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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공화국국가수도최대 도시정치정치체제대통령부통령입법부집권여당역사독립 • 공화국 선언지리면적내수면 비율시간대인문공용어공용문자데모님인구2023년 어림인구 밀도경제GDP(PPP) • 전체 • 일인당GDP(명목)HDI통화종교최대종교종교기타ISO 3166-1도메인국제 전화
Türkiye Cumhuriyeti | |
독립 행진곡 Duration: 1 minute and 6 seconds.1:06 | |
앙카라 북위 39° 52′ 30″ 동경 32° 50′ 00″ | |
이스탄불 북위 41° 01′ 00″ 동경 28° 57′ 00″ | |
이스탄불 앙카라 튀르키예(튀르키예) | |
공화제, 단일 국가, 대통령제 |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제브데트 이을마즈 | |
튀르키예 대국민의회 | |
정의개발당 |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건국함 1923년 10월 29일 | |
783,356 km2 (36 위) | |
2.03% | |
FET (UTC+3) | |
튀르키예어 | |
로마자 | |
튀르키예인 | |
85,372,377명 (17위) | |
109명/km2 (107위) | |
2021년 어림값 | |
$2조 7,490억 (11위) | |
$32,278 (45위) | |
2021년 어림값 | |
0.838 (48위, 2021년 조사) | |
튀르키예 리라 (TRY) | |
이슬람교 | |
이슬람교 89.5% 무종교 8.9% 다른 1.6%[1][2][3][4] | |
792, TR, TUR | |
.tr | |
+90 |
튀르키예 공화국(튀르키예어: Türkiye Cumhuriyeti 튀르키예 줌후리예티[*]), 약칭 튀르키예(튀르키예어: Türkiye, 문화어: 뛰르끼예)는 서아시아의 아나톨리아와 동남유럽 발칸반도의 동트라키아에 걸친 나라이다. 옛 한국어 명칭은 터키(영어: Turkey)이다. 수도는 앙카라이며, 가장 큰 도시는 이스탄불이다. 서북쪽으로는 그리스와 불가리아와 접경하고 있으며, 동북쪽으로는 조지아가 위치해 있고, 동부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이 위치하며, 동남쪽으로는 이라크, 남쪽에는 시리아와 지중해가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에게해가 있다. 대략 80%의 인구가 튀르키예인이며 쿠르드인 인구가 15%에서 20% 정도 나머지는 소수 민족들이 있다.
튀르키예는 UN의 창립 회원국이고, NATO의 일원이자 IMF, 세계은행의 멤버이자 OECD, OSCE, BSEC, OIC, G20의 가입국이다. 또한 튀르키예는 1950년에 유럽 평의회에 참여하였고, 1963년에는 EEC에도 일부 참여하였으며 1995년에는 EU 관세동맹에도 참가하였다. 2005년부터는 유럽연합에 가입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2019년 3월 13일, 유럽 의회는 다만 튀르키예의 가입 협상을 중지하기로 의결하였으나,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있다. 튀르키예의 경제적, 외교적 힘은 지역 강국의 위상을 가져다 주었고, 여러 국제기구는 튀르키예를 신흥개발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세속적, 단일 의회 공화국이며 2017년의 국민투표로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현재의 행정부는 정의개발당의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끌고 있으며, 그는 현재 케말주의와 언론의 자유와 같은 세속적 가치들을 약화시키고 있으며 이슬람교의 영향력을 국내외로 넓히려 하고 있다. 공용어는 튀르키예어, 국교를 명시하지는 않고 있으나,[5] 튀르키예 국민들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튀르키예는 여덟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동쪽으로는 조지아,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월경지인 나히체반 자치 공화국), 이란, 남동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가 있으며, 북쪽에는 흑해가 있다. 아나톨리아와 동트라키아 사이로는 마르마라해와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이 있는데, 이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인식되어 튀르키예는 두 대륙에 걸친 나라이므로[6]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지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7][8] 튀르키예의 주요 종교는 이슬람교, 공용어는 튀르키예어다.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이다.[9]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도로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받아들인 입헌 공화국으로 변화하였다. 튀르키예는 유럽 이사회, 북대서양 조약기구, OECD, WEOG, G20와 같은 국제기구에 가입하여 서방 세계와 점차 통합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196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EEC)의 준회원국이었으며 1995년에는 관세 동맹 협정을 맺었고, 2005년에는 유럽 연합의 정회원국 가입 협상을 시작하였다. 튀르키예는 또 이슬람 회의 기구(OIC)와 경제 협력 기구(ECO)에 가입하여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위시한 동양과도 문화, 정치, 경제, 산업면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에서는 튀르키예를 개발도상국으로 분류하며,[10] 세계의 정치학자와 경제학자들은 지역 강국으로 여기고 있다. 튀르키예의 국명은 튀르크에서 나왔으며 문헌에서 나타나는 돌궐을 민족국가로 여기고 있다. 대한민국과 튀르키예를 "형제의 국가"라고 칭하는 것은 이 돌궐의 귈테긴 비석에 고구려와 형제 동맹에 대해 기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인이 튀르크 제국 카프간 카안(Kapgan Kağan)의 사위가 되기도 하였다.[11][12]
국명의 유래[편집]
'튀르키예'(Türkiye)에서 '튀르크'(Türk)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고대 튀르크어에서 '강하다'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튀르키예인과 오스만인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13][14] 또 '튀르키예'의 접미사인 '-이예(-iye)'는 '주인' 또는 '~와 관계된'을 뜻하며 아랍어 접미사 '-이야(-iyya)'에서 파생된 접미사이다. 중세 라틴어 접미사 '-이아(-ia)'와 관련되어 '투르키아(Turchia)'라고 쓰이며 중세 그리스어 접미사 '이아(–ία)'가 붙어 '투르키아(Τουρκία)'라고 썼다. ''튀르크(Türük)'가 지명으로 쓰인 최초의 기록은 중앙아시아 돌궐(튀르크)의 오르혼 비문(서기 8세기경)에 등장한다. 영어 '터키(Turkey)'는 중세 라틴어 '투르키아'에서 나온 말이다.(1369년경)[14]
2021년 12월에 대통령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튀르키예'라는 국호가 튀르키예의 문화와 문명, 가치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라고 설명하면서 튀르키예산 제품에 "메이드 인 튀르키예"(Made in Türkiye)라는 이름을 사용할 것을 권고했다.[15][16][17] 이에 튀르키예 정부에서도 2022년 1월부터 터키라는 국호를 튀르키예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밝혔는데, 이는 영어권에서 터키(Turkey)라는 단어가 칠면조를 뜻하는 단어 그리고 겁쟁이, 패배자를 뜻하는 속어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18] 2022년에 대외적인 국호도 터키 공화국에서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변경되었으며, 동년 6월 1일 유엔에서 이를 승인받았다.[18] 영어명을 그대로 옮긴 한국어 국명 터키에 대해서도 2022년 6월 3일 튀르키예 외무부가 대한민국 외교부 측에 '튀르키예 공화국'을 사용해줄 것을 요청하였다.[19] 국립국어원은 6월 17일 외래어 심의를 통해 국명의 한국어 표기를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확정하였으며, 6월 24일부로 대한민국 정부는 '튀르키예 공화국', 약칭 '튀르키예'를 정식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남북한과 아제르바이잔을 제외한 나머지는 튀르키예 대신 자국어로만 표기하고 있다.[19]
역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튀르키예의 역사입니다.
고대[편집]
트로이아 전쟁(기원전 1200년경)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전설상의 트로이아 성벽 일부.
오늘날의 튀르키예 영토 거의 대부분을 이루는 아나톨리아반도는 아시아와 유럽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지구상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인류가 거주하던 땅이었다. 차탈회윅(신석기 3기), 차외뉘(신석기 1기에서 신석기 3기), 네발리 코리(신석기 2기), 하클리아르(신석기 3기), 괴베클리 테페(신석기 2기), 메르신 등 초기 신석기 시대 거주지는 지구상 최초의 인류들이 살던 거주지로 여겨진다.[20] 트로이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로, 철기 시대까지 취락이 지속되었다. 역사 시대로 접어들면 아나톨리아 사람들은 인도-유럽어, 셈어, 카르트벨리어를 비롯하여 기원이 불확실한 여러 언어를 썼다. 사실 고대 인도-유럽어인 히타이트어와 루위아어를 놓고 서구 학자들은 아나톨리아가 인도-유럽어를 확산시킨 중심지라는 가설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쿠르간 가설에 밀려 인정받고 있지는 않다.[21] 튀르키예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소인데 아시리아 제국이 존재하였다.
이 땅에 들어선 최초의 제국은 히타이트로 기원전 18세기에서 13세기까지 존속하였다. 그 다음은 인도-유럽 계통의 프뤼기아인들이 패권을 잡았으나, 기원전 7세기에 킴메르인의 침략으로 멸망한다.[22] 프뤼기아의 가장 강력했던 후계국가는 뤼디아, 카리아, 뤼키아였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아나톨리아 해안에는 아이올리스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였다. 이 지역은 기원전 6~5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에 정복되었으며, 이후 기원전 334년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진출한다.[23] 셀주크 튀르크인들이 11세기부터 이 지역에 나타났다. 1243년 룸 술탄국 나타났으며 13세기 후반,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점차 베이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24] 330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스탄불 지역에 로마의 수도로 비잔티움을 지었으나 동로마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되었고 오스만 제국에는 이스탄불이 되었다.[25]
튀르크인과 오스만 제국[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튀르크족의 이주, 셀주크 제국 및 오스만 제국입니다.
절정기의 오스만 제국 영토. 1680년경.
크느크(Kınık) 오우즈 튀르크족은 10세기경 무슬림 세계의 변방이었던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쪽인 오우즈 연맹의 얍구 칸국에에 살던 사람들로, 셀주크 가문은 이들의 분파였다.[26] 11세기에 셀주크 일파는 아나톨리아 동부로 이주하였으며,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말라즈기르트)에서 승리하면서 이 땅은 오우즈 튀르크족의 영토가 되었다. 셀주크의 승리로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술탄국이 부상하여, 중앙아시아 일부와 이란, 아나톨리아, 서남 아시아를 아우르던 셀주크 제국의 개별 분파로 성장하였다.[27]
1243년에 제국의 패권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후 오스만 1세가 지배하던 튀르크 공국이 정복 활동을 벌여, 몽골 제국을 정복하여 몽골인들을 복속시키고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 레반트를 아우르는 오스만 제국으로 발전되었다.[28]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메흐메트 2세의 오스만에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였다.
셀리미예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유명한 건축물이다.
16~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으며, 발칸반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남부를 통해 중앙 유럽으로 점차 진출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과 종종 충돌하였다.[29] 이에 맞서 지중해의 제해권을 지키고자 합스부르크 에스파냐, 베네치아 공화국, 성 요한 기사단이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런 가운데 동아시아와 서유럽 사이의 고대 해상로를 독점한 오스만 제국은 인도양에서 포르투갈과 자주 대립하였으며, 1488년 희망봉의 발견 이래 점차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1914년~1918년)에서 동맹국편으로 참전하여 결국 패배하였다. 세계 대전 당시 막대한 인명 희생을 부른 아르메니아 학살도 이때 일어났다.[30]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정전 협정으로 승전국인 연합국은 1920년 세브르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분리시키려 하였다.[28]
공화정 시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튀르키예의 역사입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는 터키 공화국의 창립자이자 초대 대통령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연합군이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점령하면서 튀르키예의 민족 운동이 촉발되었다.[8] 갈리폴리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의 주도로 세브르 조약 규정을 철회시키기 위한 튀르키예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31] 1922년 9월 18일, 이스탄불과 이즈미르에 있던 연합군은 퇴각하였으며, 새로운 튀르키예의 나라가 건국되었다. 11월 1일에 새로이 열린 의회는 공식적으로 술탄국을 폐지하여, 623년간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종식되었다.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에서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후계 국가로서 그 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1923년 10월 29일에 새 수도 앙카라에서 튀르키예 공화국이 정식으로 건국을 선포하였다.[8]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구 오스만의 잔재를 털어내고 새로운 세속 공화국의 건설을 목적으로 여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8] 1924년에 그는 632년 이래 13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칼리프제를 폐지하였고, 튀르키예 공화국의 기본 정신인 세속주의를 법으로 제정했다.
아타튀르크가 1931년 이즈미르에 있는 학교를 방문한 모습.
1925년에는 복장 개혁을 시행하여 여성들의 복장을 해방시키고, 과거에 금지되었던 여성의 교육권을 보장해 남녀평등교육을 시행하였으며, 이슬람력을 폐지하여 유럽식 그레고리력으로 대체했다. 1926년에는 민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금지하고 일부일처제를 확립하였으며, 1928년에 튀르키예어의 아랍 문자 표기법을 폐기하고 로마자 표기법으로 변경하였다. 1930년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했다. '가족명에 관한 법'에 따라, 1934년에 튀르키예 의회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아타튀르크'(아버지 튀르키예인, 즉 '국부')라는 명예 성명을 부여하였다.[7] {이하 내용재조정 필요: 1453년에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팽창은 셀림 1세의 재위기에도 계속되었고, 슐레이만 대제의 시대에는 오스만 제국이 남동부 유럽 대부분,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방까지 장악하며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떠올랐다. 다만 18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도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쇠퇴를 막기 위하여 마흐무트 2세가 19세기 초에 근대화 개혁을 실시하며 군대, 봉건제, 사회 등 모든 전반적인 부분을 대개혁하였다.
1913년에 젊은 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오스만 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고, 이들의 지휘 아래 오스만 제국은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이 때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 오스만 제국과 그 동맹국들이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각 지역과 민족들의 독립 요구가 강해졌고 유럽 국가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오스만 제국의 결속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유럽 국가들로 인해 여러 국가들로 나누어 졌다. 튀르키예 지방에서는 튀르키예의 국가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가 외국 군대에 대항하여 튀르키예 독립전쟁을 전개하였고, 1922년 11월 1일에 마침내 술탄제를 폐지하며 1923년 10월 29일에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웠다. 아타튀르크는 수없이 많은 개혁안들을 내놓았으며, 서구 사상을 들여왔고 새로운 신생 튀르키예 정부에 민주주의와 자유와 같은 가치들을 주입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거의 대부분 튀르키예는 중립을 취하였으나, 1945년 2월 23일에 의례적인 의미로 연합군 측에 참전하였으며, 1945년 유엔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32] 소비에트 연방이 튀르키예 해협에 군사 기지를 요구하는 가운데 옆 나라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자와 내전을 벌이면서 위기 상황이 조성되자, 1947년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게 된다. 이 독트린에서 미국은 튀르키예와 그리스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음을 밝혔으며, 그 결과 미국이 대규모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제공하게 되었다.[33]
튀르키예는 한국 전쟁에서 유엔군으로 참전하였으며 튀르키예는 한국의 형제의 나라임을 자처하고 있으나, 키프로스 그리스계 탄압 문제와 쿠르드족 탄압으로 논란이 되고 있다. 1952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소련의 팽창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이후 키프로스에서 십여 년간 내전이 벌어졌고, 1974년 7월에 그리스인들의 군사 정변으로 마카리오스 3세 대통령이 실각하고 니코스 삼프손이 독재 정권을 세우자, 튀르키예는 1974년에 키프로스 공화국을 침공하였다. 9년 뒤에 북키프로스 튀르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 나라는 오직 튀르키예의 승인만 받은 나라이다.[34]
1945년에 일당제 시대가 종식된 이후, 다당제 시대에는 수십여 년간 긴장을 초래하였으며, 1960년대에 1980년대 사이에 정치적 불안 상태가 계속되면서 1960년, 1971년, 1980년에 군사 정변이 일어났으며, 1997년에는 1997년 튀르키예 군부 협정 시기이기도 하였다.[35] 한편 1980년대 튀르키예 경제의 자유화 이후 튀르키예는 더 강력한 경제 성장과 더 큰 정치적 안정을 누렸다.[36]
지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