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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 ]
존 포드 감독이 거의 감독 말년시기인 1962년에 연출한 서부극이다. 총에서 법으로 서부시대의 질서가 넘어가는 시기를 배경으로 했다. (사진 왼편부터 리 마빈, 제임스 스츄어드, 존 웨인)
포드의 후기작을 대표하는 영화이면서 그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존 웨인과 함께한 마지막 서부극으로도 유명하다.
<리버티 발란스를 쏜 사나이>는 서부개척시대가 끝나고, 법치주의로 이동하는 시대를 그렸다. 단순히 총을 쏘면서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시대에서 법에 의해 심판을 받는 법치주의 시대로 나아가는 미국을 그리고 있다. 이 당시 서부극이 막 저물어가는 장르라는 점을 이 영화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서부극의 전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존 웨인이 톰이라는 인물로 나와 서부극이라는 장르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이 영화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아닌 기존의 것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환과 함께 안타까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은 랜섬 스타드(제임스 스츄어드 분)가 톰 도니폰(존 웨인 분)의 장례식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신본을 찾아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영화가 진행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사진, 리버티 발란스로 분한 리 마빈)
오래 동안 서부극에 천착해온 존 포드 감독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 영화가 만들어지던 1960년대의 서부극은 이제 한물간 장르이면서 인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실제로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포드의 마지막 흑백으로 만든 서부영화이기도 했다. 영화가 개봉할 때 이 작품의 의미와 진가를 알아본 이들이 별로 없었고 포드 사후에 재평가가 이뤄졌다.
존 포드가 서부극의 거장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고전적인 서부극으로 시작해 *수정주의 서부극에 이르기까지 그 진화과정을 시대 순으로 그대로 밟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서부극의 정형을 확립한 1939년의〈역마차>부터 할리우드 서부극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1948년〈황야의 결투>를 시작으로 <리오그란데>, <아파치 요새>,<기병대>에 이어 서부극에 대한 자기 성찰을 보여주는 1956년의〈수색자>, 그리고 1962년의<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이르기까지, 존 포드의 걸작 서부극을 일별하는 것은 곧 미국 웨스턴의 발전사 그대로이기도 하다. 물론 1964년에 만든 최후의 서부극 <샤이엔의 가을>이 있지만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야말로 포드의 서부극에 대한 성찰이 완성에 달한 작품인 동시에 그의 서부극의 마지막 걸작인 것이다.
* 수정주의 서부극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부 서부영화들은 선악을 분명히 대비시켰던 기존의 전통적 서부극의 이념과 스타일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어둡고 냉소적인 분위기로 낭만주의보다는 사실주의적인 관점을 중요시 한다. <작은 거인>, <와일드 번치>, <늑대와 춤을>, <용서받지 못한 자> 등의 작품들이 대표한다,
역마차로 신본에 도착한 랜스가 철도를 타고 동부로 가는 마지막 장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차로 운송수단이 바뀌고 댐이 설치되어 황무지가 초원으로 변모하는(사진, 톰으로 분한 존 웨인)
새로운 서부시대의 서막. 교육을 통해 개화된 시민이 존재하고, 철도와 댐을 통해 편리하고 풍요로운 곳이자 더 이상 무법자의 천국이 아닌 서부, 비록 여성이 배제된 선거이지만 선거를 통해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성숙하는 서부의 진보를 보여준다. 존 포드는 영화에서 톰의 유품에 하다못해 총 한 자루 남기지 않을 정도로 마지막 서부극이라 못 박은 듯 비장하면서 단호하다.
상원의원 랜스는 톰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서부의 신본을 찾는다. 명망 있는 의원이 작은 도시에 찾아 오자 주민들은 하나둘씩 그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중 지역신문 〈신본스타〉의 편집장은 랜스가 이 조그만 마을을 찾은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본다.이에 랜스는 톰과의 남다른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동부에서 법대를 갓 졸업한 랜스는 서부로 향하던 중 악당 리버티 발란스에게 습격을 받고 쓰러져 신본으로 옮겨진다. 식당 여주인 할리의 도움으로 곧 의식을 회복하면서 발란스에게 법으로써 책임을 물으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총잡이 톰은 총이 아니고서는 발란스를 막을 수 없다고 충고한다.
법을 신봉하는 랜스와 총이 우선이라는 톰은 사사건건 부딪힐 뿐 아니라 할리를(사진, 톰과 랜스)
두고도 미묘한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던 중 발란스가 졸개들을 이끌고 나타나 신본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이에 랜스는 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깨닫고 결투를 벌여 발란스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발란스를 제거해서 기세가 오른 랜스는 의원 출마에 성공하면서 워싱턴으로 진출한다.
좋아했던 할리를 랜스에게 양보하고 한물 간 총잡이 세계를 실감하면서 톰은 눈을 감는다. 톰의 장례식이 끝난 후 랜스는 편집장에게 정작 발란스를 쏜 것은 자기가 아니라 톰이었다고 실토한다. 총 솜씨가 시원치않은 랜스가 발란스에게 총을 쏠 때 톰이 멀리 어둠 속에서 장총으로 발란스를 쏜 것이다. 나중에 톰이 랜스에게 이 사실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편집장은 못들은 척 한다. 전설이 된 역사를 이제와서 새삼 까발려서 뭐 어쩌겠냐는 것이다.
[ 서부극의 거장, 존 포드 ]
존 포드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서부극의 거장’이라는 닉네임이 항상 따라다닌다. 포드는 무성영화 이후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던 영화 <역마차>를 통해 서부극을 부활시킨 사람이었다. 또한 다른 어떤 감독들보다 서부극을 잘 이해했고 걸작 서부극을 많이 만들었다.
한편 포드는 서부극만큼 비서부극도 많이 만들었으며, 생전엔 서부극보다 비서부극으로 높이 평가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네 작품(밀고자, 분노의 포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아일랜드의 열풍) 역시 전부 비서부극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여정 중 서부극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포드의 영화인생을 따라가는 것은 바로 서부극 역사를 더듬는 길이기도 하다.
존 포드는 영화가 탄생한 해인 1885년 미국 메인 주에서 아일랜드 이민의 후예로 태어났다. 메인 주립대학을 중간에 그만두고, 형의 손에 이끌려 할리우드에 오게 된 그는 잭 포드란 이름으로 1917년에 그의 첫 작품 <토네이도>를 연출하게 된다. 이어 <철마>, <세 악당> 같은 무성영화 시대의 웨스턴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는 이 시기부터 야외에서 행해지는 액션 신에 장대한 스펙타클을 집어넣었다. 초기 웨스턴의 원형인 카우보이 극에 시각적 요소를 강화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는 할리우드에서 감독 포드의 입지를 굳히는 시대였다. 1935년 아일랜드 혁명의 무용담을 그린 영화 <밀고자>로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탔고, 1939년에는 <젊은 링컨>과 <모호크족의 북소리>, 그리고 그의 초기 걸작이자 대표작이 된 <역마차>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고전 서부극 4대작(‘황야의 결투’, ‘셰인’, ‘하이 눈’, ‘역마차’)의 하나로 손꼽힌다. 1930년대는 서부극 장르가 코너에 몰려 있었다.
몇 년 동안 <빅 트레일>과 <시마론>처럼 많은 비용을 처들이고 실패작만 낳은 메이저 영화사들은 모두 진저리를 치며 서부극에서 손을 뗐다. 소규모 영화사들만 B급 서부극을 만들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때 마침 <역마차>가 흥행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서 이 영화는 서부극 장르의 부흥에 크게 기여한 기폭제가 되었다.
포드는 1940년 <분노의 포도>, 1941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로 연속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감독으로서 완숙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1952년에는 아일랜드 출신인 그의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
<아일랜드의 연풍>으로 네 번째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받았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다큐멘터리들을 만들며 잠시 할리우드와 멀어졌던 포드는 이전 영화보다 더욱 서정적이고 인간미가 풍부한 서부극을 만들었다. 명작 <황야의 결투>와 기병대 삼부작 <아파치 요새>, <노란 리본>, <리오 그란데>가 그것이다.(사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50년대로 넘어오면서 잠시 휴식을 취했던 존 포드 감독은 1956년 그의 진정한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 <수색자>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를 발표한다. 이 영화들은 서부와 사라져가는 영웅을 그린 서부극에 대한 고별사와도 같은 작품들이었다.
존 웨인, 헨리 폰다, 제임스 스튜어트 등을 발굴해서 대배우로 키우기도 했다. 특히 존 웨인의 경우 <역마차>에 출연시키면서 이를 발판으로 웨인은 훗날 서부극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서부극의 대표적인 명소인 모뉴먼트 밸리도 그가 처음 발굴했다. 1939년도 작품인 <역마차〉에 이곳이 처음 소개된 이후 <황색 리본>, <리오 그란데>, <아파치 요새> 등 9편의 서부극을 모뉴먼트 계곡에서 촬영했다. 그가 이렇게 모뉴먼트 밸리를 촬영장소로 여러 번 활용하면서 관객들은 서부극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되었다. 포드 이후로도 <옛날 옛적 서부에서>를 비롯해서 많은 서부영화의 로케 장소로 이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포드는 기록영화 촬영팀을 이끌고 하와이와 북아프리카 등의 전투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1941년부터 종전까지 4년간 이 팀은 여러 편의 전쟁 기록영화를 만들었다.(사진, 황야의 결투)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포드가 미드웨이 섬에서 직접 일본군의 공습과 미군의 반격을 찍은 <The Battle of Midway>였다. 포드는 촬영 도중 파편에 맞아 꽤 심하게 다치기도 했다. 2019년 롤랜드 에머리히가 찍은 영화 <미드웨이>에서 포드가 미드웨이 섬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장면이 나온다.
1944년 6월에는 육해군 합동 촬영팀을 이끌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영상 기록을 찍기도 했다. 젊었을 적에는 OK목장의 결투로 유명한 총잡이 와이어트 어프를 만나, 몇 년 동안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그의 증언을 토대로 찍은 영화가 <황야의 결투〉이다. 1948년 54세 때 세트에서 불의의 사고로 왼쪽 눈을 실명하면서 선글라스를 착용하거나 눈가리개를 하고 다녔다.
그는 무뚝뚝한 성격답게 질문에 썰렁한 답변으로 일관해서 물어보는 기자들이 머쓱해하곤 했다. 예를 들어 "어떻게 할리우드에 오셨나요?"라고 물어보자 "기차 타고" 라고 답변하는 식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건 좋아하지만, 영화에 관하여 떠드는 건 질색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괴팍한 상남자로 유명했다. 툭툭 내뱉는 말투와 변덕스러운 성격, 그리고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할 말은 하는 사람이었다. 포드는 정치적으론 보수주의자였지만, 당시 지나치게 설쳐대는 *매카시즘을 극도로 혐오했다. 당시 공산주의 컴플렉스에 너나할 것 없이 몸 사리고 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굉장히 깡다구가 있었던 인물이었다.
아래는 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크게 벌어져 한창 불어 닥칠 때 감독협회에서 존 포드가 행한 연설의 일부이다.
“나는 존 포드요. 서부극을 찍는 사람입니다. 미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방에서 세실 B. 드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는지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세실 B. 드밀을 바라보며)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싫소. 오늘밤 여기서 당신이 말한 것도 싫소.”
* 매카시즘
50년대 초반 극우적인 상원의원 매카시가 선봉이 되어 벌인 빨갱이 색출운동을 말한다. 한동안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했다.
할리우드에서 매카시즘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 명감독이었던 세실 B. 드밀(‘십계’, ‘삼손과 데릴라’ 감독)이었다. 드밀과 그의 추종자들은 무려 4시간에 걸친 연설을 하며 매카시즘 전파의 선봉에 섰다. 드밀은 협회의 모든 감독들은 충성맹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때 드밀에게 정면으로 들이받은 인물이 바로 포드였다.
이 연설에는 포드의 두 가지 특성이 드러나 있다. 우선 반골기질로서의 비판적인 태도이다. 매카시즘이라는 일방적 애국주의에 많은 감독들과 영화인들이 주눅이 들어 있을 때,(사진, 역마차에서)
포드의 배짱 있는 한 마디는 팽팽한 회의장에 어린 긴장의 얼음판을 깨버렸다. 그의 발언 이후 분위기가 역전된 것은 물론이다.
두 번째는 서부극에 대한 자부심이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네 번이나 받았지만, 한 번도 서부극으로 수상한 적은 없었다. 당시 서부극은 저급한 장르로 치부될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서부극을 만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서부극 장르에 대한 그의 자신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포드는 마초기질이 다분했고 카리스마가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그 앞에서는 할리우드의 내노라 하는 배우들도 함부로 나대거나 감독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항변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사진, 존 포드)
그는 영화를 제작할 때나 그 이후나 항상 자신이 보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권한을 즐겼다. 1955년〈미스터 로버츠〉촬영을 하던 중 헨리 폰다가 그에게 '웃음의 타이밍을 모르는 연출'이라고 했다가 주먹으로 얼굴을 얻어맞은 적이 있었다. 폰다도 한 성깔하는 지라 이후 둘은 다시는 함께 영화 일을 안 했다. 아래는 할리우드 거장들의 그에 대해 바치는 찬사다.
- 알프레드 히치콕 : “존 포드의 영화는 시각적 희열이었다.”
- 스티븐 스필버그 : “그의 작품이 영원히 기억될 것이기에, 존 포드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마틴 스콜세지 : "그는 미국 고전 영화의 정수이며, 오늘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존 포드의 영향을 받았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 : " 존 포드는 미국 영화계의 선구자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영화인은 전부 존 포드의 영향을 받았다. 그게 서부극이든 〈분노의 포도〉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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