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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돌멩이/이덕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가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위대한 체온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위에 돌멩이 하나가
얼음 속을 파고들고 있다
뜨거운 입술로
혓바닥으로
벌거벗은 돌멩이
온몸으로 너에게 푹 빠져
촉촉이 젖은 돌멩이
조금 드러난 등짝으로
지는 저녁 햇빛도 받아
돌멩이, 숨도 안 쉬고
그 두꺼운 동토의 처녀막을
맹렬히 뚫고 있다
밥그릇 경전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오, 새여
강변 모래톱에 어지럽게 흩어진 새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물가에서 방금 날아간 듯한
선명하고도 깊은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하여 달려간
생의 도움닫기 끝에 찍힌
지상의 그 웅숭깊은 마지막 족적 속에서 광대무변의,
그 먼 나라에서 흘리는 당신 눈물이 말갛게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한식(寒食)
설악산 오색약수터 한참 지나 인적 드문 계곡 깊숙한 바위틈에서 보았다, 4월의 짓무른 흰 눈 한 무더기
진즉에 식량이 바닥난 헐벗은 겨울 산중의 누더기 잔설들이 산그늘 쪽으로 밀리고 밀리어 항복하듯 백기를 내걸었다가
아니다, 아니다,
다시 돌아선 희끗한 목숨 몇몇이 골짜기를 따라 쫓기듯 숨어들어와 함께 나누어 먹다 두고 간, 동무의
허벅살 두어 근
단편, 봄날은 간다
나른한 봄날
인적 드문 산사에 올랐다가
뒤꼍 작은 암자 앞 댓돌 위에
남자 흰 고무신과
굽 높은 여자 검은 하이힐이
나란히 올려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순간, 빠르게 돌아가는
영사기 필름 부하 걸리듯
마당 끝 미륵불 펄떡거리는 심장
피돌기 급류에 휩쓸려
나는 멀리 앞산 중턱
가설 스크린 하얗게 둘러치고
한창 상영 중인 산벚나무
한바탕 단꿈 속으로 젖어드는데
달콤한 꿈은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 문을 확 열어젖히거나
열 받은 필름이 맥없이 툭, 끊깁니다
무슨 스토리였을까요
캄캄한 암자 안을 향해
공손히 합장하고 돌아서
산 아래로 목련꽃 지듯 내려서는 여자
그새 눈매가 많이 젖었습니다
거름 내는 사내
이른 봄 과수원에
거름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버려진 사과 알들도 속속들이
머금었던 단물을
주르르 힘껏 내뱉으며 썩고 있다
악취를 풍기며
한 치 한 뼘 흙 속으로 스며들어가
이제 먼 길 떠나는
섬약한 사과나무의
마른 발등을 적셔주고 있다
지금 저 나무들은
썩고 썩은 세상의 구린 뒷맛을
온몸으로 짚고 일어서는 중이다
봄바람에 지물거리는 눈을
반짝 뜨고
허공을 저으며 조심조심 맨발을 떼는
잔가지 연둣빛 어린싹들의
흔들림 앞에
닿을 듯, 닿을 듯 뒷걸음질로
거름을 내며 멀어져가는 한 사내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따라
아장아장 사과나무들이 걸어간다
물을 기다리는 사람들
보통리 저수지 수문이 열렸네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던 굳은 안면 근육을 풀고
제방 밑 칠흑 같은 암거를 빠져나온
싯푸른 물결이
꼭 일 년 만에 암내 맡은 짐승처럼
입가에 허옇게 거품을 물고
동네방네로 달려나간다네
지난밤 몽정하듯
만수위로 찔끔, 흘러넘친
낮은 수로의 비릿한 물 내음을 맡은
실한 허벅지 같은 논두렁이 벌써
제풀에 지르르지르르 무너져 내리네
출렁출렁 허겁지겁
그러나 샅샅이 더듬어가는
거친 물길 따라 스르르 치맛단 올라가듯
바싹 긴장한 마른 논바닥이 젖으며
타닥타닥, 블라우스 단추 뜯기는 소리 들리네
마침내 폭포처럼 쏟아지는
그 거센 물살을
밤새 온몸의 뼈가 다 녹아내리도록
흥건하게 받아들인 새벽녘, 그
큰 논배미 위에 엎드려
시퍼렇게 출렁거리는 넓은 등짝의
사내 하나, 또다시 이웃집 논두둑을 넘실거리네
까치 누이
간신히 중학교 나와 맨발로 논두렁 밭두렁 두리반에 밥이나 퍼 이어 나르다가
남대문 시장통 먼 일가붙이 내의(內衣)가게 점원으로 간
어린 누이가 적금 타서 집에 오던 날
까마득한 참죽나무 위에서 까작까작
너희들이 우는 소릴 처음 들었더란다
반창고 칭칭 동여맨 얼음 박인 손가락을 어머니 손에서 자꾸 빼돌려 감추며
얘야 서울엔 자장면이 흔터란다
언젠가는 꼭 너를 그곳에 데려가겠다던 누이가
그해 여름이 채 오기도 전에
반송된 편지 우표처럼 빛바랜 얼굴로 돌아온 날
수수깡 울타리 밑
양 무릎에 얼굴 묻고 웅크린 아버지 야윈 가슴을
너희는 또 그렇게 까작대며 후벼팠더란다
옆집 삼촌들 뒷집 누이들 떼거지로 몰려오던 설날
우리 집 울대 측백나무 가지 위
훌쩍 날아와 울던 낯익은 네 울음소리에 나는 단숨에 행길로 뛰쳐나갔더란다
막차는 이미 떠났고
생각해 보니, 올 사람 하나 없는
동구 밖엔 송이송이 함박눈만 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더란다
이슬 아버지
수태되지 않는 몸속에 사정하듯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땅속 깊숙이
뿌리박는 늙은 감나무 한 그루
늦가을 숨찬 합궁 끝에 맺힌 땀방울처럼
알알이 길어 올린 홍시 몇 알
그 붉은 살 속
감 씨 같은 아이 하나 낳았으면,
몸 씨앗 없다는 용철 형님
마른 텃밭 깊숙이 갈아엎는
저 힘겨운 노동 끝에 맺힌 땀방울이
종자가 될 수 있다면
송글송글
등골을 타고 맑고 맑은 아이들이 내려온다
실천시선 180
『밥그릇 경전』
- 지은이 / 이덕규
- 펴낸 곳 / (주)실천문학사
- 펴낸 때 / 2009년 2월
이 덕 규
- 1961년 경기도 화성 출생.
-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2003), 『밥그릇 경전』(2009), 『놈이었습니다』(2015) 등이 있음.
- 현대시학작품상(2004), 시작문학상(2010), 오장환문학상(2016) 수상.
- 홍사용문학관 관장.
시작 문학상에 이덕규 시인
연합뉴스 / 2010.03.31.
김정선 기자
출판사 천년의시작과 계간 문예지 '시작'(詩作)이 주관, 시행하는 '시작 문학상' 올해 제4회 수상작으로 이덕규(49) 시인의 시집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이 선정됐다.
또 제8회 시작 신인상에는 시 부문에 이선균(49) 시인의 '화사한 그늘' 등 5편이, 평론 부문에는 김익균(35)의 '그 참 견고한 외계-황인숙론'이 뽑혔다.
문학상과 신인상 수상자는 각각 1천만원과 100만원의 상금을 받는다. 시상식은 6월5일 서울 종로구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다.
[경기민예총 산증인 이덕규 시인]
농부 시인, 시로 세상을 일구다
인천일보/ 2020.01.31
박혜림 기자
토목기사에서 전업시인으로 전향
흙·나무로 손수 지은 집 '토우방'서 생활
경기민예총 멤버와 연간지 '다-다-1' 출간
역사·현주소 등 짚어내 … 내달 이사장 취임
기후재앙·자본주의 질주 막을 대안 '농사'
인간성·자연 회복 위한 예능인 역할 고민
이덕규 시인이 가지각생의 책들이 쌓인 자신의 방 책장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성철 기자 slee0210@incheonilbo.com
화성시 정남면 일대로 자리한 보통 저수지를 끼고 500m 정도를 내려가다 보면 흙과 나무로 지어진 집 한 채가 보인다. 이 건물은 경기민예총의 산증인 이덕규(59) 시인이 1년여에 걸쳐 손수 지어 올린 집이다.
그 집의 이름을 이 시인은 '흙'을 떠올려 '토우방(土愚房)'이라 지었다. '농사짓는 시인'인 그와 참 잘 어울리는 집이다. 최근 그는 경기민예총의 주축 멤버들과 함께 민예총의 역사와 일대기를 다룬 연간지 '다-다-1'을 출간했다. 세상이라는 캔버스 위에 시(詩)를 그리며 예술을 통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는 이 시인을 지난 28일 만났다.
경기민예총을 다(多) 담다
지난해 12월, 이 시인과 경기민예총의 주축 멤버들은 역사상 전례 없는 경기민예총문학위원회의 최초 연간지 '다-다-1'을 창간했다.
'다-다-1'은 경기도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지역민, 다문화, 소수자 등 다양한 계층과 여러 예술을 아우른다는 의미로 이름 붙여졌다. 포용과 상생, 평화 등 경기도 문화 예술이 지향하는 모든 바를 이 책 한 권에 녹여냈다.
"경기민예총은 선배, 동료 예술인들이 시대적 사명감을 가지고 인간성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부조리에 맞서 왔던 단체입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들의 지난 날에 대한 검열과 성찰이 필요한 적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자기 검열 없이는 타성에 젖어 도태돼 버리니 미래를 향한 스스로의 비판을 필요로 다다를 출간하게 됐지요."
다다에는 경기민예총이 걸어온 길, 현주소, 나아갈 방향 등을 상세히 짚고 있다.
민예총 역사에 한줄기 획을 그은 역대 산증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다다는 출간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다. 이 시인을 비롯, 이성호 경기민예총 이사장, 홍일선 시인, 권용택 화가, 류연복 판화가, 김종길 경기문화재단 학예팀장의 대담과 경기도 천년 역사. 경기지역 대표 문학인들과 미술, 문학, 민속굿 등 장르별 역사를 담아 312페이지 분량으로 엮여냈다.
"경기도만의 문화 무크지(책과 잡지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부정기간행물)가 필요하다는 것에서 뜻을 같이 했죠. 경기민예총의 설립과정부터 각 지부와 장르별 활동 역사, 시대 변화에 따른 담론 제시와 기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출간을 추진했습니다. 다다는 분명 10년 후 큰 역사가 돼 있을 것입니다."
시(詩)를 짓다
이 시인 앞에 종종 따라붙는 수식어는 '농사짓는 시인'이다. 실제 그는 농사일과 겸업해 작품 활동하고 있다. 첫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와 '밥그릇 경전', 최근 '놈이었습니다'까지 농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 자연스레 등장한다.
"가업이던 농사를 이어받아 짓고 있고 아마 죽을 때까지 농사는 못 놓을 것 같습니다. 시에 농사 소재가 다뤄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테죠. 저는 농사 근본주의자입니다. 농사는 생태적인 부분들과 교착점이 있고 자연스럽게 환경 변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게 됐지요. 작금의 기후적 재앙과 자본주의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막기 위한 대안은 농사밖엔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 시인의 최대 관심사는 '환경'이다. 그는 도시 변화가 태동을 일으키던 때부터 환경운동으로 2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이런 환경문제에 대한 고민들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올겨울만 봐도 사태의 심각성이 느껴집니다. 기후가 전달하는 무서운 메시지인 것이지요. 이런 메시지들이 정치적 이슈에 매몰된 채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문화 예술인들은 작품의 영역을 넓혀 이 현대사회에 닥친 환경적 재앙들을 가만두고 지켜볼 것이 아니라 꼬집어 드러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시마(詩魔)가 덮쳤다
화성에서 나고 자란 이 시인의 유년 시절은 여느 농촌 마을의 아이들 모습과 같았다.
또래들과 어울리며 붕어잡이에 나서거나 황구지천을 뛰어놀던 개구쟁이는 이 시인이 어린 시절 간직해 온 풍경이다. 그런 그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
이 시인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무렵, 사이좋던 친누나가 세상을 뜨면서 그는 슬픔의 해방구로 문학을 선택했다.
"시마(詩魔)가 덮쳤달까요? 문학이라는 그물망에 포위된 느낌이었죠. 막막하고 갑갑했던 마음에 위안 삼을 곳이 필요했는데 시를 쓰면 그런 감정들이 해소됐습니다."
학부에서 토목을 전공한 그가 토목기사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때에도 시에 대한 열망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는 돌연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시인으로 돌아섰다. "일을 하면서도 문학잡지를 들여다보거나 글을 쓰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결국 시 '양수기'를 가지고 문학계에 등단하게 됐어요. 등단을 하고 나니 숨통이 트이더라고요."
주경야시(市)
이 시인은 낮엔 농사를 짓고 밤이 되면 시를 써 내려갔다. 일을 하다가도 이따금 시구절이 떠오르면 종이와 펜부터 들었다.
그는 활동 영역을 지역사회로 넓혀갔다. 지역사회를 위한 일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환경운동연합회에 20여 년간 몸담으며 산업화와 난개발에 몸살을 앓고 있는 화성지역의 환경문제 해결에도 앞장섰다.
"어느 지역에서든 정치적인 부분이든 환경적인 부분이든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기 마련입니다. 예술인들은 현장으로 들어가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을 함께 나눠야 합니다. 지역의 사안들을 사진, 퍼포먼스, 미술, 문학 등 예술이라는 매개체로 지역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해요. 혹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며 손가락질하겠지만 물이 새어 나온 독 주변으로는 분명 꽃이 필 것이고 꽃이 피기 시작하면 곧 터전이 될 것입니다."
이토록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문화 예술로 소통하고자 했던 이 시인은 내달 19일, 경기민예총 이사장직에 취임한다. 그는 경기민예총과 지역예술인들이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한 사명들에 대해 공고히 했다.
"갈수록 자본에 의해 상실돼 가는 인간성 회복에 대한 문제, 점차 망가져 가는 자연환경 속에서 예능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훼손시킨 것들을 다시 돌려놔야지요. 이것이 앞으로 경기민예총의 역할이자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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