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부족주의에 의거 백제와 후백제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서술과 활동을 꾸준히 하며,
저의 고대사 부분 기여분을 의도적으로 삭제 중인 어떤 녀석이
또 저의 태봉 기여 내역을 되돌리고 있어, 이에 이 글을 올립니다.
뭣만하면 "주류사학계"운운하는 코웃음칠 내용도 그렇고 참... ;;
이에 제가 기여한 태봉 문서 버전을 넣습니다.
https://namu.wiki/w/%ED%83%9C%EB%B4%89?uuid=fedb0ac2-afc1-428a-9942-8bdcc1ab1857
제가 나무위키에 기여 중인 내용을 꾸준히 삭제하거나 신고질을 서슴치 않는 부류로는
주로 1. 경상부족주의에 미친 부류 아니면
2. 자기가 책을 읽지 않아 모르는 내용에 대해 무조건 부정하는 부류
(백제와 마한, 백제와 전라도, 백제와 전라남도의 관계에 대해 상당히 틀린 견해를 고수 중)
이 둘인데, 이 녀석은 저 말고 다른 사용자가 작성한 비슷한 내용에 대해서는
간혹 넘어가는 걸로 봐선 저에게 상당한 악감정이 있지 않나 짐작 중입니다.
해당인들이 상당히 이해를 못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추가 기여분 중 일부를
붙여 넣습니다.
<<<<
국가의 연속성과 계승은 특정 시기 왕조나 국호, 선호 종교만 갖고 달랐다 여부를 판정할 순 없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관념이 근대적, 서양적 '국가' 개념을 한반도 고대사에 무리하게 집목시키려는 시도라고도 보지만,
그것은 거꾸로 외려 여말선초에만 국한되었고 그마저도 철저하지 않았던, 중국 춘추식 사직 개념의 무리한 고수며, 정작 전근대 한반도 국가들의 관념도 무관하다.
그렇게 따지면 신라는 박석김 왕계가 바뀌고 백제는 비류계와 온조계가 교대로 집권할 때, 그리고 고구려 또한 주몽계와 유리(=여달)계가 경쟁할 때 부계 혈통이 바뀔 때마다 나라가 망했다 말았다고 봐야 할 것인데, 그 시대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고구려나 백제의 왕계가 복수 왕계-교대가 행해졌음을 몰랐던 고려, 조선 시대 사람들도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이 이른바 '서양적 국가 개념'에 젖어서 그렇게 봤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건 국가의 연속성 문제지, 왕조 교체로 국가가 망했다 말았다를 따지는 중국식 전근대적 관념의 근거 없는 현대적 고수와는 무관하다. 막상 고구려인들조차도 당대 중국 국가들을 인식할 때 전진에서 온 아도는 '秦'에서 왔다고 기록한 반면, 동진에서 온 순도는 '魏'에서 왔다고 기록했다.
왕조 혹은 부계 혈통 성씨가 바뀌면 무조건 같은 국가가 아니라는 엄격한 중국 특정 시대,
그리고 여말선초 일부 관점에서는 심지어 위나라와 국호조차도 틀린 동진 사람 순도는 어디까지나 '晉'나라 사람이지 '魏'나라 사람은 아니었으나, 당대 한반도인들은 그런 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되는대로 편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혹자는 궁예가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고 미륵 사항을 내세우며 신정정치적 행태를 저지른 기행을 보였고, 고(구)려 부흥을 염원하던 패서 호족들의 기대를 배반한 실책이 있으니 왕건이 고려를 완전히
새로 세은 거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다른 사례로 반박된다. 이렇게 보면 조선의 정치적 전통을 위배하고 흡사 명나라의 그것을 방불케하는 전제정치를 펼친 연산군 당시에 조선은 망한 걸로 볼 수 있겠으나 누구도 그러한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궁예는 청주 출신들을 주로 등용했으나 왕건은 배제했으니 연속성이 없다는 이견도 있으나, 이는 실상과 다른 주장이다. 궁예가 청주 세력을 친위 세력으로 끌어들였다고는 하나 패서 호족의 기반이 강했기에
패서 호족을 다 숙청할 수는 없었고, 심지어 궁예는 집권 말기에 청주 세력마저 의심하여 이들마저도 강력하게 탄압한 끝에 청주 세력과도 사이가 상당히 벌어진 상황이었다.
또한 조선 건국 이념과 그 많은 개혁 조치는 다 누가 만든 것인가? 당연하지만 전부 (옛) 고려인들이었고, (옛) 고려인과 구별되는 새로운 조선인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집현전이든 전시과든 토지 개혁이든 다 공민왕-공양왕 때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반면 신라와 고려 사이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은 오해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고려와 조선의 이미지 차이 연대적 차이가 심하게 나는 고려 중기와 조선 중후기의 이미지가 각각 대표 이미지로써 자리잡은 탓도 크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고려-마진-태봉으로 국호를 바꾼 궁예 정권과 왕건 정권 사이에는 이런 이미지 차이조차 성립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고려는 신라와 국가연속성이 없었던 반면 고려와 조선은 분명 연속성이 있고, 고려와 태봉의 간극은 그 고려와 조선 사이 간극보다 더 짧았음이 중요하다. 한편, 왕건 정권이 태봉 계승을 천명하지 않은 건 애초에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궁예의 국호 변경 자체가 901년도에 고려를 부흥한 궁예 자신이 한 말에 대한 배신이자 단절이었고,
왕건 정권 성립은 고려 건국이 아니라 국호 교체를 일삼고 패서 호족을 기만하고 살해하기까지한 최고 지도자 궁예의 교체가 핵심이었으니 고려가 태봉을 멸망시켰다는 견해는 근거 있게 성립될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왕건 정권이 계승한 정신은 901년도에 궁예가 송악을 수도로 결정하면서 개국한 고(구)려 부흥운동이었으니 태봉을 계승할 수는 없었다.
또한 궁예가 주창했던 삼국 유민의식 초월은 이보다 거의 오백 년 후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라는 국호로 실현되는 걸로 볼 때 궁예의 주장이 아주 허무맹랑했던 건 아니었다.
궁예와 마찬가지로 신라 진골이었던 김헌창도 같은 이유로 국호를 장안국으로 설정했었다. 다만 중국사의 왕망이 흡사 그랬듯 현실감각이 매우 부족했고 수단이 비상식적으로 과격했을 뿐이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도 (후)한 - 위 - 서진의 케이스는 연속성이 있었다는 점에서 여말 선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부만 바뀐 거라서, 사실 고려-조선의 관계와 정확히 대응됩니다. 다만 그렇다보니 삼국지밖에 머리에 없는 멍청한 얼치기들이 그러므로 고려와 조선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걸 이해를 못하고 맙니다.
그런 나머지 신라와 고려도 한위진 관계로 자주 오해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