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여름이었다.
지금부터 무려 37년 전이다.
그전부터 소식만 오가던 일본에 거주하는 6촌 형님과 조카들이 보고 싶었다.
말이 6촌이지 나한테는 현존하는 제일 가까운 친척이다.
大山(오오야마)이란 성으로 개명을 하고 일찌기 일본에 귀화한 형님은 동경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도치키 현에 살고 있었다.
형님은 70년대 말 경에도 가끔씩 한국에 나오시면 나를 찾기도 해 당시로서는 귀한
카시오 계산기 등을 전해 주기도 했었다.
마침 대웅제약에서 파프류의 생산을 검토할 즈음인지라 일본의 사토 제약에
*파프제의 기술을 전수받을 겸 이 기회에 일본 친척도 만날 겸 계획을 짰다.
당시 생산부의 대리 한 명과 함께 가기로 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 친구는 그 친구대로 일본 친척을 만나고 나는 나대로 또 그렇게 하는 비슷한
구상이었다.
여름휴가 7일 중 3일은 사토(佐藤) 제약에서 나머지 4일은 친척을 만나는 조건이었다.
대신 왕복 비행기표와 3일간 사토 제약이 있는 하찌요지(八王子)에서의 숙식은
회사에서 제공해 주었다.
나리타 공항에 마중 나온 큰 조카를 따라 바로 도치키 현 형님댁으로 달렸다. 조카는
당시 동경에서 부동산 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형 승용차에 기사를 딸려 가지고 나왔다.
일본의 부동산이 천정 부지로 오를 때이다. 며칠만 지나도 수천만 엔씩 값이 올라
흥청망청 하던 시절이었다.
조카는 8천여만 엔에 구입한 부동산을 불과 얼마 만에 1억 몇천만 엔에 팔았다는 서류등을
보여주며 은근히 자랑을 하고 있었다.
동경에서 붇쪽으로 쭈욱 뻩은 동북 고속도로를 140km 이상으로 커브를 돌아 가는데 차가
상당히 성능이 좋아 보였다.
지금은 시속 140 이 별거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커브를 그 속도로 돌아 나가는 것은 꽤나
성능이 좋은 차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우리는 포니 1,2 가 막 생산되던 시기였다.
도치키 현에는 우쯔노미야( 宇都宮) 라는 큰 도시가 있었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일본 최고의 관광지 닛꼬(日光)에서 흘러 내려오는 큰 개울이 있는 언덕위에 순 목조로 지은
형님의 집이 있었다.
가누마(鹿沼])市란 곳이었는데 근처 개울에서는 낚시를 하는 사람이 제법 많이 보였다.
아주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마침 형님의 처형이 근처 우쯔노미야의 천리교(天理敎) 회장으로 있어서 다음날부터
차를 가져와 나에게 닛꼬를 구경시켜 주었다. 하얀 백색의 대형차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각이 진 구형 토요다의 Century 로 추정된다.
85년 당시 닛꼬에서
대신 나는 억지로 근처 천리교 회당에 반 강제로 끌려가 아침이면 소위 예배를 보아야 했다.
내가 당시 카톨릭 신자라 얘기를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냥 같이 참석해서 우리와 같이
예배를 보면 된다는 식이었다.
헌데 그들의 예배 자세는 참으로 진지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 아닌가?
지극정성으로 아침이면 예배를 드리는데 이게 성심성의를 다 하는 모습들 이었다.
" 아니 무슨 예배를 이리도 열심히 드리지? "
저 하얀 멋진 차로 닛꼬를 구경시켜준 후 형님의 처형이 엔카 카셋테이프
두어 개를 건네 주셨는데, 거기에 수록되어 있던 노래가 바로 이런 노래이다.
사실 그때 엔카는 평생 처음 들어 본 것이었다.
조아람 / 사장가노야도(さざんかの宿)
닛꼬를 올라가는 길은 예의 도꾸가와가 만든 삼나무 숲길을 거치게 된다.
그 옛날 조성한 삼나무 숲은 이제 거목이 되어 길 양 옆을 기가 막히게 장식을 하고 있었다.
큰 나무에 비해 길의 도폭은 좀 좁았다. 당시엔 그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담양의 메타세퀘어 숲길을 연상하시면 되겠으나 닛꼬의 숲 길은 그보다 훨씬 웅장한 느낌이다.
20년 후 단체 여행으로 닛꼬를 가 보니 예의 그 삼나무 숲길 대신 새로 만든 좋은 길로 버스가 다니고
있었는데 운치는 별로 없었다.
2,000미터 이상의 男大山 을 오르면 거대한 폭포가 나타나고 산 중턱에 조성된 칼데라호의
크기도 엄청난 편이다. 유람선을 타고 그 호수를 도는데 아래 물이 그렇게 맑고 청명할 수가
없었다.
당시 생각으로는 호수에 깨끗한 물고기도 무척 많을것으로 여겨졌다.
호수 뒤로 돌아가면 유황 온천의 넓은 전장의 벌판이라는 곳이 나타난다. 한여름의 닛꼬는 시원했고 계곡에서 잡은
물고기를 소금에 구워 팔기도 했다.우리는 재미삼이 그 물고기를 몇 마리 사서 먹어 보기도 했다.
닛꼬 호수의 청명함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조카들과 봉고차를 타고 쯔쿠바 박람회도 갔었다. 한국에서 처음 온 친척을
대접한다고 그렇게 한 것이다. 츠쿠바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今市 (이마 이찌)라고 하는 닛꼬 바로 아랫동네에서 석재 가공업을 하는 조카의 이모네 식구들을 찾아 보니
사람들이 아주 순박했고 또 너무나 맑고 시원한 물이 큰 도랑으로 콸콸 흘러 내려와 마을 중간을 흐르고
있었다.
참으로 자연경관이 맑고 깨끗하고 시원했다.
당시만 해도 스키 같은 걸 탈 생각도 못하던 때였는데,
" 이 근처가 겨울이면 스키 타기가 아주 좋으니 함 놀러 와~ "
남의 속도 모르고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85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스키가
그닥 보편화되지 않았고 당연 나 자신 스키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던 시기였다.
최근 2010년 이래 일본 스키를 몇 번 가 본 경험으로는 그들은 동네에도 스키장이 웬만하면
한 둘쯤 있었다. 닛꼬 부근에도 좋은 스키장이 있음은 물론이다.
허긴 형님이 일본 형수님과 결혼해 닛꼬 부근에 정착하신 이유도 원체 경관이
수려하고 동네 사람들 인심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당시 내 눈에 들어왔던 닛꼬 아랫 동네의 풍광은 너무도 한적하고 깨끗했다.
벼가 빼곡히 잘 자라고 있는 시골 농촌은 골목까지 포장이 되어 있었고 집 옆에는
어김없이 승용차가 한 두대 세워져 있어,
" 아! 우리나라보다 몇 수 위군~ 우리는 언제나 저렇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3-40여 년이 지나 요즘 우리나라 시골에 가보면 당시의 일본 이상으로 잘 되어 있고
또한 마을에는 자동차가 즐비하게 보인다.
한국도 그사이 엄청나게 발전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 세월이 흐르고 형님도 돌아가시고 조카들과는 말도 안 통하고
하다 보니 차츰 연락이 뜸하게 되었고 결국 아주 연락 자체가 두절되고 말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후 등기우편으로 편지를 써서 두어 차례 보내 봤지만, 조카들로부터 아무
연락도 받을 수 없었다.
어찌됐건 연락이 두절된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다. 막상 일본에 겨울철 스키를
타러 더러 가는데 사정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이제 이 나이에
" 나 스키타러 왔으니 함께 스키장에 갑시다^ "
이렇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꼭 뭐 스키가 아니면 어떻단 말인가?
내 좌우에 조카들, 처형 내외, 그리고 우측 끝에 형수님!
약 37년 전 일본을 처음 방문했던 기억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무료한 겨울을 뛰어넘기 위해
일본으로 스키 여행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도치키현의 친척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첫 방문 이후 지금까지 이런저런 관광, 스키등의 명목으로 대략 일본을 10여 차례 이상
방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늘 빠듯한 일정으로 여유있게 도치키현 조카들이 살고 있을 그 동네는
찾아볼 생각을 못했다.
그것이 이제와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 파프제 -- 파스를 말함 , 당시 기술을 대략 전수받아 왔으나 대웅제약에서는
파스 제품을 아직까지도 생산 하지 않고 있다.
첫댓글 변변한 기행문은 아니지만,
이런 인연으로 제가 일본을 가 보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가끔씩 그때를 회상해 보곤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저 때만 해도 일본이 우리의 로망 아니었나요?
환율 차이도 심해서 일본 관광객들이 참 으스대고 그랬지요.
그런데 현지를 다녀왔으니 잘했네요..
그때 저를 차로 데려다 준 조카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드군요!
" 한국은 말야~ 우리에게 딱 20년 뒤져 있어~"
그 말이 지금도 선 합니다^
해외여행 자유화가
89년 1월 1일 이후로 한국인은 누구든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됐지요.
여권 발급에 연령 제한이 없어지고
서울올림픽이 열린 88년까지 해외에 나가려면 만 30세 이상이거나
공무·출장·유학 등 목적이 분명해야 해야 했지요.
마론님은 85년에 회사 업무차 다녀올 수 있었나 봅니다.
이제 6촌 형님은 떠나시고
그 가족들과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안타깝네요.
일본과 국교 정상화가 되고
일본에 있던 친인척이 왕래가 되어,
헤어져 있던 부부가 만날 수 있었지요.
그 새에 일본에 있던 남편은 일본여자와 결혼해서
안타까운 일도 많았지요.
40 여년 전만 하여도 슬픈 역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마론님 일본 첫 방문기,
잘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모습 멋져요)
다른 여건도 불비했겠지만, 그래서
일본을 그 이전엔 갈 엄두도 못냈는가 봅니다.
정확하게 여행자유화 시기를 기억하고
계시네요!
연락이 두절돼 안타깝습니다.
조카들이 비록 한국말은 못하지만,
아버지쪽 사람들은 어떨까? 늘 궁금하고
뭐 그랬을지 모릅니다.
1985 년의 일본은 미워하면서도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우리 대한민국이 일본보다 더 잘산다고 큰소리 치고있습니다 우하하하하하
잘 읽었습니다 충성
!@#$%^&*()
1996 년에 내가 모신 건설회사 대표이사님이 회의 중에
일본은 국가는 대한민국보다 부자 이나 국민은 대한민국이 일본보다 더 잘산다고 하던말이 기억납니다
네에,,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2017년도에 교토에 단풍을 보러가서
매우 이상한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
전철을 타면 왜 그렇게 일본 사람들 표정이 무겁고
침울한지,, 그때 생각을 했지요.
" 아! 얘네들 뭔가 문제가 있긴 있구나~ "
80년대 말에 세계 100대 기업을 줄줄이 꿰 차던 일본이 지금 현재
토요타 하나 빼곤 하나도 그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현실입니다.
여권 내기도 힘든 시절,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미국 못지않은 우리의 부러움 대상? 일본이 아니던가요
그동안 정말 우리 한국 비약의 발전을
했다는 생각이 세삼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기행문, 여행기도 내용에 따라
수필방에 어우러진다는 생각입니다. 건강하세요.
그때는 여권이고 뭐고 생각도 없었고
그저 회사에서 길을 터 볼수 있을까? 뭐
그랬지요.
당시 길거리 리어카에서 사온 카셋트 테잎이
우리의 정식 테잎보다 성능이 더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일본 오디오 제품도 한참을 사서 쓰기도 했지요.
소재의 다양화!! ㅎㅎ 제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본 벳부지역은 온천으로 유명한 곳
목조건물은 정갈하지만
별 장식 없는 내부는 우리의 오래된 시골 목욕탕같이 소박하다
물이 튀지 않게
서로 조심하며
소리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몸을 씻던 일본인들 틈에서
홀라당 벗은 나는 유독 홀로 호기롭다
나무로 만들어진 용기로 짜아악 짜아악 시원스럽게 물을 끼얹고는
뜨거운 탕 속으로 어뜨거버라 물 튀기며 철버덕 첨벙하고 뛰어들었다
어뜨뜨뜨 와 이리 뜨겁노~
에그그 아구야 ~
시원타아~
목욕탕에선 물 쫙쫙 끼얹고
애구구 시원타아, 큰 소리를 내어야 목욕은 하는 맛이 난다
일본인들은 한마디도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이때만 해도 일본인들, 한국 사람들을 알게 모르게 엄청 무시했어요
제가 무시당하게 일조를 한 사람입니다 ~~ ㅋ)
당시는 좀 심하게 그랬었지요.
그 친구들 목욕탕에서 왜 그리 조용한지,,,
저도벳부의 100엔짜리 유명 공중탕에 가서
하도 그들이 조용해 제대로 목욕을 못했었다는,,
코로나 이후에 일본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사뭇 궁금합니다.
목욕탕에 들럿더니 예전엔 남녀 혼탕
이었는데 욕조의 수면위를 우윳빗 유리로
절반을 갈라 남탕 여탕으로 구분해 놓았더군요.
여탕의 목욕하는 소리며 실루엣이 유리에
어른거리기도 하고 욕조의 더운물은
남탕 여탕 같이 쓰고..,..
벌거벗고 목욕하는 남탕에 옷입은 아줌마가
스스럼없이 들어와 여유있게 청소를하고
나가고....
사십여년이 다 되어가는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훤칠한 키에 훤칠한 미남이셨네요.
대웅제약에서 파스를 생산 하였다면 보람이 컷을 터인데 아쉽네요.
가고싶지 않은나라에 일본도 포함
되지만 대마도엔 가보고 싶었지요.
한때 우리의땅 이었으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일본노래
한곡 을 좋아 합니다.
저를 사랑한다 는 말을 한지 얼마
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진
일본 여인을 생각하는 마음 에서
입니다.
옛날에 한국가수 노래를 검색하였더니 본곡이 일본노래였고 제목 도 아리송 하지만.....
(Kage o shitaite)란 노래입니다.
지금도 가끔씩 유툽에서 그노래를 들어 봅니다.
ㅎㅎ 키만 컷지 정말 볼품이 없던 시절입니다.
엔카한곡을 좋아하신다니,,
웬지 이 글을 올린 보람이 갑자기 좀 있는듯?도
하네요.
무악산님에게 그런 스토리가 있었군요!
저 노래 함 찾아보겠습니다.
がゲオしたいて 혹시 이런 이름으로 찾아도
될지 해 보았으나 못찾겠네요!
좀더 정보를 ~~
일본 이야기보다 더 관심을 끄는 건 마론님의 모습입니다.
와 이 미남!. 아이돌 가수는 저리 비켜야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건 아니데요!!
뭐시가 미남이라고!! ㅎㅎ
제가 왜 이렇게 키는 크고 말랐었는지는
다음에 올려보겠습니다.
카시오 계산기
저두 갖고 있어요.
이천년대 중반에 처음으로 팔순의 어머니 모시고 일본을 갔어요
엄마가 일본 도꾜가 구경하고 싶다고 하시어
팔순 여행으로 모시고 갔지요.
동경의 여러곳을 구경하고
요코하마로 갔는데
68층에서 본 야경은
정말 지금도 잊지 못해요
몆년 전
두번째 여행은 조용한 도시 유후인에서 조용히 쉬다 왔답니다
신간센을 타고
그 다음 세번째는
일본이면서 일본이 아닌
대마도 시라다케산 산행
여행 하기 좋은 나라였어요.
카시오 계산기는 당시 참 대단했지요!
주판 아니면 종이에 써서 계산을 하던 시기
였으니까요!
요코하마, 유후인, 대마도 까지!!
여행 경비도 제주도에 비해 오히려 저렴한
편이고 음식도 입에 잘 맞고,, 저는 일본 여행이
좋더군요. 무엇보다 일정이 짧아도 되고 등등..
80년대 중반의 일본 여행기에다 스키 얘기를
하시니 그때를 회상하며 감회가 새롭군요.
아마도 그때쯤에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를
가면서 순식간에 200여Km로 내달리는
열차가 그저 경이롭기만 했었는데....
그당시 세계최초의 고속철도를 운행한다고 일본인들의 자존심은 대단 했었고 그게 또 마냥
부럽기만 했었는데...
수년전 상해에 가서 포동공항과 시내외각까지
30여 Km를 운행하는 최고시속 430Km의
자기 부상열차를 타볼때의 짜릿한 기분같은....
아키하바라에 들러 8mm 비디오 카메라가
새로나왔을때 그때아마 한국돈 80여만원에
구입했었던 기억이며......
80년대 미국 가는 유니나티드 에어라인은
동경 의 하네다공항을 중심공항으로
활용해서 미국을 오가며 수시로 동경을
들렀었고.....
80년대 중반쯤에는 포천의 베어스타운
스키장이 문을 열었었고....
그시절 겨울이면 승용차 지붕위에
케리어를 얹고 그위에 스키를 싣고다니곤
했었는데....
그때의 초등생 아이들이 지금은 벌써
사십을 넘기고......
네에,, 부밍런님은 일찌기 해외 경력이
아주 많으시군요!
일본을 비롯하여, 미국등등^^
스키도 수준급이신가 봅니다.
전 아직도 중급내지 그 이하의 실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해서 비교적 안전하고
겨울 풍광이 끝내주는 일본 스키를 좋아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