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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순례 수도암을 찾아주신 불자님들 반갑습니다. 참으로 가을은 순례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높은 가을하늘에 흰 구름 떠가고 붉게 물든 가을 산의 아름다움은 우리 모두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을 순례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만일 외경에 사로잡혀 본질을 보지 못하면 집에 돌아왔을 때 허전함을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례를 통해서 정신세계로 승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순례의 형태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답답한 가정생활에서 잠시 해방구를 찾아 순례에 오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연을 가까이 하고 싶어서 또 산을 찾기 위해서 가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불자라면 당연히 산사를 찾아서 옛 스님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거기서 나의 인생에 어떤 반전의 기회를 찾아보고자 산과 절을 찾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에게 있어서 순례는 어떤 종교나 어떤 집단보다도 유익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한 옛 스님들의 발자취를 찾는다는 것은 세속적 이익보다는 정신적 큰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정신적 안온과 낭만의 자유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순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찾는데 뜻을 두어야 합니다. 만일 대상을 향해서 아무리 좋은 경치를 보고 가을 단풍을 화려한 경치에 감동했다고 해도 그 아름다움에 도치하면 스스로 본분을 잊고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산을 보면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때 산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을 보고 산에 떨어지면 산을 잃게 되고 산을 잃어버리면 산을 찾아간 자신의 마음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만일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렸다면 여기에서 인생의 모든 비극이 일어나게 됩니다.
때문에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 이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때어나서 내가 누군지를 모르고 평생을 살다 홀연히 떠나갑니다. 여기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한탄할 것이 있습니까? 대부분 중생이란 업력의 강물에 휘말려 자기를 잃고 살아갈 뿐입니다. 때문에 불교에서 순례의 진정한 뜻은 바로 집착된 생활에서 벗어나고 자기라는 감옥에서도 벗어나 불교라는 정신세계를 순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순례를 통해서 잃었던 자기 마음을 찾아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본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육체를 동일시하고 이것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입니다. 망상의 본질은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일시적 현상에 집착하여 온갖 업을 짓기 때문에 이것을 중생이라 합니다. 이처럼 중생이란 거짓된 자아에 집착하므로 참된 이치를 보지 못하고 허망된 경계에 속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본래 마음은 청정법신입니다. 이 마음이 본래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본래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지 순례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례의 진정한 뜻은 내가 나를 찾기 위한 순례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 오늘 순례의 의미는 있게 됩니다.
잃어버린 내 마음 찾아가는 거룩한 순례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이 마음이라면 우리는 일상의 모든 일이 마침내 마음 찾아가는 일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필경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백 천 강물이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 모든 마음은 언젠가는 마음의 바다로 돌아가게 됩니다. 만일 자신을 발견 한다면 우리는 항상 진리의 바다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바다에서 참 모습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찾아가는 길이 너무나 복잡하고 어지러워 누구도 여기에서 자신을 바르게 찾아갈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의 순례에는 길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그 이정표를 부처님 가르침에서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를 바로보라고 했지 모양을 잘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금강경에 이르기를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 (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만약 사람이 모양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써 나를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 길을 가는 사람이라 부처를 볼 수가 없다.”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금강경의 이치로 보면 모양이나 소리로써 부처를 볼 수 없다 했으니 어떻게 순례해야 내용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부처님의 뜻은 모양과 소리에 집착하면 그 속에 의미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모양과 소리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모양과 소리에 현혹되면 뜻을 보기 어렵기 때문에 고적지나 성지를 순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옛 사람들의 정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야 순례의 뜻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지순례를 통해서 마음여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례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순례를 통해서 자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여러분들은 모두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남쪽으로 53선지식을 찾아가듯 도를 찾아가는 순례가 되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우리 불자들은 옛 큰 도인들이 살았던 그런 성지와 도량을 찾아서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은 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스님들의 전유물이 아니므로 세속에 사는 사람들도 도를 닦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도란 내 자신을 바르게 보자는 것이기에 스님이던 속인이던 닦아야 마땅하지만 스님들은 도를 전문으로 닦기 위해 출가 했고 속인들은 세속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도를 닦기 어려우니 도는 스님들에게 맡기고 속인은 그 스님에게서 도를 간접적이라도 배워 닦겠다는 뜻이 암묵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자기들이 하지 못하는 수행을 한다고 수행자를 존경하고 보호를 하나 오늘날 불교계를 돌아보면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서로의 탓만 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 닦는 일은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 주고와 상관없이 마땅히 닦아야 하므로 오늘 여러 불자들은 이 마음 닦는 순례에 잘 오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괴로움을 싫어하고 행복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행복을 좋아할 것 같으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을 가야겠지요. 이 길을 떠나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면 이 길을 가는 길에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찾아야하는 가장중요하고 근본적인 당위성(當爲性)은 바로 인생이 가지고 있는 생 노 병 사 라는 엄청난 고통을 벗어난 진정한 자유를 얻자는데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요? 마음을 닦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잘 배워야 합니다. 부처님가르침을 배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수행자가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오직 이 도(道) 하나에 인생전부를 걸고 살아가지만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갈래 길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오로지 간다는 것도 오랜 전생부터 쌓아온 선근 없이는 3년도 못가 물러나 속인의 행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적어도 스님이라면 도를 닦는 기본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세속인과 출가 수행인이 다른 점이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신도님들은 어떻게 도를 닦을 수 있을까요. 열심히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일심으로 염송하면 저절로 마음이 밝아지고 지혜가 열리게 됩니다. 때문에 염불을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이렇게 순례를 할 때도 속으로 염불을 하면 도량의 기운을 받아 더욱 수행이 깊어지게 됩니다. 만일 집에서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정진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대체로 우리불자들이 순례를 통해 화합을 도모하고 삶의 활력소가 되기 위해 순례를 하겠지만 순례에서 방심하지 않고 염불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순례를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곳 수도암은 참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오지입니다. 지금 수도암에서 내려가는 계곡을 수도계곡이라 하는데 이 계곡 길이가 30리 입니다. 수도계곡은 다시 무흘계곡과 합쳐진 상태로 성주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고령천의 주류가 되고 고령천은 마침내 낙동강과 합류하여 동남해로 흘러들어갑니다. 기본적으로 수도암에서 발원한 계곡을 백리계곡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무흘구곡 시작점이 수도암에서 정확하게 자동차로 40키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지리산 설악산 태백산 빼놓고 이만큼 깊은 계곡도 드물겠지요? 이런 오지에는 반드시 명찰이 있고 거기에는 수도하는 스님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여러 불자들은 100리 수도계곡 오지에서 자연의 설법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순례법문을 들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최상근기가 아니면 무정설법을 들을 수 없기에 부득이 산승이 오늘 법문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도량에서 옛 스님들의 발자취를 한번 돌아보고 우리들의 삶을 다시 반조(反照)할 수 있는 큰 계기와 반전의 효과를 이루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 성지순례오신 불자님은 지금까지 한 산승의 법문이 소중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절에 와서 여러분은 무정물(無情物) 의 설법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무정설법을 들으려면 지금까지 가졌던 세속적 사고방식과 가치체계를 놓고 무심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놓아버리면 보입니다. 뭐가 보이는가요? 자신이 보입니다. 자신을 볼 때 자연을 볼 수 있습니다. 자연을 볼 때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을 보면 산을 보는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만일 마음을 보지 못하고 산 만 본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은 어디가든 다 있습니다. 굳이 산을 보기 위해 여기 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보기 위해 산을 찾는다면 여기 온 가치가 있습니다. 옛 스님들이 고행 난행을 통해 이루어진 수행도량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 불자들이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수도암은 옛 스님들이 오로지 이 도라는 길을 닦아온 수행도량입니다. 만대의 수도인이 나온다는 수도암에서 여러분들은 안심입명처를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여기에서 잠시라도 세속적인 마음을 놓으면 무념무상을 체험하고 마음이 편안해 질것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마음이 맑아지고 맑아지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내 자신의 허물이 보일 때 바로 보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세속적인 오욕락(五慾樂)이라는 경계를 한없이 추구해 왔습니다. 거의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정도로 물질문명에 도치 되어서 자기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잠시 순례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지(聖地)란 오욕락이 침범하지 못하는 곳에 있습니다. 다섯 가지 욕망의 경계에서 벗어난 그런 도량은 반드시 우리마음을 맑혀주는 기운이 있습니다. 그 기운이 있기 때문에 성지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반드시 이런 성지를 순례해야 공덕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저 오대산 적멸보궁에 갔다고 한들 거기서 탐욕심만 가지고 갔다가 그대로 올 것인데 무슨 성지순례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성지순례가 아니고 성지관광일 뿐입니다. 오늘 여기 오신 불자님들 이렇게 도량에 왔으니 이제 옛 스님들의 숭고한 발자취를 통해서 우리도 닮아가려는 마음을 낼 때 성지에서 기운을 받을 수 있고 현실을 바르게 보는 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도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도의 인연을 지어야 하는가요. 대부분 일생을 세속에 속아서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속아서 살아가는 동안 업 속에 갇혔다가 마침내 아무것도 닦지 못한 체 세월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 마음 닦는 공부를 소홀히 했다면 오늘부터라도 아침저녁으로 30분씩이라도 염불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을 맑히고 내 자신을 돌아보는 소중한 공덕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 1시간이라도 자기를 위해서 투자를 해야 돼요. 그것이 진정한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바깥으로 투자만 하지 자신에게 투자를 하지 못하므로 늙어서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아침에 일어나면 30분 저녁 자기 전 30분 그렇게 하루 한 시간이라도 고요하게 염불하면 그게 점차 쌓여 마침내 하루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나오고 그 힘이 그대로 이어간다면 인생을 바뀌게 되어 이생에서 성스러운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딜 가나 성지순례가 되고 서 있는 곳이 진실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닦아 맑아지면 가는 곳마다 성지가 되고 수행하는 마음가짐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면 어떤 곳에서도 안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임재 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했습니다. 즉 가는 곳마다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런 사람 있는 곳이 곧 성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순례를 통해서 이와 같이 온전한 성지를 자기 마음속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성지순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순례를 통해서 자기를 만나야 합니다. 설사 자신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계기와 반전의 효과를 거둬야 한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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