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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마음공부방] 제2 교의편 - 제1장 일원상
게송
설교 : 박세훈 교무님
타이핑 : 강혜지, 박준성
◎ 제6절 게송(偈頌)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
오늘은 마지막 절인 제6절 게송에 대해서 함께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게송이라는 것은 글자가 몇 개 안 되는데 글자가 몇 개 안 되는 만큼 압축되어 있어서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게송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산스크리트어는 고대 인도어인데, 산스크리트어 가타(Gāthā) 라는 단어에서 음역과 의역을 거쳐 게송이 되었습니다. 음역이라는 것은 뜻과 상관없이 음을 그대로 따온 거예요. 그래서 가타(Gāthā)를 게타(偈陀)로 음역했습니다. 따로 뜻이 없습니다. 그리고 송(頌)이라는 것은 게타의 의역입니다. 의역은 뜻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게타는 시, 노래라는 뜻인데 이것을 의역한 것이 송입니다. 그럼 게송은 뭘까요? 게송은 산스크리트어 게타와 그 게타를 의역한 송이 합해진 거예요 병치 돼서 해석한 것입니다. 같은 뜻이에요 게하고 송하고는 같은 뜻인 거에요. 게는 산스크리트어 가타를 음역한 거고 송은 의역한 거니까 같은 말을 다른 언어로 써놓은 거죠. 게타, 게송, 사실 그러니까 게만으로도 뜻이 되고 송만 해도 뜻이 되는 거죠. 게송은 시에요. 시의 특징은 뭔가요? 짧게 압축을 하잖아요. 노래도 그렇죠. 깨달음을 시에 형식으로 압축해 놓은 게 게송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일원상 서원문도 압축해서 어려운데 거기서 또 압축을 해서 게송으로 만든 거잖아요. 그러니까 정말로 대종사님이 하고 싶은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예상이 됩니다. 게송이란 말의 뜻을 아시겠죠?
[게송의 종류]
게송의 종류가 있어요. 우리 일원상장 6절에 있는 것은 전법 게송이라고 하거든요. 저는 전법 게송을 할 수 없습니다. 전법 게송이라는 것은 법을 전할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 주법이라고 하죠.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주법이 나올 수 있죠. 주법이 법을 전하기 위해서 압축해서 시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전법 게송이라고 해요. 법을 전하기 위해서 만든 게송이 전법 게송입니다. 열반송은 돌아가신 분들한테 생사의 이치를 깨닫게 하도록 열반하신 분들한테 시를 하나 올리죠. 여러분들 많이 들었을 거예요. 천도재 할 때마다 인용되는 열반송이 있어요. 생사가 둘이 아니니 가는 자가 오는 자로다. 생이 없는 고로 멸함도 없고 멸함이 없는 고로 생도 없다. 대산 상사님께서 해서 이 열반송을 돌아가신 분들 천도재 때 많이 사용하죠. 전법 게송은 주법이 그 법을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고, 열반송은 천도재 때 생사 해탈을 하기 위해 천도를 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오도송(悟道頌)은 무엇일까요? 깨달을 오에 도 도. 도를 깨닫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오도송은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도를 깨달았다고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한테 도를 깨닫게 하려고 쓰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혜지 교우가 아까 일기를 적었는데 그 일기를 더 압축해서 내가 큰 깨달음을 얻어서 썼으면 오도송이 될 수 있겠죠. 우리 원불교에서 대표적인 오도송 무엇이 있을까요? 성리품 11장에 나옵니다.
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11장 |
대종사 봉래 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글 한 수를 써 주시되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 하시고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하시니라. |
이걸 깨닫는 사람은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변산구곡로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없고 없고 또한 없고 없으며 아니고 아니며 또한 아니고 아니다.’라는 시를 읊으시면서 이 시를 이해하면, 깨달으면 도를 깨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도송이 되겠죠? 이렇게 전법 게송, 열반송, 오도송이 있어서 이런 시들을 게송을 모아놓은 것을 책으로 엮어 놓으신 것이 전등록하고 벽암록이에요. 여러분들이 성리품을 보시면 대종사님께서 과거 칠불을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이 태어나기 전에도 부처님이 있었어요. 석가모니 부처님 본인 포함해서 일곱명을 칠불이라고해요. 그 칠불의 전법 게송은 전등록에 실려있어요. 그리고 벽암록은 임제종 계열 스님들의 게송을 실어 놓은 건데 선문답이나, 여러분들이 아시는 만법귀일 일귀하처오.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하나 그것은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많이 들어 봤죠? 그것이 벽암록에 나옵니다. 선진님 얘기를 듣기로는 대산상사님께서 이 벽암록을 많이 읽으라고 하셨데요. 성리공부에 관심 있는 분들은 벽암록을 읽어보면 좋습니다. 현승교우가 카카오톡에 ‘대종사님 그때 그 말씀’을 올리는데 상당히 재밌게 올리고 우리도 도움이 됩니다. 벽암록을 이제 읽으면서 올리시면 그다음에는 오도송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알려주는 거예요. 전등록과 벽암록을 읽으면은 전등록은 30권이라고 들었어요 이건 좀 많은 것 같고 벽암록부터 시작하면 재밌을 거예요 벽암록을 읽어보면 좋겠다. 아시겠죠? 게송이라는 것은 시라는 형식을 빌려서. 깨달음을 압축해 놓은 건데 주법이 법을 전하는 전법 게송이 있고, 돌아가셨을 때 하는 열반송이 있고, 깨달음을 표현한 오도송이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 실어 놓은 유명한 책이 벽암록이 있다.
[원불교의 게송]
그렇다면 원불교의 게송은 어떻냐? 아까는 일반적인 게송들이고 원불교에서는 원불교 게송의 특징이 있는데 역대 종법사님들께서 전법 게송을 다 하셨어요.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대산 상사님도 하셨거든요. 근데 원불교 게송에 특징이 있어요. 원불교 게송은 공전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단전이라고 해서 큰 스님이 수제자를 키워서 나중에 몰래 그 수제자를 불러서 법을 전하잖아요. 그 대표적인 것이 육조 스님에게 전한 것이 있습니다. 몰래 전했어요. 왜 옛날에는 몰래 전했을까요? 과거에는 인지가 발달하지 않아서 이 법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적어서 여러 사람한테 하면 법이 오염될 수 있잖아요. 제가 설교를 할 때 여러분들이 다 이해하면 더 어려운 말도 하겠지만 여러분들이 다 이해를 못 하면 수준을 낮춰야겠죠. 근데 게송이라는 것은 수준을 낮출 수가 없잖아요. 못 알아듣는다고 쉽게 법이 아닌 걸 전달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알아들을 만한 사람에게 전달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법이 오염되면 안 되니까, 잘 못 전달되면 안 되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지금은 수준이 높아졌어요. 지금은 옛날에 했던 것들은 여러분들이 인지가 올라가서 다 이해하잖아요. 그러니까 공전, 공개적인 석상에서 전한 거예요. 대종사님께서는 법회 시간에 게송을 하셨죠. 그것도 모자라서 정전에 실으셨잖아요. 경전에 실었다는 것은 공존에 극치라고 할 수 있죠. 근데 정산종사님 게송도 정산종사님 법어에 실려있고 대산 종사님 게송도 경전에 실려있어요. 그래서 원불교 게송의 특징은 공전이다. 비밀리에 전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전하는데 그것을 경전에 수록했다. 두 번째는 국한문 혼용이라는 것입니다. 게송이라는 것은 다 한자로 했어요. 사구 칠구 육구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했죠? 유는 무로 무는 유로 한글이 들어갔잖아요. 한자만 들어가지 않았어요. 국한문 혼용했어요. 게송의 형식파괴, 요즘 시대로 하면 대종사님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어요. 과거에 없던 게송이에요. 과거의 게송은 한자로 딱딱 떨어졌거든요. 그다음 세 번째는 열반 전에 하셨다. 옛날 영화를 보면 게송을 마지막 유언처럼 돌아가시기 직전에 수제자한테 많이 했어요. 근데 대종사님은 돌아가시기 2년 전인 1943년 법회 시간에 하셨어요. 근데 그 당시에 제자들은 열반을 앞두고 하신 말씀인지는 몰랐어요. 대종사님은 준비를 하셨지만. 이제 원불교 게송의 특징 세 가지를 알았죠? 공전했다. 그리고 경전에 수록했다. 국한문 혼용했다. 형식 파괴했다. 열반 전에 미리미리 했다. 이것이 다른 불교의 게송과 다른 점이에요.
삼동윤리 게송 |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 세계 건설하자 |
정산종사님 게송은 1962년에 열반 하실 때 하셨습니다. 삼동윤리가 게송 된 것입니다. 대산 상사님 게송은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하나의 세계 게송 |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
대산 종사님 게송은 1998년에 했어요. 여러분들이 원불교 교도라면 이 세 개의 게송은 알아야 해요. 여러분들이 법을 받아야 하니까요. 법을 받으려면 이것을 의두연마 시간에 연마해보세요.
게송이라는 것은 우리 교리상에서 어떤 위상이 있을까요? 게송이 처음 나왔을 때, 일제시대 때 원불교 정전이 있기 전에 불교 정전이라고 했어요. 그때는 교의편이 9장까지 있었습니다. 1장이 사대강령 2장이 일원상장 3장이 게송이었어요. 그러면 게송의 위치가 되게 높았죠. 사대강령, 일원상, 게송 세 개가 중요한 순서니까 나왔겠죠. 교의편 9장 중 3장이 게송이었다가 그다음에 정전으로 바뀌면서 교의품 1장 일원상 장에 편입이 되죠. 그러면 게송의 교리적 위치가 낮아진 거냐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사실 더 올라간 거죠. 원불교에 있어서 종지는 일원상인데 그 일원상장 안에 편입된 거잖아요. 그래서 일원상장의 결론이 게송이다. 지난주에 했던 법어는 일원상을 깨쳤을 때 어떻게 나오냐고 한다면 6절은 게송이 되겠죠. 일원상 장에서 나오는 게송은 일원상 게송이라고 하는 게 좋아요. 일반 게송이 아니잖아요. 계속 게송이라고 하면 오도송, 열반송과 헷갈릴 수 있잖아요. 정산종사님 게송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소태산 게송이라고 하면 그분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있으니까. 공전하신 것이고, 우리 교리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니 앞으로 여러분들이 일원상장에 나오는 게송은 일원상 게송이라고 불러줘야 해요. 아니면 게송이 너무 많아요. 일원상 게송이라고 불러야 한다.
[게송 공부는 어떻게?]
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31장 |
원기 이십육년 일월에 대종사 게송(偈頌)을 내리신 후 말씀하시기를 [유(有)는 변하는 자리요 무(無)는 불변하는 자리나,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자리가 이 자리며, 돌고 돈다, 지극하다 하였으나 이도 또한 가르치기 위하여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나니, 구공이다, 구족하다를 논할 여지가 어디 있으리요.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
게송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종경 성리품 31장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여러분들한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에요 게송 공부는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사량이라 하는 것은 생각과 분석이에요. 생각과 분석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 하지 말고 관조 밝게 비추어 봄으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 관조라는 것은 뒤에 알려줄게요. 여러분들 지금은 샤랑으로 먼저 접근해야 하니까 관조는 마지막에 알려줄게요.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 것은 관조예요. 석립청수성, 여러분들이 이제 돌이 서서 설교를 듣는다고 생각하면서 이 게송에 대한 것을 같이 해봐야 하는데 사량이란 것은 생각을 일으키거나 일어나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생각이 일어나는 그 바탕을 놓치게 되는 거예요. 사량이라는 것은 생각을 일으키거나 일어나는 생각에 사로잡혀요. 지금 여러분들 제가 게송 이야기하잖아요. 근데 다른 생각이 나요. 내가 끝나고 과제 해야 하는데 하면서 생각이 과제로 가요. 그건 사량이죠. 그리고 게송 하니까 게라는 것은 산스크리트어 게타에 음역이다 하니까 그 생각에 사로잡히잖아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사량인데 관조라는 것은 생각이 일어날 때 제가 여러분들한테 이 설교를 해서 생각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그 생각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내려놓고 생각이 일어나는 바탕 자리를 돌이켜 보는 거예요. 내가 인영 교우를 보면 인영 교우가 한 생각이 일어나죠. 부담스럽게 왜 쳐다보나. 그때 부담스럽게 왜 쳐다보실까? 내가 뭐 잘 못 한 거 있나? 이것은 사량이잖아요. 근데 일어났을 때 이 생각은 어디서 나오지? 생각이 일어난 그곳을 쫓아 가는 게 관조에요. 무엇이 들어서 이 생각이 일어나지? 아시겠어요? 제가 설교를 하는데 무엇이 들어서 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까? 듣고 있는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관조예요. 생각이 끼어 들어가면 안 돼 거기는 그냥 듣고 있는 거예요.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들을 때 생각이 들어가요? 돌이 생각을 해요?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 게 관조죠 듣고 있는 그것만 있어요 소리만. 관조로써 일원상 게송을 들어가 보겠습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바탕을 찾아가는것이 관조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생각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는 것이 관조예요. 재밌죠? 그렇게 하시면 여러분 관조가 돼요 지금, 매 순간.
일원상 게송(偈頌) |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
[유(有)는 무(無)로 무는 유로]
일원상 게송을 보면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여기서 유라는 것은 대종사님께서는 변하는 것이 유다. 변하는 것은 다 유에요. 지금 여러분 생각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있잖아요. 1초 전에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잖아요. 변하는 것은 유고 그것을 일원상 서원문에서는 무상이라고 하죠. 여러분들이 인생무상이라고 하잖아요. 인생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서 이렇게 변한 거잖아요. 내가 나이가 들거나 인생무상이네 벌써 4학년이네, 벌써 한 학기가 끝나가. 무상하다고 하잖아요. 유라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에요. 순식간에 지나가잖아요. 벌써 추워요,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리고 유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잖아요. 그것을 불교에서는 색이라고 해요. 형상 있는 것을 색, 유라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무상한 것이고, 색이고, 현이에요 나타난 것이에요. 여러분들 한 생각 일어난 것이 유에요. 지금 한 생각 일어났잖아요. 그렇죠? 마음작용까지 포함한 것이 유다. 무는 뭐에요? 무는 변하지 않는 것, 일원상 서원문에서 유상이라고 해요. 유상으로 보면, 그리고 불교에서 공이라고 해요, 그리고 은이라고 해요. 숨어 있어요. 숨어 있다는 것은 없는 건 아니죠. 그리고 유라는 것은 인과보응이고 무라는 것은 불생불멸이라고도 하고 무라고 하는 것은 일념미생전이에요 여러분이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마음을 무라고 해요. 한 생각이 일어나면 유에요. 그러면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여러분들 계속 그러지 않아요? 한 생각이 일어나요. 제가 모르는 얘기 하면 한 생각이 일어날 거 아니에요? 근데 한 생각은 어디서 나와요? 없는 곳에서 나오잖아요. 일념미생전 자리, 없는 곳에서 한 생각이 나와요. 그러다가 한 생각이 계속 있어요? 아까 혜지 교우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어디서 일어났어요? 그 생각이 어디서 나왔어요? 모르겠죠? 언제, 어디서 실체가 뭐에요? 먹고 싶다, 배고프다, 근데 그 생각이 안 없어지면 어떻게 돼요? 몸무게가 100kg 넘어갈 수도 있겠죠? 근데 먹고 싶다 그 생각이 사라지잖아요. 다행히 사라지잖아요. 무는 유로, 유는 무로. 먹고 싶다. 그거 사라지게 하려고 잔 거잖아요. 근데 생각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래요. 100년 전에 나 있었어요? 없었죠, 근데 지금은 있네요. 그런 생각 해본 적 있나요? 나는 계속 있는 것처럼 생각하죠. 나는 영원할까요? 나는 1000년 뒤에는 있어요? 없죠? 그게 뭐예요 유는 무로 무는 유로 가는거 잖아요. 여러분들이 지금 힘들어요? 영원히 힘들 것 같지만 얼마 전에 추석 연휴 보냈잖아요. 근데 그거 다 잊어버렸잖아요. 왜 힘들지?, 피곤하지? 과제도 많지 계속 유는 무로 무는 유로 가요. 그렇잖아요 계속 힘들 것 같지만 힘든 건 사라지고 다시 생겨나고 사라지고 우리의 생각도 그렇고 나의 육신도 그렇고 모든 게 그렇다는 거예요.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태어나는 순간 죽음으로 가는 시작이잖아요 안 그래요? 태어나면 죽는 거 스타트에요 그건 뭐예요 태어나는 것은 유잖아요. 유가 태어나는 순간 무로 가는 거잖아요. 죽는 것은 무잖아요. 사라지잖아요 근데 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요.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생각도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나도, 만물도 유는 무로 무는 유로 그것을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변한다. 성, 만들어지고, 주, 머물고, 괴, 점점 소멸하고, 공, 없어지고. 유는 무로 무는 유로가 성주괴공으로 했고 나를 포함한 만물은 생로병사라고 한 거예요. 생각은 생주이멸로 일어나요. 여러분들이 ‘먹고 싶다.’ 한 생각이 일어났어요. 그것이 머물렀어요. 그러다가 밥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배부르다로 바뀌겠죠? 변화되고 멸, 없어져요.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만물은 생로병사로, 생각은 생주이멸로. 모든 것은, 유는 무로 무는 유로 그리고 지금도 계속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여기까지 이해되시나요?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원불교 교전 공부를 쓰신 각산님께서는 돌고 돌아를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돌고 돌아를 넘어선 것 같아요.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순환하잖아요. 그것을 돌고 돌아라고 많이 해석하는데 그 순환의 의미를 넘어선 진리의 역동성이다. 진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성. 그것을 일원상 서원문에 능이성 유상이라 하셨어요. 능이성이라는 것은 스스로 유상하다는 것이고 능이성 무상은 스스로 무상하다는 것이에요. 누가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변화한다. 누가 들어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스스로 변화한다는 거예요. 그것을 돌고 돌아라고 하는 거고 지극하다는 것은 우리는 현상계만 보고 사는데 우리가 그냥 보고 살 때는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도는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이 진짜 유고 진짜 무인가? 유와 무를 초월하여 지극한 자리에 들게 되면 그것을 천도 법문에는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닌 그것이나 그중에 그 있는 것이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생겨나, 자동적으로 생겨나는 역동성이고 유, 즉 나라고 하는 것은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와 무를 초월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나의 본래 마음도 유무라고 하는 그 용어의 개념에 가둘 수가 없다. 그래서 유는 무로 무는 유로 현상을 보니까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아가는데, 그것의 현상만 보는 게 아니라 실체를 더 보니까 유와 무를 초월해 있다는 것입니다.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그래서 유와 무를 초월했으니까. 그렇다면 유와 무가 구공이네. 구공이라는 것은 구자는 모두 구(俱) 자에요 그리고 빌 공(空)자니까 유와 무가 모두 텅 비어있다. 텅 비어있다는 것은 공간적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텅 비었다는 것은 유와 무를 초월했으니까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유라고 생각하는 관념과 무라고도 생각할 수 없는 것. 왜냐하면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하고 유가 아니기도 하고 무가 아니기도 해요. 나라고 하는 것은 만유가 한 체성이에요. 그러면 유와 무가 한 체성이라는 거에요. 유와 무라는 것이 손바닥의 앞, 뒷면과 같아요. 그래서 일원상 진리에서 ‘유상으로 보면’이잖아요. 변화하는 것에서 보면 그렇고, 변화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어요. 진리를 변한다고만 말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다고만 말할 수 없어요.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가운데 변해요. 한 체성이에요. 그것을 불변과 변으로 본 것이지 유와 무가 둘이 아니라는 거에요. 유인 진리 따로 있고 무인 진리 따로 있고 변하는 진리 따로 있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 따로 있지 않아요. 변, 불변이 같이 있어요. 한 체성이에요. 같이 돌아가요. 여러분은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육신은 생로병사로 변화하는데 그 육신이 나에요? 나는 아니잖아요. 내 본래 마음 지금 역력히 설교를 듣고 있는 그것은 변한가요? 변, 불변, 유, 무가 한 체성이다. 둘이 아니다. 그래서 유와 무는 서로 바탕에 있어요.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해서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생멸 없는 도가 변하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인과보응 되는 이치가 변하는 이치에요. 근데 변하는 이치와 변하지 않는 이치가 어떻게 했다? 서로 바탕했다는 거에요. 그것이 뭐예요? 하나라는 이야기잖아요. 바탕했다는 것은 하나가 없으면 하나가 없다는 거예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은 같이 돌아가요. 불생불멸은 성품에 체가 되는 거고 인과보응은 성품의 작용이에요. 이것이 같이 돌아가요. 서로 바탕했어요 서로 하나란 말이에요, 한 체성이에요. 이것을 쉽게 얘기하면 유마거사라는 뛰어난 스님인데 사리불에게 물었어요. 당신이 선을 하는데 유심으로 합니까, 무심으로 합니까? 제가 요새 줌모닝 선모닝을 열심히 하는 이하은 교우한테 선을 하는데 유심으로 합니까, 무심으로 합니까? 물었어요. 지금 그럼 뭐라고 하시겠어요? 현승교우에게 선을 유심으로 해요? 무심으로 해요? 사리불에게 이렇게 물었대요. 현승교우는 유심으로 하고 있다. 유심으로 하고 있으면은 일체중생이 다 선을 하고 있네? 여기 있는 사람 다 선하고 있네? 다 유심이잖아요, 선을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네 욕하는 것도 선이네 유심이니까. 선이에요? 욕하는거? 자, 무심으로 하면 어떻게 돼요? 컵도 선하고 있네요. 이거 무심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리불이 대답을 하는데 유심으로 한다고 하면은 일체중생이 선을 하고 있는 것이고 무심으로 한다고 하면은 산천초목이 다 선을 하고 있다는 건데 유심으로 합니까? 무심으로 합니까?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유와 무가 구공이나 이렇게 대답해야겠죠? 유라고도 할 수 없고, 무라고도 할 수 없잖아요, 우리가 아침 좌선할 때 그 마음을 유무 초월의 생사문 자리에 있잖아요. 그렇죠? 언어도단의 입정처와 유무 초월의 생사문 자리에 선할 때 있는 거잖아요. 그것을 유심이라고도 할 수 없고 무심이라고도 할 수 없잖아요.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 유무 초월의 생사문이니까.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선할 때 유심도 아니고 무심도 아니고 또 그것도 틀린 거죠. 유심이라고 할 수 있고 무심이라고도 할 수 있고 이게 유와 무가 구공 하다는 거에요.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구공 역시 구족이라. 구족이라는 것은 갖출 구(具) 넉넉할 족(足)으로 다 갖추고 있다. ‘온전히 갖추고 있는, 온전히 갖출 수 있는’이란 뜻입니다. 온전히 갖출 수 있다는 것은 가능태를 말하는 거예요. 아까는 유와 무를 초월한 거잖아요. 이거는 한 체성이니까 유와 무를 다 갖추고 있어요. 그래서 성품과 인과가 둘이 아니라 인과의 체가 성품이고 성품의 운영이 인과고 온전히 갖추어 있고 온전히 갖출 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쉽게 해볼게요. 구공 역시 구족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가능태를 말해요. 구공이라는 것은 완전히 비어있다는 것이고 구족이라고 하는 것은 다 갖춰 있다는 것이잖아요. 근데 구공 역시 구족이니까 다 비어있는 것과 다 갖추어 있다는 것이 같다는 말입니다. 다 비어있는 것과 다 갖춰 있는 것이 같다. 모든 것들은 다 할 수 있는 가능태가 구공이면서 구족이에요. 중용에 희노애락지미발(喜怒哀樂之未發) 위지중(謂之中)이다.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에 마음이 중이에요. 그것이 구공이에요. 없잖아요. 희로애락이라고 하는 것은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이 감정을 발하기 전에 마음이에요, 있어요 그때? 없잖아요. 그럼 구공이네 비었네, 그런데 희로애락이 발하기 전에,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겁고 이런 것들을 발하기 전에, 마음이 있어야지 희로애락을 발할 수 있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지금 기쁘면 슬픈 감정이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니까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어야지, 비어있어야지 희로애락의 감정을 낼 수 있잖아요. 내고 싶은 대로. 그러니까 구공이 되어야지 구족이 되지 않아요? 여기 컵이 있어요. 이 컵이 비어있으면 물도 담을 수 있고 콜라도 담을 수 있고 주스도 담을 수 있어요. 그러면은 컵이 비어있는 것은 뭐예요? 가능태에요. 모든 걸 담을 수 있는 상태잖아요. 구공이면서 구족이잖아요. 비어있는데 다 가능해요. 비어있으니까 다 가능해요.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상태가 구공이고 한 생각 일어나서 내가 모든 생각을 낼 수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모든 생각을 낼 수 있어요. 한 생각 일어나기 전에 상태로 가야지, 구공이 되어야지 구족이 돼요. 비어있어야지 채울 수가 있고 그것이 비어있는 상태를 가능태라고 해요. 여러분들이 인만 심으면 모든 것이 가능해요. 그것을 원만구족 지공무사라고 하죠. 비어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내가 비어있는 상태일 때는 모든 인을 심을 수 있는 거죠. 그러면 모든 것이 가능하잖아요. 그래서 구공이면서 구족인거에요.
一圓相 偈頌 6단계 공부1단계 有는 無로(무념공부)현실 있는 데에서(一切善法) 열심히 활동하고 갖추고 장만하나거기에 집착상을 다 놓아 버리고 없는 데로 돌아가 안주해 버리고2단계 無는 有로(유념공부)아무 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초연히 유유자적하다가기틀 따라 있는 곳에 나타나 종횡무진하는 경륜을 다듬고 펼치고3단계 돌고 돌아(동정간 불리선)그러나 그 어느 한 지점에서도 정지하지 아니하고 계속 돌려서 끝이 없게 하여가면4단계 至極하면(무시선, 무처선, 무한동력)그 공부는 점점 깊어져서드디어는 지극한 자리 무등등한 자리에 도달이 되나니5단계 有와 無가 俱空이나(유무, 고락을 초월한 마음/정산종사, 양산종사 일화)비록 도달이 되었다 하나 有에서도 有가 없고 無에서도 無가 없어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며6단계 俱空 亦是 具足이라(이 원상을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사용)모두 다 비었으되 광명수량(光明壽量)과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경륜과여래 지혜덕상(如來智慧德相)은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자리이다.
一圓相 偈頌 6단계 공부 1단계 有는 無로(무념공부) 현실 있는 데에서(一切善法) 열심히 활동하고 갖추고 장만하나 거기에 집착상을 다 놓아 버리고 없는 데로 돌아가 안주해 버리고 2단계 無는 有로(유념공부) 아무 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초연히 유유자적하다가 기틀 따라 있는 곳에 나타나 종횡무진하는 경륜을 다듬고 펼치고 3단계 돌고 돌아(동정간 불리선) 그러나 그 어느 한 지점에서도 정지하지 아니하고 계속 돌려서 끝이 없게 하여가면 4단계 至極하면(무시선, 무처선, 무한동력) 그 공부는 점점 깊어져서 드디어는 지극한 자리 무등등한 자리에 도달이 되나니 5단계 有와 無가 俱空이나(유무, 고락을 초월한 마음/정산종사, 양산종사 일화) 비록 도달이 되었다 하나 有에서도 有가 없고 無에서도 無가 없어 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으며 6단계 俱空 亦是 具足이라(이 원상을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사용) 모두 다 비었으되 광명수량(光明壽量)과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경륜과 여래 지혜덕상(如來智慧德相)은 원만구족(圓滿具足)한 자리이다. |
[일원상 게송 6단계 공부법]
이것을 이제 좌산상사님께서는 일원상 게송 6단계 공부라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유는 무로.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가는데 있는 것에 집착하면 어떨까요? 괴롭잖아요.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명예도 있는 거고, 재물도 있는 거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거고, 다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없어지잖아요. 그것을 잡고 있으면 괴롭다. 무념공부입니다. 집착을 놓는 공부, 비우는 공부죠.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없는 것은 생겨나요 그럼 우리가 없는 자리만 머물면은 편안하니까 보은 활동을 못 하잖아요. 유념공부에요 주입 공부, 한 생각 챙기는 공부에요. 옛날 도인들은 그 자리에만 머물면 되지만 복도 짓고 보은 활동도 해야 하잖아요. ‘무는 유로’는 무념공부, 무념공부는 여기서 잊어버리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공부 놓는 공부. ‘무는 유로’가는 유념공부는 주의심을 챙기는 공부. 3단계 ‘돌고 돌아’라는 것은 어느 한 시점에도 정지하지 않고 계속 돌려서 끊임없이 하는 공부죠. 동정 간에 불리하는 공부입니다. 여러분들이 일이 없을 때도 공부하고 일이 있을 때도 공부하고. 유에서 무로 갈 때도 공부하고 무에서 유로 갈때도 공부하고 돌고 도는 공부입니다. 지극하면 어떻게 될까요? 무시선 무처선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무한동력 공부. 이렇게 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유와 무를 초월한 단계에 들어가요. 고와 락을 초월한 단계죠. 여러분들이 돈이 있어도 편안하고, 돈이 있어도 타락하지 않고, 돈이 없어도 비굴하지 않고, 명예가 있어도 권력을 안 좋게 행사하지 않고, 명예가 없어도 그것을 탐하지 않고 있고 없는 것에 구애되지 않는 상태가 와요. 이것이 5단계 ‘유와 무가 구공이나’에요. 정산종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총부를 거닐다가 어느 아이가 발로 돌을 차서 정산종사님이 맞아 머리가 깨져서 피가 났는데 ‘아 시원하다’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받을 인과는 받아야겠죠? 그리고 인과의 세계를 쓰신 양산종사님은 옆집에 있는 사람이 계속 양산종사님 집에다가 쓰레기를 버렸대요. 그때마다 계란을 가져다드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그 집에서도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 좋은 음식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이분들은 유무 자리를 초월한 거죠. 그러면 6단계 구공 역시 구족이라. 다 비어있는 것 같지만 그 비어있는 곳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을 일원상 법어에서 이 원상은 눈, 코, 귀, 입, 마음, 몸을 사용할 때 쓰는 것이니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것이 되는 것이죠. 모든 걸 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 모든 걸 할 수 있잖아요. 인을 심으면 할 수 있잖아요. 인과의 진리가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노력을 하면 되는 거잖아요. 언제 될지는 기한을 모르지만. 그래서 일원상 게송 6단계 공부가 이렇게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게송이라는 것은 사량으로써 가는 것이 아니라 관조로써 가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 관조로써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라. 관조로써 보는 것은 듣되 듣는 바가 없고 말하되 말한 바가 없고, 화를 내되 화낸 바가 없이 하는 거예요. 그냥 마음을 있는 그대로 비춰 보는 공부. 그래서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을 쫓아가거나 경계에 휩쓸리지 않고 생각이 일어나는 바탕을 비추는 것. 그것이 관조 공부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무엇이 들어서 생각이 일어나는가, 화가 날 때마다 무엇이 들어서 화가 나는가 그 화내는 그것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이 경계경계마다 생활생활마다 하시면 그것이 유와 무가 구공이고 구공 역시 구족인 단계로 가는 거예요.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생각에만 빠져있지 말고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을 찾아가고 무엇이 들어서 일어나는지 찾아보면 여러분들이 게송을 깨쳐서 대종사님의 법을 오롯이 받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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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합력해주신 혜지 교우님 감사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네에
감사합니다! 잘 보겠습니다~!
우와 준성교우님~!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