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집 (1)
군데군데 하얗게 남아있는 산기슭에 봄 햇살이 내리쬔다. 철길 아래로 언뜻
비친 개울가에 눈 녹은 물이 흐르고, 유리창 밖을 지나는 바람은 눈으로 보기
에도 한결 부드러워져 있다.
창턱에 팔을 기댔다. 작게 덜컹거리는 진동과 조금 덥다싶은 객차의 난방이
나른하다.
며칠 동안의 피로가 달라붙어 있는 건 몸이 아닌 정신 쪽이다. 과거에 매달린
꿈속에서 생활한 것 같은 날들이지만 사람이 죽은 뒷정리의 고단함은 착실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유리창에 쿵, 소리가 나게 머리를 기댔다. 긴 머리칼이 스르르 떨어져 중력
방향을 가리킨다. 손으로 닦아놓은 부분이 뿌예지기 시작해 다시 쓱쓱 문질
렀다. 유리에 스며있던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 옆구리에 묻어나온다.
사실, 내가 한 일은 별로 없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여자가 장례식
에서 할 일은 많지 않다. 요리도 서투르고 힘도 없다. 게다가 난 싹싹한 성격도
아니니까.
외할머니는 내 유일한 가족이었다. 부모가 없는 나는, 외할머니를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자랐다. 같은 호적에 등재되어 있지 않은 아버지로부터 꽤 오랫동안
돈이 들어왔나 보지만, 그 가느다란 실은 끊어진지 오래였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든 연락이 닿기 마련인가 보다. 수화기 저 편으로, 고향
에 돌아가지 않은 10년분의 세월을 먹은 하꼬방가게 아줌마의 음성이 들린
순간 ‘아, 돌아가셨구나’ 하고 알았다. 그 뿐이었다. 통화를 끝내고 다시 테이블
에 앉아 먹다 만 샐러드를 마저 먹었다. 먹으면서, 내일 일찍 회사에 전화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조부모가 돌아가시면 며칠이더라,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샐러드
그릇을 꽤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는데 거반 남겨버렸다. 버리기가 귀찮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었다. 분명 멍해진 얼굴이었겠지.
그 얼굴은 여태까지 풀릴 기미가 없다. 슬픔의 단계로 넘어가야 할 테 지만
계속 겨울에 머물러 있다. 표정에도 눈길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기차가 광활한 호를 그리며 철로를 돌기 시작한다. 태양이 시야의 중심에 불쑥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튼다. 무거울 것 없는데도 왠지
무거워 보이는 보스턴백이 옆좌석 시트에 뚱하니 놓여있다. 고향동네에서 산
싸구려. 그렇지만, 내릴 때 잊고 내릴 것을 걱정해 천장의 짐받이에는 올려두지
않았다. 평일 낮 열차는 한산하다 못해 옆좌석도 뒷좌석도 영영 비어있을 것
같다.
할머니는 내가 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썼던 방을 그대로 남겨두고 계셨다. 빈
방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었는지 모른다. 만약 내가 다시
그 집에 머물게 될 때를 위해서였다면 어느 정도 당신의 생각이 들어맞았다고
해야 하나. 덕분에 내 방이 아닌 곳에서 잠이 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비행기를 타고 온 외삼촌이 그 방 정리를 나에게 맡겼다. 명절 귀향행렬 뉴스가
나오는 도중에 선물을 든 외삼촌을 맞이하던 기억은 있지만, 함께 산 적은 없다.
장례식 뒷정리를 마치면 다시 외국으로 날아가겠지.
어린시절의 잔해 중 부피가 작은 것들을 쓸어모아 무조건 큰 걸로 달라고 해서
산 보스턴백에 담고, 나머지는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가연성, 불연성, 재활용
가능한 것…….
폭력적일 만큼 눈부시게 따라오는 햇살을 따돌리며 열차는 터널 속으로 미끄
러져 갔다. 고막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감각이 느껴지고 조금 편안해졌다. 환한
곳은 견디기 힘들다. 버섯은 아니지만.
*
보스턴백을 내려놓고 현관문에 키를 꽂아 돌렸다. 블라인드가 쳐져 있어 집
안이 흐리다. 며칠간 쌓여있던 습습한 공기를 막 흩뜨리려는데 복도 저 쪽에
얌전히 웅크린 회색 모포뭉치를 발견했다. 맨션 정원 주위를 배회하는 도둑
고양이였다. 가끔 먹을 걸 던져주곤 해서(물론 내가 고양이에게) 이제는 꽤
스스럼없다고 자부한다. ‘고양이사람, 잘 있었어?’하며 목을 긁어주자 고로록
고로록 거렸다. 그러고 보니 꽤 오랫동안 먹이를 주지 않았다. 의무는 아니지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길들여진다는 의미일까.
얼른 들어가 냉장고에서 맛살을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좀 뜨거울 것
같아 찬물에 휘휘 저어 가지고 나와 한 조각씩 내민다. 고양이는 콧잔등에 주름
을 지으며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 모습이 예뻐서 웃음이 난다. 그러다가 맛살 한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모래가 잔뜩 묻어버렸다. 고양이가 그냥 집어먹으려
하기에 억지로 빼앗았더니, 녀석은 우엥, 하고 냅다 내 손을 할퀸다. 세 줄로
피가 배어나왔다. 용맹스런 녀석이다.
넌 미안한 마음 안 들겠지? 길들여진 건 나뿐이었나 보다. 시간을 정해놓고
먹이를 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다 주고 기름기 묻은 손가락을 잠시 녀석에게 내맡긴 다음, 현관문을 열었다.
고양이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씹어삼킬만한 것이 더 있나 살펴보고 있다.
몸을 반쯤 집어넣다가 현관문 안쪽을 등으로 기대고 고양이를 돌아봤다.
“들어올래?”
녀석이 고개를 치켜든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갈색과 까만색이 섞인 구슬 같은
눈알이다. 고양이가 충분히 들어올만한 공간을 만들고 잠시 기다린다. 그 녀석은
바닥에 오도카니 앉아서 벌어진 문틈과 나를 번가랐다. 하지만 망설이는 것
같지는 않다.
점점 좁아지는 문 틈 사이로 고양이는 여전히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지금이
라면 들어올 수 있어. 가족이 될 수 있어. 속으로 말하는 동안에도 틈은 계속
줄어들고, 탁 소리와 함께 녀석은 문 밖에 존재하게 되었다. 자물쇠를 잠그고
손을 씻은 다음 침대에 엎드렸다.
손등에 약이라도 발라두려 했지만 약상자를 찾을 수가 없다. 집을 옮길 때
사라진 거겠지. 언젠가 불쑥 나타날 테고. 고향 누구에게도 새 연락처를 알리
지 않았지만 갑자기 울린 며칠 전의 전화벨처럼 말이다.
대학생이 되어 시골을 떠나온 뒤, 한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연락을 끊은 건
아니었다. 전화통화도 하고 가끔씩 할머니가 올라오시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꽤 오래전 일이여서 점점 뜸해진 연락은 다 탄 촛불처럼 스르륵 꺼져
갔다. 출퇴근하기 편한 이곳으로 이사 온 후로는 연락처를 알려드려야지 하면
서도 바쁜 일상에 미루었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어 몇 모금 마신다. 다시 넣어두다가 장례식에 가기
전 넣어둔 샐러드그릇을 발견하고는 음식 쓰레기통에 쏟아 부었다.
눈을 붙이고 싶지만 졸리지는 않았다. 잠들기 직전에 나타나곤 하는 반짝반짝
물고기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누워있다가 침대 발치께 놓아둔 보스턴백을
집어들며 일어났다. 지퍼를 열어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 놓는다. 부활동 문집,
말려서 작은 유리병에 모아놓은 장미꽃잎(학교 담장에서 땄다), 문고본으로된
로맨스 소설책, 친구들과 함께 갔던 시대축제 팸플릿, 상장과 졸업장을 끼워
둔 졸업앨범, 하모니카, 그리고 교복의 단추니 꽃핀, 아크릴 명찰과, 공기놀이
에 쓰이는 공깃돌, 장난감 요술봉 등 자잘한 물건들이 차곡차곡 쏟아져 나왔다.
하모니카를 옷에 슥슥 문지르고 소리가 나는지 확인한 다음, 초등학교 때 배운
으스름달밤을 불어본다.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끝까지 불 수 있어서 조금 놀랐
다.
언제 이런 것들과 함께했을까 싶을 만큼 낯설고도 정겹다. 소중히 여겼든
그렇지 않았든 내 지난날의 한켠을 차지했고, 그때의 나를 알고 있는 잡동
사니들. 어쩌면 내가 모르는 나까지 고스란히 스며있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다. 옆좌석에 놓아두길 잘했다. 예감일 뿐이지만, 객차 선반에 올려
두었더라면 분명 그냥 잊고 내렸을 것이다.
남겨둔 게 없나 싶어 보스턴백을 들여다본다. 내용물이 빠져나간 백은
이상한 동물의 껍질마냥 맥이 없다. 싼 거라 그런가. 쇼핑백 대신삼아
구입한 거니까 다시 쓸 일 없겠지.
보스턴백 자신의 그림자만 가득 찬 공동은 꽤 어둡다. 손을 넣어 휘휘
휘젓자, 작고 차가운 무기질이 손가락에 걸렸다. 뱀!! ……그럴 리 없잖아.
조그만 돌멩이다.
손바닥에 놓고 굴려본다. 조금 납작한 부분에 자연적으로 생긴 허연 꽃무늬
같은 게 있긴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둥글둥글한 돌멩이다. 언제 적 물건이지?
뭐하러 이런 돌멩이를…….
하긴, 어린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소중해지기도 한다. 이따금 다니는
수영장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매미 허물을 보물처럼 간직했다고 한다.(근데
연말대청솟날 엄마가 갖다 버렸단다.)
돌멩이를 책상에 내려놓으려 하다가, 꽃무늬가 네잎클로버처럼 보였다. 그리
고 단풍이 섞여들기 시작하는 무성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햇빛이 떨어
지는 커다란 양버즘나무의 터널.
풍령(風鈴)소리가 들린다.
응? 하고 갸웃한다. 그리고 알아챈다. 이 돌멩이는 그 날, 그 여름이 끝나가던
날의 물건이다.
다리가 녹아드는 느낌에, 기대듯 의자에 앉았다. 놀랄만큼 오랫동안 한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뇌 속에서 억압의 기재라도 작용한 것 마냥.
시선을 멀리 내뻗을 곳을 찾아 얼굴을 든다. 베란다로 이어진 맨션의 창문
아래에는 자동차가 오가고, 나름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길을 걷는다. 그 위에는
눈 녹은 구름이 흐르는 하늘이 있다.
(to be continued...)
첫댓글 음.. 1님칭 주인공 시점인가요, 일상을 말하고 있는 여자.... 그럼 나중에 소녀가 나오겠네요?(저번에 프롤로그에서 말씀하셨던, ) 그런 나즈막한 이야기가 일기같아서 왠지 제가 언제 읽었던 소설작가분 특유가 묻어나시는듯,, 진짜 작가분 아니세요오? 으음.. 어쨌든간, 2화도 기대하겠습니다~^^
흑흑... ㅠ.ㅠ 이렇게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날 쓴 거는 그날 올린다는 계획으로, 검은집을 완결할때까지 매일매일 쓸 생각이랍니다. 격려 고마워요~
분위기가 좋은 글이네요. 잔잔하고.. 기대되요 :)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하하하 제 글은 언제나 잔잔하답니다!!(뭔소린지 ㅠ.ㅠ)
맞아요. 묘사가 섬세하고 공감가는 부분들도 많네요. 잘 읽었습니다.
하하하.. 제가 원래 섬세한 사람이다 보니~(전 띄워주면 안됀답니다) 하지만 꽤 지루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야기전개가 워낙 느리니까.. 감사드려요^^
!! 제꺼하고는 수준이 다른 문장들..ㅠㅠ!!차분하면서도 계속 빨려들어가는 느낌!!! ㅠㅠ!! 이런게 글이군요..ㅠㅠ!!앞으로도 계속 읽겠습니다!!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도, 빨려들어가시면 곤란해요. 잠에 빠져들어가고 있는거니까요... 제 글을 읽다보면 어느새 꿈나라로...ㅠ.ㅠ 안녕히주무세요
음....단어와 묘사가 대단한데요..^^~
표현들이 넘 좋아요. 글에 대해 아는게 없는지라 글이 어떻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제 취향이라고나 할까 부럽습니다.
흑흑 ㅠ.ㅠ 역시 글쟁이되보기 카페는 다정한 느낌이 든다니까요.. 전 지루하다고 아무도 안 읽어주실줄 알았는데.. 따뜻한 격려 감사드립니다!!
제목이 멋져서 1편까지 찾아왔는데 ㅋㅋ 실망시키시지 않는 군요- 묘사나 단어나 정말 신선하고 분위기 있네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