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3667
11월7일[연중 제31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ceVyiAuU448
[서울대교구 이경록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길음동 본당 보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 교회의 서비스는 어떠합니까?>
동네 칠순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초대받은 우리 식구들 숫자만 해도 10명 남짓입니다. 모든 잔치 비용을 아들딸들이 분담했을 텐데, 시골이라도 잔치 음식의 수준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인당 삼사 만원은 족히 될 텐데,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어떻게 그냥 맨입으로만 가겠습니까? 작은 선물도 하나 챙기고, 적은 금액이라 할지라도 봉투도 챙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잔치 중의 잔치, 천상 잔치는 전혀 선물이나 봉투가 필요 없는 무상의 잔치입니다. 그리고 그 잔치는 세상 모든 사람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VIP로 모시는 특별한 잔치입니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늘나라 잔칫상 초대 비유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과분하게도 영원한 생명과 천상에서 누릴 충만한 기쁨의 축제가 죄인들을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려 있다는 것, 얼마나 감지덕지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늘나라 잔치 초대를 통해 구원의 보편성을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선포하셨는데, 안타깝게도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다고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은혜로운 잔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불참의 이유를 드는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을 부려 보기 위해서! 남아도는 게 시간 뿐인데, 겨릿소 다섯 쌍, 내일 부려봐도 아무 문제 없는데, 그 작은 이유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은총을 자신의 발로 멀리 차 버렸습니다.
방금 장가를 들었다고! 지상에서의 혼인은 잠시지만, 천상에서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이루어지는 혼인은 영원한 혼인인데...
요즘 어머니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가수의 미담이 세간에 희자되고 있습니다. 그 가수의 공연 티켓을 사주는 자녀들은 요즘 가장 효심이 지극한 사람들로 인정받는답니다.
그 가수께서 어르신들로부터 사랑받는 이유가 있더군요. 공연의 질도 질이지만, 그렇게 서비스가 좋답니다. 장시간 진행되는 콘서트 시간, 자리가 불편할까봐, 좌석 하나 하나에 방석을 깔아놓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선물로 준답니다.
방향 감각이 둔감해진 어르신들을 위해 지하철역부터 시작해서 공연장,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자원봉사 스텝들이 그렇게 친절히 안내를 한답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자녀들을 위한 쉼터까지 마련해놓는답니다. 공연 내내 빼어난 노래 실력에 어르신들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거듭 건넨답니다.
그 시간만큼은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시간이랍니다. 공연이 끝난 후 많은 어르신들이 그러신답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는 교우들과 지역 주민들을 위해 어떤 서비스를 베풀고 있습니까? 그 서비스의 질은 어떻습니까? 만족도는 어떠합니까?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체성사를 통해 사람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습니까?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음이 없으면 방법이 없다>
제가 아는 김 베드로란 선교사님은 세례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일미사를 한 번도 빠져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세례 때 예수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당신은 가지라는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어떠한 열매도 맺을 수 없으니 적어도 주일미사는 거르지 말아야한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빠지지 않는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그분은 여행사 사장님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지내는 날이 더 많으신 분입니다. 성지순례를 위한 여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매번 주일마다 빠져나와서 성당을 찾아 미사를 해야 하는 것은 이만저만한 노고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러시아에 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가톨릭교회를 찾는다는 것은 모래 속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차로 4시간 이상 되는 도시로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여행 온 분들 중에 냉담하던 한 자매도 함께 동반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말을 하지 못하기에 무조건 묵주에 달린 십자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10번 정도 묻고 나니 가톨릭교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냉담하던 자매를 말도 안 통하는데 무작정 고해성사를 보게 하였습니다. 불가능은 없었습니다. 그 자매는 여행 내내 눈물을 흘리며 큰 회개의 은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여행한다고, 바쁘다고 주일미사에 빠지는 것은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또 선교할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그분은 술도 안 드시지만 술자리가 있으면 술집 사장님도 불러서 성당 다니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렇게 실제로 술집 사장님이 세례를 받고 술장사를 접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들 앞에서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마음만 있다면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잘 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성당과 미사시간을 찾아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 때 주일미사를 빠졌다는 고해를 너무 자주 듣습니다.
미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혼인잔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혼인잔치 식탁에 앉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유태인들입니다.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주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하느님은 아드님의 혼인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고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미사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결혼했는데 집에 들어오는 것을 두 번째로 여기고 여기저기서 자고 다닌다면 집에서 기다리는 배우자의 마음이 어떨까요?
이 세상에서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마음이 없다면 저 세상의 혼인잔치에도 참여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 자리를 다른 사람들로 채울 것입니다.
미사의 중요성에 대한 마음을 가집시다. 마음이 없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은 마음만 있다면 주님께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미사에 참여할 방법을 마련해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동양의 고전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한 것이 첫 번째 기쁨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더불어 세상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두 번째 기쁨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기쁨이다.” 여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하는 첫 번째 기쁨은 무병장수하는 것이 첫 번째일 것입니다. 성공하여 재물을 풍족하게 쓰는 것이 두 번째일 것입니다. 권력과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대접받고 사는 것이 세 번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들을 원하기에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할 때 이 세 가지를 사용하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다른 차원에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곡신불사(谷神不死), 상선약수(上善若水), 천장지구(天長地久)’를 이야기합니다. 계곡은 비어 있기 때문에 신령하고, 물은 아래로 흘러서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데에 거처하므로 땅과 곡식을 풍성하게 한다. 하늘은 높아도 모든 사람을 감싸고, 땅은 죽은 쓰레기를 다 받아들여 생명으로 바꾼다. 그래서 텅 빈 산의 계곡과 거기서 흘러내린 물,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늘과 땅에게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헌신과 겸손이 기쁨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사제삼락(司祭三樂)’이 있다면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사제는 예수님을 따르기고 약속하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제의 기쁨의 원천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겸손과 헌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의 거만한 헌금보다 과부의 겸손한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바리사이의 거만한 기도보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와 사제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위해서 헌신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겸손과 헌신이어야 합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마귀 들린 사람은 치유하고, 병자들은 고쳐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오직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에 익숙한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겸손과 헌신을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15-24: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큰 잔치에 비유하신다. 여기서 하늘의 음식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사랑으로 표현되고, 증거된다. 그 사랑은 실제로 하늘 음식이며 말씀이 베푸시는 잔칫상이다. 사랑은 모든 맛 좋은 양념과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한결같이 내려오고 있다. 모든 법과 말씀이 사랑에 달려있다.(마태 22,40)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마르 12,30-31) 하늘에 마련된 잔칫상을 받을 것이다. 이 거룩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이들의 기쁨과 평화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먹으면 몸 밖으로 나오고 마는 그런 음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음식이다. 누가 여기 앉을 수 있을까?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15절) 그 사람은 누구일까?
잔치를 차리고 우리를 초대하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르러 간 사람은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다. 아드님은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17절) 하고 손님들을 부르신다. 이 잔치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선물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셨고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어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18절) 그들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때문에 핑계를 댔다. 사람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일은 보지 못하고 있다. 집주인은 건방진 부자들에게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돌아선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이 초대를 가볍게 여겨 거절하였고, 그 초대는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서 갔고, 이어서 다른 민족들이 초대를 받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어떤가?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오감으로 온전히 파악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여 주십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잔치를 벌이기 한참 전에 미리 손님들에게 초대되었음을 알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잔치가 다 준비되면 주인이 다시 종을 보내, 초대받은 이들을 찾아가 직접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미리 잔치에 초대받았으면서도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첫째 부류는 구약 성경이 증언하듯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았기에 그들 스스로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이어서 주인은 종들에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고 이릅니다. 그 결과 잔칫집은 뒤늦게 초대된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이 참으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구원의 길임을 가리키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대는 선물처럼 거저 주어지며 보편된 구원을 실현합니다. 그럼에도 초대받은 이는 초대에 합당한 최소한의 준비를 하고 품격에 맞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에서 거행될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저마다 일상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혼인 잔치의 비유>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루카 14,16ㄴ-21ㄱ)
여기서 “초대받았지만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이 비유에서,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이스라엘 민족으로,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해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초대의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했는가? 거부했는가?”, 즉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했는가? 참석하지 않았는가?(구원을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그것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이고, ‘큰 잔치’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이고, ‘많은 사람’은, 뜻으로는 ‘모든 사람’입니다. ‘초대’는 구원과 생명을 받으라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잔치 시간’은 ‘종말의 날’입니다. 밭 때문에, 겨릿소 때문에, 방금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말은, 가기 싫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날이 닥친다면, 밭을 보러 갈 시간도, 겨릿소를 부려 볼 시간도 없을 것이고, 방금 장가를 들었다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 되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그날이 되면 무엇인가를 할 시간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느냐? 죽느냐?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절박한 순간에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 ‘헛된 일’에 정신을 팔고, 그 일만 걱정하고 신경 쓰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기서 양해해 달라는 말은 미안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고, 당연히 양해해 줄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하는 말인데, 실제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누가 감히 “지금 다른 일로 바쁘니까 종말과 심판을 며칠만 미루어 주십시오. 회개와 신앙생활은 지금 하는 일을 모두 마친 다음에 하겠습니다.”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지금 당장 모든 일을 중단하고 종말 준비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생업이든지 학업이든지 무슨 창작 활동이든지 간에, 선한 일이라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종말을 기다리는 올바른 자세입니다.(2테살 3,11-12)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4,21ㄴ-24)
여기서 ‘노하여’는 뜻으로는 ‘안타까워하면서’입니다. “고을의 한길과 골목”은 ‘모든 곳’이라는 뜻이고,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해서 어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로 복음이 넘어간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복음 선포에 응답하면 구원받는 것이고, 응답하기를 거부하면 구원을 못 받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을, 또는 유대인들을 너무 깎아내리기만 하는 것은 불공정한 일입니다. 성모님과 열두 사도와 초대 교회 신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복음 선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민족들에게로 확산되었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구원’도 유대인들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류 전체가 들어갈 수 있는 ‘넉넉한 나라’입니다. 자리가 모자라서 정원 제한을 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입니다.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는 “한 사람도 빼놓지 말고 불러라.”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가득 채우는 것이 복음 선포의 목적이 아니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고, 차별당하는 사람도 없고,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24절의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은, 뜻으로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는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억지로 구원하는 일은 없다.”입니다.
=====================
[성 베네딕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부르심과 응답>
하느님의 부르심은 아무런 조건이 없이 부르시고 응답자도 조건 없이 응해야 합니다. 다음 날 주님은 “준비가 다 되었으니.” 하시며 불림 받은 이에게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응답에 조건을 붙이고 거절하는 사람은 결국 준비된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가진 것에 매여 귀한 부르심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현세적 의미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시대적 사명을 잃고 자기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예수님 시대에도 장애인, 소외된 사람, 죄를 짓고 뉘우치는 사람, 현세적 삶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천대받는 이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 이사야서 44, 13)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이사야서 66, 2)
가난한 사람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자신만으로 허무한 것을 깊이 인식하며 사는 사람은 쉽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초대하는 곳은 궁궐이 아니고 높은 사람, 힘이 있는 사람, 많이 가진 사람,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 힘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 궁핍한 사람들이 현존하는 자리입니다. 이 길을 가려는 사람은 내적으로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며, 사회적으로는 혁명적 사명을 가진 사람이며, 종교적으로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하여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고,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정의를 위하여 싸우는 사람은 자유를 찾아주고, 분배를 공평하게 하는 사람은 평화를 가져다주고, 친교를 위하여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모든 이를 기쁨으로 살게 하며,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게 하며, 행복한 삶을 살게 합니다.
"나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볼 수 있게 하소서."( 마르코 10, 46-52) 하는 것같이 우리의 의식을 변화시켜 들을 것을 듣고 볼 것을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예수님 당대 유다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큰 잔치를 치를 때는 미리 초대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참석 여부를 밝히지요. 그러다 잔칫날이 가까워지면 손님들을 다시 초청합니다. 예를 갖추는 것이지요. 따라서 처음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막상 잔치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알리면 주인에게는 큰 모욕이었습니다.
오늘 잔치에 초대받고도 막상 잔치에 오지 않은 이들은 유다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으로 이미 간택되었으면서도,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초대를 거절한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 잔치에 이미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 잔치에 참석하여 기쁨을 나누느냐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보면,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둘러댄 핑계는 다양합니다. 밭을 샀기에, 소를 샀기에, 방금 장가를 들었기에 갈 수가 없다는 핑계입니다.
밭은 소유물을 뜻합니다. 소는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한 기술이나 직장을 뜻하지요. 장가를 든다는 것은 가정 중심의 생활을 뜻합니다. 물론 이 세 가지 모두,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이 세 가지가 중요하더라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보다 결코 앞설 수 없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잔치에 참여하여 기쁨을 나누는 것을 우리 삶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하겠습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식탁에 많은 이들을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종을 보내시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잔치에 참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에 매여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였습니다. 진노하신 하느님께서는 종에게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데려오라 명하십니다.
그런데 그들만으로 자리가 다 차지 않자, 하느님께서는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당신의 잔치에 사람이 가득 차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바로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할 것 없이 당신의 초대에 응하는 이들은 모두 데려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잔칫상에 참여하는 조건은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일 필요도, 유다인일 필요도 없습니다. 부자일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지 않는 이는 잔치 음식을 먹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유다인들이 구원에서 제외시켰던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의 생각과 달리 그들은 이미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자신들이 져야 할 십자가를 충분히 지고 살았던 이들이기 때문입니다.(필리피서 2장 6절-8절 참조)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여 잔칫상에 모인 이들이 갖추어야 할 태도를 잘 알려 줍니다.
하느님 잔칫상에 모이는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 뜻을 같이하고 서로서로 지체로 살아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잘 사용하여 주님을 섬기고, 오만한 생각을 버리며 비천한 이들과 어울려야 합니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며, 형제애로 서로 아끼고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 속에서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런 이들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그분 잔칫상의 음식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살아가면서 닥치는 일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누구의 초대를 받았는데 사정이 생기면 양해를 구하고 정중히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밭을 샀으면 밭에 나가볼 수 있고 겨릿소를 샀다면 그 소를 잘 샀는지 부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방금, 결혼했다면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가야 할 잔칫집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집입니다. 그 잔치에 초대받은 것이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핑계가 필요합니까? 더 좋은 것, 지금까지 갈망하던 하느님 나라가 눈앞에 주어졌는데 왜 망설여야 합니까? 결국 지금까지 기다리고 희망하던 것은 헛된 환상이었습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 것이 좋은데 그것을 어떻게 놓고 가라 하십니까?
그러나 “나 없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도 나 없이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십니다.”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결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저러한 핑계를 갖는 한 구원의 잔치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우선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면 나머지는 다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운 정 때문에 인간적인 것을 택하면 더 큰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루카 14,24) 결국 처음 초대 받았던 사람들은 재산과 사업상의 관계, 결혼이라는 핑계거리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에서 멀어졌습니다. 이 순간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힌 사람은 적습니다.
하느님 나라보다 물질이 앞설 수 없고, 돈이 정신보다 우위일 수 없으며 시간이 영원보다 값질 수 없습니다. 일이 중요하지만 일의 노예가 되어 영혼의 자유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도 영생을 향한 일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의 결합을 통해 가정을 형성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능적인 행위로 영혼 사정을 돌볼 겨를 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뿌려진 씨앗의 비유(마태13,1-9)를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씨앗이 어떤 것은 길바닥에, 어떤 것은 돌밭에, 그리고 가시덤불에,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은 것은 당연히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밭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무관심한 사람이지요, 그리고 돌밭은 흙이 얼마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시련이나 어려움이 오면 금방 신앙이 죽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처럼 핑계를 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하느님 앞에 단호한 결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의 안녕을 열망하며 그것을 너무 많이 고려하다가 그만 중요한 것, 천상의 선물을 놓치고 맙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돌다리를 두드려 보다가 오히려 돌을 깨뜨리고 만다고.’지금 자신 있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우선 부름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뽑힌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키울 곳을 찾아서 세 번이나 이사했다는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공동묘지 근처로 이사하지요. 그러자 상엿소리와 곡소리를 흉내 내는 것입니다.
다음은 시장 근처로 집을 옮깁니다. 그러자 상인들이 호객하고 흥정하는 흉내를 냈습니다. 이번에는 서당 근처로 집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글 읽는 흉내를 냈습니다. 이곳이야말로 배움에 적합한 곳으로 판단해서 이곳에 정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 군데 모두가 맹자를 위한 환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처음의 공동묘지 근처에 살면서 삶과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었고, 이로써 삶을 진지하고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장소인 시장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바쁘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평범한 삶의 치열함과 백성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두 곳이 맹자의 교육에 나쁜 영향만을 주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사상가 맹자를 만드는 훌륭한 환경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곧바로 서당 옆으로 이사 갔다면, 아마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또 인생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내 자리는 언제나 중요했습니다. 나쁜 환경이라면서 불평불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지금 내 자리는 최고의 환경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 이야기해 주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손님을 초대하여 모아 놓고 베푸는 잔치와 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초대는 시대와 장소를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초대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일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밭에 가려고, 겨릿소를 부려 보려고, 장가를 들어서’라는 이유로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은 초대보다 자기 일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느라 바쁜데 초대한다고 불평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그분의 초대에 곧바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언제나 주님의 부르심에 주의를 기울이며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최고의 선물을 가지고서 부르십니다. 따라서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께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로 그렇게>
루카 14,15-24 (혼인 잔치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로 그렇게>
나를
믿는 이의
믿음대로 그렇게
나를
바라는 이의
바람대로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이의
사랑대로 그렇게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은총과 은사>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은총과 은사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런데 은총과 은사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부끄럽게도 옛날에 은총론이란 것을 배웠는데도
이 은총과 은사의 차이점에 대해 알지 못하겠고
그래서 오늘은 오늘 말씀의 맥락에서 그 차이점을 한번 보고자 합니다.
은총이란 아시다시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공로나 노력과 상관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고 그래서 사랑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은 내게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은사는 이웃사랑을 위해 내게 주신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고 있고,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라고 베드로 사도 또한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 지체가 되고, 우리의 은사는 서로를 위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자기를 위해 쓰라고만 주시지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저 주신 것은, 우리 또한 거저 주라고 주신 것이고 그것이 제 생각에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은사를 공동체를 위해 쓰지 않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은사는 죽은 은사가 될 것이고, 은총도 내 안에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은총이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면 사랑을 위해 쓰이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 은총이 아닌 것은 당연하고 그 은사도 똥과 같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상에서 천국天國의 삶>
-주님의 초대는 선물이자 과제이다-
"너희는 길이길이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바위이시다."(이사 26,4)
그동안 몇 차례의 피정지도 강의때 서두에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 피정이든 맨먼저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매일미사에 참석한 분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내용들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 역시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참 오늘 기막힌 선택을 잘 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새삼 이런 선택 역시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좋은 선택은 결단이자 동시에 은총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가장 아름다운 곳,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나러 오신 가장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한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함으로 참 좋은 선택을 하신 여러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의 큰 잔치 비유에서 보면 세 사람의 경우 바쁘다는 핑계로 주인의 초대에 모두 불응함으로 참 좋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주님으로 바꿔 이해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초대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응답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참으로 이들이 지혜로웠다면 만사 제쳐놓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주인의 초대의 선물에 응했을 것입니다.
초대를 거절하자 주인은 종에게 이릅니다. 그대로 예수님의 심정을, 하느님의 심정을 반영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열린 구원의 기회요 초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 교회에 주어진 선교 사명을 상징합니다.
“어서 가서 가난한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자리가 차지 않자 주인은 거듭 종에게 분부합니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 복음의 큰 잔치 비유는 오늘의 우리를 향합니다. 이 공동의 집인 지구에 태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로 태어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의 선물인지요! 절망이나 자살이 얼마나 하느님을 슬프게 하는 큰 죄인지 깨답게 됩니다. 지상에서의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귀한 존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교회의 세례성사요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함으로 참으로 지상에서의 천국 삶을 선택하여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주님께 초대 받은 선물 인생임을 까맣게 모르고, 참으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바쁘게 무지의 삶을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기도 할 것입니다.
삶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 사는가?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초대 받은 선물 인생,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지상에서 천국 삶을 살아보라고,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아보라고 주님께 초대 받은 인생임을 알아야 합니다. 한두번 초대가 아니라 날마다 우리를 초대하시는 주님이시고 날마다 초대에 응답해야 합니다.
바로 날마다 주님의 미사잔치의 초대에 응답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미사잔치가 우리 모두는 우연적 존재가 아닌 초대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초대에 선택으로 응답했다 하여 저절로 구원이 아닙니다. 날마다 죽을 때까지 초대에 응답하는 삶이어야 하고 초대받은 사람답게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의 초대에 감사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으로 응답하지 않고, 초대받은 신분임을 까맣게 잊고 세상 일에 빠져 살다 보면 구원은 요원할 것이며 이는 바로 그 당사자의 책임일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받은 신분임을 잊은 냉담한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세상에서 할 일 다하고, 먹을 것 다 먹고, 놀 것 다 놀고, 만날 것 다 만나고, 볼 것 다 보고 하며 세상 일에 중독되어 바쁘게 살다 보면 주님의 초대에 응답은 끝내 이뤄지지 못할 것이며 급기야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만사 제쳐 놓고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삶의 중심과 질서도 잡히고 비로소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니 초대에 응답 하는 자체가 바로 회개의 결정적 기회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초대에 선택으로 응답했다 하여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초대는 선물이자 동시에 과제입니다. 평생 날마다 하루하루가 초대요 과제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초대받은 사람답게 책임을 다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결코 값싼 은총도, 값싼 구원도, 값싼 평화도 없듯이 결코 값싼 초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제를 실천합니까? 고맙게도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통해 초대받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알려 줍니다. 사도 바오로의 자신의 체험적 삶에 대한 적나라한 나눔같습니다. 사도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가열찼는지 감동하게 됩니다. 다음 과제 내용에 여러분 삶을 비춰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2장 내용 거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을 위한 규범들입니다.
1.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2.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3.형제애로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4.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5.희망속에 기뻐하고 환난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6.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7.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해 주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8.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9.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10.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11.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12.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13.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14.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15.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무려 15개 항목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삶이 얼마나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은 일치의 겸손한 삶이었는지 그대로 감지되는, 또 예나 이제나 얼마나 힘든 공동생활인지 깨닫게 하는 구체적 생활지침들입니다. 결코 혼자가 아닌 모두가 더불어 아가페 공동체 삶을 위한 치열한 영성훈련의 내용들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초대받은 사람다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겠습니다. 결코 값싼 초대가 아니라, 분투의 노력으로 응답해야 하는 초대받은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초대받은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시편 67,2)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차게 하여라."(루카14,23)
<하느님의 사랑!>
오늘 복음(루카14,15-24)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당신의 크신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잔치에 참석할 수 없다는 양해를 구합니다.
그러자 잔치를 준비한 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이릅니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그래도 자리가 남자 주인은 종에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차게 하여라." 라고 이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려는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지난 토요일 독서인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로마11,28)
오늘 복음과 로마서의 말씀 안에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때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의 과정으로써 고통도 주시고 아픔도 주시고 불순종의 자유 의지도 주십니다. 하지만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났듯이, 하느님 사랑의 본질은 우리의 구원, 우리의 부활입니다.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7DNr1yRYeKI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루카 14, 23)
우리의 마음을
가득 차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뿐입니다.
들어가야 할 때와
돌아갈 때를
하느님
사랑이 때와
방향이 되어
알려주십니다.
움켜쥔 우리의
아쉬움과
미련까지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어드리는 때가
구원의 때입니다.
사랑은
지켜야 할
약속에
충실합니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소중하게
만듭니다.
사랑만이
닿을 수 있는
충만하신 사랑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사랑해야 할
날들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랑이
존재하는 지를
알게 됩니다.
모두
하느님의 집에서
나온 하느님의
사람들이기에
하느님께로
돌아갑니다.
사랑의 완성은
사랑의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사랑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 여정을
지나고서야
알게 되는
하느님의
여전한
사랑이며
가득찬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삶도 죽음도
시작도 마침도
가득찬 여정이
됩니다.
여정의 끝에는
기다림과
기도로
우리를 안아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소중한 분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집에는
구원으로
가득한 행복
가득찬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을
하느님 사랑 앞에
기꺼이 내어드리는
사랑의 순간들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향하는 오늘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