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번역 성경… 언더우드가 들고 한국 찾아
만주 뉴좡(牛莊)에서 한글성경이 번역되고 있을 때 일본서는 이수정에 의해서 성경번역이 시도되었다. 그의 가계나 이력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있어 이견이 없지 않으나 지금의 외교통상부에 해당하는 통리외무아문의 협판(協辦)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수정(李樹廷·1842∼1877)은 임오군란 당시 민비를 보호해준 공로에 대한 고종 황제의 배려로,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비공식 수행원 신분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다.
그는 1882년 9월 28일 도쿄에 도착했다. 그는 곧장 친구인 안종수(安宗洙)의 소개로 농정 권위자였던 쓰다 센(津田仙·1837∼1908)을 찾아갔고 그를 통해 농학은 물론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 간 지 3개월 후인 12월 25일부터 쓰다의 안내로 야스카와(安川亭) 목사가 담임하고 있던 쓰키지(築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신앙은 급속하게 성장하여 1883년 4월 29일 주일에는 도쿄의 로개주초(露月町) 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일본에서 세례 받은 첫 한국인이 되었다.
세례 받은 후 약 두 주가 지난 5월 12일에는 도쿄에서 열린 제3회 전일본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해 한문으로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의 삶의 변화된 행로를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신앙의 길을 갔고, 1883년 말 7∼8명의 한국인 수세자를 얻음으로써 일본에서 최초의 한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또 그는 녹스 선교사 등의 도움을 받으며 성경 연구에 진력하였다.
특히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헨리 루미스 목사의 요청과 야스카와 목사의 도움으로 한문성경을 대본으로 마가전(馬可傳·1884년)부터 마태전(馬太傳) 누가전(路加傳) 요한전(約翰傳) 그리고 사도행전(使徒行傳) 등을 번역하였다. 이렇게 번역한 성경이 ‘현토 한한 신약성서(縣吐 漢韓 新約聖書)’였다. 1887년 요코하마의 ‘대영 및 외국성서공회’를 통해 출간된 이 번역본은 신약성경 전서가 아니라 복음서와 사도행전만으로 엮어진 성경이었다. 완전한 번역본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한문에 토를 단 성경이었다. 한문에 익숙한 조선인들이 쉽게 읽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수정은 진정한 의미의 번역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가 번역한 첫 책은 마가복음인데, 부피가 작고 내용이 간결했기 때문에 이 책부터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 번역본은 1885년 2월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땵’라는 이름으로 요코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를 통해 간행되었다. 초판은 1000부를 인쇄하였는데, 그해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입국할 때 가지고 온 성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수정은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을 주 대본으로 하되, 일본어, 영어,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대조하면서 번역하였다고 한다. 이 번역본에서는 만주에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와는 달리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하였고 고유명사 표기가 원어에 가깝고 한문투의 용어가 많다. 그는 하나님 칭호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두고 고심했다. 한문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상제(上帝)’로, 일본어 성경에서는 ‘가미(神)’로 번역된 것과 달리 그는 하나님을 ‘천주(天主)’로 번역하였다. ‘천주’는 천주교도들에 의해 이미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세례는 ‘밥테슈마’로, 그리스도는 ‘크리슈도스’로 각각 음역하여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이 번역본은 가능한 순 한글역을 지향하되 지식인들의 편리를 위해 중요한 단어는 한자로 표기하고 한글로 토를 달았다. 이렇게 번역된 마가복음서를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땵’라고 한 것은 유교와 불교 계통 서적의 한글역을 ‘언땵’라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수정 역의 마가복음은 1882년 만주에서 간행된 누가복음 번역본에 이어 한글로 번역, 간행된 두 번째 한글성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수정은 계속하여 마태, 누가복음서도 완역했으나 빛을 보지는 못했다. 이수정의 1885년판 마가복음 번역본은 1887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리고 한국인 송덕조 등의 공역으로 개정되어 요코하마에서 재출간되었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성경번역 외에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이미 미국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또 한국은 개항한 이후였으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는 더 이상 지체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1883년과 1884년에 녹스 목사의 이름으로 ‘조선의 사정(Condition of Korea)’이라는 서한 형식의 글을 ‘세계선교평론(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발표하였다. 이 글이 흔히 ‘그리스도의 종 리주테(A Servant of Christ Rijutei)’의 호소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수정은 이 글에서 “혹시 미국의 선교단체가 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전도자를 보내시겠지만 미국의 선교사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면서 한국 선교를 간절하게 호소하기도 했다. 이 글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내한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그가 1886년 귀국하여 국내에서는 활동하지 못했으나 한국 복음화를 위한 예비적 사명을 감당했다는 점에서 그의 입신과 수세, 그리고 성경번역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점에서 선교사들은 그를 ‘한국의 마게도냐인(A Macedonian from Corea)’이라고 불렀다.
첫댓글 힘들었던 시대였을텐데 ~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하면서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했던 그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