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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충효재(기념물81호(89.5.29). 소재지 :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번지)
구한말 산남의진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국한 정환직(鄭紈直)(1844~1907)선생과 정용기(鄭鏞基)(1862~1905)선생 부자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검단(檢丹)동을 충효(忠孝)동으로 고쳐 1923년 건립하였다.
정환직 선생의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엄(東厂),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1844년 충효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처음 태의원전의(太醫院典醫)를 거쳐 고종24년(1887)북부도사(北部都事)가 되고 이듬해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使)가 되었다. 1899년 시찰사(視察使)· 토포사(討捕使)를 역임하였고, 그 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정용기선생은 혜민원(惠民院)총무를 거쳐 민영환과 더불어 독립회와 만민회에 참여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앞장서서 회장직을 역임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밀령을 받은 정환직선생은 정용기와 함께 영남지방에서 산남의진을 창군 흥해, 청하, 영해, 의흥, 청송, 영덕, 신녕 등지에서 왜구와 격전, 혁혁한 공을 세우고 부자가 연이어 순국하였다. 이 유적은 1987년 보수 정화하였다.
정환직(鄭煥直) :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수차에 걸쳐 전공을 세운 뒤, 적의 대부대를 만나 동대산(東大山)에서 체포, 영천에서 총살당했다.
정용기(鄭鏞基) : 을사조약(乙巳條約) 때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의 命을 받아 의병(義兵)을 일으켜 산남진대장(山南陣大將)이 되었고 영천(永川)을 중심으로 크게 기세(氣勢)를 떨쳤으나 뒤에 전투(戰鬪) 중 체포되어 총살(銃殺)당했다. 부자(父子)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을 추모하여 방명(坊名)을 충효동(忠孝洞)이라 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출처:영천시청)
산남의진 정대장 양세출신 충효동사적비
산남은 문경새재 즉, 조령 이남의 영남지방을 이르고, 의진은 오직 구국일념의 충성된 의기로 뜨겁게 뭉쳐진 의병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
호국문 현판
‘짐망화천지수전세비(朕望華泉之水傳世碑)’가 세워져 있다.
삼남도시찰사와 중추원의관 등을 지낸 정환직(鄭煥直∙1843~1907)은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 당시 고종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라는 밀지를 받게 받게 됐다. 화천지수란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화천지수(華泉之水) : 춘추전국 시대에 제(齊)나라 환공이 여러 제후국의 집중공격을 받아서 체포될 경지에 이르렀을 때 차우장(車右將) 봉추부(逢丑父)가 경공의 수레에 올라가서 환공과 옷을 바꾸어 입고 환공을 돌아보면서 “내가 목이 마르니 화천(華泉)의 맑은 물을 떠 오라”고 명령하였다. 환공이 심부름 가는 것처럼 빠져나와 도피하게 되었고 봉추부(逢丑父)가 대신 붙잡히게 되었다는 고사(故事).
산남의진 추모비
을사조약 :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으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일본의 보호국이나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약(條約) : 국가 간의 권리와 의무를 국가 간의 합의에 따라 법적 구속을 받도록 규정하는 행위. 또는 그런 조문. 협약, 협정, 규약, 선언, 각서, 통첩, 의정서 따위가 있습니다
늑약(勒約) : 억지로 맺은 조약이며, 을사년에 맺어졌던 것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억지로 맺어진 것 이기에 [을사조약]보다는 [을사늑약]이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겁니다. 이 조약은 1905년(광무 9)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 강압에 의한 것으로 원천적으로 "무효"이며, 이 조약이 무효임은 1965년 한 일 기본조약에서 한 일 양국이 다시 한번 확인했던 사실입니다
勒 :굴레 늑
을사늑약 국권침탈 온나라가 분노할제
고종황제 밀지받아 동영부자 창의하니
산남의진 깃발아래 구름처럼 모인의병
국권회복 앞장서신 다섯분의 애국지사
동에번쩍 서에번쩍 적의간담 서늘하니
구국향한 혁혁한공 그뉘라서 잊을소냐
광복조국 나라에선 공적기려 포숭하고
후손들은 정성모아 옥돌가려 비세우니
천년만세 영원토록 남긴뜻을 가리리라
조양공원(조양각) 경내에 있는 대장정공양세순국기념 산남의진비
정환직(鄭紈直)(1844~1907)선생과 정용기(鄭鏞基)(1862~1905)선생 부자의 묘소
정환직(鄭紈直)(1844~1907)선생 묘소
묘의 호석
묘의 호석
묘의 호석
정용기(鄭鏞基)(1862~1905)선생 묘소
묘의 호석
묘의 호석
정환직
정환직 鄭煥直, 1844.05.19~1907.11.16.
경상북도 영천, 대통령장 1963
2007년 8월의 독립운동가 선정동엄(東广)의 출생과 관직 생활
1) 가계와 성장
정환직(鄭煥直, 1843~1907)은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 검단리(慶尙北道 永川郡 紫陽面 檢丹里)에서 아버지 정유원(鄭裕玩)과 어머니 순천 이씨(順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초명은 치우(致右), 자는 좌겸(左兼), 호를 우석(愚石)이라 하였으나, 1900년 고종이 하사한 이름과 자호(字號)로 개명하여 이름을 환직(煥直), 자를 백온(伯溫), 호를 동엄(東广)이라 하였다.
정환직의 영일 정씨 가문은 고려 중기 예종(睿宗)·인종(仁宗)·의종(毅宗) 3대의 임금을 섬긴 직신(直臣)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의 후예이다. 정환직은 정습명의 25세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하여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며, 성균관 생원 정하호(鄭夏濩)의 증손이다.
정환직은 성품이 강직하고 영민하여 12세인 1855년 향시(鄕試)에서 장원(壯元)을 하는 등 학문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가세가 넉넉지 못하여 의술을 연마하며 각처를 주유(周遊)하던 중, 44세인 1887년(고종 24) 형조판서 정낙용(鄭洛鎔)의 추천으로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가 되었다. 당시 정환직은 서울에서 의술로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같은 영일 정씨인 정낙용의 추천을 받았던 것이다. 정환직이 출사하기까지 가세가 빈한(貧寒)했던 가족들은 영천·금릉·영천·죽장 등지를 전거(轉居)하다가 자양면 검단리로 돌아왔다.
정환직이 출사하기 전까지 각처를 전전하며 남긴 시 94수는 대부분 명승고적을 돌아보며 지은 것인데, 그 중 〈회향시(懷鄕詩)〉는 서울에서 고향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시국을 한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논설 〈무우성기(無憂城記)〉에서 돈의 폐단을 지적하였고, 〈출교외문야인(出郊外聞野人)〉에서는 매관매직과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며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5) 따라서 이 기간 중 정환직은 당면한 시국을 탄식하며 정치를 강론하는 등 경세제민(經世濟民)에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관직 생활
정환직은 1887년(고종 24) 12월경부터 형조판서 정낙용의 천거로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정환직은 서울에서 의술로 명성을 얻고 있었고, 정낙용과 같은 영일 정씨였기 때문에 추천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1888년(고종 25) 정환직은 충무위사용행의금부도사 겸 중추원의관(忠武衛司勇行義禁府都事兼中樞院議官)으로 벼슬이 올랐다. 1894년 2월 동학농민이 봉기하자 삼남지방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으로 파견되어 토벌작전에 참여하였고, 곧이어 5월 청·일 양군이 출병하여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완전사(翫戰使)로 당시 군무대신 조희연(趙羲淵)과 동행하여 청·일 양군의 전투를 직접 관전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조선정책을 강화하고 내각재편과 내정개혁을 급격히 진행하였다.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이후 종래의 '척양척왜(斥洋斥倭)'에서 '항일구국(抗日救國)'을 표방하고 전국적으로 재기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황해도 일대의 동학농민군 토벌에 일본군이 개입하여 토벌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정환직은 〈일병의뢰반대상소(日兵依賴反對上疏)〉를 올려 일본군에 의뢰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10월 선유사겸토포사(宣諭使兼討捕使)로 황해도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때 정환직은 〈초유문(招諭文)〉을 발포하여 농민군을 효유하였고, 나아가 구월산 일대의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1895년 정월 정환직은 태의원(太醫院) 시종관(侍從官, 典醫)이 되었고, 동년 8월 시찰사겸토포사(視察使兼討捕使)로 삼남지방을 순시하던 중 진주(晉州)에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소식을 듣고 귀경하여 벼슬에서 물러난 뒤 2년 동안 서강(西江)의 사저에서 은거하였다.
1896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고 아관파천으로 전 국민의 반일감정은 한층 격앙되었다. 이에 정환직은 의병에 관한 〈여신대장방략론(與申大將方略論)〉과 아관파천에 대한 대응책으로 〈기정부의석(寄政府議席)〉을 올려 그 대책을 세우도록 촉구하였다.
1897년 8월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 정환직은 동년 10월 태의원별입시(太醫院別入侍)로 고종의 시종관(侍從官)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1898년 〈토역상소(討逆上疏〉를 올려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망명한 역신들을 소환 처벌하고 국모시해를 응징하도록 촉구하였다.
1899년 11월 활빈당과 화적이 전국적으로 활동하자 정환직은 삼남검찰겸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에 임명되어 삼남 일대의 민정을 시찰하였다. 이어서 1900년 여름에는 원수부위임(元帥部委任)에 임명된 뒤, 삼남시찰사(三南視察使)를 겸하여 삼남지방을 순시하였다. 곧이어 동년 겨울 삼남도찰사(三南都察使)로 승직하여 순시하던 중 경주부윤(慶州府尹)을 파면하였다. 또 울산과 양산에서는 민원을 야기하였으므로11) 봉세관(捧稅官)에 의해 송환되어 구금되었으나 국왕의 신임으로 석방되었다. 이에 정환직은 사직하였다가 후일 다시 시종신(侍從臣)으로 입직하였다. 1901년 11월 20일 밤 종묘에서 화재가 났을 때 시종신으로 황제와 태자를 피신케 한 공로로 이름과 자호(字號)를 하사받았다.
1902년 정환직은 당시 정치적으로 시급한 문제를 지적하는 십조소(十條疏)를 올렸는데, 명국법(明國法)·교육(敎育)·제용관(除冗官)·거현량(擧賢良)·축간세(逐奸細)·참패역(斬悖逆)·항외국(抗外國)·금유식(禁遊食)·양병(養兵)·금복무(禁卜莁) 등 부국강병과 국권수호를 위한 것이었다. 1904년 정환직은 김옥균·안경수·우범선에 관한 한성신문의 기사를 보고 〈변파황탄설(辨破荒誕說)>을 반포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유생 곽종석 등을 조정에 천거하기도 하였다.
1905년 정환직은 삼남도찰사겸토포사(三南都察使兼討捕使)로 부산·동래·경주를 시찰하던 중 동래에서 보의당(報義堂)을 훼철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였다. 그러나 정환직은 모략을 받아 경주에서 시찰사 강용구(康容九)에게 직권을 박탈당하고 상경하여 평리원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었으나, 곧 무죄 석방되어 복직되었다. 이때 고종은 정환직을 시종원으로 불러 위로하고 “짐(朕)이 화천(華泉)의 물(水)을 취(取)하여 경(卿)과 마시고자 하노라” 하며 무죄 석방하였다. 그 후 정환직은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고종의 부름을 받아 다시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905년 12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고종으로부터 “경(卿)이 화천(華泉)의 물(水)을 아는가. 짐망(朕望)하노라”는 밀조(密詔)를 받고 창의를 결심하였다.
산남의진과 동엄
1) 산남의진의 결성과 동엄
1905는 12월 5일(양 12. 30)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은 정환직은 관직을 사퇴하고 창의를 계획하였다. 우선 장자 정용기(鄭鏞基)에게 거의(擧義)의 뜻을 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용기가 대의를 밝히며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결의함으로써 부자는 함께 창의하기로 하였다.
정환직 부자의 계획은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고 무기를 수집하여 거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환직 부자는 서울진공을 위한 북상계획을 실현한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즉 강원도를 거쳐 서울에서 합류하여 황궁을 옹호하며 배성일전(背城一戰)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정환직 부자가 수립한 서울진공작전은 당시 서울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허위·이강년·여중룡 등이 1906년 5월 5일 구상했던 서울진공작전의 초기 단계이기도 했다.
1906년 1월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영남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영남 일대를 순회하며 동지를 모으고 이한구(李韓久)와 함께 영천·부산 등지를 거쳐 1월말 서울로 돌아왔다. 정환직은 창의를 위한 군자금으로 고종의 하사금 5만 냥과 전 참찬 허위로부터 받은 퇴관 동료들의 모금 2만 냥을 확보하였다.
한편 정환직은 퇴관 동료들과 군략상의 급무를 논의하며, 유산군인(流散軍人)들을 모아 시기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의병 활동에 필요한 무기와 군수품은 외국인을 통해 구입하기로 하였다. 우선 정환직은 청나라 사람 왕심정(王心正)을 통해 양식총 500병(柄)과 기타 군수품을 구입하기로 하고 2월 중순 그를 상해로 보냈다.
산남의진의 결성와 함께 정환직은 서울진공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아들 정용기를 독려하는 한편, 서울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정환직의 순절과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실패 이후 최세윤 대장이 지휘하는 산남의진의 서울진공작전도 지대별 유격전으로 변화하였지만, 산남의진의 서울진공을 위한 북상계획은 창의 초기부터 꾸준히 추진된 작전이었다.
2) 정용기의 투쟁과 동엄
1906년 3월 정용기는 영천(永川)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창의(倡義)하였다. 정용기의 창의는 아버지 정환직의 후원과 협력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자신도 아버지와 같이 당시의 세태를 충분히 인식하고 국권회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정용기(1862. 12. 13~1907. 9 . 1)는 아버지 정환직과 어머니 여강 이씨(驪江李氏)의 장자로서 1862년 12월 13일 검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활달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정의로운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그러나 공부는 가정환경에 따라 15세 미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1876년 15세의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을 따라 김산 봉계로 이거하였다. 당시 봉계에는 먼 친척인 연일 정씨들이 세거하고 있어 정환직 일가는 살 길을 찾아 이거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정환직이 각지를 유람하고 있었기에 정용기는 농사와 공예업에 종사하며 가사를 돌보았다. 그 후 죽장 창리로 이거하면서 경주의 여강 이씨 이능경(李能璟)·능종(能種) 형제·이한구(李韓久)·재종제 정순기(鄭純基) 등과 깊이 사귀게 되었다.
1887년 부 정환직이 태의원(太醫院) 전의(典醫)로 관직에 나아가자 상경하였다. 정용기는 1905년 을사늑약에 즈음하여 대세가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음에 분개하여 존황실(尊皇室)·축간세(逐奸細)·금사술(禁邪術)·보생민(保生民)·금유식(禁遊食)·축잡류(逐雜類) 등의 내용을 의정부에 건유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행위를 탄핵하는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아버지 정환직이 고종의 밀조(密詔)를 받자 함께 영남에서 창의하여 북상하기로 하였다. 1906년 1월 정용기는 영남(嶺南)에서 창의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영천에 이르러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 등과 거의를 결정하고 경고문(警告文) 및 통문(通文)을 각처로 배포하였다. 그리고 영천에 창의소를 차리고 각처에 사람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이한구는 청송으로 들어가 동지를 모으고, 정순기는 영해의 신돌석(申乭石), 이규필은 흥해의 정래의(鄭來儀) 등을 초청하여 사방에서 동지들을 모았다.
1906년 3월 정용기는 대장으로 추대되어 진호(陣號)를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하고, 부서와 조직을 편성하였다. 산남의진은 창의 초기부터 그 목표를 서울진공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진공작전은 창의 초기부터 실시되어 정용기는 각처에 주둔하고 있던 산남의진의 지역부대를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회합하도록 연락한 후, 3월 5일 행진을 시작하여 영천·청송지방을 경유하여 북상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던 정환직도 4월 중순에 모집된 의병 100여 명을 강원도 강릉의 남쪽 금광평(金光坪)으로 보내어 산남의진을 맞이하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용기 대장은 신돌석의병진(申乭石義兵陣)이 영해에서 토벌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돕기 위해 수백 명의 병력으로 영해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1906년 4월 28일 경주 우각(牛角)을 지나다가 경주진위대(慶州鎭衛隊)의 간계로 대장 정용기는 체포되어 대구의 경상감영으로 이송·수감되었다.
대장 정용기는 경주를 떠나 대구로 이송되면서 중군장 이한구로 하여금 산남의진을 이끌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한구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영천·강구·청하 등지를 전전하며 신돌석의진과 연락·활동하다가 1906년 7월 하순 진영을 해산하였고, 정용기는 아버지 정환직의 주선으로 9월 대구경무청에서 석방되었다.
영천으로 돌아온 정용기는 재기를 모색하였다. 이때 서울에서 내려온 정환직은 산남의진의 요인들을 만나 1907년 5월 관동지방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4월 정용기는 산남의진의 진용을 다시 편성하고 재기하였으며, 정환직은 1906년 2월 거의 전부터 추진하던 무기반입을 위해 다시 청나라 사람 왕심정(王心正)을 중국에 보내는 등 무기의 확보에 전력하고 있었다.
1907년 4월 재기한 산남의진이 본격적으로 의병투쟁을 재개한 시기는 7월부터이다. 우선 산남의진은 관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신돌석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동해안 쪽으로 척후병을 파견하면서 북상의 길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해·청하·청송·포항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북상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1907년 8월말 정환직은 산남의진의 관동진출을 기다리던 중 심복 수십 인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갔다. 그리고 동해안으로 내려와 청하를 거쳐 영천에 이르러 아들 정용기를 만나 산남의진의 북상을 재촉하였다. 이와 같이 정환직은 서울진공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아들 정용기를 독려하는 한편, 서울에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정용기는 9월 초순에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 준비를 위해 8월 29일 본진 선발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죽장의 매현(梅峴)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이튿날 일본군이 입암(立巖)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산남의진은 9월 1일 새벽 입암을 공격하기로 하고 매복을 하였다. 그러나 산남의진은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李韓久)·참모장 손영각(孫永珏)·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 수십 명의 장령들이 전사하는 참변을 당하였다.
입암전투(立巖戰鬪)의 참패로 산남의진의 지휘부는 무너지고, 산남의진이 추진하던 서울진공작전은 다시 미루어지게 되었다.
3) 동엄의 투쟁과 순절
입암전투에서 참패한 1907년 9월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각오로 군사를 모집하고 진영을 재편성하였다. 입암전투 참패 이후 산남의진은 진영을 재조직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우선 정환직을 대장으로 추대한 산남의진은 9월 3일부터 9월 12일 사이에 보현산(普賢山) 주위 인근지대에 흩어진 군사를 집결하도록 하고, 여러 장령과 종사들을 각지로 보내 군사를 모으고 적세를 탐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9월 12일 밤 북동대산(北東大山)으로 진을 옮기고, 청하·영덕·청송 등지에서 군량을 모으는 한편, 울산분견대(蔚山分遣隊) 병사 출신의 우재룡(禹在龍)·김성일(金聖一)·김치현(金致鉉) 등이 군사를 훈련시켰다.
북동대산에 진을 친 산남의진은 9월 22일 흥해(興海), 9월 28일 신녕(新寧), 9월 29일 의흥(義興) 등지를 공략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0월 2·3일에는 청송 두방(斗坊)에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전군이 패주하였다. 10월 5일 산남의진은 추격하는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보현산으로 집결하였고, 곧이어 진영을 2대로 편성하여 일대는 청송, 일대는 기계로 이동하였다. 10월 11일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흥해분파소(興海分派所)를 습격한 이후 청하·영덕·북동대산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청송의 보현산 일대와 영일의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의병 토벌을 위해 증파된 일본군은 안강·기계 등 동해안 일대에서 기습전을 전개하였고, 그에 따른 의병진의 탄약과 장비의 소진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초 산남의진이 서울진공작전의 일환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였던 관동지방으로의 북상은 현실적으로 어려워지는 형편이었다.
이리하여 정환직은 관동 진출을 위한 최후의 방책으로 진용을 분산하여 북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즉 정환직은 “내가 먼저 관동(關東)으로 들어가 중인(衆人)을 기다릴 것이니 중인은 각지로 나아가 탄약 등을 구하여 관동으로 들어오라”고 명하고, 병사들은 상인·농부 등으로 변장시켜 모두 파견하였다.
그러나 산남의진이 관동으로 북상하는 과정에서 11월 6일 정환직은 청하면 각전(角田)에서 일본군에게 피체되었다. 정환직은 영덕에서 대구로 이송되어 귀순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끝내 거부하였고, 영천으로 돌아오던 중 남쪽 교외(郊外)에서 총살·순절하였다. 1907년 11월 16일이었다. 정환직은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身亡心不變 (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
義重死猶輕 (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後事憑誰託 (뒷일은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 (말없이 앉아 오경을 넘기노라)
2020 년 01 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주요공적
1905~1906년 부친과 의병조직, 산남의병장
1907년 청하, 청송, 영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
1907년 포항 죽장면 입암전투에서 전사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정용기
정용기 鄭鏞基, 1862.12.13~1907.09.02. 경상북도 영천, 독립장 1962
목차
1. 충절의 가문에서 태어나다
산남의진비(경북 영천)
정용기 선생은 영일정씨(迎日鄭氏)이다. 시조는 고려 예종 때 향공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인종 때 예부시랑과 추밀원지주사를 지낸 형양(滎陽) 정습명(鄭襲明)이다. 고려의 신하로서 조선의 신하되기를 끝내 거부하다 목숨을 잃은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는 시조 정습명의 10세손이다. 포은 선생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인으로서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고려 말 이래 충절의 상징이 되어 온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침략으로 영천성(永川城)이 함락되자, 향병을 조직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장 강의공(剛義公)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1535~1612)는 시조 정습명의 15세손이다. 또 그의 장남 의번(宜藩)은 부친이 경주성에서 왜군에게 포위당하자 부친을 구출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조정은 그에게 이조참판직과 함께 충효가문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이들 부자가 동시에 공을 쌓아 포은 정몽주에 이어 영일정씨 ‘충절가문’의 가풍을 이루었다.
부친 정환직(鄭煥直, 1844~1907)은 1844년 5월 19일, 경북 영천군 자양면 검단동 곧 지금의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서 부친 병산공(屛山公) 유완(裕玩)과 모친 순천이씨 용조(鏞祖)의 따님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자를 좌겸(左兼) 또는 열남(洌南), 호를 우석(愚石), 이름을 치우(致右) 또는 치대(致大)라 하였다. 그 후 1899년 11월 종묘화재 때 고종과 태자를 위험에서 안전하게 피신시킨 공로로, 고종이 특별히 내려주신 자 백온(伯溫), 호 동엄(東广), 이름을 환직(煥直)으로 바꾸었다. 부친은 시조 정습명의 26세손이자 임란 의병장 정세아의 11세손이다. 증조부는 성균관 생원 운암(雲庵) 하호(夏濩)였고, 조부는 충효동 입향조 검계(檢溪) 탁휴(鐸休)였다. 조부는 1824년 자양면 삼구리(三龜里)의 귀미 마을에서 이곳 검단동으로 옮겨 터를 잡고 검계서당을 짓고 강학하였다. 부친 정유완에 이르러서 자식이 없자, 모친과 함께 자양면 기룡산(騎龍山)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린 후 아들 치우 곧 환직을 얻었다고 한다.
부친 정환직은 1855년(12살) 향시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이름을 날릴 정도였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부는 그만두고 전국 각지를 전전하였다. 부친은 19세가 되던 무렵 여강이씨 재석(在奭)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슬하에 용기(鏞基)와 옥기(沃基, 鋈基) 두 아들을 두었으나, 옥기는 종숙 치훈(致勳)에게 양자를 갔다. 부친은 결혼 후에도 전국을 떠돌았다. 이때 고향을 생각하는 글, 현실을 한탄하는 글, 농민들의 처지와 일그러진 현실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는 글 등 많은 글들을 남겼다. 부친은 이러한 글을 통해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달랬다.
부친 정환직이 벼슬에 오르기 전까지는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떠도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틈틈이 연마한 의술로 명성을 쌓았던 덕택에 고관의 추천을 받아 1887년(41세) ‘태의원 전의(太醫院 典醫)’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태의원은 당시 왕족과 궁중에서 쓰이는 약을 조재하던 관청이며, 전의는 그 일을 담당하던 벼슬이다. 하지만 부친은 의술과는 관계없이 삼남지방의 시찰을 주된 업무로 하였고, 이듬해인 1888년에는 의금부도사겸 중추원의관, 북부도사(5품관) 등으로 품계가 올랐다.
선생도 부친이 어려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공부를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했다. 1876년(15세) 김천시 봉산면 예지리로 이사하였다. 당시 그곳에는 먼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약 10년을 지낸 뒤 다시 영천 자양을 거쳐 포항시 죽장면 현내리 창마을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사귄 이한구(李韓久)와 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과는 집안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선생은 1887년 부친이 관직에 오르자 비로소 상경하여 부친을 곁에서 모시게 되었다.
2. 부친 정환직이 고종의 밀지를 받들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일제가 파견한 이토(伊藤博文) 통감에게 외교뿐만 아니라 국정의 모든 분야까지 간섭을 받게 되었다. 정부 대신들은 고종 보다 통감의 눈치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이 때문에 친일 인물이 아니면 궐내 출입마저 어려웠고, 고종도 감시를 당하는 지경으로 이어졌다.
궁중에서 밀지를 받다(『산남창의지』中)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침략 책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국가 존망에 대한 위기의식은 궁궐 안팎으로 점점 더 높아져 갔다. 이러한 때인 1905년 12월 5일(양12.30), 고종은 시종관(侍從官) 정환직을 불러 “경은 화천(華泉)의 물을 아는가?”라고 말한 뒤 ‘짐망(朕望, 짐은 바라노라)’이라는 두 자로서 밀지(密旨)를 내렸다. 정환직은 이를 받들고 주변의 감시를 피해 눈물을 머금고 조용히 물러나왔다.
‘화천지수’는 중국 춘추시대에 제나라 경공(頃公)이 제후국 연합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장졸들은 다 흩어지고 주군인 경공도 포로가 될 위기에 이르렀다. 이때 주군의 우편에서 수레를 몰며 호위하던 장수 봉축보(逢丑父)가 주군의 수레에 올라가 자신의 옷과 주군의 옷을 바꾸어 입고 달려 오는 적장들 앞에서 말 고비를 잡은 경공을 돌아보며, 목이 마르니 급히 가서 화천의 물을 떠 오라고 명하였다. 주군인 경공은 이 틈을 타서 포위망을 벗어날 수가 있었고, 장수 봉축보는 주군 대신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는 고사이다. 고종이 통감부와 친일인물들의 극심한 감시 속에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해서 자신의 뜻을 전했던 것이다.
짐망화천지수전세비(산남의진기념사업회, 경북 영천)
부친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든 12월 5일 바로 그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서 장남인 선생을 불러 밀지를 내 보이며 창의(倡義)에 대해 말을 꺼냈다. 부친은 ‘나는 의병을 일으킬 것이니 너는 고향으로 내려가 뒷일을 잘 보존하라’고 분부를 하였다. 선생은 대의를 밝히며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하였으나 부친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흘 동안 밤낮없이 꿇어 엎드려 간청을 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들 부자의 계획은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동(關東) 곧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북상한 뒤 다시 서울로 들어가 일본군과 간신들을 몰아내고 ‘황실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아버지의 분부 곧 친명(親命)을 받들고, 12월 10일 고향 영천으로 내려왔다.
부친 정환직은 아들을 내려 보내고 1905년 12월 30일부터 영남지역을 돌며 동지들의 도움을 약속 받는 한편, 고향에 들려 옛 친구들과 시국을 의논하기도 하였다. 또 경남지역을 돌며 지역 실정을 살핀 뒤, 1906년 1월 서울로 돌아와 창의를 도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3. 친명을 받들고 의진을 일으키다
선생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12월 10일 영남으로 내려왔다. 먼저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을 만나 모든 것을 의논하고 계획하였다. 문제는 역시 군사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와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지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이끌고 있던 의병장들이 다투어 모였다. 고종의 밀지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밀지는 그 어떤 명분보다도 창의에 대한 당위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도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1906년 1월경 ‘영천창의소’를 설치하였다. 민심을 안정시키면서 민중의 협조를 얻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먼저 통문과 격려문 등 각종 광고문을 지어 배포하였다. 내용은 대개 역적들이 나라를 팔고, 일본이 조약을 강제로 맺어 나라와 민족이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함께 일어나 줄 것 등이었다.
또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과 함께 활빈당과 같은 무장 농민들도 일어나고 있어서 세상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통감부는 각 지방의 진위대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게 하고, 각 군수들은 초토관(招討官)이 되어 관할 지역을 지키도록 하였다. 따라서 관군과 의병과 무장 농민군의 활동이 뒤얽혀 사회가 혼란해지고 민생은 어려워져 갔다.
선생은 의병을 진압하려는 각지의 초토관들에게 경고문을 띄웠다. 관직과 녹봉은 임금이 내린 것인데 임금과 백성을 위해 힘쓰지 않고, 사리사욕과 민패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또 도적을 잡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면서 개인의 재산과 마을을 몰살하고 다니는 것이 과연 옳은 처사인지를 반문하며 각성을 촉구하였다.
선생은 권세가(勸世歌)를 지어 호소하였다. 나라에 운이 없어 일본인들이 들어와 문명과 종사가 무너지고, 백성들이 그들의 고기밥이 되고 있는 실정을 한탄하고, 그 원인이 을사5적들 때문이라는 것을 지탄하고, 충성심 있는 의사들이 의병을 일으켜 역적들과 왜적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 백성들의 원한을 풀 것과 우리 대한독립만세의 기치를 전 세계에 자랑하기 위해 모두 함께 의병으로 나설 것 등을 호소하였다.
1906년 봄 영남지역에서 모인 1,000여 명의 장정들이 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대장을 사양하였으나 결국 수락하였다. 선생은 대장에 올라 진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陣)’으로 정하고 부대를 편성하였다. ‘산남’이란 영남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렇게 하여 1906년 2월(양 3월) 영천에서 산남의진이 결성되었다.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총수로, 선생을 대장으로 하고 중군ㆍ참모장ㆍ소모장ㆍ도총장ㆍ선봉장 후봉장ㆍ좌영장ㆍ우영장ㆍ연습장ㆍ도포장ㆍ좌익장ㆍ우익장ㆍ좌포장ㆍ우포장ㆍ장영집사ㆍ군문집사 등 16개 부서로 나누어 편성하였다. 전체 규모는 약 1,000이었고, 각 부 장령은 본영의 지휘에 따라 각기 50~100명의 소부대를 지휘하였다.
4. 진위대의 간계로 대구로 압송되다
선생은 관동으로 북상하여 다시 서울로 진격한다는 애초의 목표를 위해 1906년 3월 5일 출진을 시작하였다. 농사철이 시작되었기에 농민들을 위로할 겸, 농사 피해도 최소한 줄이기 위해 격려문을 발표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부득이 의병을 일으켰으니, 농사는 농사대로 군사는 군사대로 모두 힘을 다하자’고 호소하였다.
선생은 영천을 출발한 뒤 흥해ㆍ청하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다. 의진이 출진한 지 달포가 지났을 무렵, 신돌석 의진 쪽에서 지원을 요청해 왔다. 신돌석 의진은 선생의 의진이 출진한 지 일주일 뒤인 3월 13일 영덕군 축산(丑山)에서 결성되었다. 신돌석 의진은 일본이 대한제국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는 울진 장호동 기지를 먼저 공격하였지만 원주진위대의 출동으로 크게 실패하고 청송군 진보로 물러났다. 그 뒤 의성(義城)을 공격하기 위해 청송 이전평으로 물러나 있던 중 갑자기 안동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자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본진 군사 수백 명을 이끌고 신돌석 의진과 약속한 연합작전을 펴기 위해 영해를 목적지로 하여 진군하였다. 먼저 청하읍을 향해 나가던 중 1906년 4월 28일 포항시 신광면 우각리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나더니, 자신들은 경주진위대의 병사로서 대장 참령 신석호(申奭鎬)의 명을 받고 왔다며 인사하였다. 선생은 본진 군사들을 진정시키고 이들을 만나 보니 한 통의 편지를 꺼내 놓았다. 내용은 ‘존공(尊公)의 대인(大人)이 서울에서 잡혔으니 이를 해결하는데 좋은 기회가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존공의 대인’이란 바로 부친 정환직을 말하는 것이다.
선생이 주위를 둘러보며 곧장 경주로 가야겠다고 하자 중군장 이한구가 동행하겠다고 하였으나, ‘뒷일을 그대에게 맡기노라.’ 하고 홀로 떠났다. 경주에 도착하자 경주진위대장 참령 신석호가 비장한 말로 위로하며, ‘나는 충성스런 의사들이 공연하게 죽으면 큰일에 효력이 없을까 하여 이 자리에서 공의 이해를 얻고자 합니다.’ 하였다. 선생은 그때서야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신석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의로써 크게 꾸짖었다. 선생의 의기에 눌린 참령 신석호는 진위대 군사들을 시켜 그를 대구경무서로 보냈다. 선생은 대구경무서에 구금되었다가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중군장 이한구는 선생이 대구로 잡혀가자 선생의 종숙 치훈(致勳)을 서울로 보내 부친 정환직에게 급히 사정을 알렸다. 이한구는 의진 부서를 일부 개편하고 이를 지휘하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선생의 구속으로 구심점을 잃은 병사들은 상당수는 떠나버렸고, 남은 군사들도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이한구는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영덕 달산 덕산리 청련사(靑蓮寺)로 들어갔다. 마침 소모장 정순기도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군사를 서로 합쳐 의진을 재편성하였다. 중군장 이한구와 소모장 정순기의 병사들을 다 합쳐도 8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한구 중군장이 이끄는 의진은 영덕, 흥해, 강구, 청하 등 각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다.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병사들의 희생이 너무 컸다. 더구나 지방 관리들의 회유로 민심마저 크게 돌변하였고, 일본군 수비대도 점점 더 강화되고 있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중군장 이한구는 청송군 진보에서 의진을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상황을 『산남창의지』(상)(1946, 20쪽)에서는 “우리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였는데, 저 국록을 먹는 자들이 이를 반대로 선전하여 백성들이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도록 한다. 우리는 민중들의 각성을 기다렸다가 뒷날 다시 일어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라고 하였다.
5. 영천군 국채보상운동을 이끌다
선생이 붙잡혀 구속되었다는 소식은 누구보다도 아버지 정환직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그것은 의진 총수로서 서울에서 군사 100여 명을 광부로 변장시켜 관동(강릉)으로 보내, 북상하는 산남의진과 연합하여 서울을 들이치겠다는 당초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백방으로 아들을 석방시키려 노력하였다. 다행히 ‘조선의 의사를 해치지 말라’는 특명을 내림으로써, 1906년 8월 3일 대구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선생은 풀려나긴 했으나 4개월 동안의 고초와 시달림으로 당장 의병을 일으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가 몸을 안정시키고 있던 때인 12월 16일, 대구에서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ㆍ부사장 서상돈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일제가 만든 외채 1,300만원을 정부가 갚을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우리 국민의 손으로 갚고자 한 일종의 경제적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반응이 좋아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경북지역에서도 고령ㆍ성주ㆍ김천ㆍ상주 등 여러 지역에서 여러 관련 단체들이 조직되어 동참하였다.
국채 일천삼백만원 보상취지(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자)
영천지역에서는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가 조직되고 선생이 회장으로 추대되어 취임하였으며, 단연회 통문을 발표하고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다. 통문의 주요 내용은 일본에 진 외채 1,300만원을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끊고 한 달에 20전씩 석 달만 모으면 갚을 수 있다는 것, 영천지역에서도 서로 서로 전하여 한 사람도 빠지지 않도록 할 것, 일본에 진 빚을 갚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노예가 될 것, 나라가 없으면 몸 또한 망하고 나라가 흥하면 몸은 죽어도 영광일 것 등이었다.
선생은 통문에 이어 권고가도 지어 발표하였다. 권고가는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모든 것 그만 두더라도 국채만은 빨리 갚아 자주 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이었다. 이 운동에 앞장섰던 인사들은 전ㆍ현직 관료들을 비롯해서 지방 유지나 상공인ㆍ농민ㆍ상인ㆍ광부ㆍ노동자 등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다.
선생은 국채로 말미암아 나라를 빼앗기고, 백성이 남의 나라 노예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급히 상경할 일이 생겨, 영천군 단연회 회장직을 자양면 용산리 원각(元覺) 마을의 선비 명암(明庵) 이태일(李泰一, 1860~1944)에게 인계하고 영천을 떠났다.
국채보상운동의 성과는 『대한매일신보』에 9월 27일부터 12월 23일까지 약 3개월 동안 게재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광고」의 의연금 납부자와 납부 금액 등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영천지역 국채보상운동은 시기적으로는 좀 늦게 시작되긴 하였지만, 참여 상황으로는 나름대로 활발했던 것 같다.
6. 의진을 다시 일으키다
선생은 1907년 봄이 되면서 다시 의진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먼저 각 지역에서 활동하였거나 활동하고 있는 옛 부장들을 만나 의논을 하였다. 지난번 제1차 산남의진의 조직과 거의 같은 모습의 의진을 다시 결성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4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의병 모집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무렵에는 일본군과 관군의 활동이 한층 강화되었기 때문에 인적 물적 자원 조달이 쉽지 않았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재기의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람들을 각지로 보내 군사를 모아 왔다. 또 그동안 쉬지 않고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지역 의병장들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군인 출신을 비롯하여 개인적으로도 여러 명이 들어왔다.
선생은 군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확보하는 일을 어느 정도 끝낸 뒤, 1907년 4월 중순에 의진을 결성하였다. 장정들의 추대로 대장에 취임하고, 중군장, 참모장, 소모장, 도총장, 선봉장, 후봉장, 좌영장, 우영장, 연습장, 도포장, 좌익장, 우익장, 좌포장, 우포장, 유격장, 척후장, 점군검찰, 장영서장, 군문집사 등 19개 부서를 두고 장령을 선임하였다. 각 초장과 종사는 별도로 선정하였다. 당시 1초는 10명으로 편성되었다.
제2차 의진 결성에서 주목되는 것은 군인출신이 많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진의 전투력이 그만큼 강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군령도 엄격하게 하였다. 선생은 ‘만약 군령을 어기는 자는 군법으로 시행할 것’이라고 하여 진영의 기강을 강화하는 동시에 민폐를 막으려하였다. 정환직 총수도 서울에서 내려와 의진의 여러 부장들을 만나고 1907년 5월, 관동지방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돌아갔다.
선생의 의진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07년 7월경 부터였다. 선생은 본진 약 300명을 2대로 나누어, 1대는 죽장에서 천령(泉嶺)를 넘고, 1대는 신광에서 여령(麗嶺)을 넘어 청하읍을 공격하게 하였다. 본진이 7월 17일 청하읍에 들어 닥치자 놀란 적군들은 동해로 도주하였다. 선생 부대는 읍내로 들어가 창고의 무기 등을 몰수하고, 적의 분파소와 건물 등을 불태운 뒤 도주하지 못한 한인 순사 1명을 처단하였다.
의진은 청하를 장악한 뒤 다시 천령으로 돌아왔다. 몰수한 무기 가운데 불필요한 것 등은 천령 산 속에 숨겨 두었다. 천령으로 돌아온 선생은 일본군 대부대가 포항으로 들어왔다는 척후의 보고를 받았다. 선생은 장령들과 의논하여 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직접 대적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다시 천령을 넘어 죽장으로 이동하였다.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한 선생은 당분간 주변 지역을 돌며 무기와 탄약을 보충한 뒤 북상을 한다는 계획을 각 지대에게 알렸다. 이 후 다시 청송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비가 오는 관계로 영천 신녕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무렵 대구 진위대 참교 출신 우재룡(禹在龍)이 입진하였다. 선생은 부친 정환직 총수에게 무기와 탄약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에서 전투를 계속하다보니 북상이 지연되고 있고, 최근에는 일본군이 유독 북상 통로를 막고 있어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알렸다. 정환직은 이 소식을 듣고 관동에서 대비하고 있는 강릉부대를 영남으로 내려 보내기로 하였다.
선생의 본진이 영천 화북면 자천(慈川)을 거쳐 청송지역으로 들어가자, 일본군이 영천에서부터 본진을 추격해 북상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선생은 곧바로 본진을 2대로 나누어 영천 화북에서 청송 현서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매복하게 하고 기다렸으나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본군이 청송읍을 향해 출격했다는 정보를 듣고 방대령(方臺嶺)에서 매복했으나 적군이 오지 않자 군사를 거두어 청송 현서면 벌전(筏田)으로 나아갔다. 본진을 이끌고 의성읍을 공격하려 하다가 기밀 누설로 청송군 안덕으로 갔다.
선생이 이끄는 본진은 1907년 8월 14일 저녁 청송 안덕면 신성(薪城)에 도착하였다. 그때 신돌석 부대에서 주위에 일본군이 많다고 알려왔다. 선생은 본진을 3대로 나누어 주요 지점마다 매복하게 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이 신성지역으로 들어오자 접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밤새도록 지속되었다. 8월 15일 새벽이 되자 일본군이 현동 추강(秋江) 뒷산으로 도주하였다. 이 신성전투에서 부장 이치옥(李致玉)이 전사하였다. 의진은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포위하였으나 갑자기 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여 어쩔 수 없이 포위망을 풀고 퇴각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보병 제14연대 제12중대의 1개 소대 병력 약 30명이었다.
그 뒤 선생은 청하군 죽장면 절골 개흥사(開興寺)에 유진하였다. 8월 18일 강릉의병 부대가 내려와 합류하였다. 이에 따라 본진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다. 또 이날 우포장 김일언이 죽장면 침곡(針谷)에서 일본군 척후 1명을 사살하였다. 이튿날 8월 19일 흥해군 기계면 운주산 안국사(安國寺)로 진을 옮기고 포항을 공격하기 위해 정보원을 연해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안강읍 옥산 원촌(院村)에 도착하니 연해로 나갔던 정보원이 돌아와 ‘포항에는 일본군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쉽게 공격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영천수비대가 영천관포 곧 한국인 보조원을 앞세우고 자양으로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었다. 선생은 본진을 2대로 나누어 유인작전을 폈다. 자양으로 출진한 본진 병사는 약 150명이었다. 얼마 후 출진한 본진 1대가 일본군 1명과 영천관포들을 사로잡아 왔다. 관포는 동포이므로 타일러 보내고, 일본군 1명은 목베어 처단하였다.
선생은 관동으로의 길을 트기 위해 신돌석 부대를 지원하는 한편, 동해 연안 지역으로 길을 찾고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자양전투의 보복으로 영일수비대와 청송수비대가 연합작전으로 선생 부대를 추적하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8월 25일 군사 약 300명으로 청하읍을 공격하여 적 1명을 사살하고, 분파소 및 관계 건물 등을 소각하고 다시 천령으로 회군하였다. 이동할 때는 농민이나 상인 등으로 위장하여 추적을 따돌렸다.
일본군 청송수비대는 미야하라(宮原) 소위가 이끄는 보병 제14연대 제11중대 소속 미야하라 소대였고, 영일수비대는 나카오카(長岡) 중위가 이끄는 제12중대 소속 나카오카 소대였다. 1개 소대는 약 30명 정도였다. 그들은 8월 27일 흥해군 기계면 가천동 안국사를 의병의 근거지라 하여 불태웠다. 그들은 의병 탄압을 위해 경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안국사를 불태운 뒤 영일수비대는 8월 28일 영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청송수비대는 계속 선생 의진을 추적하여 8월 29일 진보, 청송을 지나 이튿날 30일 청하군 죽장면 입암으로 들어갔다.
한편 8월 24일 자양전투를 치른 선생은 본영 150여 명을 지휘하여 안국사로 회군하였다. 석양 무렵 종제 진기(溱基)가 진중으로 와서, 부친 정환직 총수가 검단동 향재에 왔다고 하였다. 선생은 핵심 부장들과 함께 곧 바로 향재로 달려가 문안 인사를 올리고 관동으로의 북상 일정이 더디게 된 이유를 첫째, 자신의 병상 생활, 둘째, 무기와 탄약 등 물자의 부족, 셋째, 신돌석 의진의 거듭된 패전, 넷째, 군기 준비의 지연 등이었음을 아뢰었다. 선생이 목매인 음성으로 말씀을 올리자 묵묵히 듣고 있던 정환직도 눈물을 닦았다.
정환직 총수는 의진은 ‘만사를 그만두고 당장 북상하라’고 훈시였다. 이날 저녁 음식상은 선생의 동생 옥기가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8월 24일(양10.1)이 정환직ㆍ정용기 부자의 마지막 상봉일이 되고 말았다. 향재는 이틀 뒤인 8월 26일 일본군에게 불태워졌고, 선생은 일주일 뒤인 9월 2일 입암전투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튿날 8월 25일 전군을 영천시 자양면 상구미에 집결시키고, 북상 일정을 잡기 위해 부장들의 의견을 모았다. 장령들도 확신을 하지 못하자 ‘북상 기일은 다음에 정한다’고 공포한 뒤 8월 26일 보현산으로 들어갔다. 산 아래 여러 마을에 군사들의 식사를 배정시키고 숙영할 준비를 하였다. 이때 척후병이 와서 자양면 검단동에 일본군이 들어가 마을을 불살랐다고 하였다. 의진은 곧바로 출격하였으나 일본군이 도주한 뒤였다. 마을은 온통 연기로 가득했고, 선생의 향재 뿐만 아니라 이웃의 여러 집까지 잿더미가 되었다. 선생은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미치지 못하자 안국사로 회군하였다.
검단동 향재가 불타버린 8월 26일 안국사로 돌아온 선생은 야간회의를 열고 북상에 대한 부장들의 의견을 다시 모았다. 부장들의 의견을 듣고 나서 의진이 북상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10일간을 휴식’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장령들이 나가는 지역이 대부분 그들의 출신지였기 때문에 집안도 둘러보고 가족도 만나 볼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출장 형식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본부진영의 군사 150여 명을 이끌며 본진을 관리하기로 하였다.
7. 입암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다
선생은 북상 준비 및 각 지대와의 연락을 위해 각지로 장령들을 파견한 뒤, 본진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청하군 죽장으로 이동하였다. 8월 29일 죽장면 매현(梅峴)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유숙하며 휴가를 나간 장령들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 4시경 척후병으로부터 ‘추격하는 일본군이 청송에서 죽장으로 이동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튿날 9월 1일(양10.7) 이른 아침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장수 깃대 두 대가 동시에 쓰러졌다. 모두가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선생은 이 같은 징조는 피할 수 없는 사정이니 ‘소란케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 무렵 일본군이 죽장면 입암에 도착하였다는 척후의 보고가 있었으며 일본군이 입암에 유숙할 것을 예측하였다.
선생은 곧 작전을 짰다. 부장 3명에게 각기 일대를 지휘하여 적의 길목을 지키면, 새벽에 본진이 적을 공격하여 섬멸한다는 작전이었다. 이에 따라 우재룡을 작령(雀嶺)으로, 김일언을 조암(瞗巖)으로, 이세기를 광천(廣川)으로 나가 매복하게 하였다. 선생은 내일 9월 2일 새벽 본진이 습격하면 적들이 도주할 것이다. 그 때 복병들이 길목을 막으면 ‘일본군 전체를 섬멸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세 부대를 매복지로 내보내고 새벽을 기다기로 하였다.
9월 1일(양10.7) 선생의 명을 받은 김일언ㆍ우재룡ㆍ이세기 세 부장은 각자 군사를 이끌고 목표 지점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세기가 입암리 뒷산을 지나던 중이었다. 마침 골짜기 개천에서 일본군의 저녁 준비를 위해 닭을 잡아 장만하는 고지기(庫直) 안도치(安道致)라는 인물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일본군이 자신에게 저녁밥을 시켜놓고, 안동권씨 문중 회관 영모당(永慕堂) 대청에서 모두 누워 쉬고 있다는 것이다.
저녁 9시 30분경이었다. 이세기는 적병이 그리 많지 않다고 판단하고, 단숨에 작살을 낼 요량으로 선제공격을 하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주위에 잠복해 있던 일본군이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다. 이세기 부대는 크게 당황하면서 오직 본진이 와 주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선생은 매현에서 9월 2일(양10.8) 새벽에 출격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입암 방면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선생은 곧바로 본진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였다. 그믐밤이라서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겨우 입암리 전지에 도착하였다. 선생 부대는 총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개울을 따라 접근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모습이 어른 거리는 영모당을 향해 집중 공격을 했다. 한참을 사격한 뒤 반응이 없자 일본군이 모두 죽거나 도망간 것으로 판단하고, 물러나 입암서원(立岩書院) 근처 주막에 이르렀다. 본진은 늦게나마 저녁 식사를 하였다.
영모당에 있던 일본군 청송수비대는 이세기 부대와 교전을 벌인 뒤 선생의 본진이 들이 닥치자 마루 밑에 납작 엎드려 죽은 듯이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참 뒤 의병들이 물러나자 이를 추격하여 일시에 공격하였다. 주막에서 기습을 당한 의병들은 어둠속에서 저항을 하였으나 참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를 ‘입암전투(立岩戰鬪)’라 한다. 여기서 선생은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핵심 장령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정용기 선생 순국지(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25 일대)
일본군 보병 제14연대가 남긴 『진중일지』(1907년 10월 9일자)에서는 일본군 청송수비대는 “이날 밤 9시 30분 정관여(鄭寬汝, 선생을 말함)가 이끄는 의병 150여 명으로부터 기습을 받았지만 오히려 9월 2일(양10.8) 오전 0시 20분부터 공세로 전환하여 의병이 머물고 있던 진영을 쳐서 선생 의병장 이하 19명을 사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9월 2일 날이 밝자 비극의 현장은 처참하게 드러났다. 당시 일본군은 지난 8월 27일 운주산의 안국사를 불태웠던 제14연대 11중대 소대장 미야하라(宮原) 소위가 이끄는 청송수비대였다. 청송수비대는 입암 마을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양민들을 학살하였고, 집안의 귀중품까지도 약탈해 갔다고 한다.
이날 전투는 1907년 9월 1일 밤 9시 30분경부터 9월 2일 새벽 2시경까지 약 4시간 30분 동안 벌어졌다. 여기서 선생이 이끌고 출격한 본진 150여 명 가운데서 선생 이하 19명이 전사하였다.
8. 부친 정환직 총수가 대장이 되다
입암전투 무렵 부친 정환직은 포항시 기북면 용기리 막실 처남 이능추(李能樞)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9월 1일 밤 꿈에 아들 용기가 나타나서 사태의 위급함을 알리는 악몽을 꾸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와서 급히 보고하기를 ‘어제 밤 입암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선생과 장령이 모두 순절하였다’고 전하였다. 정환직 총수는 놀란 나머지 황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시신은 총상을 10여 군데나 입었고, 피 자국은 온 집안에 퍼져 있었다. 정환직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너희들이 어찌 먼저 이 지경이 되었느냐’ 하고, 입은 옷을 벗어 아들 용기의 몸에 걸쳐주고, 주변을 둘러보며 장례를 군례로 치를 것을 명하였다.
충효재(경북 영천)
선생의 장례는 정순기, 우재룡, 이세기 등 여러 영장들이 함께 군례로 치르되, 소복을 입고 예를 갖추는 호소례(縞素禮)로 진행하였다. 장례는 장병들이 사방을 파수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묘소는 입암서원 앞을 지나는 가사천 상류를 따라 약 600m 떨어져 있는 죽장면 매현리 인학산 기슭의 욕학담(浴鶴潭, 학소) 북편에 정하여 안장하였다.
입암전투로 의진의 지휘부가 무너지자 남은 장령들이 정환직 총수에게 의진을 이끌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정환직도 의진 총수로서 지금까지 의진을 총괄해 왔던 만큼 더 이상 사양하지 못하고 수락하였다. 그러나 의진을 이끌던 정환직 대장마저 1907년 11월 7일 청하군 죽장면 상옥리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에게 잡혀 대구로 압송되던 도중 11월 13일(양12.17)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그 뒤 의진은 최세윤 대장이 이끌었다.
정환직·정용기 부자 묘소(경북 영천)
선생과 아버지 정환직을 추모하기 위해 생존 지사들과 유족들을 중심으로 1934년 2월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번지에 충효재(忠孝齋)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에는 산남의진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1963년 3월에는 영천시 창구동 조양각 후원에 ‘대장정공양세순국기념 산남의진비(大將鄭公兩世殉國紀念 山南義陣碑)’를 세웠고, 1988년 11월에는 충효재 뜰에 ‘화천지수전세비(華泉之水傳世碑)’를 세워 양세 의병장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선생의 묘소는 1963년 6월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14번지 양세의병장 묘역에 부부 합장묘로 이장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출처 : 보훈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