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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과 매너 – 매너가 인간을 만든다
2014년 6월.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두 후보 간에 토론이 한창이다.
정몽준 : “박 후보가 농약 묻은 식자재가 아이들 식탁에 올라간 적이 없다고 했는데 감사원 보고서를 보면 친환경 농산물에 농약이 포함돼 있었다고 적시돼 있다. 그 농약은 아이들의 성장과 발육에 치명적인 발암물질이 들어있다. 지난 3년간 1000만 명 이상의 학생이 농약급식을 먹었는데 이게 박 후보 말대로 미미한 문제냐”
"박 후보가 이런 사실을 2012년경, 늦어도 2013년에 알았는데 어떻게 최근까지 방치했느냐, 잔류농약이 있는 농산물 납품업체에 대해 납품 영구 금지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박 후보가 상당 기간 눈감고 묵인했다“
박원순 : (감사원이 서울시에 통보한 보고서를 꺼내들며) "이 자리에서 서울시민들께 정확히 말씀 드리겠다. 서울시에 통보된 '감사결과 처분요구 및 통보' 문건에는 어디에도 잔류 농약이 있는 식자재가 학교에 공급됐다거나, 그래서 어떤 처분이 필요하고 누구를 징계하라는 등의 내용이 하나도 없다“
"감사원이 주의를 준 건 잔류 농약 때문이 아니고 서울시친환경유통센터가 이를 발견해 폐기처분 했으면 다른 국가기관과 공유해야 하는데 공유하지 않아 주의를 받은 것이며 정 후보가 주장하는 내용과 완전히 다르다“
세월호 사건이 벌어진지 채 두 달이 안 되어 치러진 지방선거. 대한민국 정치 1번지 수도 서울의 수장 자리를 놓고 여야 간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안철수의 지지를 받아 보궐선거에서 시장 자리에 오른 박원순 후보는 수성의 입장. 대표적인 기업가로 7선의 관록을 자랑하는 정몽준 후보는 풍부한 경험과 재력을 바탕으로 서울 시장의 자리를 노리는 공격수로 등장했다. 우리나라 선거 풍토에서는 토론 결과가 당락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드물지만 지역이 서울이고 자리가 자리인지라 박원순-정몽준 토론에 대한 관심은 유달리 뜨거웠다.
당시 여론 조사 결과는 민심을 두루 읽고 소통을 강조해온 박원순 후보에게 호의적이었다. 게다가 국정 민심을 차갑게 만든 세월호 사건도 있었기에 정몽준 후보로서는 좀처럼 여론 조사 결과를 뒤집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마도, 후보자 초청 토론을 승부처로 생각했는지 정몽준 후보는 작심을 한 듯 네가티브로 일관했다. 몇 가지 쟁점이 있었으나 시민들의 밥이 중요하다 생각했는지, 무상급식, 아니 의무급식 자체를 공격하지는 않았고 급식의 질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러다 보니 앞서 소개한 바대로 날서게 급식 문제를 공격한 것이다
토론이 이러하다 보니 박원순 후보는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다. 상대의 토론 내용이 사실에 근거한 거라면 얼마든지 반박을 하겠지만 본인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자료와 근거로 공격을 해대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결국 수 차례 비슷한 토론의 후반부에 가서는 정몽준 후보의 토론 자세나 태도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토론에서의 예절과 매너가 없이 토론에 임하기 때문에 토론 자체의 품격이 떨어진다고 상대를 공격했다.
“세간에 이런 이야기가 떠돈다. 박원순은 서울시를 이야기하는데 정몽준은 박원순만 이야기한다. 박원순은 서울의 미래를 이야기하는데 정몽준은 낡은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 이번 시간만큼은 서울의 미래를 이야기하자. 그리고 토론이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이 되도록 품격 있는 토론을 하자.”
백분 토론에서 토론자들이 흥분해서 간혹 목소리를 높이거나 발언권을 가지고 다투는 현상에 눈살을 찌푸린 경험이 한두 번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정하게 시간과 절차를 정해서 진행하는 토론에서 이런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다. 잘못하면 토론 내용보다도 토론 자체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우를 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원순 후보도 정몽준 후보의 토론 내용이나 태도에 대해서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이 토론을 보면서 새삼 느낀 것은 ‘그래, 토론은 품격이고 매너구나’ 하는 점이었다. 토론의 내용도 좋다. 사실 여부를 체크하는 과정도 꼼꼼하게 검증해야 한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토론에서의 품격,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비단 토론 당사자들 간의 상대방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토론을 지켜보고 참여하는 천만 서울 시민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사담이 아니라 시민들이 지켜보는 데서 치러지는 공적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토론에서 예의와 품격을 강조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다. 공공의 토론에서도 토론자들이 감정적으로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거나 심지어 몸짓까지도 좀 격해지는 경우를 종종 보고 사회자는 발언의 수위를 조정하고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애쓰는 게 우리나라의 토론 문화 풍토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고 보면 토론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끔 되물을 때가 있다. 똑똑함? 창의성과 유머? 리더십을 키우기 위해서라거나 소통과 질문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라는 등 다양한 대답이 있다. 다 맞는 말이다. 이 책에서 토론의 철학과 방법을 너무 수준 높게(^^) 논하다 보니 잊은 게 있다. 바로 매너다. 토론에서의 예절과 상대에 대한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고 토론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킹스맨>을 통해 진정한 매너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영화 제목 <킹스맨>은 원래 세계 각지의 권력자들에게 옷을 만들어주던 재단사들이 1894년에 설립한 모임이 시초였으나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권력자 후계자들이 대거 목숨을 잃게 되고 이 때문에 재산을 물려줄 데가 없어진 권력자들이 이걸 세계 평화를 위해 쓰자고 해서 탄생된, 범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이다. 국가의 권력을 능가하는 초법규적인 집단이라 어떠한 나라의 법도 킹스맨의 행동을 방해할 수 없으며 각국의 지도자들마저도 킹스맨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지도자들이 킹스맨 소속 요원의 정체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영화의 주요 악당도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인터넷 백과사전)
이 영화는 겉보기에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의 스토리 구조를 가진 영화다. 킹스맨이라는 그룹에서 정의를 위해서 일하던 아버지가 죽었다. 어머니와 아들만 남았는데, 어머니는 깡패를 만나서 힘겨운 삶을 살고 아들 에그시는 아버지 부재 속에서 비뚤어진 생활을 하다가 갤러헤이라는 신사를 만나서 킹스맨 그룹에 들어가 훈련을 받고 정의로운 일을 하게 된다. 주인공 에그시는 가족주의에 빠진 영화답게 어머니와 동생을 구하는 것은 물론 위기에 빠진 인류까지 구한다. 아버지의 부재와 아들의 성장, 가족과 인류의 구원 등은 너무나 흔히 보아온 익숙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본질에서는 기존의 스파이영화들과 맥을 달리하는 개성이 돋보인다. ‘매너’라는 열쇳말을 중심으로 이 영화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보자.
이 영화의 겉 이야기는 핸드폰에 유심칩을 박아 지구 구원을 핑계로 인류를 소멸시키려는 악당 발렌타인과 전지구적 어려운 문제를 음지에서 해결하려는 킹스맨 첩보 그룹 사이의 대결이다. 하지만 속 이야기는 겉으로는 고급스러운 신사이고 품격 높은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상은 속물인 사람들에 대한 풍자다. 주인공 에그시는 별 볼일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보통 청소년이지만 자기를 이끌어주는 삶의 멘토 해리를 만나면서 차츰 인간의 품격이 무엇인지 배워간다.
영화에서 겉으로 집안과 품격을 따지면서 속으로는 속물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으로 아서가 있다. 아서는 킹스맨의 실질적인 대표이지만 킹스맨들은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같은 명문대 출신이어야 하며 집안도 좋아야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겉으로는 신사인 양 우아를 떨어대지만 알고 보면 킹스맨을 대표하는 그도 속물이다. 랜슬롯의 후계자를 구하는 데서도 능력보다 집안이나 가문을 중시한다. 인종, 인간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악당 발렌타인에게 영혼을 팔았으며 에그시를 차별하고 자기 뜻을 따르지 않자 죽이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한다.
이 영화에서는 고급문화와 저속한 문화의 혼융을 통해서 겉으로는 고급문화 취향을 지향하지만 속으로는 속물적이고 우월감을 가진 사람들을 묘하게 비틀어 풍자한다. 드비어라는 이름으로 분장하고 주인공 해리가 악당 발렌타인을 찾아갔을 때 둘만이 함께 하는 고급 만찬 자리에서 햄버거를 내놓고 와인과 함께 먹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신사의 품격을 강조하는 상층 문화에 대한 하층 문화의 반란이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 마지막까지 악당과 타협하지 않고 정치적 순수성을 지키던 스웨덴 공주는 주인공 에그시에게 후배위 봉사까지를 권유하는 장면도 역시 풍자적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전형적으로 고급 문화에 속한 사람의 속물성이 드러나는 영화다. 해리와 에그시 대화에 등장하는 이 영화는 이미 영국적 가치 속에 매몰된 고급 취향의 영국인들을 비판한다.
이 영화에는 서양의 유명한 속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 maketh Man)이라는 대사가 두 번 나온다. 차를 훔치고 사고를 낸 에그시를 경찰서에서 빼낸 뒤 해리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해리는 매우 우울하다. 동료 랜슬롯이 정체 모를 죽음을 당한 까닭이다.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데 에그시를 괴롭히는 깡패들이 그를 몰아내고, ‘어린 남자를 만나 즐기고 싶으면 남창 있는 거리로나 가라’는 말에 분노를 참지 않는 해리는 술집 문을 잠그면서 ‘사람을 만드는 것은 매너’라는 말을 해준다. 그리고 결과는 매너 없이 굴었던 깡패들의 전멸. 그렇다 이 영화는 매너 즉 고귀함에 대한 이야기다. 속물이냐 매너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속물의 반대말은 신사나 매너, 고귀함이다. 이 영화에서는 고귀함에 대한 명대사로 헤밍웨이를 인용한다.
“인간이 고귀해지는 것은 남보다 우수할 때가 아니라 과거의 나보다 나아질 때다.”
우리는 남과 비교해서 더 우월한 것을 높고 귀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다르게 말한다. 나의 성장과 변화가 고귀함의 원천이다. 남보다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한 걸음 나아간 삶이야말로 진정한 고귀함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죽고 엄마마저 건달 두목의 첩 노릇을 하면서 인생이 비루해졌는데, 에그시라고 달리 잘 살아갈 방도가 있는 건 아니다.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도 거두고, 운동도 열심히 했으며 해병대까지 입대했던 에그시지만 삶에 대한 존중을 받지 못해 그 역시 반 부랑자와 다름 없는 거친 생활을 해왔다. 그렇지만 에그시에게는 본디 남들에게 없는 삶의 품격이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와 적어도 건달이 돼서 남을 괴롭히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에그시의 품격은 무엇인가?
첫째는 살아있는 것들, 특히 동물들에 대한 연민과 존중이다.
영화 초반, 건달패의 차를 몰던 에그시는 고양이가 길가에 있는 것을 보고 차 사고를 내면서까지 잡히는 것을 감수한다. 자기보다 더 약하고 아픈 것을 보면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 측은(惻隱)지심이 발동한 것이다.
에그시의 이런 마음은 훈련 과정에서 키우던 개 J.B(제임스 본드나 제이슨 본이 아니라 24시의 잭 바우어)를 죽이라는 명령 앞에서 주저하다가 차마 죽이지 못하는 심정과도 상통한다.
여자만도 못하다는 성적 차별과 편견의 희생자가 될지언정 같이 훈련하고 고생해온 동료개를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는다. 에그시를 이끌어준 해리나 같은 훈련생인 록시는 달랐다. 그들의 경우 개를 향해 총을 쏘라는 명령 앞에 복종했다. 주저함 없이 개에게 총을 쏴서 킹스맨의 일원이 되었지만 에그시는 달랐다. 해리는 공포탄이라며 쏘지 못한 에그시를 타박했지만 정작 본인은 발렌타인의 뇌파 조종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을 죽인 뒤에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에그시는 더 깊고 강한 연민의 힘으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한다. 에그시가 보여준 면모는 토론으로 치자면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심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대상, 어떤 존재라도 내가 마음대로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존중감.
둘째는 독창성과 팀웍을 존중한다.
독창성과 팀웍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토론에서는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특히 여느 싸움과 마찬가지로 토론에서도 팀웍은 절대적이다.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그시는 혼자서 살아가는 독창성도 뛰어나지만 팀웍의 중요성도 일찍 깨우친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에게 몇몇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과 팀웍을 이루어 호흡을 맞추지는 않았다. 킹스맨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첫 시험은 물속에서 생존하기였다. 록시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과학적인 생존법을 따라 샤워기 호스와 변기를 연결하여 산소호흡을 하고 생존법을 활용했으나 에그시는 유리를 깼다. 나름대로의 독창성 발휘한 것이다. 유리가 거짓 거울인 줄 에그시가 알았는지 모르지만 다른 친구들이 갇혀서 버티는 법을 선택했다면 에그시는 깨고 나가는 법에 도전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자 친구 하나가 죽었다.(실은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일하고 있다) 차기 킹스맨 랜슬롯을 만들어내고 결정하는 멀린은 도전자들에게 팀웍의 중요성을 배우라고 충고한다. 그럼에도 다른 친구들은 자기네끼리 분파를 만들어 에그시를 놀리기만 할 뿐 진정한 의미의 팀웍을 배울 의지나 능력이 없다. 자기네들 집안이 좋고 명문 학교를 다녔다는 자부심이 독이 된 것이다. 록시만이 홀로 따돌림 당하는 에그시를 존중하고 격려한다. 자부심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속물적인 허영이다. 인간의 가장 큰 적은 허영심이다. 허영심은 상대를 가벼이 여기고 무시한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독이 되는 것이다. 바둑에서도 ‘위기십결’이 있는데 그 가운데 경적필패(輕敵必敗)가 있다. 적을 가볍게 보면 반드시 패한다는 격언이다. 경적의 밑바탕에는 자만과 우월이 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문제를 풀지 않고 독불장군식으로 떨어져나가거나 패거리를 짓는 행태가 그러하다.
에그시가 독창성과 팀웍을 발휘하는 대목은 낙하산 훈련을 통해서다. 적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기 위해 낙하산을 최대한 늦게 펴야 한다. 그러면서도 목표 지점에 정확히 도달해야 하는데 더 큰 문제는 낙하하는 친구 6명 가운데 한명이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황하는 훈련생 사이에서 에그시는 기지를 발휘한다. 여섯이서 서로 힘을 합쳐 손을 잡은 뒤에 한 사람씩 낙하산을 펴서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그 오른쪽 사람이 그들 도와 함께 바닥에 착지하자는 제안을 한다. 일단 먼저 겁을 먹은 친구가 혼자 살겠다고 낙하산을 펴고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손을 잡은 친구들이 하나씩 낙하산을 펴서 무사히 착지해나가는데 마지막으로 록시와 에그시만 남는다. 록시의 낙하산을 편 에그시는 둘이 꽉 잡고 땅으로 내려와 목표 지점에 정확히 도착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몸을 던져 시험에 임하는 자세는 물론 함께 하는 길만이 답을 찾는 거라는 걸 알고 그걸 과감히 실천한다. 아무리 어려운 난제가 놓여 있고 상대방이 상황을 어렵게 만들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문제를 풀어나간다. 토론을 하다보면 종종 자기 역할이 끝났다고 상황을 방치하는 친구들이 있다. 또 문제 해결을 같이 하지 않고 혼자서 자기 역할에만 몰두해서 팀웍을 잃어버리는 친구들도 있다. 토론의 궁극적 목적은 상대방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다. 무엇을 배우는가? 상대에 대한 존중과 자기 팀에 대한 배려를 배우는 것이다. 그게 토론의 품격이다.
에그시의 세 번째 미덕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낙하산 훈련을 비롯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훈련생들에게 주어진 다음 과제는 미인계를 써서 상대방을 포섭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부수적인 실험이었고 그 과정에서 마취약을 먹은 록시와 에그시는 한 사람씩 최후의 진술을 강요당한다. 기차가 오는 길에 눕혀져서 자기 조직의 비밀과 스승을 밝히라는 과제 앞에서 에그시와 록시는 목숨을 걸고 비밀을 유지한다. 자기를 키워준 조직과 은사를 배신하지 않고 목숨을 바칠 각오로 약속을 지킴으로써 명예 즉 매너를 지킨다. 팀웍과 함께 팀 토론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일관성이다.
부산에서 학생들에게 토론 실습을 준비시키고 5대5 팀 토론을 했다. 주제는 원자력발전소 건설의 확대 여부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한국수자력원자력발전소 사장의 아들도 있었다. 이 학생들은 마이스터고 학생들로 전원이 국비로 학교를 다니고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고2,3 시절에 이미 대기업과 공기업에 상당수가 취직을 하는 학생들이다.
첫 번째 토론자가 맡은 찬성측 입론을 마치고 두 번째 토론자들이 반론을 시작하는데 갑자기 찬성측의 반론 역할을 맡은 친구가 찬성인지 반대인지 모를 애매한 발언으로 입장을 흐려놓았다. 두 번째 입론과 반론이 끝난 뒤 5분간의 전원 교차조사가 시작되었다. 반대측 학생들은 반론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두 번째 토론자를 집중 공격하기 시작했다. 논점이 흐리고 논거가 부족하자 그 친구를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진 것이다. 당황한 두 번째 친구는 급기야 자기 입장이 흔들리다 못해 반대쪽으로 기울어지더니 자기 팀에게 불리한 발언을 서슴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장내는 웃음 바다가 되었고 학생은 결국 자기 발언에 대해서 책임을 지겠다며 자리에서 물러나 다른 토론자에게 자리를 넘겼다. 팀 토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학생은 자기 팀의 팀웍을 살리고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 장렬하게 무너질지언정 입장을 바꾸지 않았어야 하는데 나약한 의지로 토론 과정에서 상대에게 굴복하고 만 것이다.
원탁토론이라면 상대방의 설득과 질문에 부족한 자기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한 단계 더 높은 논의를 진행할 수 있지만 팀이 같이 움직여야 하는 디베이트에서는 중간에 나만 살겠다고 입장을 바꾸는 것은 배신이다. 상대방은 물론 우리 팀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매너를 배워가는 에그시에게서 우리가 함께 배우고 생각할 문제다.
그밖에도 에그시가 매너를 배워가는 과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막 배운 에그시가 형식화된 예절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노크도 제대로 안 하고 아무 때나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던 에그시가 해리를 만나면서 인간의 품격, 예절의 힘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묻는다.
“매너를 배울 수 있는 것은 언제인가요?”
해리의 대답이 유머스럽다. 건방지듯 앞의 의자에 앉아 있는 에그시에게 해리가 말한다.
“의자에 앉아도 되는지 물을 때와 마티니 제조법을 알 때다.”
역시 물음의 자세만큼 중요한 예절은 없다. 물음은 상대에 대한 호기심, 관심 없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티니 제조법은 일종의 은유 정도로 이해하기로 하자.
서울 시민들은 정몽준 후보의 능력을 어디서 평가했을까. 아는 바대로 결과는 정몽준 후보의 참패였다. 세월호 민심이었을까? 접전이긴 했지만 경기에서도 여당이 이긴 걸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고 두 후보 간에 정책이 뚜렷이 차이가 나고 선명한 정책 대결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어느 한 가지만으로 승패가 갈리는 요인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토론을 사랑하고 평가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단 정몽준 후보는 토론의 기본, 즉 품격과 매너에서도 박원순 후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팀웍을 이끌어내는 조화로운 호흡 그리고 민심을 배반하지 않는 초심 그 어느 것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말의 품격, 삶의 태도에서 이미 승부가 난 것이다. 토론에서 꼭 논리로 이겨야만 할까? 논리와 품격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없이 품격을 고른다. 매너가 곧 논리다. 가식 없는 좋은 매너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