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최명길의 아들 최후량(崔後亮)의 묘갈명이다. 인용한 부분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최후량이 최명길에게 한 말이다. 최후량은 아버지만큼 역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 그리고 병자호란과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남았다. 최후량은 원래 최명길의 동생인 최혜길(崔惠吉)의 아들이었다. 생모가 일찍 죽어 양육할 사람이 없자 최명길이 데려와 길렀는데, 마침 최명길과 첫째 부인 장씨 사이에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최후량을 양자로 들여 후사로 세웠다. 그런데 장씨가 일찍 죽고 재혼한 둘째 부인 허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이런 경우 양자를 파양(罷養)하고 친아들을 후사로 바꿔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최명길은 이미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은 이상 사정이 달라졌다고 관계를 끊는 것은 천륜에 어긋난다며 결국 파양을 하지 않았다. 최후량이 21살 되던 1636년 병자년 12월에 청나라가 쳐들어왔다. 인조와 조정의 신료들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봉림대군 등 왕실 사람들과 양반가의 사람들은 강화도로 피난했다. 최후량도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아버지 대신 장남으로서 집안사람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들어갔다. 다음해 1월 강화도가 함락됐다. 청나라 군대는 약탈을 자행했다. 귀천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당시 청나라 군대에는 ‘최명길의 가족은 침탈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최명길이 청나라 진영을 드나들며 화친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최후량은 이 사실을 알고 홀로 청나라 군영으로 들어가 자신이 최명길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군사들의 약탈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청나라 장수는 그의 식솔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부하들이 약탈하지 못하게 조치했다. 이때 다른 양반가의 가족과 강화도 주민 중 상당수를 최씨 집안의 가솔이라고 속여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게 했다. 당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형 김상용(金尙容)도 강화도에 있었는데, 그는 강화도가 함락되던 날 성 남문에 쌓여 있던 화약더미에 불을 놓아 자결했다. 이후 조선의 조정은 화친이라는 이름의 투항을 결정하고 성을 나와 충성을 맹세했다. 청나라는 화친의 조건으로 볼모를 요구했다. 재상과 판서의 자제들이 볼모가 되어 심양으로 가게 됐고 최후량도 그중 하나였다. 얼마 뒤에 최명길도 심양으로 갔다. 명나라와의 싸움에 군대를 파병하라고 요구하는 청나라와 담판을 짓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조선인 수천 명을 속환해 왔다.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들, 소위 ‘환향녀(還鄕女)’들과의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도리를 앞세워 주장하는 신하들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했다. 1642년 최명길은 또다시 심양으로 갔다. 이번에는 사신이 아닌 죄인의 신분이었다. 청나라와 화친을 맺은 뒤 최명길은 화친이 부득이했음을 알리는 글을 명나라 장군 홍승주의 군문에 있던 조선인 승려 독보(獨步)에게 주어 명나라 조정에 전하게 했다. 이 독보의 왕래를 청나라에서 의심하기 시작했고 홍승주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결국 밀통이 발각됐다. 최후량이 걱정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영의정으로서 이 일을 관장했던 최명길은 청나라 측에 이 일은 자신이 독단적으로 벌인 것이며 왕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사형수를 수감하는 심양의 북관(北館)으로 압송됐다. 그 전에 조선에 돌아와 있었던 최후량은 급히 많은 양의 재물을 가지고 다시 심양으로 갔다. 당시 김상헌도 북관에 갇혀 있었다. 누군가 최후량에게 김상헌처럼 엄격하고 꼿꼿한 사람은 뇌물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겠냐고 묻자 최후량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북관으로 가서 김상헌에게 물었다. “산의생(散宜生)은 어떤 사람입니까?” 산의생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신하로 문왕이 주왕(紂王)에 의해 옥에 갇히자 뇌물을 바쳐 석방되게 한 사람이다. 김상헌은 대답했다. “옛날의 현명한 사람이었지.” 최후량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고 심양의 관련자들을 만나고 다니며 적극적인 구명 활동을 펼쳤다. 결국 최명길은 물론 북관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무사했고, 조선에 있을 때 서로 미워하고 대립하던 최명길과 김상헌은 북관에 갇혀 있는 동안 서로를 이해하는 벗이 되었다. 어쩌면 최후량이 최명길에게 한 말이 조금이나마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1645년 볼모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 등과 함께 풀려나 조선으로 돌아왔다. 김상헌은 북관에서 아버지의 수발을 드는 최후량을 오랜 시간 접하면서 호감이 생겼는지 그를 극구 칭찬하는 글과 함께 노래 한 수를 이별 선물로 전했다. 봄꽃 활짝 피어날 때 가을 낙엽 떨어질 때 / 春花爛熳秋葉落 춘화난만추엽락 슬프게 서로 그리워하며 밝은 달 바라보겠지 / 惆悵相思共明月 추창상사공명월 (『청음집(淸陰集)』, 「청문의 노래. 최후량에게 주다(靑門歌, 贈崔生後亮)」 중에서) |
2년 뒤 최명길이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최명길은 나라의 중대한 현안을 최후량과 의논한 적이 많았다. 위에서 인용한 내용도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다. 최후량이 20대 초반이던 시절이다. 아버지의 상을 치른 최후량은 낮은 벼슬을 몇 번 거친 것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별다른 활동 없이 지냈다. 많지 않은 나이에 부인을 잃었지만 재혼하지 않았다. 최명길과 최후량은 처한 자리가 매우 달랐고 업적이나 명성 또한 차이가 난다. 하지만 삶의 방식은 닮았다. 명분이나 관습을 존중하되 당면한 현실에 맞게 절충하고 타협하는 자세,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위험과 비난을 무릅쓰는 결기. 『인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최명길의 졸기(卒記)에서 최명길이 명분을 어그러뜨린 소인이라고 한껏 비난한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은 따라올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할 만하다.[然凡有緩急, 直前不避, 臨事剖析, 人無能及, 亦可謂救時之相也.]” 최후량도 그런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