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과 의식
현상학(現象學)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에 의해서 창시된 철학이다.
현상학이라 하면 ‘현상’이라는 용어 때문에 오해를 불러오기 쉽다. 현상이라 하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드러나 있는 모양을 기리키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낙엽이 지는 현상이 있다라든가, 물은 영하로 내려가면 어는 현상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철학자 후설이 말하는 현상은 그런 객관주의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라고 하는 주체 안에 놓인 대상을 말한다. 대상이 주체와 떨어져서 밖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보고 느낀 순수의식 안에 존재하는 현상을 말한다. 책상 위에 책이 있다고 하자. 그것은 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책을 보고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의 의식 속에 현상이 있기 때문에 책이 있는 것이다. 책이 책상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 안에 책이 있는 것이다. 책이 우리의 순수의식 안에서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지독한 주관주의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서유럽에서 나타난 철학적 경향은 실증주의가 지배하였다. 과학적인 실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탐구하려는 사조가 실증주의다. 인간의 심리조차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실험심리학이 대두되었다. 후설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데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탐구활동은 인간의 의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때까지는 이 의식에 대해 충분히 탐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상이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며, 인간은 대상을 어떻게 의미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 현상학의 주제다.
여기에 꽃 한 송이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고 꽃잎이 몇 개인지를 헤아리고, 어떤 사람은 색깔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생각할 것이다. 앞의 사람은 꽃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고, 뒤의 사람은 그것을 미술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어느 쪽으로 보는가에 따라 현상의 의미는 달라진다. 대상을 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 활동이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대상을 볼 때 주관적 관점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후설은 이를 반대한다. 무엇이 객관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현상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선입견이나 선판단을 버리라고 한다. 이것을 ‘판단 중지’ 또는 ‘사태 그대로’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이것을 에포케(epocho)라 한다. 사태를 그 자체로 보려면 기존의 습관적 태도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즉 판단을 중지해야 하는 것이다. 후설은 이것을 ‘괄호를 친다’라는 말로도 표현했다. 괄호는 내용이 비어 있다,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판단중지를 통해서 사물의 우연적 속성을 배제하고 본질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사물(대상)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통해서 우리의 의식 속에 구성된다.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것을 구성하는 원천인 의식의 내부로 되돌아가는 것, 이러한 인식 상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현상학적 환원이라 한다. 현상학적 환원이란 본질 인식의 근원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인데 판단중지, 괄호침 등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처럼 현상학은 현상을 탐구할 때 어떤 전제도 갖지 않고 현상을 그대로 보라고 한다.
의식이 어떤 대상을 만나는 것을 의식의 지향성(志向性)이라고 한다. 의식은 반드시 그와 관련된 대상이 필요하다. 의식은 어떤 대상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대상을 만날 때 맺는 관계를 지향성이라 한다.
우리의 의식은 어떤 대상을 만나 어떤 의미를 형성하게 된다. 꽃을 보면 아름답다는 의미가 가 생긴다. 이때 우리의 의식을 노에시스(noesis)라 하고 대상인 꽃을 힐레(hyle), 의식이 꽃을 보고 이루어진 의미를 노에마(noema)라 한다.
우리는 꽃에 대하여 판단을 중지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가 발견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연인에게 받은 따뜻한 사랑을, 또 어떤 이는 꽃을 보고 아름다운 그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현상학은 자신의 의식으로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면서 경험하는 주관성이다. 이를 그는 초월적 주관이라 하였다. 어린 시절과 현재의 세계는 다르며, 개인에 따라 세계의 차이가 있다.
자신이 세계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존재가 달라진다. 세계를 새롭게 의식하면 자신의 존재 또한 다르게 나타난다. 세계를 구성하는 의식으로 새롭게 세계를 만들어 가는 실존에 해당하는 의식이 초월적 주관이다. 이처럼 현상학이 실존주의에 영향을 미쳤다.
현상학은 자칫 독단주의에 빠질 여지가 있다. 후설은 이 독단을 염려해 상호주관성을 내세운다. 모든 개인은 각자의 주관성을 가지는데, 여러 사람이 각자 지니고 있는 주관성을 모으면 주관성 사이에는 서로 공통적으로 인정되는 부분이 있다. 이를 상호주관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모나리자를 보았을 때, 사람들마다 느끼는 감상은 각자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모나리자의 미소가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이러한 감상은 상호주관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첫댓글 대학1년차일 때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읽으며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이렇게 빛날 수가 있는가 하고요ㅡ. 현상학에 대한 겉핥기 식의 관념을 겨우 가지고서 친구들에게 거들먹거렸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그 부끄러운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오늘 비로소 현상학의 진수를 맛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심풀이로 쓴 것입니다.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