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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3397]家傳忠孝,世守仁敬 [가전충효,세수인경]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기풍을 지키도록 하라.
家: 집 가,傳: 전할 전忠: 충성 충孝: 효도 효
世: 인간 세,대 세 守: 지킬 수仁: 어질 인.敬;공경 경.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글자는
세종대왕이 손수 어필하여 전의 이성이신
효정공 이정간(貞幹)할아버님께 하사한 시다.
이시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오직 하나의 세종대왕의 필적이다.
그 후 우리 전의 이성은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을
가훈으로 받들어 대대손손 지켜 가는 충효와 예절의 가문이다.
조정의 충신 공신들이 효정공 할아버님의 충효를 송축하는 글을 모아
효정공 경수집(孝靖公 慶壽集)이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효정공 이정간(貞幹)할아버지는, 자는 고부(固夫),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1360년(공민왕 9)에 태어나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아버지
구직(丘直)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올라 종3품 사헌부 집의(執義)를 역임한 뒤,
1405년(태종 5) 강화부사로 부임해 당시 목장에 뛰어든 호랑이를
아무런 피해도 없이 포획해 비단을 하사받았다.
이후 사헌부의 요직과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강원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100세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하면서 노모를 봉양하는 데
전심전력하였다. 특히 자신도 80세의 노령이면서 100세의 어머니 앞에서는
색동옷을 입고 출천지효(出天之孝)로 이름을 날렸다.
세종(世宗)도 이 사실을 알고 그의 품계를 정2품으로,
부인을 정대부인(貞大夫人)으로 봉하고 궤장을 하사하였다.
서울특별시 구로구 전의 이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세종이 이정간에게 내린 어필을 모사한 글.
개설
이정간(李貞幹)[1360~1439]은 전의 이씨로 자는 고부(固夫),
시호는 효정(孝靖)이다. 사헌부 요직과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강원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100세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특히 자신도 80세의 노령이면서 어머니 앞에서는 색동옷을 입고
병아리를 희롱하여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등 하늘이 내린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세종이 이 사실을 알고 이정간의 품계를 정2품으로
올리고, 노모는 정대부인(貞大夫人)으로 봉하였다.
이때 이정간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어필을 내렸는데
이는 후대에 전의이씨의 가훈이 되었다.
형태 및 구성
세종의 어필은 고(故) 이정로(李正魯) 가족이 보관하고 있는
전의 이씨 족보에서 발견되었다.
이 족보의 권두에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자가 넉 자씩 두 줄로 적혀 있다.
풀이하면 “충과 효를 가문에 전하고,
어질고 공경하는 정신을 대대로 지켜 나가라.”라는 뜻이다.
특징
처음부터 이 족보에 새겨진 글씨가 세종의 친필이라 여겨진 것은 아니다. 이정간을 배향한 충청북도 청주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있는
『서원행록(書院行錄)』에 “세종대왕은 친필로
‘「가전충효 세수인경」’이라는 여덟 자를 정간에게 내렸다.”라는
내용을 보고 조선어학회 이극로(李克魯)가 1937년에야 족보를 확인하여
어필을 찾아내었다. 족보에 수록된 어필은 세종대왕의 친필로
추정되는
‘세종대왕어사희우정효령대군방문(世宗大王御賜喜雨亭孝寧大君房文)’
와 같은 필체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세종의 글씨가 아니라 모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의와 평가
비록 세종이 하사한 필적의 모사이나 서체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가치가 높다. 전의 이씨 문중 후손들은 이 어필을 가훈으로 전해
족보 권두에 새겨 그 정신을 이어받고 있는데,
그 뜻 또한 훌륭하여 다른 가문에서도 이 여덟 자를 가훈으로 삼기도 한다. 이 문구를 붓글씨로 쓰거나 모각하는 사례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전의이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도(棹:齒)이며,
그 후손 문의공(文義公) 언충(彦沖)과 효정공(孝靖公) 정간(貞幹),
문장공(文莊公) 혼(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그 중 혼은 시조 도의 8세손으로 고려 충선왕 때 첨의정승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익(翊)이 예안(禮安)으로 분적하여 예안이씨로 불렸으나
근래에 다시 전의이씨와 통합하였다.
언충은 고려 고종 때의 장군 천(仟)의 손자로서 충렬·충선·충숙·충혜왕의 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문학·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간은 천의 현손이며 언충의 재종손으로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임명되고
왕으로부터 사연(賜筵) 및 궤장을 하사받았다.
또, 죽음에 임박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거둥(擧動:임금의 행차)해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자의 어필(御筆)을 내려,
이후 전의이씨는 모두 이 여덟 자를 가훈으로 삼고 있다.
전의이씨는 조선에서만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7명, 대제학 2명,
청백리 8명, 공신 8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4만 1071가구에 13만 32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의(全義)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 면이다.
삼국시대는 백제의 구지현 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금지현으로 개칭하고
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전의현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삼한 통일에 전공이 혁혁한 이도(李棹) 응양대장군에게
익찬 2등공신으로 책훈 되셨다. 공신에 오르면 자손대대 영화를 누릴 수 있고
토지와 노비를 받아 경제적으로 혜택을 누릴 수가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시조 태사공 이도(李棹) 할아버지에게
군사적 요충지인 청주목인 전의 전동 지역 토지와 수천 호의 식음을 하사하시고
전산후로 봉작되셨다. 태사공 할아버님께서 전산후로 봉작 되었음은
고려 태조의 봉건 정치 체제하에서는 최고의 대재(大宰) 후에 봉작 되신 것이다.
그 시절 공작과 후작은 왕이라고도 칭하였다.
태사공 할아버지께서 받은 토지 지역은 소백산맥과 차령산맥이 이여 져 있고
금강 공주 전의 전동 지역은 후 삼국시대 적 전지이다.
원문=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五 / 墓碣
遯庵李處士墓碣
昔眉叟先生之嗣孫一疎翁。謁眉淵而還。喜謂余曰宜寧之有先生書院。遯庵李某之力爲多。刱廟宇立齋舍具書籍置學田。非至誠不能也。其尊賢衛道之心。養士興學之意。與白鹿之肇建何殊哉。余聞而善之。願一納拜。今來南方。遯庵沒已二十四年。其孫根玉草公行蹟而至。請銘其碣。余有素心。遂爲之銘曰。公天資聦穎。十歲能連誦少微通鑑一袠。從祖叔父試之。歎曰絶才也。因指案上中庸曰幾遍而可。對曰二遍。果一日無一字碍滯。又歎曰絶才也。若未成就。父兄之過也。遂使先習功令業。文藝精妙而屢 擧不中。悔曰命也。不可力求。乃扁其書室曰遯庵。潛心經傳。悅讀朱子書。村秀才子日聚講業。公作杏子詩。以寓奔競之俗而警之。初公欲負笈從師。而年壯猶未痘。不敢遠遊。以書爲贄於魯庵鄭參奉。如太極四端七情之辨。多所質問。魯庵詡之曰吾黨有人。嘗爲洛山洞主。修廢物謹享儀定參禮立學規。洛山。松庵李先生腏享之所也。一鄕諸院咸推公爲山長。公嘗曰星湖李先生。眉爺之嫡統。斯文賴之而未喪。當配食於眉院。假我數年。能事畢矣。齎志而沒。所著若干篇。如爲孝箴事天笏銘若序。亦可見實心實行之推也。
內行純至。至誠事父母。隣有不孝子。感而爲孝子。四十三丁母憂。時痘氣方熾。大人強之出避于山寺。哭泣不撤。有髡徒姓鄭者悔曰遺親罪也。卽還俗。四十九居父喪。不以氣衰或廢禮。兄弟三人。同居同業同樂。敎子姪嚴而有度。公諱龍奎字明五。全義之世。始祖諱棹。佐麗祖南征。護涉有功。賜是名。世襲簪組。至國朝有諱邱直議政府參贊。
生諱貞幹。孝養其親。世宗嘉之。
書家傳忠孝 世守仁敬八字賜之。
又賜慶宴。命朝紳作詩歌之。謚孝靖。生諱士寬。領議政封全城府院君。六世至諱山立號曰聾叟。京兆少尹。光海時退隱於宜寧四美亭。子孫因居焉。高祖諱虞弼。曾祖諱彙昌。祖諱義采。考諱邦鐸。妣載寧李氏 恒龍之女。公以壬寅歲生。以癸卯歲終。葬本鄕芝山之楮谷子坐原。配晉陽河氏甲浩之女。一男鉉祥。二女壻安斗植,成永根,鉉祥五男。根玉進士,根紹根錫,根萬,根一。二女壻,李徽峻,趙性簡。根玉四男龜魯。餘幼。
頭陀草冊十七 / [雜著]
代淸州儒生等。請額松泉書院。追配三賢䟽。
伏以崇儒重道。王者之先務。褒行尙節。有國之令典。是故聖王之御世也。苟有名德之士。可以羽翼斯道。矜式一世者。則必表章崇報。如恐不及者。盖所以風當時勵後學也。惟我國家。以文爲治。其宗儒術㫌
孝義者。逈出百王。故雖窮鄕下邑之士。一節一行。卓有可觀。則無不沾被褒嘉之典。是以列邑之間。先賢俎豆之所。比比相望。而其得賜恩額。列于祀典者。又不知其幾何。祖宗朝右文尙賢之意。於是尤可見矣。豈不猗歟盛哉。臣等所居之地。素稱湖左名州。而節孝之士。篤學之儒。無代無之。若麗之按廉使臣金士廉,本朝之參贊贈諡平度公臣崔有慶,觀察使贈諡孝靖公臣李貞幹,司諫臣朴光祐,處士臣李之冲,贈左承旨臣趙綱,處士贈左贊成臣李大建。尤其表著者也。今臣等略擧其平日言行。以備殿下之澄 省焉。士廉其文學行誼。爲一時衣冠之眉宇。而尤以氣節自許。與鄭文忠夢周相友善。見麗政衰亂。常憂憤忼慨。有殉國之志。及王氏亡。遂歸隱于州北
嶺山下。本朝徵拜司諫而終不起。遂作詩曰烈女猶不更。忠臣豈事二。以自明其志。臨沒謂諸子曰吾家世麗臣也。旣不能扶顚持危。又不能捐軀死國。將何顔面下見吾祖先乎。仍令薄葬。勿爲封樹。與平地等。後之人高其節義。至以遺令平塚。出題試士。其淸風高節。實無愧於吉再,徐甄諸人云矣。有慶天性至孝。事父母盡誠。及其歿。六年廬墓。太宗特拜大司憲。
後諸臣俱薦其才行可大用。歷典大州䧺藩。一淸如水。人皆嗟嘆。被抄於淸白吏。死後以孝旌閭。摭其事實。載於三綱行實。故至今邑人指其所居曰孝子里。貞幹自幼有至性。其父早死。事母極孝。老而不衰。甞慕老萊子斑衣娛親之意。爲嬰兒戱以悅母志。
世宗聞而嘉之。擢拜中樞院使。
遂以御筆書家傳忠 孝世守仁敬八大字以褒。
又令賜宴壽親。州人至今艷稱之。光佑天資粹美。潛心性理之學。與趙光祖諸賢。磨礲講討。深爲光祖所嘆賞。兄弟四人。同居一室。事親極孝。其行義著于鄕里。及己卯禍作。以新榜進 士。與同志之士申命仁,李若水等。齊聲陳䟽救光祖。爲門者所敺。血流被面。裂裳裹首。作詩曰此身已許王庭士。努力當年莫作羞。逮乙巳元衡將戕殺善類。火色滔天。光佑方居諫職。力爭前席。天怒大震。遂設庭鞫。光佑顔色不變。徐徐納供曰杖大如股。命盡今日。求仁得仁。又何怨尤。命竄鳳山。出城門卽死。追奪官爵。籍其産。宣廟初服。先正臣李珥上箚暴其冤死狀。命復其官。忠直之節。爲儒賢所奬許者如此。之冲自少講學于金安國之門。隱居求志。不就徵辟。德器渾厚。學問淹博。居親喪執禮甚苦。幾至滅性。士論以此高之。甞著三經輯覽等書。又抄程朱書及春秋傳要語。朝夕觀覽。以自警省。其見解之精。踐履之篤。實有人所不及者焉。如黃廷彧,李海壽諸名臣。皆其門人。其誘掖薰陶之功。亦可見矣。綱少有美質。性極孝友。早棄科業。博學力行。事親專以養志爲先。母病中思想野鴨羹。綱出野次涕泣徬徨。忽有一鶻搏鴨墜于前。執而供母。人稱爲孝感云。父母歿。廬墓前後六年。後以才行薦。筮仕出守恩津。値壬辰倭寇。倡義募勇士。守險設奇。斬獲甚衆。又鳩合千餘斛朱豆鐵千斤。陳䟽以献。請補𥹝械。上嘉之。至顯宗朝
因朝臣奏達。追贈承旨。而告身左方書以忠孝二字。人皆榮之。大建卽甲子名臣黿之曾孫也。生質淸明秀異。未十歲詞學驟進。及長受業於故徵士李潛,朴枝華之門。潛心性理。探究經旨。與枝華論卞大學格致之說。枝華亦歎其學識超詣。後遊於太學。太學諸生莫不敬服。至稱之曰館中顔子。甞渡漢江作詩曰氷下滄波幾仞深。行人莫不戰兢臨。若敎平地皆如此。步步無時放爾心。以此可驗其操履之篤實矣。惜其早歿。未能究其志業。而當時名流多與友善。無不咨嗟興悼。盛稱其學術之淵微。才行之高卓。噫。之前 數臣者。或守西山之媺節。或踵孟王之至行。或秉史魚之直道。或紹濂洛之遺緖。其出而顯於王朝者。用樹風聲。可以爲邦國之光華。退而隱於山林者。有功斯道。可以爲後學之楷範。而其杖屨逍遙之所。衣冠所藏之地。俱不出數十里之間。通德之里。下馬之陵。往往爲人所指点。則其流風餘韵。尙有不泯者。足以激勵頹俗。維持世敎者矣。是故一州之衿紳。擧懷高山景行之誠。同倡建祠妥靈之議。乃於丙戌間。臣等各鳩財力。創立祠宇。而年歲荐凶。加以國家多事。臣等無以上籲。尙未蒙恩額之頒。門楣無色。享儀多觖。
多士之抑欝。爲如何哉。夫臣鄕以湖左之䧺州。而七臣之高行峻節又如此。而獨不沾朝家褒崇之典。宣額之恩。則此不獨爲臣等之至恨。豈不爲聖朝之闕典耶。臣等玆敢不避煩猥。裹足上來。齊聲仰瀆於九閽之下。伏乞聖明特念諸臣卓異之行。俯察臣等懇迫之誠。亟命該曹。宣賜華額。以彰國家崇儒尙節之意。千萬幸甚。臣等窃又伏念故贈領議政臣李濟臣。曾在宣廟朝。來蒞是土。多施仁惠。至今州民莫不追思。稱賢長吏者。必以濟臣爲首。然此特濟臣之緖餘耳。慶源之役。宣廟特起濟臣爲北兵使。奮
不顧身。聞命卽行。指麾諸將。防守要隘。出奇兵以鏖虜衆盡殪之。連破其部落五百餘帳。盪掃窟穴。剪其黨羽。終使醜虜欵塞內附。邊塵不驚。其豊功偉烈。至今爀爀照人眼目。宣廟甞下敎以褒曰北變之作。如癰疽積年內蓄。一朝潰决。大命隨之。朝廷失慶源。而濟臣復之。又討滅反賊。此不世之勳也。濟臣若在。必使君父紓憂。此一節足可以建祠崇奉。而若其孝友之行。廉白之操。俱可爲後學之軌式。則宜其與七賢配食於一宇也。至於故相臣崔錫鼎。天質淸粹穎異。聦悟絶人。博極羣書。識解淹該。上自六經。下至濂 洛關閩之書。靡不硏究旨要。積有成說。至有象數之學。尤爲玄邃。洞貫精微。多發先賢所未發者。樂育人才。誘掖後學。出於至誠。雖窮鄕遠裔之士。摳衣來學者則受而舘之。供其衣食。盡心敎導。俾有成就。是以及門之士。多有彬彬可觀者。爲人樂易豈弟。名位雖極隆崇。而待人接物之際。恭謙和順。絶無一毫傲慢之意。故麻衣草履之士。常滿其座。無不得其歡心。賙恤窮交貧族。賴以擧火者甚衆。由是士論翕然歸之。稱爲儒相焉。臣等亦甞出入於錫鼎之門下。覿德薰化。所以敬慕者。尤倍他人。而顧此淸州。卽錫鼎松檟 之鄕也。間甞來往。而七臣祠宇之創建。又自錫鼎倡之。及其歿也。又卜葬於此。故一鄕士論。皆曰追配七賢者。宜莫先於錫鼎云云。於此尤可見公議之所在也。故司僕寺正臣李寅爀。卽大建之曾孫也。爲人沖和淵深。高潔正直。動靜語默。鮮有不合於理。盖其天資自然近道也。居家孝友篤至。豁達喜施與。賑窮賙急。惟恐不及。寒族窮交。歸之如家。歷典郡邑。而御下以寬。處事以簡。氷蘖自持。吏民愛戴如父母焉。平居靜處一室。終日危坐。人不見其喜慍。凡於勢利浮華窮達毁譽。視之泊如也。
待人一以誠信。容貌言語之
間。和氣藹然。眞意洋溢。令人自無鄙詐之心儇薄之態。故見之者莫不感悅敬服。一時儕友。亦以黃叔度,元紫芝一流人稱之。及當己巳之變。與朴泰輔諸人。同聲陳䟽。及泰輔死。遂退歸鄕廬。絶意仕宦。朝廷累除郡邑終不赴。家素貧寠。或至烟火累絶。妻子凍餒。而處之晏然。誘掖後進。必以先行誼後文藝爲務。故頗有成就之人。甲戌改紀之初。卽拜南陽府使。謂人曰今日朝著之局面雖換。而中宮尙處閭舍。難進之義。與己巳少無差殊。了無起色。及中宮復位。始乃趁賀班來謝。其志操之卓然。有如是者。故一世 之士。無不高其爲人。嘉其節行。而臣等從遊於寅爀者亦久矣。臣等窃以爲寅爀資稟之美。操守之確。亦可以振一世頹靡之習。而其生也游息於斯。其歿也又葬於斯。則實合躋祀於七賢之祠。玆敢因請額之䟽。略陳三臣平日本末。仰徹於黈纊之下。倘蒙 聖明亦加睿照。幷賜允許。以爲表章風勵之圖。則其有補於聖代崇賢興學之化。固不少矣。臣等不勝激切祁懇之至。
[주-D001] 祁 : 祈
巖棲集 卷三十四 / 行狀
成均生員吃窩 李公行狀 【己酉】
암서집 제34권 / 행장(行狀)
성균 생원 흘와 이공 행장 기유년(1909, 순종3)
〔成均生員吃窩李公行狀 己酉〕
공의 휘는 근옥(根玉), 자는 성함(聖涵), 자호는 흘와(吃窩)이다.
이씨는 선계가 전의(全義)에서 나왔으니,
시조 휘 도(棹)는 고려 개국공신 삼중대광 태사이다.
이조(李朝)에 들어와서 휘 구직(丘直)은 참찬 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지냈다. 부인은 낙안 김씨(樂安金氏)인데 나이가 102세에 이르렀다.
아들 휘 정간(貞幹)은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어머니를 받들기 위해
치사(致仕)하였는데,
세종대왕께서 ‘충과 효를 집안에 전하고 인과 경을 대대로 지킨다.’는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글자를 손수 써서 하사하였고, 또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어 공경들에게 시를 지어 읊으라고 하였으니,
이 분이 효정공(孝靖公)이다.
영의정에 추증된 이는 사관(士寬)이다.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이는 함장(諴長)이다.
안동 판관(安東判官)을 지낸 이는 수해(壽孩)이다.
무위부정(武威副正)을 지낸 이는 창조(昌祖)이다.
군수(郡守)를 지낸 이는 충영(忠榮)이다.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이는 장문(長文)인데
한성 서윤(漢城庶尹)에 불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산립(山立)은 광해군 때의 어지러운 정치를 만나
남쪽으로 내려와 의령의 세간리(世干里)에 지내며
사미정(四美亭)을 짓고 노년을 마쳤다.
그 뒤 여러 대에 걸쳐 숨어 빛나지 못하였다.
증조는 휘가 방탁(邦鐸), 호는 농와(聾窩)이고,
조부는 휘가 용규(龍奎), 호는 돈암(遯菴)이며,
부친은 휘가 현상(鉉祥)으로, 다섯 명의 아들을 두었기 때문에
가슬헌(歌瑟軒)이라고 호를 지었는데,
증조ㆍ조부ㆍ부친 모두 문학과 행의로 당시에 추중을 받았다.
모친은 은진 송씨(恩津宋氏)이니,
존양재(存養齋) 정렴(挺濂)의 사손(嗣孫) 요명(堯明)의 따님인데
현숙한 덕이 있었고, 순조(純祖) 갑신년(1824) 9월 30일에 공을 낳았다.
公諱根玉,字聖涵,自號吃窩。李氏系出全義,始祖諱棹,
高麗開國功臣、三重大匡、大師。入李朝有諱丘直,參贊議政府事。
夫人樂安 金氏,壽至百二歲。有子諱貞幹,以都觀察使,爲將母致仕,
世宗大王手書賜“家傳忠孝,世守仁敬”八字,
又賜几杖,設慶宴,使公卿歌詠之,是爲孝靖公。
贈領議政士寬。禮曹參判諴長。安東判官壽孩。
武威副正昌祖。郡守忠榮。上護軍長文,徵漢城庶尹不就。
山立値昏朝政亂,南下居宜之世干里,築四美亭以終老。
其後累世伏不耀。曾祖諱邦鐸,號聾窩;
祖諱龍奎,號遯菴;考諱鉉祥,有五男子,因號歌瑟軒,
皆以文學、行誼爲時推重。妣恩津 宋氏,
存養齋 挺濂嗣孫堯明之女,有淑德,
以純廟甲申九月三十日生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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