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장석남
늦은 밤에 뭘 생각하다가도 답답해지면 제일로 가볼 만한 곳은 역시 부엌밖에 달리 없지
커피를 마시자고 조용조용히 덜그럭대는 그 소리는 방금 내가 생각하다 놔둔 시詩 같고,(오 시詩같고)
쪽창문에 몇 방울의 흔적을 보이며 막 지나치는 빗발은 나에게만 다가와 몸을 보이고 저만큼 멀어가는 허공의 유혹 같아 마음 달뜨고,(오 시詩 같고)
매일매일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고요의 이 반질반질한 빛들을 나는 사진으로라도 찍어볼까? 가스레인지 위의 파란 불꽃은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기도 하여라
내가 빠져 나오면 다시 사물을 정리하는 부엌의 공기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아도 또 시詩 같고, 공기 속의 그릇들은 내 방의 책들보다 더 고요히 명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읽다가 먼데 보는 오 얄팍한 은색銀色 시집詩集 같고.
<시 읽기> 부엌/장석남
장석남은 뭇 존재와 생명들을 귀한 손도 오시는 것으로, 꽃도 피어나시는 것으로, 바람도 불어오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에겐 봉숭아 새싹도 작고 간절한 일생을 사는 것으로 안쓰럽고, 하늘이 손톱달도 말간 숨결을 내보이는 것처럼 아름다우며, 재잘거리는 여학생들도 막 첫 꽃이 피어나는 오이넝쿨처럼 아릿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그가 존재와 생명을 공경과 연민의 마음을 담은 ‘젖은 눈’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젖은 눈’은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입니다. 이렇게 겸허하고 따뜻하고,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에게 세상의 모든 것들은 대결의 대상이라기보다 동화의 대상입니다. 대결의 긴장을 접고, 세상에 자신의 속살과 속마음을 포갠 채 동화의 느낌에 젖어 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위 시는 장석남의 시집 『젖은 눈』 속에 들어 있습니다. 위 시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부엌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것이 세 끼의 식사라면, 그 식사가 준비되고 저장되고 그것을 위한 모든 도구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부엌입니다. 부엌은 바깥사회가 무리할 정도로 강조되고 권력을 지니면서 외진 곳 비루한 곳, 그저 그런 곳, 여성이나 들어가야 할 곳처럼 격하되었지만, 한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자 성스러운 곳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부엌입니다. 이 부엌을 관장하는 소위 부뚜막신이 ‘조앙신’입니다. 사람들은 한 채 농사를 마치고 떡을 져서 집 안의 곳곳을 관장하는 신들에게 떡을 바칠 때, 조왕신을 위한 떡도 꼭 부뚜막 위의 보기 좋은 곳에 넉넉하게 올려놓곤 하였지요. 조왕신은 이렇듯 우리의 식사를 돌보면서 부엌을 지배하고 있는 가정이 위대한 모신母神(the great mother)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은 이사를 갈 때, 불싸를 소중히 지니고 그 새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불씨는 한 집안의 음식과, 따스한 잠자리와 재산의 불 같은 증대를 보증하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그 불씨가 부엌의 아궁이 속에서 살아나서 한 집안을 지키고 있으니, 그 불씨가 살아 있는 부엌과 아궁이야말로 불의 신이 사는 거치이자 지성소인 셈입니다.
위 시를 보면 변방으로 부당하게 내몰렸던 부엌이 재탄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음 속에서 아무렇게나 소비되고 구겨졌던 부엌이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존재하고, 제자리로 귀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 시의 첫 행에 대해서는 우리는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늦은 밤까지 무엇인가를 하다가 마음이 허전해지면 제일 먼저 달려갈 만한 곳이 부엌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인정할 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늦은 밤이 아니더라도, 어른이나 어린이나 속이 헛헛해지고 마음이 제 모습을 놓친 듯하면 습관처럼 부엌으로 달려들어 냉장고 문을 여닫으며 먹을 것들을 찾곤 하지않는가요. 냉장고에는 품이 큰 어머니처럼 늘 제자리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이 몸을 뒤지며 성가시게 굴어도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결 같지요.
이어서 위 시의 제2행은 늦은 밤 커피를 마시려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김 부엌이 도구들을 덜그럭덜그럭 매만지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그 모습이야말로 시 같다고, 방금 쓰다가 뇌둔 미완의 시 같다고 말합니다. 시를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황으로 환기시키고 있는 이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개념은 명료한 듯하나 추상의 뼈대만 있고, 상황은 불투명한 듯하나 구체의 살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제3행을 보기로 합니다. 시인은 부엌의 쪽창 문으로 지나가는 빗발을 봅니다. 그런데 그는 그 빗발이 자신에게만 알몸을 보이고 떠나간 것 같다고 느낍니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는가요? 그러나 그에게만 이렇게 알몸을 보이고 떠났다고 믿는 그 빗발 속에서 시인은 우주의 유혹을, 허공의 매혹을 느낍니다. 그 유혹과 매혹 앞에서 그는 마음이 달뜨고, 그 달뜬 마음이 바로 시 같다고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시의 정서는 본래 평상시보다 조금 뜨거울 때가 많지요.
이제 제2연의 제1행을 봅니다. 참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납니다. 시인은 부엌이 우리들을 매일매일 먹여 살린다는 이 엄연한, 그러나 감동적인 사실을 슬쩍 재음미하도록 만들면서 바로 부엌 속에 깃든 고요의 반질반질한 빛들을 찾아냅니다. 잘 씻어놓은 그릇들과 부엌에 깃든 남모르는 고요는 얼마나 윤이 나고, 또 아늑하며, 사랑스럽던가요? 시인은 이런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다고 말합니다. 사진에 담지 않아도 이미 우리들이 마음속에 담겨 있는, 다만 인식하지 못했던 이 풍경들은 시인의 말로 인해 잊힌 사진첩의 한 장면이 살아나듯 불현 듯 살아납니다.
시인은 이어서 부엌의 가스레인지 불꽃에 시선을 줍니다. 가스레인지의 불은 아궁이 속의 불에 비하여 너무나도 문명화된 냄새를 깔끔하게 풍기고 있지만, 그래도 그 불은 부엌의 주인이며 부엌의 주재자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의 둘레로 모여 온갖 음식을 만들어 냅니다. 가스 불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음식도 만들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인은 이런 가스 불을 보며 어디에 꽂아두고 싶도록 어여쁘다고 말합니다. 불꽃의 남실대는 유혹은 꽃의 유혹보다 강하고, 그 아름다움은 그것의 무서움만큼 크고 강합니다. 불꽃을, 말 그대로 불의 꽃을, 아니 꽃 불을 화병에 꽂는 상상을 하는 것은 그 상상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시인은 커피를 마시겠다고 부엌으로 들어간 자신 때문에 부엌이 그들의 고요를 한동안 잃고 분주하게 움직였을 것임을 압니다. 그는 일을 마친 듯이 부엌 밖으로 나오며 부엌의 뒷모습에 관심을 둡니다. 부엌은 불한당 같은 그가 떠난 뒤에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금 그들의 내적 질서를 은은히 잡아가며 고요 속으로 들어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모습을 포착하여 보여주며 그 광경이야말로 또 한 편의 시 같다고 말합니다. 혼돈의 회오리바람 뒤에도, 묵묵히 스스로를 정돈하며 차분해지는 사물의 풍경, 그것은 다른 말 없이 그 자체로 시 같은 울림을 준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부엌의, 그 고요 속의 그릇들을 들여다봅니다. 그 그릇들 속에 담긴 삶과 우주의 비밀스러운 신비를 보면서 그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방 속에 있는 책들보다 한 수 위하고 생각합니다. 어디 한 수뿐이겠습니까? 추상의 언어와 도그마로 이루어진 책과 구체의 삶과 우주를 담고 있는 그릇은 그 차원이 아예 다르겠지요. 시인은 이 다른 차원이 삶을 살고 있는 그릇 앞에서 너무나 놀라, 아, 그 삶이야말로 가슴이 감동으로 밀물처럼 벅차올라 읽다가 먼 데를 볼 수밖에 없는 한 권의 “얄팍한 은색 시집”같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위 시에서 부엌이 품고 있는 시적인 장면들을 다양하게 만납니다. 그 장면들은 통하여 시가 어떤 것인지를 파스텔 풍의 물감이 몸에 스미듯, 그런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곡된 편견과 논리에 의하여 한쪽에 소외된 채 웅크리고 있던 부엌이 품위 있는 꽃처럼, 만개한 꽃처럼, 시인의 간절하고 공경어린 시심에 의하여 멋진 모습으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인간의 마음과 말에 의하여 밀려났던 존재가 제 모습을 찾으면서 재발견되고, 재탄생되고, 재음미되는 시와 삶의 신비를 만나게 됩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