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22일(현지시간) 폐막하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 13명의 선수를 '개인중립선수'(Individual Neutral Athletes·AIN) 자격으로 출전시켰다. 제정러시아 시절인 1908년 이후 가장 적은 규모. 성적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번 대회에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산악 스키(혹은 스키 등산)에서 니키타 필리포프가 은메달 하나를 수확했을 뿐이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이후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던 싱글 여자 피겨스케이팅에서도 6위로 밀려났고, 남자 부문에서는 아예 10위권 밖으로 떨어졌다.
산악 스키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필리포프 선수/사진출처:필리포프 텔레그램
하지만 성과는 따로 있었다. 2022년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스포츠계에서 밀려난 러시아가 이번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국제 무대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냈다.
개막식 선수 입장을 관중석에서 지켜봐야 했던 러시아 출신 선수들은 22일(한국시간 23일 새벽 4시30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리는 폐막식에는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내달(3월) 6일~16일 열리는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패럴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단은 국기와 국가 등을 사용할 수 있다.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가 지난해 9월 서울 총회의 결정에 따라 최근 러시아 선수 6명(벨라루스 선수는 4명)의 출전을 허용하고 국기 사용과 국가 연주 등을 최종 승인했다. 러시아가 패럴림픽에 국가 자격으로 출전이 허용된 건 2014 소치 동계 패럴림픽 이래 12년 만이다. 2018 평창, 2022년 베이징 패럴림픽에는 국가 차원의 조직적인 도핑 혐의로 러시아 선수단 자격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 선수단의 출전 여부는 아직 더 지켜보아야 한다.
rbc 등 러시아 언론은 7일 IPC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 조치를 해제했지만, 각 국제 연맹의 제한 조치로 러시아 선수들은 동계패럴림픽에 참가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이 문제는 이후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편집자)
앤드류 파슨스 IPC 위원장은 "출전 금지 조치가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하며, 결국 선수들만 고통받을 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패럴림픽 서울 총회 포스터/사진출처:대한장애인체육회
미국이 러시아의 출전 금지 해제로 돌아선 것은 일단 고무적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1일 트럼프 미 대통령의 글로벌 파트너십 특사인 파올로 잠폴리의 성명을 인용해 "미국은 러시아의 국제 스포츠 무대 복귀를 지지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이같은 태도는 우크라이나와 유럽 지도자들의 입장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패럴림픽 출전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패럴림픽 개막식을 보이콧하기로 했다.
NYT는 또 이번 동계올림픽 개막에 앞서 밀라노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의(서밋,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위원들이 러시아의 주요 대회 참가를 허용하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며 "러시아의 국제대회 참가 금지 조치가 끝날 것"으로 전망했다.
커스티 코벤트리 IOC 위원장은 회의에서 "스포츠는 모든 선수가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중립적인 플랫폼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거듭 피력했고, 요르단 출신의 IOC 위원인 파이살 알 후세인 왕자는 "궁극적으로 올림픽 정신은 배타성이 아닌 포용성에 관한 것이므로, 우리는 모두를 다시 불러들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러시아의 복귀를 촉구했다.
커스티 코벤트리 IOC 위원장/사진출처:olympics.com
이에 앞서 IOC는 지난해 12월 러시아와 벨라루스의 국제 스포츠 무대 복귀를 위해 유소년 단계에서부터 빗장을 풀기로 했다. 오는 10월 31일~11월 13일 세네갈 다카르에서 열리는 2026 다카르 유스 하계올림픽부터 러시아와 벨라루스에게 국기와 국가 사용을 포함한 '국가 정체성'을 허용하도록 권고했는데, IOC는 "유소년 선수들이 정부 정책에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회의 참석자들이 인식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각 국제 스포츠 연맹들도 이에 화답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요한 엘리아쉬 국제스키연맹(FIS) 회장은 IOC 회의에서 "대회 참가 자격의 박탈에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른 분쟁들을 모두 고려해 보다 명확한 원칙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미국의 베네수엘라 군사 작전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 작전을 언급하며 "우리는 정치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가 높은 축구에서도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러시아 축구팀의 대회 참가를 금지한 조치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며 "러시아가 국제 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보고 싶다"고 제재 해제를 주장했다.
러시아 스포츠의 국제 무대 복귀를 지지하는 잠폴리 트럼프 미 대통령 특사(왼쪽)과 인판티노 FIFA 회장/사진출처:페이스북
또 지난 1월에는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회장 뤼크 타르디프가 "러시아가 2028년 올림픽에 맞춰 복귀할 수 있도록 IOC가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흐름이 가장 불편한 곳은 역시 우크라이나다. 러시아 선수단의 출전 소식에 패럴림픽 개막식 불참을 선언하고, 올림픽 레슬링 그레코로만형에서 금메달을 딴 최고라다(의회) 청소년체육위원회 제1부위원장인 잔 벨레니우크는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지난 6일 텔레그램에 글을 올려 "새해에는 러시아 선수들이 대규모로 국제 스포츠 무대에 복귀 할 것"이라며 국가 차원의 대응을 촉구했다.
안드레이(안드리) 시비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도 대(對)러 규제 해제를 주장한 인판티노 FIFA 회장을 겨냥해 "도덕적으로 타락한 자"라고 직격했다. 또 러시아의 군사작전을 지지하는 인물들을 비판하고 기억하자는 취지로 개설된 우크라이나 웹사이트 '미로트보레츠'(Миротворец, 평화주의자라는 뜻)는 인판티노 회장을 곧바로 명단에 올렸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주의적 침략 행위와 정보 및 선전 선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다.
하지만 러시아가 국제 스포츠 무대로 복귀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관측도 있다. 동계올림픽 개막에 앞서 코벤트리 IOC 위원장은 지난 1일 러시아 올림픽위원회(ROC)의 복권과 선수들의 국제 대회 복귀에 대한 명확한 일정이 아직 없다고 선을 그었다. 미하일 데그탸레프 러시아 스포츠부 장관은 지난 1월 ROC의 복권에 대한 긍정적인 결정이 "향후 몇 달 안에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지만, 유럽 국가들과 우크라이나의 반발은 여전하다.
2026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러시아 출신의 구메니크(위)와 페트로샨의 공연 모습/텔레그램 캡처
이번 동계올림픽 대회에서 러시아에게 가장 충격적인 소식은 역시 피겨 스케이팅의 몰락이다. 러시아는 2014 소치 동계 올림픽부터 여자 피겨스케이팅 싱글 부분 금메달을 놓치지 않았는데, '개인중립선수'(AIN)로 출전한 러시아 피겨 선수권 대회 우승자인 아델리야 페트로샨은 그 맥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종합 6위에 그쳤다. 그녀는 러시아의 출전 선수 13명 중 몇 안 되는 유력한 메달 후보였지만, 결선 격인 프리스케이팅에서 쿼드러플(4회전) 점프에서 실수를 범했고, 더 이상 쿼드러플을 시도하지 않고 주저앉았다.
남자 싱글에 출전한 표트르 구메니크도 쇼트 프로그램에서 실수하는 등 러시아 피겨 스케이팅이 이번 대회에서는 무력했다. 올림픽 사용 음악의 저작권 문제가 구메니크 선수의 발목을 잡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있다.
실제로 경기 시작 사흘 전에 구메니크가 연습한 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음악 사용이 거부됐다. 구메니크는 급히 아르메니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에드가르 하코뱐의 '왈츠 1805'에 발을 맞춰본 뒤 경기에 나섰다. 구메니크는 람슈타인 밴드의 음악 사용권을 얻으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사용 음악의 저작권 이슈는 피겨 스케이팅에서 비교적 새롭게 불거진 문제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피겨 선수들은 그동안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을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국제빙상연맹(ISU)이 2014년 규정을 고쳐 가사가 있는 현대 음악의 사용도 허용하면서, 은반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문제는 저작권. 뮤지션들이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의 음악 무단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고 보상을 요구하는 사례가 이어졌다. 구메니크는 이번 올림픽을 위해 준비한 음악을 끝내 사용하지 못하고 '자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망가진 것은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스트라나.ua는 21일 "이번 동계올림픽은 우크라이나 팀에게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한 역대 최악의 대회였다"고 규정했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도 '노 메달'에 그쳤지만, 두 대회에서는 최소 5위 안에 드는 성적을 거두었으나 이번 대회에서는 6위 안에 드는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동계올림픽에서 헬멧 스캔들을 일으킨 헤라스케비치 선수/사진출처:페이스북
오히려 전쟁 희생자의 사진을 내세운 '헬멧 스캔들'로 올림픽 정신을 얼룩지게(?) 만들었다는 평도 일각에서는 나온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IOC가 '추모 헬멧' 사용을 고집한 스켈레톤 선수 블라디슬라프 헤라스케비치를 실격 처리한 것을 "침략자를 비호했다"고 비난했지만, IOC의 중재에 따라야 했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헤라스케비치 선수는 나중에 우크라이나 재벌 기업으로부터 금메달 포상금에 버금가는 지원금을 받았는데, 이 역시 '정치적인 술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