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기친람(萬機親覽)”은 ‘온갖 정사를 임금이 친히 보살핌’의 뜻을 가진 좋은 말이었습니다. 임금이 정사에 힘을 써 온갖 일에 관심을 가지고 백성을 살피면 그런 나라는 태평성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만기친람’은 나라와 국민을 힘들게 만드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이 복잡한 세상을 한 사람이 다 장악하고 자기 뜻대로 한다면 누구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이다.” 이주호 부총리가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을 두고 “입시에 대해 수도 없이 연구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한 말이라고 합니다. 박대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도 “대통령은 수십 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입시 비리 사건을 수도 없이 다뤄 봤고, 특히 조국 일가의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에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나라를 망칠 사람들입니다. 교육부 수장이 입시에 대해 대통령에게 배운다면 그 자리에 왜 앉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검사가 무슨 ‘대입제도의 해박한 전문가’라니 이게 아부의 말인지 자기 무식의 고백인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문재인 전 대통령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은 수십 년 동안 검사 생활을 하면서 입시 비리 사건을 수도 없이 다뤄 봤고, 특히 조국 일가의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에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다.”
윤석열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공정 수능’ 지시로 일대 혼란이 벌어지자 여당 정책위의장이 옹호하며 한 말이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한술 더 떴다. “나도 전문가이지만,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고 했다. 최근 정치권에서 나온 발언 중 가장 많은 웃음을 선사했다.
시쳇말로 ‘빵 터졌다’는 사람도 있다. “이재용 부회장을 수사하면 경제 전문가인가”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오랜 시간 기억될 아부성 발언이었지만, 쓴웃음만 짓고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고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이 있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는 2년 차 징크스가 있다. 1년 차 때는 조심스럽게 국정을 운영하다, 2년 차에 접어들면 자신감이 붙으며 조속히 성과를 내려고 한다.
김영삼정부 이후 세계화·햇볕정책·행정수도·4대강·통일 대박·최저임금 인상 등 각 정권의 대표 정책이 대부분 집권 2년 차에 본격화했다. 그러다 보니 과속에 따른 혼선과 권력 남용 등 부작용이 불거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 만기친람을 하기 시작하는 것도 대개 집권 2년 차부터다. 대통령에게는 온갖 정보가 모이고 최고의 참모들이 조언한다. 그러니 대통령은 ‘나는 다 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주변에서 부추기는 부류도 생긴다.
윤 대통령도 올해 들어 부쩍 “직접 챙기겠다”는 게 많아졌다. 수출, 민생 현안, 규제 철폐, 부동산 등 그 대상이 하나둘이 아니다. 급기야 수능 출제 방향까지 직접 챙기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라의 기본 틀을 바꾸는 사안들인데, 정부 내에서 추진 전략이 충분히 다듬어졌는지 의문이다.
윤 대통령이 논란의 최전선에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만 5세 조기 입학’, ‘주 69시간 노동’을 놓고도 대통령이 전면에 나섰다. 국민 삶에 직결된 주요 정책들이 윤 대통령의 한마디에 좌우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리고는 검사 출신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평생 관료로 일한 장관이 존재감을 잃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윤 대통령은 만기친람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적이 있다. 후보 시절인 2021년 10월 20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대통령이 만기친람해서 모든 걸 좌지우지하지 않고 각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이 능력과 기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국정을 시스템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만기친람의 부작용과 폐해를 익히 알고 있다는 말이다.
지난해 4월 한덕수 국무총리 후보자를 지명하면서도 ‘책임 총리제’를 강조했다. 5월1일 대통령실 인선 때도 “행정부가 창의적이고 핵심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도록 대통령실은 조율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또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하겠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했고 대통령실 규모를 줄였다. 그러나 책임 총리, 책임 장관은 보이지 않고 매사에 대통령만 보인다. 법무부, 국토교통부를 빼면 존재감 있게 이슈를 주도하는 장관이 누가 있나.
집권 2년 차가 되면 대통령뿐 아니라 국민도 변한다. 1년 차 때와는 달리 국민 기대치는 높아지고 평가는 냉정해진다. 국민이 첫해에는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지만 2년 차부터는 시비를 엄격히 따지고 구체적인 실적을 요구한다.
정권의 지나친 자신감과 허니문 기간을 끝낸 국민의 냉정한 시각이 맞물리면 국정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그래서 “국민과 정부의 관계는 1년 차 때는 연애 같고, 2년 차는 결혼 같다”는 말도 있다.
윤 대통령은 만기친람하기보다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나라의 모든 일에 손대려 하기보다 꼭 해야 할 일을 선택하고 그것에 역량을 쏟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만기친람을 부추기는 주변의 달콤한 말에 빠져서도 안 된다. 만기친람은 정책 혼선을 부르는 것은 물론 정부와 집권당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막는다.
모두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게 되는 권한 집중 현상도 발생한다. 역대 대통령의 실패에는 여지없이 만기친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세계일보. 박창억 논설위원
출처 : 세계일보. [세계포럼] 만기친람은 실패의 지름길
그러고 보면 윤 대통령의 2년 차 커브도 역대 대통령들과 다르지 않나 봅니다. 국정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장악력도 단단해지고 있고, 윤 대통령 특유의 캐릭터도 분명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이 너무 많아진다는 생각입니다. 이젠 윤 대통령의 말도 좀 세련되어질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도 거친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어 염려스럽습니다.
이전 대통령들과 완연히 다른 스타일이라고는 하지만 별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각 부처 장관에게 전권을 부여하되 결과에 대해 확실히 책임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실상 대통령의 의지만 과도하게 드러나니 이게 바로 한국 대통령제의 문제로 여겨지는 만기친람(萬機親覽) 양태인가 봅니다.
장마로 아주 습하고 날도 더워지는데 국민들에게 짜증을 주는 일을 대통령, 정부, 국회가 다 조심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