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알파마요산… 원주민 언어로 ‘강의 땅’이란 뜻
페루의 우아스카란국립공원Huascaran National Park은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길이 7,000㎞에 달하는 안데스산맥의 일부이다. 우아스카란은 잉카 황제 우아스카르의 이름에서Alpamayo 유래되었다. 페루에서 가장 높은 우아스카란산(6,768m)을 비롯해 우안트산Huantsan(6,369m), 우안도이Huandoy(6,360m), 초피칼키Chopicalqui(6,354m) 등 6,000m가 넘는 수십 개의 고산들이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험준한 고산과 광활한 호수, 날카로운 협곡이 어우러진 이곳은 가히 남미의 히말라야라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알파마요Alpamayo 산(5,947m)을 완벽하게 조망하며 걷는 산타크루즈Santa Cruz 트레킹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트레킹 코스 중의 하나이다.
매년 건기인 4~10월 사이에는 페루 안데스산맥의 눈 덮인 산들을 즐기려는 수많은 전 세계 트레커들이 와라즈huaraz라는 작은 도시로 몰려든다. 페루의 북부 도시인 와라즈는 트레킹을 위한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중심지인 마리스칼Mariscal 거리에 가면 많은 투어사와 장비렌탈숍,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거리는 세계 각 나라에서 몰려 든 수많은 트레커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의 관심사는 단연 트레킹, 그중에서도 산타크루즈 트레킹이 으뜸이다.
와라즈에서는 산타크루즈 트레킹 이외에도 많은 트레킹 코스가 있다. 하루 코스로는 69호수(4,600m)와 파스토루리Pastoturi 빙하(5,200m)가 인기 있고, 그곳에서도 안데스의 설산을 즐길 수 있다.
산타크루즈 트레킹은 카샤팜파Cashapampa에서 시작해서 바케리아Vaqueria까지 50여 km를 걷는 3박4일간의 일정이다. 카샤팜파에서 바케리아로 가는 시계방향은 오르막이 많아서 반시계방향보다는 조금 더 체력소모가 많다. 투어로 트레킹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투어사에 따라서 시작지점이 다르므로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투어로 트레킹을 가게 되면 당나귀에 짐을 싣고 걷게 되므로 가볍게 트레일을 즐길 수 있다.
1일 한낮의 폭염을 뚫고 고도 1,000m 올라
카샤팜파에서 야마코랄Llamacorral까지
투어사에서 새벽 6시 호스텔로 픽업을 왔다. 어제는 오기로 했던 픽업이 오지 않아서 나홀로 69호수에 다녀왔다. 항의를 해 볼까 생각했지만 4일 동안 함께 지내야 할 사람들이니 나중을 위해서 참았다. 이곳에선 가끔 픽업을 오지 않거나 한없이 늦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아직까지 큰 불편 없이 여행하고 있는 걸 감사해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나에게도 일어났을 뿐인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잠시 후 한눈에 봐도 한국인임을 알 수 있는 두 청년이 차에 탔다. 반가웠다. 3박4일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생겼으니! 그들은 재민과 준호.
카라즈Caraz에서 아침식사를 하고서 카샤팜파에 있는 카사casa에 도착하니 10시 반이 넘었다. 뮬에 3박4일 동안 먹을 먹거리와 텐트, 침낭 등 캠핑 장비까지 실었다. 뮬은 노새인데 당나귀에 비해 몸집이 훨씬 크고 힘이 세다. 남미에서 짐을 나르는 데 노새는 필수이다. 당나귀와 말을 교배해서 태어난 노새는 생식력이 없어서 새끼를 낳지 못한다. 한국인 3명을 포함해 모두 11명의 트레커, 가이드와 요리사까지 3박4일 동안 함께 동고동락할 한 식구가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입산신고도 하고 우아스카란국립공원 입장권도 구매했다.
11시 반이 넘어서 걷기 시작. 태양은 이미 중천. 햇살이 얼마나 뜨겁고 강렬한지 눈을 뜨기도 어렵다. 이때만큼 선글라스가 고마운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냥 서 있기도 더운 날인데 거의 1,000m를 올라간다. 게다가 시작지점이 해발 3,000m 정도이니 고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힘들 수도 있다. 다행히 우리팀엔 아직 고산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은 없다.
좁은 길 왼쪽에는 빙하로 인해 만들어진 협곡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양옆으로는 거대한 산이 트레커들을 호위하듯 부동자세로 도열해 있다. 우리는 열병식을 사열하듯 그 길을 걸어간다. 저 멀리 빙하로 인해 U자 계곡이 된 산타크루즈(6,259m)도 보인다. 계속된 너덜길에 독일인 친구는 발뒤꿈치가 벗겨져서 통증을 호소한다. 이제 첫날 시작인데 그녀의 갈 길이 너무나 멀다.
한낮의 더위도 수그러들고 조금 지루하다 싶은 무렵, 첫 캠프사이트 야마코랄에 도착.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는 캠프사이트에는 벌써 텐트 몇 동이 세워져 있었다. 텐트를 본 순간 마치 집에 도착한 것처럼 긴장이 풀리고 피로감이 몰려온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몸을 씻지도 않고 모두들 각자의 텐트로 들어간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먼저 도착한 요리사가 벌써 음식을 준비했나보다. 산행 후에 누군가 차려준 밥상을 받는 행복감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2일 환상적인 설산의 파노마라와 별들의 잔치 즐겨
야마코랄에서 타우이팜파Taullipampa까지
역시나 큰 산, 높은 산에 오면 추위를 각오해야 한다. 한기가 찾아오니 한낮의 뜨거웠던 태양이 그리워질 정도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재민은 지난밤에 몸이 꽁꽁 얼을 만큼 추워서 고생했다고 한다. 왜 유독 혼자서만 그 정도로 추웠을까? 텐트 안의 장비들을 모두 꺼내는 순간 이유가 밝혀졌다. 재민과 준호는 매트리스 없이 잤던 것. 캠핑을 해보지 않아서 매트리스가 있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땅의 습기와 찬 기운이 그대로 올라왔으니 얼마나 추웠을지? 그래도 젊어서 그런지 밤새 추위에 떨었어도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 듯하다.
오늘은 고도 3,650m에서 4,420m로 올라갔다가 다시 4,250m까지 내려오고, 장장 8시간에 걸쳐서 2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날이다. 가이드는 각자의 컨디션 조절에 특히 주의하라고 한다. 한 명이라도 낙오되면 팀 전체의 트레킹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모두들 기대감과 함께 긴장감을 가지고 출발했다. 새벽공기는 꽤 쌀쌀했지만 해가 올라오며 키타라후Quitaraju(6,036m) 설산의 끝자락이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장관을 바라보고 있으니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큰 산에 처음 오는 재민과 준호는 소풍 온 어린아이마냥 신이 나서 걷는다.
어디선가 많이 본 봉우리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너무 멋지다. 눈 덮인 새하얀 봉우리에 영롱한 빛이 반짝인다. 걷다 뒤돌아보고 다시 걷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저 봉우리 이름은 뭘까? 가이드를 만나 비로소 답을 얻었다. 그 봉우리는 바로 알파마요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라미드 모양의 봉우리. 알파마요는 원주민의 언어인 케추아어로 ‘강의 땅Tierra del rio’이라는 뜻이다. 1962년 독일에서 열린 산악회의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1위에 뽑혔다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사 파라마운트사의 로고에 나오는 설산이기도 하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완전히 발가벗은 알파마요를 보았으니 나는 3대가 덕을 쌓아놓은 사람인듯!
이곳은 알파마요 전망대. 알파마요를 등지고 이젠 해발 4,420m 에 있는 아르우아이코차호수Laguna Arhuaycocha로 향한다. 이 코스는 옵션 코스란다. 호수는 산속에 숨어서 보이지 않고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푸카르히르카Pucarjirca(6,046m), 린리이르카Rinrihirca(5,888m), 타우이라후Taulliraju(5,830m). 웅장한 고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설산의 빙하가 히말라야만큼이나 깨끗한 순백이다. 손으로 만질 때 느낌이 궁금하다. 눈 한줌을 떼어먹는 시늉을 해본다. 설산을 마주보고 평원을 한참 걸었다. 그 어디에도 호수는 있을 것 같지 않더니 마침내 호수와 타우이팜파의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 초입에 배낭을 풀어놓고 호수를 향해 오른다. 매우 가파른 오르막이다. 빙하가 녹아서 만들어진 빙하호수는 대부분 큰 산 바로 아래에 숨어 있다. 69호수도 그러했다. 숨을 몰아쉬며 오른 길의 마지막에 아르우아이코차호수가 나타났다.
린리이르카의 빙하가 아르우아이코차호수까지 내려와 있었다. 숨어 있던 호수를 발견하니 그 비경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아르우아이코차호수 같은 곳에 오면 대부분의 외국인 트레커들은 수영을 즐긴다. 우리에게도 수영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자신이 없어서 극구 사양을 했다. 저녁식사 시간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나신으로 수영을 즐긴 후였다. 잠깐 후회가 밀려왔다. 빙하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인생 경험을 놓치다니….
아르우아이코차호수에서 타우이팜파까지 가는 길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앞쪽에는 오전에 보았던 알파마요가 구름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오전에 이어 다시 만나니 더 반가웠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트레킹 내내 나의 두 눈은 알파마요를 떠나지 못했다.
산을 오를 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며 자신 있게 걸었던 재민이 내리막길에서 두통을 호소했다. 오르막은 그런 대로 참을만한데 내리막은 뇌가 흔들리듯이 힘들다고 했다. 약을 먹고 쉬엄쉬엄 걸었지만 별달리 차도가 없었다. 타우이팜파 캠프 사이트에 도착해서는 졸도하듯이 쓰러졌다. 저녁식사 전에 나온 간식도 먹지 못하고….
종일 강행군을 해서인지 모두들 오늘따라 더 맛나게 저녁식사들을 한다. 재민 말고도 미국인 친구가 고소증세로 저녁식사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내일은 거뜬하게 걸었으면 좋겠는데….
식사 중에 무언가 붉은빛이 느껴져서 밖으로 나가본 순간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눈앞에 보이는 저 광경이 꿈인지 실제인지? 저만치 타우이라후산에 주황색 불이 붙고 있었다. 저무는 태양의 빛이 산에 불을 지른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계곡의 항아리에 누군가 불을 피워놓은 것 같기도 한 황홀하고 신비로운 빛의 천국이었다. 다들 식사를 하다 말고 접시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황빛 태양이 세상을 물들이고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숨을 멈춘 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서 좀더 가까이 가려고 뛰었다. 혹여 렌즈에 담기 전에 그 꿈같은 순간이 사라질까봐.
햇님이 사라진 초저녁부터 예상치 않았던 별님들이 쏟아졌다. 선셋의 흥분이 사라지기도 전에 캄캄한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보석같은 별들, 그 별들이 쏟아내는 빛의 세례를 받으며 한동안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별빛은 타우이라후의 모습까지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빛깔로 변화시켰다. 산 전체가 온통 은의 광산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어떤 밤도 이보다 황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는 산이 아닌 우주다.
3일 산타크루즈 최고봉 푼타 우니온Punta Union(4,760m) 올라
타우이팜파에서 우아리팜파Huaripampa까지
밤새 텐트를 두들기던 비가 멈췄다. 부슬비가 살짝 뿌리고 산봉우리엔 구름이 한가득 얹혀 있다. 어제 참 오묘한 선셋을 보여 주던 그 모습은 간데없고 안개에 가득 차 있는 타우이라후는 다른 산들과 다르지 않다. 마치 꿈을 꾼 것 같다. 안개가 걷히고 파란하늘이 나오니 타우이라후는 늠름한 장군의 모습이다.
어제 고산증세로 힘들어했던 재민은 많이 좋아졌다. 걷는 동안 비가 쏟아질까 염려스러워 오버트라우저 바지를 입었다. 우기라 걱정은 했지만 어제 그제 걷는 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정말 감사했다. 이곳은 4,400m. 그래서인가 아침엔 더욱 쌀쌀하다. 바람까지 불어 주니 체감온도는 뚝 떨어진다. 준비해 온 경량 패딩을 꺼내 입었다. 고산트레킹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체온유지이다.
한참동안 평원을 따라 편하게 걸었는데 지그재그로 오름길이 계속된다. 이 길의 가장 높은 지점인 푼타 우니온Punta Union(4,760m)까지 오르는 길이다. 뮬도 힘겹게 오른다. 뮬의 등에 진 짐이 유독 한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니 측은해 보인다. 사람도 동물도 힘들기는 매 한가지.
아래쪽엔 에메랄드빛 빙하호수와 타우이라후가 안개 속에 휘감겨 있다. 어제 저녁이나 아침과 또 다른 신비한 모습이다. 날씨가 화창했더라면 눈부신 설산과 에메랄드빛의 빙하호수, 광활한 평원이 한 폭의 유화처럼 진한 모습으로 있겠지. 그러나 안개에 휩싸인 모습도 마치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아서 느낌만 다를 뿐 아름다운 장관은 그대로다. 힘겹게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또 다른 이들이 힘겹게 오르고 있다. 저 멀리 광활하게 펼쳐지는 계곡의 끝에는 어제의 캠프사이트인 타우이팜파도 보인다. 저곳을 걸어왔다니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작고 큰 바위가 살짝 내리는 빗물에 젖어 더욱 미끄럽다. 모두들 조심하고 걷고 있는데 재민이 미끄러졌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푼타 우니온을 무사히 통과하고 이젠 우아리팜파로 향하는 내리막길. 이제 고생은 끝났다. 천천히 조심스럽지만 여유 있게 우리들은 마치 큰 전쟁에서 이기고 온 전사처럼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그곳엔 크고 작은 빙하호수들이 참 많이 있다. 한 곳은 완전한 하트 모양. 우리 셋은 모두 손으로 하트를 그리고 사진을 한 장씩 찍었다. 재민도 이제는 컨디션이 회복된 것 같다. 즐기며 걷다 보니 우아리팜파가 저만치 보이는데 한켠에선 비쿠냐Vicuna가 놀고 있다. 비쿠냐는 해발고도 3,000?4,000m의 안데스산맥 고지대 초원에 서식한다.
캠프사이트에 도착해서 조금 쉬려니 비가 내린다. 얼마나 다행인지… 종일 조금씩 내리던 비가 저녁 식사 후에는 장대비가 되었다.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점점 커진다. 내일 2시간 정도만 내려가면 트레일이 끝나는데 비가 멈추길 바랄 뿐.
4일 다시 문명의 길로 돌아오다
우아리팜파에서 바케리아까지
밤새 비가 내렸다. 몇 번을 뒤척이다 잠을 깼다. 양 옆의 두 사람은 어느 때처럼 단잠을 잔다. 잠시 단잠에 들었는데 새벽녘 비가 멈추고 아주 많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깼다. 경쾌하고 기분 좋은 새소리 덕분에 비따위는 생각에서 없어졌는데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고 새들도 어디론가 비를 피해 날아갔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날은 밝았다. 텐트 밖으로 나오니 비도 거의 그쳐간다. 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이렇게 상쾌하고 여유롭고 편안한 아침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가. 다른 날보다 한 시간 늦게 출발하는 조그만 여유가 이렇게도 행복하구나.
아침에 내리던 부슬비는 어느새 그쳤다. 길은 어제 밤의 비로 진흙탕. 발을 딛기 어려운 곳들이 꽤 많았다. 길가엔 드문드문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보이고 아이들이 나와서 길을 걷는 우리들을 구경한다. 작은 상점에는 몇 가지 과자와 음료수가 놓여 있다. 시끄럽거나 복잡하진 않지만 그래도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 것 같다. 음식점에서만 보던 꾸이Cuy를 기르는 모습도 보았다.
콜카밤바Colcabamba까지 1시간여의 내리막길. 상점구경, 사람구경을 하며 가볍게 걷는다. 그리고 바케리아까지 1시간의 오르막길도 힘들지 않게 마무리를 했다. 그렇게 3박 4일의 산타크루즈 트레킹이 끝났다.
처음으로 4,000m 이상의 고산을 걸었던 재민과 준호는 어느 누구보다 기쁨의 크기가 더욱 컸으리라. 그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이젠 계곡물에 고양이 세수를 하지 않아도, 텐트에서 추위와 싸우며 자지 않아도, 비 내리는 날 배낭을 메고 걷지 않아도 된다.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 안데스의 노래
안데스는 ‘하늘까지 이어지는 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파른 고원지대에 밭을 일구고 살았던 인디오들의 삶이 스며 있다. 안데스를 걸으며 여고시절 들었던 노래,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가 떠올랐다. 잉카의 마지막 왕이 죽은 후 콘도르로 환생해 안데스 창공을 날아다니며 인디오들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로 잉카의 몰락과 서글픈 전설이 담긴 노래라고 한다. 원래는 ‘콘도르가 날다’ 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는 왜 ‘철새는 날아가고’ 라고 번안되었는지 모르겠다. 콘도르가 나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영혼이 낯선 이방인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준 것일까.
4,000m급의 고산 트레킹, 4일 내내 아무런 사고 없이, 황홀함과 행복감을 선사해 준 산타크루즈 트레킹. 걷는 내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알파마요의 선명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한다.
설산과 빙하호수의 눈부신 비경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었던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타우이팜파에서의 불타는 일몰과 별들의 잔치는 나에게 우주의 중심에 선 듯한 황홀감을 안겨주었다. 그것을 렌즈에 담을 수 있었던 것 또한 크나큰 행운의 하나다. 엘콘도르 파사, 안데스의 노래가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트레일 정보
1일차 이동경로 카샤팜파-야마코랄
고도변화 2,875m~3,775m
이동시간 11:40-15:50(4시간 10분)
이동거리 10.9km
2일차 이동경로 야마코랄-타우이팜파
고도변화 3,775m~4,420~4,250m
이동시간 07:30-15:50(8시간 20분)
이동거리 20.4km
3일차 이동경로 타우이팜파-우아리팜파
고도변화 4,250m~4,750m~3,670m
이동시간 07:10-15:00(7시간 50분)
이동거리 15.6km
4일차 이동경로 우아리팜파-바케리아
고도변화 3,670m~3,400m~3,630m
이동시간 08:00-09:55(1시간 55분)
이동거리 6.0km
참고
■캠핑하는 동안 샤워는 할 수 없다. 물티슈를 넉넉히 준비하면 좋다.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위한 여분의 배터리가 필요하다.
■식수는 첫째 날만 준비하면 된다. 둘째 날부터는 끓인 물을 식수로 제공한다.
■고산약을 예비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고산의 밤은 생각보다 무척 춥다.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다운 재킷이나 핫팩을 준비한다.
■고산의 날씨는 수시로 변한다. 언제 올지 모를 비에 대비해 레인재킷을 준비한다.
■등산용 스틱을 사용하면 4일 동안 계속되는 트레킹의 피로도를 줄일수
페루의 우아스카란국립공원Huascaran National Park은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길이 7,000㎞에 달하는 안데스산맥의 일부이다. 우아스카란은 잉카 황제 우아스카르의 이름에서Alpamayo 유래되었다. 페루에서 가장 높은 우아스카란산(6,768m)을 비롯해 우안트산Huantsan(6,369m), 우안도이Huandoy(6,360m), 초피칼키Chopicalqui(6,354m) 등 6,000m가 넘는 수십 개의 고산들이 만년설로 뒤덮여 있다. 험준한 고산과 광활한 호수, 날카로운 협곡이 어우러진 이곳은 가히 남미의 히말라야라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알파마요Alpamayo 산(5,947m)을 완벽하게 조망하며 걷는 산타크루즈Santa Cruz 트레킹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트레킹 코스 중의 하나이다.
매년 건기인 4~10월 사이에는 페루 안데스산맥의 눈 덮인 산들을 즐기려는 수많은 전 세계 트레커들이 와라즈huaraz라는 작은 도시로 몰려든다. 페루의 북부 도시인 와라즈는 트레킹을 위한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중심지인 마리스칼Mariscal 거리에 가면 많은 투어사와 장비렌탈숍, 게스트하우스 등이 있다. 거리는 세계 각 나라에서 몰려 든 수많은 트레커들로 북적거린다. 그들의 관심사는 단연 트레킹, 그중에서도 산타크루즈 트레킹이 으뜸이다.
와라즈에서는 산타크루즈 트레킹 이외에도 많은 트레킹 코스가 있다. 하루 코스로는 69호수(4,600m)와 파스토루리Pastoturi 빙하(5,200m)가 인기 있고, 그곳에서도 안데스의 설산을 즐길 수 있다.
산타크루즈 트레킹은 카샤팜파Cashapampa에서 시작해서 바케리아Vaqueria까지 50여 km를 걷는 3박4일간의 일정이다. 카샤팜파에서 바케리아로 가는 시계방향은 오르막이 많아서 반시계방향보다는 조금 더 체력소모가 많다. 투어로 트레킹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투어사에 따라서 시작지점이 다르므로 미리 확인하는 것이 좋다. 투어로 트레킹을 가게 되면 당나귀에 짐을 싣고 걷게 되므로 가볍게 트레일을 즐길 수 있다.
카샤팜파에서 야마코랄Llamacorral까지
투어사에서 새벽 6시 호스텔로 픽업을 왔다. 어제는 오기로 했던 픽업이 오지 않아서 나홀로 69호수에 다녀왔다. 항의를 해 볼까 생각했지만 4일 동안 함께 지내야 할 사람들이니 나중을 위해서 참았다. 이곳에선 가끔 픽업을 오지 않거나 한없이 늦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도 아직까지 큰 불편 없이 여행하고 있는 걸 감사해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나에게도 일어났을 뿐인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잠시 후 한눈에 봐도 한국인임을 알 수 있는 두 청년이 차에 탔다. 반가웠다. 3박4일 동안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생겼으니! 그들은 재민과 준호.
카라즈Caraz에서 아침식사를 하고서 카샤팜파에 있는 카사casa에 도착하니 10시 반이 넘었다. 뮬에 3박4일 동안 먹을 먹거리와 텐트, 침낭 등 캠핑 장비까지 실었다. 뮬은 노새인데 당나귀에 비해 몸집이 훨씬 크고 힘이 세다. 남미에서 짐을 나르는 데 노새는 필수이다. 당나귀와 말을 교배해서 태어난 노새는 생식력이 없어서 새끼를 낳지 못한다. 한국인 3명을 포함해 모두 11명의 트레커, 가이드와 요리사까지 3박4일 동안 함께 동고동락할 한 식구가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입산신고도 하고 우아스카란국립공원 입장권도 구매했다.
11시 반이 넘어서 걷기 시작. 태양은 이미 중천. 햇살이 얼마나 뜨겁고 강렬한지 눈을 뜨기도 어렵다. 이때만큼 선글라스가 고마운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냥 서 있기도 더운 날인데 거의 1,000m를 올라간다. 게다가 시작지점이 해발 3,000m 정도이니 고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힘들 수도 있다. 다행히 우리팀엔 아직 고산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은 없다.
좁은 길 왼쪽에는 빙하로 인해 만들어진 협곡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양옆으로는 거대한 산이 트레커들을 호위하듯 부동자세로 도열해 있다. 우리는 열병식을 사열하듯 그 길을 걸어간다. 저 멀리 빙하로 인해 U자 계곡이 된 산타크루즈(6,259m)도 보인다. 계속된 너덜길에 독일인 친구는 발뒤꿈치가 벗겨져서 통증을 호소한다. 이제 첫날 시작인데 그녀의 갈 길이 너무나 멀다.
한낮의 더위도 수그러들고 조금 지루하다 싶은 무렵, 첫 캠프사이트 야마코랄에 도착.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는 캠프사이트에는 벌써 텐트 몇 동이 세워져 있었다. 텐트를 본 순간 마치 집에 도착한 것처럼 긴장이 풀리고 피로감이 몰려온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몸을 씻지도 않고 모두들 각자의 텐트로 들어간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먼저 도착한 요리사가 벌써 음식을 준비했나보다. 산행 후에 누군가 차려준 밥상을 받는 행복감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야마코랄에서 타우이팜파Taullipampa까지
역시나 큰 산, 높은 산에 오면 추위를 각오해야 한다. 한기가 찾아오니 한낮의 뜨거웠던 태양이 그리워질 정도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재민은 지난밤에 몸이 꽁꽁 얼을 만큼 추워서 고생했다고 한다. 왜 유독 혼자서만 그 정도로 추웠을까? 텐트 안의 장비들을 모두 꺼내는 순간 이유가 밝혀졌다. 재민과 준호는 매트리스 없이 잤던 것. 캠핑을 해보지 않아서 매트리스가 있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땅의 습기와 찬 기운이 그대로 올라왔으니 얼마나 추웠을지? 그래도 젊어서 그런지 밤새 추위에 떨었어도 컨디션은 나쁘지 않은 듯하다.
오늘은 고도 3,650m에서 4,420m로 올라갔다가 다시 4,250m까지 내려오고, 장장 8시간에 걸쳐서 20km 이상을 걸어야 하는 날이다. 가이드는 각자의 컨디션 조절에 특히 주의하라고 한다. 한 명이라도 낙오되면 팀 전체의 트레킹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모두들 기대감과 함께 긴장감을 가지고 출발했다. 새벽공기는 꽤 쌀쌀했지만 해가 올라오며 키타라후Quitaraju(6,036m) 설산의 끝자락이 황금색으로 물들어가는 장관을 바라보고 있으니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큰 산에 처음 오는 재민과 준호는 소풍 온 어린아이마냥 신이 나서 걷는다.
어디선가 많이 본 봉우리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너무 멋지다. 눈 덮인 새하얀 봉우리에 영롱한 빛이 반짝인다. 걷다 뒤돌아보고 다시 걷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저 봉우리 이름은 뭘까? 가이드를 만나 비로소 답을 얻었다. 그 봉우리는 바로 알파마요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라미드 모양의 봉우리. 알파마요는 원주민의 언어인 케추아어로 ‘강의 땅Tierra del rio’이라는 뜻이다. 1962년 독일에서 열린 산악회의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1위에 뽑혔다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사 파라마운트사의 로고에 나오는 설산이기도 하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완전히 발가벗은 알파마요를 보았으니 나는 3대가 덕을 쌓아놓은 사람인듯!
이곳은 알파마요 전망대. 알파마요를 등지고 이젠 해발 4,420m 에 있는 아르우아이코차호수Laguna Arhuaycocha로 향한다. 이 코스는 옵션 코스란다. 호수는 산속에 숨어서 보이지 않고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푸카르히르카Pucarjirca(6,046m), 린리이르카Rinrihirca(5,888m), 타우이라후Taulliraju(5,830m). 웅장한 고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설산의 빙하가 히말라야만큼이나 깨끗한 순백이다. 손으로 만질 때 느낌이 궁금하다. 눈 한줌을 떼어먹는 시늉을 해본다. 설산을 마주보고 평원을 한참 걸었다. 그 어디에도 호수는 있을 것 같지 않더니 마침내 호수와 타우이팜파의 갈림길이 나온다. 갈림길 초입에 배낭을 풀어놓고 호수를 향해 오른다. 매우 가파른 오르막이다. 빙하가 녹아서 만들어진 빙하호수는 대부분 큰 산 바로 아래에 숨어 있다. 69호수도 그러했다. 숨을 몰아쉬며 오른 길의 마지막에 아르우아이코차호수가 나타났다.
린리이르카의 빙하가 아르우아이코차호수까지 내려와 있었다. 숨어 있던 호수를 발견하니 그 비경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아르우아이코차호수 같은 곳에 오면 대부분의 외국인 트레커들은 수영을 즐긴다. 우리에게도 수영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자신이 없어서 극구 사양을 했다. 저녁식사 시간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나신으로 수영을 즐긴 후였다. 잠깐 후회가 밀려왔다. 빙하호수에서 수영을 하는 인생 경험을 놓치다니….
아르우아이코차호수에서 타우이팜파까지 가는 길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앞쪽에는 오전에 보았던 알파마요가 구름을 입었다 벗었다 반복하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오전에 이어 다시 만나니 더 반가웠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트레킹 내내 나의 두 눈은 알파마요를 떠나지 못했다.
산을 오를 때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며 자신 있게 걸었던 재민이 내리막길에서 두통을 호소했다. 오르막은 그런 대로 참을만한데 내리막은 뇌가 흔들리듯이 힘들다고 했다. 약을 먹고 쉬엄쉬엄 걸었지만 별달리 차도가 없었다. 타우이팜파 캠프 사이트에 도착해서는 졸도하듯이 쓰러졌다. 저녁식사 전에 나온 간식도 먹지 못하고….
종일 강행군을 해서인지 모두들 오늘따라 더 맛나게 저녁식사들을 한다. 재민 말고도 미국인 친구가 고소증세로 저녁식사 시간에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내일은 거뜬하게 걸었으면 좋겠는데….
식사 중에 무언가 붉은빛이 느껴져서 밖으로 나가본 순간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 눈앞에 보이는 저 광경이 꿈인지 실제인지? 저만치 타우이라후산에 주황색 불이 붙고 있었다. 저무는 태양의 빛이 산에 불을 지른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계곡의 항아리에 누군가 불을 피워놓은 것 같기도 한 황홀하고 신비로운 빛의 천국이었다. 다들 식사를 하다 말고 접시를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주황빛 태양이 세상을 물들이고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숨을 멈춘 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서 좀더 가까이 가려고 뛰었다. 혹여 렌즈에 담기 전에 그 꿈같은 순간이 사라질까봐.
햇님이 사라진 초저녁부터 예상치 않았던 별님들이 쏟아졌다. 선셋의 흥분이 사라지기도 전에 캄캄한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 있는 보석같은 별들, 그 별들이 쏟아내는 빛의 세례를 받으며 한동안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별빛은 타우이라후의 모습까지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빛깔로 변화시켰다. 산 전체가 온통 은의 광산처럼 보였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어떤 밤도 이보다 황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는 산이 아닌 우주다.
타우이팜파에서 우아리팜파Huaripampa까지
밤새 텐트를 두들기던 비가 멈췄다. 부슬비가 살짝 뿌리고 산봉우리엔 구름이 한가득 얹혀 있다. 어제 참 오묘한 선셋을 보여 주던 그 모습은 간데없고 안개에 가득 차 있는 타우이라후는 다른 산들과 다르지 않다. 마치 꿈을 꾼 것 같다. 안개가 걷히고 파란하늘이 나오니 타우이라후는 늠름한 장군의 모습이다.
어제 고산증세로 힘들어했던 재민은 많이 좋아졌다. 걷는 동안 비가 쏟아질까 염려스러워 오버트라우저 바지를 입었다. 우기라 걱정은 했지만 어제 그제 걷는 동안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정말 감사했다. 이곳은 4,400m. 그래서인가 아침엔 더욱 쌀쌀하다. 바람까지 불어 주니 체감온도는 뚝 떨어진다. 준비해 온 경량 패딩을 꺼내 입었다. 고산트레킹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체온유지이다.
한참동안 평원을 따라 편하게 걸었는데 지그재그로 오름길이 계속된다. 이 길의 가장 높은 지점인 푼타 우니온Punta Union(4,760m)까지 오르는 길이다. 뮬도 힘겹게 오른다. 뮬의 등에 진 짐이 유독 한쪽으로 기우는 모습을 보니 측은해 보인다. 사람도 동물도 힘들기는 매 한가지.
아래쪽엔 에메랄드빛 빙하호수와 타우이라후가 안개 속에 휘감겨 있다. 어제 저녁이나 아침과 또 다른 신비한 모습이다. 날씨가 화창했더라면 눈부신 설산과 에메랄드빛의 빙하호수, 광활한 평원이 한 폭의 유화처럼 진한 모습으로 있겠지. 그러나 안개에 휩싸인 모습도 마치 비오는 날의 수채화 같아서 느낌만 다를 뿐 아름다운 장관은 그대로다. 힘겹게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또 다른 이들이 힘겹게 오르고 있다. 저 멀리 광활하게 펼쳐지는 계곡의 끝에는 어제의 캠프사이트인 타우이팜파도 보인다. 저곳을 걸어왔다니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작고 큰 바위가 살짝 내리는 빗물에 젖어 더욱 미끄럽다. 모두들 조심하고 걷고 있는데 재민이 미끄러졌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
푼타 우니온을 무사히 통과하고 이젠 우아리팜파로 향하는 내리막길. 이제 고생은 끝났다. 천천히 조심스럽지만 여유 있게 우리들은 마치 큰 전쟁에서 이기고 온 전사처럼 의기양양하게 걸었다. 그곳엔 크고 작은 빙하호수들이 참 많이 있다. 한 곳은 완전한 하트 모양. 우리 셋은 모두 손으로 하트를 그리고 사진을 한 장씩 찍었다. 재민도 이제는 컨디션이 회복된 것 같다. 즐기며 걷다 보니 우아리팜파가 저만치 보이는데 한켠에선 비쿠냐Vicuna가 놀고 있다. 비쿠냐는 해발고도 3,000?4,000m의 안데스산맥 고지대 초원에 서식한다.
캠프사이트에 도착해서 조금 쉬려니 비가 내린다. 얼마나 다행인지… 종일 조금씩 내리던 비가 저녁 식사 후에는 장대비가 되었다. 텐트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점점 커진다. 내일 2시간 정도만 내려가면 트레일이 끝나는데 비가 멈추길 바랄 뿐.
4일 다시 문명의 길로 돌아오다
우아리팜파에서 바케리아까지
밤새 비가 내렸다. 몇 번을 뒤척이다 잠을 깼다. 양 옆의 두 사람은 어느 때처럼 단잠을 잔다. 잠시 단잠에 들었는데 새벽녘 비가 멈추고 아주 많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깼다. 경쾌하고 기분 좋은 새소리 덕분에 비따위는 생각에서 없어졌는데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고 새들도 어디론가 비를 피해 날아갔다.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날은 밝았다. 텐트 밖으로 나오니 비도 거의 그쳐간다. 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친다. 이렇게 상쾌하고 여유롭고 편안한 아침을 느껴본 게 얼마 만인가. 다른 날보다 한 시간 늦게 출발하는 조그만 여유가 이렇게도 행복하구나.
아침에 내리던 부슬비는 어느새 그쳤다. 길은 어제 밤의 비로 진흙탕. 발을 딛기 어려운 곳들이 꽤 많았다. 길가엔 드문드문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보이고 아이들이 나와서 길을 걷는 우리들을 구경한다. 작은 상점에는 몇 가지 과자와 음료수가 놓여 있다. 시끄럽거나 복잡하진 않지만 그래도 문명의 세계로 돌아온 것 같다. 음식점에서만 보던 꾸이Cuy를 기르는 모습도 보았다.
콜카밤바Colcabamba까지 1시간여의 내리막길. 상점구경, 사람구경을 하며 가볍게 걷는다. 그리고 바케리아까지 1시간의 오르막길도 힘들지 않게 마무리를 했다. 그렇게 3박 4일의 산타크루즈 트레킹이 끝났다.
처음으로 4,000m 이상의 고산을 걸었던 재민과 준호는 어느 누구보다 기쁨의 크기가 더욱 컸으리라. 그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이젠 계곡물에 고양이 세수를 하지 않아도, 텐트에서 추위와 싸우며 자지 않아도, 비 내리는 날 배낭을 메고 걷지 않아도 된다.
안데스는 ‘하늘까지 이어지는 밭’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가파른 고원지대에 밭을 일구고 살았던 인디오들의 삶이 스며 있다. 안데스를 걸으며 여고시절 들었던 노래,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가 떠올랐다. 잉카의 마지막 왕이 죽은 후 콘도르로 환생해 안데스 창공을 날아다니며 인디오들을 보호한다는 이야기로 잉카의 몰락과 서글픈 전설이 담긴 노래라고 한다. 원래는 ‘콘도르가 날다’ 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는 왜 ‘철새는 날아가고’ 라고 번안되었는지 모르겠다. 콘도르가 나는 걸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영혼이 낯선 이방인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준 것일까.
4,000m급의 고산 트레킹, 4일 내내 아무런 사고 없이, 황홀함과 행복감을 선사해 준 산타크루즈 트레킹. 걷는 내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 알파마요의 선명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한다.
설산과 빙하호수의 눈부신 비경을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었던 경험을 잊지 못할 것이다. 특히, 타우이팜파에서의 불타는 일몰과 별들의 잔치는 나에게 우주의 중심에 선 듯한 황홀감을 안겨주었다. 그것을 렌즈에 담을 수 있었던 것 또한 크나큰 행운의 하나다. 엘콘도르 파사, 안데스의 노래가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트레일 정보
1일차 이동경로 카샤팜파-야마코랄
고도변화 2,875m~3,775m
이동시간 11:40-15:50(4시간 10분)
이동거리 10.9km
2일차 이동경로 야마코랄-타우이팜파
고도변화 3,775m~4,420~4,250m
이동시간 07:30-15:50(8시간 20분)
이동거리 20.4km
3일차 이동경로 타우이팜파-우아리팜파
고도변화 4,250m~4,750m~3,670m
이동시간 07:10-15:00(7시간 50분)
이동거리 15.6km
4일차 이동경로 우아리팜파-바케리아
고도변화 3,670m~3,400m~3,630m
이동시간 08:00-09:55(1시간 55분)
이동거리 6.0km
참고
■캠핑하는 동안 샤워는 할 수 없다. 물티슈를 넉넉히 준비하면 좋다.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위한 여분의 배터리가 필요하다.
■식수는 첫째 날만 준비하면 된다. 둘째 날부터는 끓인 물을 식수로 제공한다.
■고산약을 예비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고산의 밤은 생각보다 무척 춥다. 몸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다운 재킷이나 핫팩을 준비한다.
■고산의 날씨는 수시로 변한다. 언제 올지 모를 비에 대비해 레인재킷을 준비한다.
■등산용 스틱을 사용하면 4일 동안 계속되는 트레킹의 피로도를 줄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