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 바다 교실
한이나
이층 교실 창가에 기대어 흰 운동장 너머
바라보면 남해바다 한쪽이 정답다
바다가 있는 교실 풍경
몇 걸음 내달리면 닿을 아름다운 거리
내 스무 살 시에 그린 꿈의 자화상 한 장
바다가 없는 곳이 고향인 나는 꿈의 바다 대신
상추 잎 같은 산골 처녀 선생이 되었다
들판에 들꽃 지천인 봄날 때 씻긴다고
우루루 줄지어 아이들 냇가로 몰고
지루해진 오후, 냉이꽃과 싸리나무와 종달새
그리려 자주 언덕에 올랐다
뽀뽀한다고 달겨들던 코찔찔이 1학년 철이랑
가난해도 의젓했던 화전민 반장 준이는
너른 세상바다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
폐교로 만든 진도 시화박물관에서 다시
씀바귀 잎 같은 선생 노릇이나 해 볼까
이층 바다 교실 창가에서, 우두망찰
바다를 향해 온 맘 활짝 열어놓고
씌여지지 않은 시집을 읽는다
꿈의 전구 15촉에 반짝 불빛이 켜진다
----애지, 2022년 가을호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공자, {論語})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은 넓고 비옥한 땅과 함께, 그 고장의 역사와 전통이 그곳의 사람들에게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담장 하나와 황소 한 마리 때문에 다툴 일도 없고, 무엇을 사거나 팔 때에도 그 어떤 보증이나 매매계약서 따위를 작성할 필요조차도 없다. 문과 문은 항상 열려 있고, 서로가 서로를 믿어 의심하지 않을 때, 그 고장 사람들의 행복의 지수는 크게 올라가게 될 것이다.
한이나 시인의 [이층 바다 교실]은 “폐교로 만든 진도 시화박물관에서” “바다가 없는 곳이 고향인” 시인이 “내 스무 살 시에 그린 꿈의 자화상 한 장”을 떠올려 보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이층 교실 창가에 기대어 흰 운동장 너머/ 바라보면 남해바다 한쪽이 정답”고, “바다가 있는 교실 풍경”, 즉, “몇 걸음 내달리면 닿을 아름다운 거리”에는 “내 스무 살 시에 그린 꿈의 자화상 한 장”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넓고 시원하고, 그 모든 일들이 가능한 지상낙원의 입구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바다는 환상, 즉, 꿈과 낭만이라는 환상 속의 존재였을 뿐, “바다가 없는 곳이 고향인 나는 꿈의 바다 대신/ 상추 잎 같은 산골 처녀 선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들판에 들꽃 지천인 봄날 때 씻긴다고/ 우루루 줄지어 아이들 냇가로 몰고/ 지루해진 오후, 냉이꽃과 싸리나무와 종달새/ 그리려 자주 언덕에 올랐”던 것이다. 그 시절, “뽀뽀한다고 달겨들던 코찔찔이 1학년 철이랑/ 가난해도 의젓했던 화전민 반장 준이는/ 너른 세상바다에서 무엇이 되어 있을까”라는 시간 여행 끝에, “폐교로 만든 진도 시화박물관에서 다시/ 씀바귀 잎 같은 선생 노릇이나 해 볼까”라는 생각에 잠겨본다. 대부분의 젊은 시절의 산골은 더없이 아름답고 신성하기보다는 더없이 좁고 답답하며, 차라리 ‘통곡의 벽’처럼 절망의 노래를 부르게 만든다.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는 노래가 있다. 노래 속에는 시가 있고, 시 속에는 꿈과 낭만이 있다. 시를 읽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행복을 연주하는 것이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는 것도 행복을 연주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과 삶의 조건이 손을 잡으면 행복하고, 자기 자신의 꿈과 사회적 꿈이 일치하면 그는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한이나 시인의 [이층 바다 교실]의 주인공은 선생이며, 그것도 산골과 바다를 다같이 아우르는 “씀바귀 잎 같은 선생”이다. 왜, 씀바귀란 말인가? 선생이란 많이 아는 자, 모든 학생들을 인도하는 자이며, 그 가르침이 천하제일의 씀바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씀바귀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며, 줄기와 잎에서는 쓴맛이 나지만, 봄나물로서의 최고의 입맛과 함께, 항암효과까지 있다고 한다. 추억이나 회상은 아름답고, 상상이나 꿈은 즐겁고 흐뭇하다. “이층 바다 교실 창가에서, 우두망찰/ 바다를 향해 온 맘 활짝 열어놓고/ 씌여지지 않은 시집을 읽는다.”
추억이나 회상은 추억이나 회상일 뿐이고, 상상이나 꿈은 상상이나 꿈일 뿐이다. 이미 지나간 시절과 젊음은 되돌릴 수가 없고, ‘씀바귀 잎 같은 선생의 꿈’은 영원히 쓸 수 없는 시집에 지나지 않는다. 노년은 일몰이 가까운 시간이며, 일몰이 가까운 시간에는 “꿈의 전구”인 “15촉” 불빛이 반짝 켜진다.
산에 사는 사람은 바다를 꿈꿀 수도 있고, 바다에 사는 사람은 산을 꿈꿀 수도 있다. 산에 사는 사람은 상호 경쟁자와 적대자가 없으니 고요하고, 바다에 사는 사람은 거친 바다와 함께 수많은 경쟁자와 적대자들과 싸울 수밖에 없으니, 늘, 항상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한이나 시인의 [이층 바다 교실]의 상추잎 같은 산골 처녀 선생이나, 씀바귀 잎 같은 선생은 다같이 어질고 고요하게 산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은 둘이 아닌 하나이며, 그토록 사납고 거친 삶의 바다에서 싸우기 보다는 시를 쓰며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산과 바다는 어쩌면 암수 한 몸인 자웅동체의 부부와도 같다. 산의 기원은 바다 밑이고, 바다의 기원은 산의 꼭대기이다. 산은 남편이고, 바다는 아내이다. 산은 어질게 살고, 바다는 즐겁게 산다. 아니, 산과 바다, 아내와 남편이 다같이 어질고 즐겁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