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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그 능동적 참여] 성모 마리아의 믿음이 가져온 열매들
우리는 성모 마리아라는 나무를 바라보며 그 나무의 뿌리인 믿음이 하느님 은총의 태양빛으로 광합성 되어 그 나무를 통해 맺어진 열매들에 대해 관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의 믿음이 가져온 열매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성모님의 믿음은 신약시대를 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구약의 출발점이라면 성모 마리아의 믿음은 신약의 출발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하와의 불신으로 맺어진 매듭을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루카 2,45)으로 푸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구세주를 육체적으로 잉태하시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믿음으로 말씀을 마음에 품으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이런 마리아의 믿음에 응답하여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심으로써 신약시대가 열렸습니다.
“하와의 불순종이 묶어 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종이 풀어 주었고,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맺어 놓은 것을 동정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성 이레네오)
둘째, 성모님의 믿음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게 하였고 사람이신 성모님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였습니다. 만일 성모님께 믿음이 없었다면 사람이 되고자 하신 성자를 잉태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기에 주님이신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 가장 행복한 분이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축복과 특권은 성모님의 믿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은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느 인물을 두고 행복하다고 선언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복음의 목표는 진정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성자를 탄생시킨 어머니께서는 믿음의 어머니요, 그 믿음을 통해 행복선언을 받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삼위일체 신비를 최초로 계시 받으신 분
셋째, 성모님의 믿음은 성모님께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고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최초로 계시 받으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지만 그만큼 이해할 수 없는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위일체 교리는 성모님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천사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라고 한 인사말에서는 성부이신 하느님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어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루카 1,35)이라는 말씀에는 성자이신 하느님과 성령이신 하느님이 계시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삼위일체가 계시된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삼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삼위일체 신비를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신 분이 되셨습니다. 또한 성모님은 예수님 다음으로 성령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시기에 성모님보다 더욱 가깝게 삼위 하느님과 일치된 생활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적인 순명으로 성자를 잉태하고 탄생시킨 마리아께 십자가에서 성자는 “이분이 너희 어머니이시다.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선언하시면서 당신의 모친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이렇게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후에는 나약하고 두려워하는 사도들의 가운데서 기도의 모범으로 그들을 교회탄생인 성령강림을 준비시키시는 역할을 하셨으며, 지금은 천상에 오르시어 은총의 중재자로서 신적 모성을 발휘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자의 탄생에만 마리아의 역할을 칭송하는 경향이 있고 교회탄생에 있어서 마리아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약하게 인지하는 면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렇듯 교회역사의 모든 시점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한 분이십니다.
“동정 마리아는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따르고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위해서 신앙과 사랑의 모범이 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67)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기원과 의미 살펴보기
성모님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네, 우리의 천상 행복도 알려주시네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해방을 맞이한 ‘광복절’이자 성모 마리아께서 하늘로 불려 올라가심을 기념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이다. 교회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의무 축일로 규정해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여러 축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날로 보내고 있다. 이는 성모 마리아의 승천이 신앙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심어주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8월 15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성모 승천 대축일 삼종기도에서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하느님 집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만큼 성모 승천 대축일이 신앙인들에게 주는 의미는 크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이 축일의 기원과 의미를 정리했다.
성모 승천 대축일의 기원
가톨릭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신원을 △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 성령으로 인하여 구세주를 낳고 기른 ‘하느님의 어머니’ △ 평생 동정녀이신 분 △ 생을 마친 다음 영혼 육신이 하느님의 불림을 받아 승천하신 분 △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에 참여하고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인류의 중재자’로 고백한다.
성모 승천 대축일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4세기 무렵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축일이 시작됐다는 이야기만 전해진다. 현재와 같이 8월 15일이 대축일 날짜로 정해진 것은 5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예루살렘에서는 8월 15일을 ‘하느님의 어머니의 날’로 제정해 기념했다. 이날에 맞춰 성모 승천 대축일 날짜가 정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믿음은 사도 시대 때부터 교회 안에서 전승됐다. 물론 성경 어디에도 성모 승천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초세기 사도들의 전승을 모아 전하고 있는 2세기쯤의 외경에서는 ‘동정녀의 승천’ 또는 ‘마리아의 잠드심’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를 맡겼던(요한 19,26-27) 가장 사랑하던 제자인 요한 사도에게 직접 들은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마리아는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계시를 통해 아셨는데, 모든 사도가 기적적으로 그녀의 주위로 모여왔고, 예수님도 그녀의 임종을 돕기 위해 발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육신을 묻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고 영혼을 거두어 가셨다. 제자들이 성모님을 매장하려고 할 때 예수님은 다시 발현하셨고, 사도들이 그녀를 부활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한 천사가 무덤을 열었고, 마리아는 무덤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하였다.”(「성모님의 영면」 중에서)
이처럼 초대 교회 시대부터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가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믿음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성모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특권이 있으며 거룩함과 충만한 은총을 지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모 승천 의미
성모 승천에 대한 믿음은 20세기에 들어서야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됐다. 비오 12세 교황은 1950년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을 통해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었다”고 성모 승천 교리를 선포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묵시 19,16 참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교회헌장」 59항)고 밝히고 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우리말로는 둘 다 ‘승천’으로 표현하지만, 라틴어로 살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라틴어에서 그리스도의 승천을 표현할 때 ‘상승, 오름, 올라감’을 뜻하는 ‘Ascensio’를 사용한다. 반면 성모 마리아의 승천은 ‘올림을 받음’이란 뜻을 지닌 ‘Assumptio’을 사용한다. 즉 그리스도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 육신과 영혼을 지닌 채 스스로 하늘로 오르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모 승천은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는 의미를 지닌다.
교리상으로 ‘성모 승천’은 ‘우리도 성모님처럼 살면 하느님 나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또한 ‘성모 승천’을 통해 신앙인들은 천상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며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다.
[전례 영성 – 성품성사] 봉사 직무를 통해 이루어지는 파스카 신비
죽을 때까지 봉사할 임무
얼굴을 바닥에 대고 제대 앞에 엎드린 수품자.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이들의 봉헌이 갸륵하고 고마우면서도 솔직히 염려스럽다. 말로는 국민에게 봉사하겠다고 해 놓고 선출이나 임용이 되고 나면 태도가 돌변하는 일부 정치인과 공무원들처럼, 성직자 또한 서품받고 나면 종종 그런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서품은 단순한 선출이나 임용이 아니라 축성이다. 서품 때 복음 선포와 성사 집전의 소명과 임무가 ‘지워지지 않는 인호’로 새겨진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언제나 선물이 되겠지만, 서품된 성직자에게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직무 유기 또는 직무 남용으로,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 하고 주님의 꾸지람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건설할 사명
성품성사의 목적은 교회를 건설하는 데 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하신 이 사명은 곧,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여 당신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 곧 하느님의 백성을 형성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하신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주교
교회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현존은 무엇보다 사도들의 사명을 이어받은 주교 직무에서 충만해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하듯, “주교 축성으로 충만한 성품성사가 수여”되며, “신부들의 협력을 받는 주교들을 통하여 대사제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들 가운데에 계신다”(교회 헌장, 21항 참조).
공의회의 규범에 따라 개정된 1968년 ‘부제, 사제, 주교 서품 예식’은 1989년 ‘주교, 사제, 부제 서품 예식’이라는 새로운 제목의 제2표준판으로 수정되면서 주교 서품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에 대해 경신성사성 교령은 “예식서의 차례를 바꾸어, 성품성사의 정점인 주교 서품 예식을 처음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신부는 주교의 협력자로, 부제는 주교의 봉사자로 서품된다는 사실을 더욱 잘 알 수 있게 하였다.”고 설명하면서 성품성사의 본질과 구조를 명확히 밝힌다.
서품의 본질적인 요소는 주교의 안수와 서품 기도이다. 그 뒤 이어지는 다른 예식들은 이 축성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비본질적인 요소들이다. 주교 서품의 경우에는 머리 도유, 복음집과 반지, 주교관, 목자 지팡이와 같은 주교 표지의 수여, 사제 서품의 경우에는 영대와 제의, 손의 도유, 성반과 성작 수여, 끝으로 부제 서품에는 부제 영대와 부제복(달마티카), 복음집 수여가 이어지는데, 이 같은 표지들을 통하여 주교, 사제, 부제가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 할 직무들이 외적으로 표현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모두 참여
주교직이든 사제직이든 부제직이든 이들의 직무는 모두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1티모 2,5)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단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고 영구히 완전하게 해 주신(히브 10,10-14 참조), 당신의 유일한 십자가의 제사에 참여하는 직무이다. 교회 안에서 이미 옛날부터존재한 주교, 사제, 부제의 직무는(전례 헌장, 28항 참조)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성부께 바치는 이 유일한 제사, 곧 성체성사의 거행 안에서 그 임무와 역할이 분명히 드러났다.
이 세 품계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가 드리는 제사에서 특별히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만을 수행하기 때문에 ‘직무 사제직’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주교와 신부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in persona Christi) 교회의 직무를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가시화한다.
특히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예식을 집전한다. 이 말은 성찬례를 주례하는 사제가 제2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뜻이다. 사제를 통하여 전례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친히 그때에 십자가에서 바치셨던 희생 제사를 지금 사제들의 집전으로 봉헌하고 계시는 바로 그분께서’ 집전자의 인격 안에 현존하시고, 또한 특히 성체의 형상들 아래 현존하신다. 당신 능력으로 성사들 안에 현존하시어, 누가 세례를 줄 때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다”(전례 헌장, 7항).
왕다운 사제직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방식이 직무 사제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례의 은총과 성령에 따른 삶을 누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도 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 전체는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1베드 2,9)이며, 그 자체로 사제적인 공동체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546항). 다시 말해 교회 전체가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제단이다. 그래서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을 ‘왕다운 사제직’이라고도 부른다.
신자들의 왕다운 사제직은 어떤 면에서 직무 사제직보다 더 중요하다. “성찬례 거행은 교회 전체의 행위이며, 여기서 각자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따라 자기에게맡겨진 임무만을 온전히 수행”하여, “본디 거룩하지만 성찬의 신비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이며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그 거룩함을 완성해”(「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5항) 가기 때문이다.
직무 사제직의 본질은 사실 왕다운 사제직의 완성을 돕는 데 있다. 곧 왕다운 사제들인 신자들이 바치는 영적인 제사를 “유일한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와 결합”시켜, “온 교회의 이름으로 성찬례 안에서 피 흘림 없이 성사적으로 봉헌”하는 것이 직무 사제직의 목표이다.
“복음 선포에서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서 그 힘과 가치를 길어 올리는” 사제직은 “사람들을 위하여 그 밖의 교역을 수행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높이고 거룩한 삶에서 사람들을 진보시킨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파스카에서 흘러나오며, 바로 그 주님의 영광스러운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2항).
[전례 톡톡] 부모가 아이들의 세례를 결정합니까?
제 친척인 어느 부부는 유물론적 사고를 갖고 있어서 자기 딸이 세례 받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 무죄한 영혼의 구원이 무척 걱정스러운데, 제가 몰래 그 아이한테 세례를 주면서 물을 붓고 기도를 바쳐도 될까요? - 필리네 발다르노에서 로마노
유아 세례의 결정은 전적으로 부모의 몫이죠. 따라서 몰래 세례를 주는 모든 시도는 누가 하든 부모의 천부적인 권리를 심각하게 해치는 불법 행위지요. 제 생각엔 교회의 뜻도 거스르는 행위이니 그 유효성에 의문이 생기네요.
교회 규정에 따르면 죽을 위험이 임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녀의 세례에 대한 권한은 오직 부모에게 있어요. 완전한 자유로, 충분한 숙고를 거친 다음, 신앙의 동기로 결정하는 것이지, 사회적 편리성 때문에 결정해서도 안 되고, 자기 자식이 영원한 구원을 못 받을까 두려워 결정해서는 더더구나 안 되지요.
신앙 교육이 보증돼야 함
공의회 이전 시대와 달리 부모의 책임이 커졌어요. 아이를 데리고 성당에 와서 예식에 참여하고, 대부 대모와 같이 예식 규정의 동작들을 따라하며, 특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즉 ‘마귀를 끊어버림과 세례 서약’을 고백하는 등, 모두 바로 부모가 할 일들이죠. 세례 받은 자식이 계속 신앙 교육을 받도록 챙기고, 자유와 책임을 갖고 신앙에 동의해서 세례의 충만한 완성에 이르게 하는 것, 이는 언제나 부모의 의무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정말 중요한 것은 세례 예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이 아니에요. 세례의 참되고 완전한 신앙적 의미, 세례의 미래,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영세자의 생활 체험 등이 중요하죠. 여기에 포함된 견진성사와 성체성사라는 두 후속 단계도 중요해요. 세례는 그리스도인 양성의 시작이고, 성숙은 교회 공동체 안에 완전히 통합되어 매주일 성찬례를 신앙으로 거행해 가면서 되는 거에요.
하지만 사회의 심원한 변화 때문에 이 같은 그리스도교 생활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요. 사회가 그리스도교의 모습과 정신을 잃어버렸어요. 신앙의 성장을 더 이상 도와주지도 않고, 오히려 가로막기까지 하죠. 그래서 교회가 먼저 선수를 쳐서 가정이 책임지고 본당에서 지원하도록 정했어요. 영세자가 믿음의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적합한 토양을 만들려는 거였죠.
1980년 신앙교리성이 펴낸 「유아 세례에 관한 훈령」이 가장 권위 있고 가장 중요한 문헌이에요. 훈령은 가정을 신자 가정, 냉담자 가정, 비신자 또는 비그리스도인 가정, 이렇게 세 가지 상황으로 나누어 생각해요. 문헌은 여기서 마지막 경우에 대해 부모가 요청해도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해요. 하지만 유아가 커서 언젠가 세례를 청할 것을 예상하며 아이의 이름을 교회에 등록하는 예식은 허용하고 있어요. 이는 세례를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협박이나 압력도 아니에요. 말하자면, 가정에 책임을 지우고 성사의 진지함을 이해시키기 위한, ‘교육의 연기’(31항)인 거죠.
스스로의 선택을 위한 도움
다른 한편 아이의 이름을 등록하는 고유 예식이 있다는 것은 – 교회에 입문하고 예비 신자로 받아들여지는 예식과 이를 혼동해서는 안 됨 –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책임을 갖고 돌보겠다는 뜻이에요. 나중에 학교에 다니는 시기가 오면 아이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우려는 거죠. 이탈리아와 여러 다른 나라들에서 다들 그렇게 하고 있어요(해당 나이에 맞춘 고유 예식서도 발행됐어요). 교회는 부모의 생각과 행위를 존중하고 어떠한 심리적 압박도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이와 아이의 가족을 방치하지도 않아요. 등록 예식을 통하여 분별력과 살아있는 사목 감각으로써 복음화 활동에 뛰어들어요. 그렇게 해서 대화와 우정의 분위기를 형성하죠.
아이는 그렇게 복음화하고 맞아들이는 교회의 기도와 활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게 되는 거지요. 이는 교회의 중재를 통해 그리스도교로부터 나오는 은총의 영역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부모와 매우 신심 깊은 친척들이 아직 세례 받지 못한 아이를 두고 하느님께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살 이유는 없어요. 세례를 영원한 구원을 위한 안전 통행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에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신자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영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지요.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하셔요. 여기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비신자 부모를 둔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하느님께서는 세례 받지 못한 이들도 사랑하신다
세례는 교회에 맡겨진 통상적인 수단이에요. 교회는 그밖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요.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정해놓으신 조건, 즉 신앙과 복음화라는 조건이 맞지 않아서 세례를 줄 수 없을 때에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맡기는 거죠. 하느님께서는 성사의 노예가 아니시니, 우리에게 계시된 적 없는 어떤 방법을 찾아내셔서 이 무죄한 피조물들을 당신의 영광 안으로 받아들이실 거에요. 세례 받지 못한 유아 장례식에서 바치는 교회의 기도가, 성급하고 은밀하며 마법 의식처럼 보일 위험이 있는 예식보다 효과가 적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어요.
오직 죽음의 위험에 있을 때만 부모가 모르는 상태에서도 세례를 주는 것이 합법이지만, 최근의 전례 규정은 소위 핵심 기도문을 바치는 것 외에도 신자 단체의 참석과, 독서와 기도문을 조합한 짧은 예식의 거행을 요구하고 있어요.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꽃으로 보는 성모님의 생활소품들 (1)
‘성모님의 베일’이라 불린 숙근 안개꽃
안개꽃 또는 안개초(Babyˈs Breath)는 원산지가 지중해 연안으로 추위에 강하며 깁소필리아(Gypsophila)라는 학명으로 불릴 정도로 석고(gypsum) 성분을 많이 함유한 흙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다. 흔히 안개꽃은 일년초라고 알지만 여러해살이풀인 숙근 안개꽃(Gypsophila paniculata)도 있으며, 그 꽃은 당연히 흰색이려니 생각하지만 분홍색, 빨간색, 보라색, 파란색도 있다.
안개꽃은 결혼하는 신부가 드는 부케를 비롯해서 웬만한 꽃다발을 만들 때 거의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꽃이다. 본줄기가 잘게 갈라지며 퍼진 끄트머리마다 희고 작은 꽃이 무수히 피는데, 꽃이 작은데다가 그렇다고 꽃 모양이 특별히 예쁘지도 않다. 그런데 한데 묶여서 다발을 이루노라면 나름대로 존재감을 보일 뿐 아니라 안개가 서린 듯 눈이 쌓인 듯 꽃다발의 다른 꽃들을, 가령 장미들이며 카네이션들을 돋보이게 해준다.
안개꽃이 신부의 부케나 꽃 장식으로서 결혼식에서 흔히 쓰이는 이유들 중 하나는 이 꽃이 사랑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인하는 신부가 손에 드는 부케 안의 작고 하얀 안개꽃 송이들은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신랑과 신부가 상대를 향해서 서로 품는 지순하고 진솔한 감정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안개꽃이 드러내 보이는 사랑의 상징성을 보면서 신랑과 신부의 그렇듯 지순한 사랑이 오래도록 변함없이 이어지기를 축원한다.
안개꽃이 이렇듯 지순한 사랑의 상징이 된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어느 바닷가 마을에 제니라는 아가씨가 살았다. 하루는 제니가 바닷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해군 장교 하나가 제니를 구해 주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제니와 장교는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얼마 뒤 전쟁이 일어났고, 장교는 전쟁에 차출되었다. 제니는 장교가 무사하기를, 별일 없이 돌아오기를 날마다 기도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장교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마을에는 장교가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런데 그것은 마을에 사는 부잣집 아들이 퍼뜨린 거짓 소문이었다. 그는 제니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제니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과 제니가 곧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도 퍼뜨렸다. 마을 사람들은 잘된 일이라며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지만, 제니의 속은 타들어 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장교가 돌아왔다. 그는 전쟁터에서 빨리 적군을 물리치고 제니에게 돌아가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부상을 당해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부서진 뱃조각에 의지하여 헤엄을 쳐서 겨우 바닷가에 닿았지만, 그곳은 머나먼 타국이었다. 그는 오직 제니에게 돌아갈 생각으로 열심히 일을 했고, 어렵사리 뱃삯을 모아서 기어코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부잣집 아들은 비열하게도 자기 마을에 도망병이 있으니 잡아가라고 신고하고 군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군인들에게 돈을 주어 장교를 죽이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제니는 부잣집 아들을 찾아가서 장교를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부잣집 아들은 장교를 고향으로 보내 주겠다며 바닷가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장교를 돌려보낼 마음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장교를 죽일 속셈이었다. 그들이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불안한 마음에 그 뒤를 몰래 따라가던 제니가 장교의 손을 잡고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군인들이 쫓아왔다. 제니가 그만 모래밭에 넘어지고 말았다. 쓰러진 채로 제니는 기도했다.
그 순간 짙은 안개가 몰려오더니 군인들을 휘감고 바닷가를 뒤덮었다. 군인들은 안개 속에서 갈팡질팡했다. 부잣집 아들은 안개를 벗어나려고 이리저리 날뛰다가 자기가 휘두르는 칼에 찔려 숨을 거두었다. 간신히 안개 속을 헤치고 나온 군인들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닷가에는 하얀 꽃들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군인들은 돌아갔다. 그제야 쓰러져 있던 장교와 제니가 몸을 일으켰다. 잔잔한 흰 꽃송이들, 안개꽃이 그 두 사람을 에워싸고 감춰 준 것이다.
안개꽃의 이러한 역할 또는 특성 때문이었을까,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꽃을 ‘성모님의 베일’(Our Lady’s Veil)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성모님의 종(鐘)’이라 불린 초롱꽃
꽃의 모양이 보기에 따라서 밤에 불을 밝히는 초롱처럼 생긴 것도 같고 작은 종처럼 생긴 것도 같은 식물이 있다. 그래서 이 식물을 두고 우리말로는 ‘초롱꽃’이라고 부르고 서양말로는 ‘벨플라워(종꽃)’라고 부른다. 또한 서양에서는 이것을 흔히 캄파눌라(Campanula)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캄파눌라는 라틴어로 ‘작은 종’ 또는 ‘방울’을 뜻하는 단어이다.
초롱꽃의 원산지는 유럽 남부 지역이다. 그리고 북반구 온대 지방에 폭넓게 분포하는데, 그 종류가 3000이 넘을 정도로 다양하다. 초롱꽃은 대개는 한해살이풀 또는 두해살이풀이지만 더러는 여러해살이풀도 있다. 주로 분홍색, 보라색, 흰색 꽃을 피우는데, 꽃이 아름답고 개화 기간이 길어서 널리 사랑받는다. 초롱꽃은 온대 지역에 분포하는 만큼 추위에는 강한 편이지만, 고온다습한 환경에는 취약하다.
중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초롱꽃을 ‘성모님의 종’(Lady Bell 또는 Mary Bells)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꽃의 모양이 종과 비슷하게 생긴 것을 보고 성모님이 목공소에서 일하시는 성 요셉과 예수님께 연락할 필요가 있을 때 울리시던 종을 연상한 것이다.
초롱꽃들 중에 ‘성모님의 종’이라 불리던 것으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벨플라워(Bell flower) 또는 캄파눌라라고 불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캔터베리 종꽃(Canterbury Bells) 또는 캄파눌라 메디움(Campanula medium) 또는 커팬소서(Cup-and-saucer, 잔 받침이 딸린 찻잔 모양의 겹꽃)라 불리는 것이다. 한편, 이중에서 캔터베리 종꽃은 ‘성모님의 종’이라는 이름 외에 ‘성모님의 나이트캡(취침용 모자)’, ‘성모님의 일옷(일할 때 옷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걸쳐 입는 덧옷)’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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