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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대원성
임제록 강좌.
무비스님 - 불교는 쉽다. 6강 - 4 (2009. 06. 17)
마음은 흘러가게 되어있는 겁니다. 보면 본대로 마음 나게 되어있고,
應無所住(응무소주) 아닙니까? 응당히 머물지 않고 흘러가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어디에도, 어떤 가치관에도 목을 매어서 고정시키지 말란 말입니다. 상황에 따라서ㆍ시대에 따라서ㆍ국가에 따라서 이것이 제일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하고 저것이 가치가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런 것이지 꼭 이것이다 라고 이렇게 매면 그것은 안 맞는 일이지요.
마음은 흘러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흘러가서 변한 것을 가지고, 너는 왜 변했느냐? 고, 변했느냐고 안 변하기로 약속을 해놓고 왜 변했느냐고, 왜 변했느냐고 하면, 그 사람은 이미 저 만치 변하고 가버리고 있는 것을 혼자 왜 변했느냐고, 왜 변했느냐고 그래봤자 그것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참 맹꽁이고 답답하기만 하지요.
아, 일상생활 하는 데 우리가 이런 도리를 알아야 돼요. 무슨 불법이고, 도고 그것은 제쳐 놓고라도 일상생활에 우리가 마음 쓰는데 이런 이치를 알면은, 이런 이치를 알면 그렇게 괴로움 받지 않습니다.
‘사람은 으레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구나.’ 춘하추동 4계절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흘러가고 있어요. 이 순간 밤에도 변해가고 있어요. 밤에도요. 밤에도 시간이 지나간다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오잖아요.
한 순간, 한 순간 재깍재깍재깍 지나가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이 우리 마음은 그 보다 더 잘 변해요. 사실은 바깥 세계는 훨씬 덜 변합니다.
춘하추동 4시절이 변한다고 하지만 훨씬 덜 변해요. 마음은 형상이 없는 것이라서 훨씬 변하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요. 마음이라는 것이요.
조건이 그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훨씬 더 잘 변합니다.
시시때때로 그냥 변해요. 그런데 그런 이치를 모르고 이것을 서로 어리석고 철없을 때, 엉터리약속 해놓은 것을 가지고 붙들고 있으면 어쩌잔 말입니까? 그러니 그런 이치를 잘 알아야 돼요. 그래 이것을 잘 알아서 예를 들어서 사업하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업도 시대의 어떤 그 상황의 흐름을 잘 빨리빨리 간파를 해서, 거기에 맞추어서 아주 새로운 생각을 해낼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 떡~ 히트상품 만들어 놓고 그것 가지고 계속 우려먹어지나요? 그것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생각에 젖어있는 사람은 발전 없어요.
무슨 학교에서 공부 좀 했다고, 그래서 회사에는 좀 괜찮은 성적으로 들어가서 그리고 주저앉아요. 그런 사람은 3년 안에 퇴출당해요.
들어가자마자 그 때부터 계속 또 새로운 공부해야 됩니다. 끊임없이 뛰어야 되는 겁니다. 왜냐? 모든 것은 변하니까요. 모든 것은 無事閑(무사한)이기 때문에요. 그래 여기에 임제 스님께서 여기서 말하신 내용이 전부 그 겁니다. 머리 깎은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ㅎㅎㅎㅎㅎ 瞎禿子(할독자).
그것도 눈먼 머리 깎은 놈. 그런 말이네요. 눈멀고 머리 깎은 사람이 있어서 배 불리 실컷 먹고 앉아서 좌선 觀行하되, 把捉念漏(파착념누)여,
생각은 끊임없이 새어 나가게 되어있고, 변해가게 되어있고, 흘러가게 되어있는데 그것을 붙든다 이 말입니다. 그거 벌써 거기서부터 틀린 겁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일어나지 못하게 不令放起(불령방기)라.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시끄러운 것이 우리 마음의 본령인데도 불구하고, 厭喧求靜(염훤구정).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만. 마음은 고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끄러운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시끄러운 것을 싫어 하고 고요한 것을 구하나니 이것은 외도법이라고 했잖아요. 외도법이다.
그것이 엉터리잖아요. 마음의 본색이 본래 그렇게 생겼는데요.
그래 조사가 말하기를, 住心看靜(주심간정),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하고,
고요한 것을 보고 擧心外照(거심외조)ㆍ攝心內澄(섭심내징)ㆍ凝心入定(응심입정). 이것이 전부 뭐라고요? 전부 조작이다. 皆是造作(개시조작)이다.
이것은 전부 엉터리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끝내 안 되는 일이다.
아등바등 붙들어 매면 잠깐은 붙들어 질지 몰라요. 변해 간 그 사람을 아~, “제발 이번만은 한 번 봐주라.” 이번만은 한 번 봐주라 해가지고 붙놓으면 한 이틀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한 이틀 지나면 마음이 변해진 마음이 금방 또 더 빨리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그 마음의 본색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가? 마음의 속성을 정확하게 잘 이해하고, 우리가 그 마음의 원리에 맞도록 맞추어서 살줄 아는 이것이 현명한 삶이지요.
14-5
是儞如今與麽聽法底人(시이여금여마청법저인)을
作麽生擬修他證他莊嚴他(자마생의수타증타장엄타)리오?
渠且不是修底物(거차불시수저물)이며
不是莊嚴得底物(불시장엄득저물)이니라.
若敎他莊嚴(약교타장엄)하면 一切物(일체물)을
卽莊嚴得(즉장엄득)이니 儞且莫錯(이차막착)하라.
是儞如今與麽聽法底人(시이여금여마청법저인)을, 이것은 그대들이 지금 이렇게 법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을 作麽生(자마생) 어떻게 擬修他ㆍ證他ㆍ莊嚴他(의수타증타장엄타)리오? 그를 닦고자 하고, 그를 증득하고자 하고, 그를 장엄하고자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이렇게 내 말하는 소리 듣고 있는 그 사람을 어떻게 그것을 닦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증득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꾸미고 장엄할 수가 있겠는가? 그 물건을요. 그것은 장엄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완전무결한 존재입니다. 그것은 그대로 이미 증득되어져 있는 겁니다. 더 이상 증득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그것대로 온갖 신통을 다 가지고 있어서 더 이상 장엄할 필요가 없는 존재인데 어디다 더 이상 장엄 한다 말입니까?
지금 이렇게 말할 줄 아는 놈. 말 들을 줄 아는 그놈. 그 당사자들 다시 어떻게 꾸밉니까? 어떻게 그것을 닦아요? 이미 완전무결하고 너무 활발발해서 신통묘용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는데, 그 자체가, 신통묘용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는 그 자체가 만행만덕이요, 그것이 온갖 만복입니다. 더 이상의 복은 없어요. 欠少什麽(흠소심마)오? 六道神光(육도신광)이 未曾間歇(미증간헐)이니 ←10-3.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를 통해서 신비로운 광명이 한 순간도 쉬지를 않고 이렇게 활발발하게 작용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다고 지금 그러느냐? 이 말입니다. 무엇이 부족한가? 欠少什麽오? 너 한테 부족한 것이 뭐냐 말입니다.
渠且不是修底物(거차불시수저물)이며, 그것은 또한 닦는 물건이 아니며 장엄하는 물건도 아니다.
不是莊嚴得底物(불시장엄득저물)이니라. 장엄해서 되는 물건이 아니야.
若敎他莊嚴(약교타장엄)하면, 만약에 그것으로 하여금 장엄할 수 있다면,
一切物(일체물)을 卽莊嚴得(즉장엄득)이라. 모든 사물을 전부 장엄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닌가? 儞且莫錯(이차막착)하라. 그대들은 또한 착각하지 말라.
그것은 장엄되고ㆍ닦아지고ㆍ얻어지고ㆍ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절대 참선 수백 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불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하고 전혀 관계없이 인생을 살아도... 불교를 비난하고, 부처님을, 이런 가르침을 비난하는 사람도 결코 감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不增不減(부증불감)입니다. 이것은 不增不減입니다. 성인이 있다고 해서, 성인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말하자면 성인이라고 해서 그것이 더 불어난 것도 아니고, 범부라고 해서 더 부족한 것도 아니고요.
14-6 獅子吼(사자후)
道流(도류)야
儞取這一般老師口裏語(이취자일반노사구리어)하야
爲是眞道(위시진도)하야 是善知識(시선지식)은
不思議(부사의)요. 我是凡夫心(아시범부심)이니
不敢測度他老宿(불감측탁타노숙)이라하나니
瞎屢生(할루생)이여 儞一生(이일생)을
祇作這箇見解(지작자개견해)하야,
辜負這一雙眼(고부자일쌍안)하니冷噤噤地(냉금금지)가
如凍凌上驢駒相似(여동릉상려구상사)로다.
我不敢毁善知識(아불감훼선지식)이라
怕生口業(파생구업)이라하니라.
道流(도류)야, 夫大善知識(부대선지식)이
始敢毁佛毁祖(시감훼불훼조)하며 是非天下(시비천하)하며,
排斥三藏敎(배척삼장교)하며 罵辱諸小兒(매욕제소아)하야,
向逆順中覓人(향역순중멱인)하나니
所以我於十二年中(소이아어십이년중)은,
求一箇業性(구일개업성)을 如芥子許(여개자허)도
不可得(불가득)이니라.
若似新婦子禪師(약사신부자선사)하면
便卽怕趁出院(변즉파진출원)하야 不與飯喫(불여반긱)하야,
不安不樂(불안불락)이어니와 自古先輩(자고선배)가
到處人不信(도처인불신)하고 被趁出(피진출)하야,
始知是貴(시지시귀)하나니 若到處人盡肯(약도처인진긍)하면
堪作什麽(감작심마)오? 所以師子一吼(소이사자일후)에
野干腦裂(야간뇌열)이니라.
그대들은 一般老師口裏語를 취해가지고서, 그대들이 이미 한 종류의
老師의 口裏語. 입 속에서 나오는 말을 취해가지고서,
爲是眞道(위시진도). 야~ 이것야말로 진짜 도다. 임제록이야말로 이것 참 진짜 도다. 라고 해서 是善知識(시선지식)은 不思議(부사의)요,
야~, 이 임제 스님 같은 선지식은 참 불가사의한 존재다.
我是凡夫心(아시범부심)이니 나는 범부의 마음이야,
不敢測度他老宿(불감측탁타노숙)이라. 감히 저 노숙의 말을, 임제 스님의 말을 헤아릴 수가 없다. 도저히 측량할 길이 없다 라고 하노니,
瞎屢生(할루생)이여, 이 눈먼 놈들이여, 儞一生(이일생)을 그대 일생을
祇作這箇見解(지작자개견해)하야, 다만 이러한 견해를 지어가지고서,
辜負這一雙眼(고부자일쌍안)하니, 이 한 쌍의 눈을 저버렸으니, 一雙眼이라고 하는 것은 제3의 눈. 말하자면 진짜 눈, 정말 환히 뜨고 있는, 눈을 감아도 뜨고 있고 눈을 떠도 뜨고 있는 그 눈을 저버렸으니 冷噤噤地(냉금금지)가 如凍凌上驢駒相似(여동릉상려구상사)로다. 아주 그 얼음판 위에서, 예를 들어서 망아지나 개나 이런 동물들이 얼음판을 지나갈 때 어떻게 하면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을까 하고, 그 벌벌 떠는 모습을 冷噤噤地라고 해요. 마치 冷噤噤地, 벌벌 떠는 모습이, 추운데서 벌벌 떠는 모습이 마치 凍凌上. 얼음판 위에서 당나귀나 나귀가 지나가는 것과 같이 相似하도다.
我不敢毁善知識(아불감훼선지식)이요, 나는 감히 다른 선지식을 비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또 怕生口業(파생구업)이다. 구업을 낼까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말입니다. 나는 할 소리 한다 이겁니다. 비방해서 하는 소리도 아니고, 뭐 구업 지을까봐 겁내는 일도 아니고,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뿐이다. 그래 불교는 사실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 되어져야 되는데, 상황과 어떤 현실과 너무 타협을 해서 어떤 타협점에서 나온 소리가 너무 많아요.
거의 99%가 그렇다고 봐야지요. 어떤 상황. 또 심지어 사찰 운영의 문제. 이런 것하고 타협해가지고 적절하게 거기에 맞는 이야기를 하지, 불교가 있는 그대로 이야기되어 지는 데는 거의 없어요. 여기는 조계종의 최고 기관인 종회가 이루어지는, 법을 세우는 장소니까 이런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사실 누굴 비난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구업이 무서워서 할 소리 못할 일도 아니고요. 그냥 있는 그대로는 이야기가 되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道流야 夫大善知識(부대선지식). 대저 큰선지식은, 진짜 큰선지식은
始敢毁佛毁祖(시감훼불훼조)하면, 비로소 부처를 헐뜯고 조사를 헐뜯으며,
是非天下(시비천하)라 천하를 시비하며
排斥三藏敎(배척삼장교)라. 三藏敎를 배척 해.
罵辱諸小兒(매욕제소아)라. 저~기 소인배들을 전부 꾸짖고 욕해서,
向逆順中覓人(향역순중멱인)하나니, 逆順境가운데서 사람을 찾나니,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정말 ‘아 이것이다.’ 라고 긍정하는 사람을 거기에서 찾아내나니, 所以로 我於十二年中(소이아어십이년중)은, 나는 12년 가운데서,
求一箇業性(구일개업성)을, 一箇業性. 하나의 업을 구해도,
如芥子許(여개자허)도 겨자씨만치도 不可得(불가득)이니라. 가히 업을 찾지 못했다. 당신은 업 지은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나는 12년 동안을...
이때가 아마 깨닫고 나서 12년 정도 됐을 때 법문을 한 것 같아요.
업을 찾아봐도 겨자씨만큼도 찾지를 못했다. 업이란 본래 공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 세계는 한 마음위에 있고, 한 마음은 또 찾아보니까 바다위에 거품과 같은 것이더라. 그런데 뭐 업이 거기에 어디 있겠는가?
若似新婦子禪師(약사신부자선사)하면, 新婦子. 막 시집간 새 신부 같은 그런 禪師라면, 그런 선사가 많거든요. 그런 선사는 예를 들어서 조실이 됐다. 아니면 무슨 큰 소임을 맡았다. 그러면 혹시 말 잘못하면 대중들로부터 쫓겨나면 어쩔까? 便卽怕趁出院(변즉파진출원). 院 = 절입니다.
절에서 쫓겨날 것을 곧 두려워해서, 不與飯喫(불여반긱)이라. 쫓겨나서 밥도 못 얻어먹을까봐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不安不樂(불안불락)이여, 편치도 못하고 즐겁지도 못해요. 뭐라고 어떻게 해야 이 현실하고 맞는 타협이 이루어진 그런 말을 할까? 조마조마하고 ‘이 말을 해야 맞을까? 저 말을 해야 맞을까?’ 이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때는 법문 다녀 보면, ‘야, 이 말을 했다가 이것 차비도 못 받고 가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하하하 아 고민 될 때가 있다니까요.
新婦子禪師인가 봐요. 新婦子. 막 시집간 신부 같은... 왜 그러냐? 막 시집온 신부는요? 시어머니 눈치보고, 시아버지 눈치보고, 어쩌다가 실수하면 바로 쫓겨나거든요. 옛날에 중국에 여자 흔하고 그런데, 그까짓 여자 쫓아내기 일쑤입니다. 보통 그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비유가 나온 것입니다. 막 시집간 며느리는 시어머니 눈치 봐야 되고, 시아버지 눈치 봐야 되고 그래서 당당하게, 자기답게 살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그와 같이 그런 선사들도 옛날에 상황 따라서 많았다 이겁니다.
그래서 요즘 법사들도 다니면, 으레 그 절에서 해달라는 대로 주문이 와요.
으레 쪽지가 날아와요. “이번에 무슨 행사가 있으니까 좀 이야기 해주십시오.” 심지어 “49재 보험선전 좀 해주십시오.” 이런 이야기까지 쪽지가 날아오는 겁니다. 허허허허허허허 그러니까 자기 소신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주문대로 해 주는 것이지요. 주문대로... 허허허허허허
그 사찰의 상황과 타협을 해가지고서 주문대로 해 주는 겁니다.
그러면“이이고 큰스님 법문 잘 했습니다.” 하고 대접이 아주 융숭하지요.
自古先輩(자고선배)가, 자고로 선배가 到處人不信(도처인불신)하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믿어주지 아니하고,
被趁出(피진출). 쫓겨남을 입어서, 쫓겨난 뒤에야 始知是貴(시지시귀). 비로소 그가 귀한 사람이란 걸 아나니, 그러니까 사중하고 안 맞는 소리하면 쫓아내버리잖아요. 다시 말해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내가 이 집안을 크게 일으켜봐야 되겠다.’하고 당당하게 자기 소신대로 살림을 거머쥐고 살 것 같으면, 시부모한테 안 맞으면 일단은 쫓겨난다고요.
그런데 쫓아내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참 그 사람이 아주 큰 그릇이고 훌륭한 며느리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若到處人盡肯(약도처인진긍)하면, 만약에 到處.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긍정해주고 인정해 준다면, 堪作什麽(감작심마)오? 그까짓 것 뭐 쓸모 있는 존재냐? 이 말입니다. 그것 뭐 쓸모 있는 존재냐?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믿어주고 쫓겨나고,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 정말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 이것이 참으로 제대로 된 것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지요. 所以로 師子一吼(소이사자일후)에, 사자가 한번 포효함에, 野干腦裂(야간뇌열)이니라. 여우는 크~ 뇌가 찢어진다. 사자가 한번 크게 부르짖으면, 여우는 놀라서 바로 그냥 뇌가 찢어져버려요. 임제 스님, 아주 참 멋있지요? 이렇게 아주 당당하고, 자기의 그 사상과 이론에 이와 같이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신감이 넘칩니까? 내 지금 진실한 한 마디에 시시한 여우같은 쫄때기 선비들ㆍ그런 시시한 법사들ㆍ선지식들은 전부 나가자빠지고, 뇌가 다 찢어질 꺼야.
14-7 平常心(평상심)이 道(도)다.
道流(도류)야 諸方說有道可修(제방설유도가수)하며
有法可證(유법가증)하나니
儞說證何法修何道(이설증하법수하도)오?
儞今用處欠少什麽物(이금용처흠소십마물)이며
修補何處(수보하처)오?
後生小阿師不會(후생소아사불회)하야
便卽信這般野狐精魅(변즉신자반야호정매)하야
許他說事(허타설사)하야 繫縛他人言道(계박타인언도)호대,
理行相應(이행상승)하고 護惜三業(호석삼업)하야사
始得成佛(시득성불)이라하니, 如此說者(여차설자)는
如春細雨(여춘세우)로다.
古人云(고인운), 路逢達道人(노봉달도인)이어든
第一莫向道(제일막향도)하라하니라.
所以言(소이언) 若人修道道不行(약인수도불행)이니
萬般邪境競頭生(만반사경경두생)이라.
智劍出來無一物(지검출래무일물)하야
明頭未顯暗頭明(명두미현암두명)이로다.
所以(소이)로 古人云(고인운),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하니라.
道流야 諸方에서 說有道可修(제방설유도가수)하며 제방에서 말하기를 도 가히 닦을 것이 있고, 有法可證(유법가증)하나니, 법 가히 증득할 것이 있다 하나니, 儞說(이설) 그대는 證何法修何道(증하법수하도)오? 무슨 법을 증득하고, 또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儞今用處欠少什麽物(이금용처흠소십마물)이며, 그대 지금 用處. 작용하고 있는 그곳. 그곳에서 欠少什麽物이며, 도대체 무슨 물건이 부족한가?
지금 부족한 것이 뭐냐? 말입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듣고 보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이 무한한 능력. 여기에서 부족한 것이 欠少什麽物이며, 修補何處(수보하처)오? 어디를 꿰매야 되느냐?
어디를 보수해야 되느냐? 말입니다. 보수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잘도 화내고 잘도 웃을 줄 알고 잘도 슬퍼할 줄 아는데, 어디가 부족해야 그것을 꿰매든지 보수를 하든지 무슨 다듬든지 고치든지 하지요? 전혀 고치고 다듬고 보수할 데가 없어요. 修補何處오? 어느 곳을 修補해야 할 것인가?
後生小阿師不會(후생소아사불회)하야, 後生. 후배들, 저 시시한 그런 중들은 그것을 이해를 하지 못해서 便卽信這般野狐精魅(변즉신자반야호정매)하야, 이와 같은 여우들의 정신. 여우의 정신에 홀긴 그런 정도의 이야기들만 믿어가지고서, 許他說事(허타설사)하야, 저런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일들. 딴 사람이 이야기하는 일들만 들어서, 繫縛他人言道(계박타인언도)호대,
딴 사람까지도 그것을 속박시켜. 그 어떤 범주 속에다 집어 넣어가지고 그것을 하나의 잣대로 쳐가지고서 말하기를, 전부 거기다 묶어 놓는 겁니다.
理와 行이 相應(이행상승)하고, 護惜三業(호석삼업)하야사, 신ㆍ구ㆍ의 삼업을 아주 점잖게 말도 함부로 하지 말고, 아~ 욕심이 나도 안 나는 척하고, 화가 나도 안 나는 척하고 이렇게 해서 잘 보호하고 이 삼업을 아껴야,
始得成佛(시득성불)이라하니, 비로소 성불한다. 대개 전부 그런 이야기합니다.
근래에 우리가 라디오나 TV나 어디서나, 어디 가서 법문을 들어봐도 전부 그렇게 護惜三業하야사 理와 行이, 이치와 행이 잘 맞아 떨어지고, 삼업을 잘 아주 점잖게, 아주 그렇게 잘 아끼고 가꿔 나가고 그래야 비로소 성불한다 합니다. 그래야 성불을 이루지, 어디 본래 성불이라니 그것이 말이나 되냐?
사람이 본래 성불이라니 그것이 무슨 소리냐? 그러나
“護惜三業理(호석삼업)하고 理行相應(이행상승)해서 성불한 사람이 있으면 어디 내놔 봐라.” 제가 늘 그러지요. “그것은 답이 없잖느냐? 그렇게 해서 성불한다는데 그런 성불은 없지 않느냐? 누가 그렇게 해서 성불한 사람이 있더냐? 있으면 한번 지적을 해보라.” 이 것이지요. 이 세상에 그렇게 해서 부처 된 사람 없습니다. 석가모니도요? 그렇게 해서 부처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자기 자신의 위대성을 그냥 이해한 겁니다. 하나라도 보탠 것 없습니다. 석가모니도 전혀 보탠 것 없습니다.
如此說者(여차설자)는 如春細雨(여춘세우)로다. 아~ 여기, 해놨네요.
이와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마치 봄에 가랑비 오듯이 그렇게 숫자가 많다. 불교 TV틀면 그저 법문 하는 사람마다 전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부처라고... 그래야 부처지... 결국은 어디에도 답을 찾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지적하지, 그렇게 해서 부처 된 사람은 누구도 지적하지 못해 놓고는, 말은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렇게 하는 겁니다.
정말 그것이 무책임한 소리지요. 뭐 답이 있는 문제를 내놔야 그것이 책임 있는 말이지요. 답도 없는 문제를 내놓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그렇게 하면 되는가요? 본래 부처라고 하니까 아이 그럴 수가 없다고, 그럴 수가 없다고... 如此說者는 如春細雨로다. 이와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마치 봄날에 가랑비처럼, 이슬비처럼 그렇게 숫자가 많다.
古人云(고인운), 고인이 말하기를, 路逢達道人(노봉달도인)이어든,
길에서 도통한 사람을 만나거든 第一莫向道(제일막향도)하라하니라.
第一에 그를 향해서 말하지 말라. 所以로 言(소이언), 소이로 말하되,
若人修道道不行(약인수도불행)이니, 만약에 도를 닦는다고 할 것 같으면 도는 행해지지 않는 것이니, 萬般邪境競頭生(만반사경경두생)이라.
만 가지의 삿된 경계가 다투어서 일어난다.
智劍出來無一物(지검출래무일물)이라, 지혜의 칼이 한번 나오면 한 물건도 없다. 明頭未顯(명두미현)에 暗頭明(암두명)이로다. 밝은 것이 드러나기도 전에 어두운 것이 이미 밝더라. 所以(소이)로 古人云(고인운), 고인이 말하기를,
平常心是道(평상심시도)라 하나니라.
우리 사람들의 平常心이 뭡니까? 그저 지지고ㆍ볶고ㆍ울고ㆍ웃고. 이것이 우리 삶입니다. 평상심이에요. 더 이상 평상심 없어요.
平 常 하니까 이것을 어떻게, 어떻게 글자를 풀이해가지고, “평탄하고 항상한 그런 마음이 바로 道다.” 어떻게 하더라도 이것을 저~ 차원높이 설명하려고 하는데, 엉터리로 설명하려니까 그것이 되나요? 본인에게도 이해 안 되고요. 설명하느라고 땀만 빠작빠작나고요. 그냥 쉽게 平常心. 사람들의 평상심이 뭡니까? 좋은 물건 보면 갖고 싶고ㆍ기분 나쁜 것 보면 화나고ㆍ슬픈 일 당하면 슬프고ㆍ웃고 싶으면 웃고. 이것이 평상심 아닙니까?
우리 맨날 그러고 살잖아요. 그런 마음이 그대로 도입니다.
平常心이 是道(평상심시도)라고요. 심지어 “三毒이 卽是道(삼독즉시도)다.” 그런 말도 있어요. 貪ㆍ嗔ㆍ癡(탐진치). 삼독이 곧 도다. 그것이 평상심이니까요. 여러분 평상심, 탐진치 삼독 빼놓고 뭐 또 있어요? 가끔 좋은 일도 하기는 하지요. 그것도 평상심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그것도 평상심이지 무슨 특별한 것은 아니에요. 이렇게 분명하게 밝혀놨습니다.
그런데 공연히 자꾸 ‘아니야 그게 아닐 꺼야, 아~ 도는 특별한 거야. 불법은 아주 우수하고 특별하고 아주 위대하고 저~ 높은데 있는 것이고, 우리들 중생은 감히 넘보지 못하는 그런 세계다.’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막을 치고 경계를 만든다니까요. 이미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아무튼 참 우리가 이와 같이 속 시원한, 당장에 이것이 나에게 살림살이가 되고 나의 인격이 되기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 속이 툭 터지고 시원한 이런 가르침을 우리가 만나서 함께 공부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에 정말 부러울 것 없는 欠少什麽(흠소십마)오?
부족한 것이 도대체 뭐냐?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정말 넉넉한 그런 영혼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이렇게 자부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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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대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