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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를 찾아서 할미공주 하하 전 세원(全 世原)작가 탐방기
프로필 본명: 로사(ROSA)/아호: 예자(禮子) 일본 황실병원에서 출생 원주여자중고등학교 졸업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 대학 정책대학원 수료 숙명여대 총동창회이사(현) (사)국제외교안보포럼상임이사(현) 민주 평화통일 15,16기 자문위원 한국 육필문학 시 등단 문예춘추(시, 수필)등단 국제 펜클럽회원/한국 문인 협회회원 한국 육필 문인 협회이사(현) 한국 문단 100주년 빛나는 한국 문단이사(현) 한국 현대문학100주년 기념탑건립위원(현) 시와 숲길공원 유지관리위원회이사(현) 문화저널 21전문위원(현)
상훈: 헤르만헤세 문학상수상(2007년)
<작가 가곡작품> 1,최 영섭 작곡: 슬프도록 보고픈 이여/축복의 날 2,엄 긍수 작곡: 창밖에 머문 나/봄으로 오시는 그대 3,신 귀복 작곡: 그리움에는/그림이 되어/ 나 여기 있어요 4,이 안삼 작곡: 마음 하나, 포근한 오후(합창오케스트라)/그 사람(삼중창) 5,윤 광섭 작곡: 그대 모습/ 빨간 잎 하나 6,정 덕기 작곡: 눈물 꽃다발(합창오케스트라)/그토록 사랑했던 너 7,정 애련 작곡: 사랑하는 너희/낙엽 태우며 8,엄 채일 작곡: 사랑은 영혼의 울림/가을날에/그대 슬프면/눈꽃 피었네 9,이 일찬 작곡: 너를 사랑하는 힘으로(합창오케스트라) 엄마는/ 어머니/ 슬프도록 보고 싶은 이여 10,김 성봉 작곡: 가을바람/ 소쩍새/슬프도록 보고 싶은 이여 11,강 순미 작곡: 사랑하는 너희 12,임 긍수 작곡: 기적의 기쁨
평소 하하 웃으시는 <할미공주 하하>로 널리 알려진 전 세원 작가 그분을 만나보기 위해 안성 미리 내 로사정원을 찾아보았다. 홀로 살아가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꽤나 넓은 2층 저택 이곳에선 평소 인연 지어진 지인들과 우리나라 여러 작곡가, 성악가, 가곡 애호가들을 초청하여 자신이 작사한 가곡 음악회를 열기도하고, 우슬라의 집 양로원 어른들을 모시고 성악가들의 재능기부 자선음악회를 갖기도 한단다. 전 세원 작가는 시인이며 수필가인 반면, 수많은 가곡과 가요를 산출한 문단의 거장이다. 전 작가의 작품은 예술의 전당과 세종 문화회관등 수많은 공연장에서 일류 성악가들의 목소리를 통하여 감동적인 공연들을 펼쳐왔다. 할미공주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모교인 숙대에서 총동창회이사와 정외과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때로는 정의 구현사제단과 맞서 1인시위도 벌렸던 맹렬여성ㅡ 그녀는 캠퍼스의 멋쟁이인 동시에, 공주처럼 천사처럼 하하 웃음으로 꽃향기 피워내며, 만인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팔방미인 도대체 할미공주는 어떤 분이실까?
*ㅡ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들었는데 건강은 좀 어떠신지요?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병원통원치료는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젠 살만합니다. 사고 당시 그땐 꼭 죽는 줄 알았어요. 버스에서 내리던 그 순간에 발이 차 문에 걸린 체 차가 그대로 달린 거예요. 운전기사가 초보인데다 이제 막 취직한 사람이었답니다. 그런 사고는 뉴스에서나 들어왔던 이야기인데, 내가 그러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지요. 그때 사고는 정말 꿈만 같아요. 기사가 젊은 사람인데 신고해서 보상도 받고 치료도 받으라고 하였지만, 내가 싫다고 했습니다. 나도 자식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 장래를 생각해서 그냥 용서해 주기로 했지요. 상당히 큰 사건인데 내가 그렇게 해주니 기사가 어리둥절했답니다. 택시를 태워주어 집에 와서 정신을 잃은 체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새벽이더군요. 밤새 무서워서 불을 환히 켜놓고 잠들었답니다. 내 몸을 거꾸로 매달고 버스가 달렸는데, 이건 살아있다는 게 기적일 뿐입니다. 죽을 뻔 했는데 하나님이 저를 다시 살려주셨나 봐요.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성시를 썼습니다.
기적의 기쁨/ 전 세원(임 긍수 작곡)
두 손 모아 기도하면 은혜로운 나에 주님 주님 안 에 기적으로 살아있는 오늘에 나 밝은 아침 새소리에 화답하고 기뻐하니 구름 걷어 살그머니 웃음 짓는 주 하느님 참된 사랑 믿음으로 말씀 따라 살아가며 내 주님께 영광 찬미 영원토록 찬송하리라
기도하는 나 눈물이 흐름 니다 살아있으매 기적으로 살려주신 주님은총 보답 하리 세상만물 피고 지는 신비함에 환호하며 꽃다발을 가득안고 감사함에 미소 짓네 참된 사랑 믿음으로 말씀 따라 살아가며 내주님께 영광찬미 영원토록 찬송하리라
*ㅡ일본 황실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1942년 3월 7일 태어났는데 그때는 아직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전, 일제 강점기 시절입니다. 그 시절 일본 황실병원에서 제가 태어났다는 것은 특별한 인연 때문입니다. 황실병원이란 일반사람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본천황가족만이 이용하는 병원인데, 한국 사람인 제가 더군다나 식민 국가였던 그런 상황에서 황실병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예삿일이 아닐 겁니다. 그 사건의 실마리는 저희 부모님의 일본유학에서부터 비롯되었답니다. 아버님은 일본의 중앙 대학원을 나오시어 도청에 근무를 하시었는데 그런 까닭에 도청근처에 있는 아파트에 사시게 되었습니다. 구리스다루 하우스란 일본에서 제일 좋은 아파트였는데, 그 집은 지금도 유일하게 남아있답니다. 반면 어머니와 일본천황의 따님인 황녀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구요. 서로 대학시절부터 친구로 지내왔는데 아파트에 사실 때 함께 같은 아파트에 사신거래요. 그때 제가 임신되어 분만할 때가 되었는데, 그 황녀의 주선으로 황실병원에 입원하여 제가 태어난 거지요. 당시 황녀는 아직 미혼인 노처녀였는데, 저를 수양딸로 삼겠다고 하며 극진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누구도 받지 못한 호강을 누렸다고 생각됩니다.
*ㅡ장면박사의 외손녀라 들리던데 사실인가요? 저희 어머니가 김 씨인데 장면박사님의 외손녀가 된 데는 사연이 있답니다. 장 박사님이 16세에 14세 되는 신부(김 옥윤여사)를 만나 결혼을 하시고, 얼마 후 장 박사는 미국으로 유학길에 올랐고, 신부는 친정집에 와있게 되었나 봐요 그 신부는 저희 어머니의 고모가 되시는 분이셨으며 저로썬 고모할머니가 됩니다. 새색시가 친정집에 와 있을 때 올케가 저희 어머니를 낳아서, 미국에 가있는 신랑만을 기다리는 지루함을 우리 어머니를 딸처럼 그렇게 키웠답니다. 자식을 낳기 전이었기에 저희 어머니는 할머니 딸이었습니다. 그래 엄마를 딸로 여기며 키우셨기에, 저로 하여금 외할머니로 부르게 하셨지요. 그래서 장면박사님은 자연스레 외할아버지가 되셨구요. 장면박사는 해방 후 자유당정권시절 국무총리도 하시고 부통령도 하셨는데, 제가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늘 상 총리공관으로 부르시어 저를 귀여워해 주셨답니다. 총리공관은 외국에서 온 손님들이나, 여러 귀빈들을 맞이하는 일들이 자주 있기 마련인데, 그때는 외식이 없이 손님들을 공관에서 맞이했기에 늘 잔치 집이었고, 그때마다 사람이 필요하여 친정 조카들과 저희가족을 항상 불러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할머니는 저희가족을 끔찍하게 사랑하시어, 집안에 무슨 큰일이 있으면 꼭 직접 찾아와 챙겨주시고, 저희 어머니가 몸이 조금만 아파도 명동성모병원특실에 입원을 시키시어, 식사도 끼니마다 병원 밥이 아닌 할머니가 손수 식사를 챙겨 기사로 하여금 배달시킬 정도로 엄마를 사랑하셨답니다. 외할아버지 장면박사는 군사혁명이 있고나서 한때 영어생활을 하셨습니다. 군사정부가 할아버지를 연행해 갔던 사실을 할머니께 물었더니, 남북한 피 흘림도 용서치 못할 일인 데, 그때 군사정권을 맞서 싸울 수도 있었지만 또 피를 흘리게 할 수 없어 그렇게 하셨다 답변 하시더라 구요. 아마도 외할아버지는 국가장래를 내다보는 깊은 안목이 계신 분 같습니다. 혁명이후 장면정권을 무능하다 몰아붙였지만, 4,19혁명이후 어수선한 정국이긴 했어도 국가 대계를 위한 플랜들은 다 갖고 계셨나 봐요.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이미 할아버지 때 세워놓은 계획이었다고 들었습니다.
*ㅡ부친께서 만석 군이라 들었는데 그에 대한 말씀과 부친의 교우관계를 좀 들려주시지요. 저희 아버님은 전 기양공이시고 어머님은 김 숙경 여사이십니다. 아버지는 일본 중앙대학법학부(대학원)출신으로 젊은 30대에 일본 도청주사로 재직하셨고, 어머니는 진명여고 시절 성악 솔로였으며 유학하여 대학은 일본에서 다니셨습니다. 아버님을 만석 군이라 했지만, 실은 조부님과 그 이전 선조 때부터 유복한 가정이었답니다. 만석 군하면 오늘날 백만장자인데 저희 친정가정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집안이었지요. 그렇게 잘사는 집안에 고명딸로 태어난 저였기에, 공주라는 호칭이 그때부터 붙어다녔구요. 저는 5남 1녀 6남매 중 유일한 딸 이였기에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저희 아버님과 절친한 친구 분은 일본 유학시절 3총사(원주 3총사로도 통함)로 불렸던 최 규하 선생과 윤 길중 선생이십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최 규하선생은 강원도 원주가 고향이셨고, 일본 동경 고등사범학교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신분인데, 이분은 오랫동안 외교관 관료를 지내시다가 외무부 장관을 거쳐, 잠시이긴 하지만 한때 대통령에 오르시기까지 한분입니다. 윤 길중 선생은 출생지가 함경남도 북청이신데, 남하하여 원주 보통소학교를 거쳐 일본 경성법정학교와 일본 대학 전문 부 법과를 나오셨답니다. 선생은 일본 고등문과시험 행정과와 사법과를 동시에 합격하신 분으로, 고국에 돌아와 전남 강진, 무안등지의 군수로 재직도 하셨고, 해방직전엔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무관으로 종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해방이후에는 국민 대학교수, 국회 법제조사국국장, 법전 편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시다가 그 후 계속 정치활동을 하셨는데, 원주에서 민의원당선을 필두로 제8대,11,12대국회의원에 당선되셨고, 국회부의장까지 역임하신분이십니다. 이들 두 분이 관직에 나가 훌륭히 성공하신 배후에는, 저희 아버님의 경제적후원이 컸다고 봅니다. 저희 아버님은 일체 관직에 나가시진 않고, 조용히 다른 사람들을 돕는 후원 사업만을 하셨는데, 일제 강점기시절엔 독립군 뒤를 보아주시다가 위험한 어려운 경지를 겪기도 하셨답니다.
*ㅡ5대째 가톨릭 신앙을 하시게 된 배경과 가정환경에 대해서 말씀 좀 주시지요. 전통적으로 가톨릭신앙을 하게 된 신앙의 뿌리는 저희 어머니 외가 쪽입니다. 저희 어머니 외할머니(조 마리아) 고모 되시는 분이 조 대비(趙 大妃)라는 분이셨어요. 조 대비는 신정왕후(神貞王后)인데, 풍은 부원군 조만영(趙萬永)의 딸로써 조선왕조 말기 익종의 비로 책봉되어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고종이 즉위한 뒤엔 대왕대비로써 수렴청정까지 하신분이십니다. 그 조 대비로부터 따진다면 5대가 아닌 7대째가 되는 거고, 저희 외할머니가 독실한 신앙을 갖고 계셨기에 외가 집안은 전체가 가톨릭신앙을 하게 된 거지요. 저희 이모님인 김 말가리다 수녀는 메리놀 수녀 회 1호 수녀가 되셨고, 장 익 요한주교(장면박사 아드님)는 외삼촌이시기도 합니다. 김 말갈리다 수녀는 일찍이 숙대를 졸업하시고 장면박사 여동생과 동행하여 미국유학길에 올라 함께 메리놀 수녀 1호가 되셨던 분이지요. 한편 큰 외삼촌 장 전 박사는 전 서강대 학장이시기도 하셨구요. 이렇듯 장면박사님 가정이나 우리가정은 전체가 가톨릭신앙을 철저하게 지켜온 전통신앙이 되었습니다.
*ㅡ남편은 어떤 분이셨으며 가족사항에 대해서 좀 전해주시지요. 제 남편은 박 지현님이시고, 서울대 법대를 나오셨습니다. 남편은 공식적으론 쌍용(당시 우리나라 재계4위)에서 총무와 상무를 지내셨고, TK실세인 신 현확총리의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었습니다. 남편은 선거 때마다 선거책임자가 되었으며,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보이지 않는 능력자이며 실세였지요. 신 현확씨는 일제강점기에 고등문과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관계에 입문하였고, 광복 후 부흥부 장관, 보건사회부 장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지내셨던 분이십니다. 이런 분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히 재계나 정계에도 폭넓게 아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보아야하겠지요. 저희 자녀는 순성, 순준, 혁준, 혜진, 연진 등 3남2녀의 5남매입니다. 모두 훌륭하게 잘 자라주어 더없이 기쁘고 감사한일이랍니다. 손 주도 7남매나 두었는데, 그중 큰손자는 2011년 미국 동부의 명문인 시카고 주립대학 아바나 삼페인에 들어가 지금은 3학년이 되었구요. 저는 어려서는 부모님사랑을 독차지했고, 결혼 후에는 남편사랑에 취해 살았으며, 이제 말년엔 자녀들과 손 주들 사랑을 받고 창작활동을 하며 사는 행복한 여자랍니다.
*ㅡ살면서 가장 즐겁고 행복했던 일과 또한 어려웠던 일은? 저의 어린 시절은 누구보다 사랑과 행복을 많이 누린 행운아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남편을 만나 함께 살아온 시간들이라 여겨집니다. 제가 남편을 만난 것은 숙대 정외과에 다니던 그때인데, 아마도 그땐 눈에 쌍꺼풀이 씌였나 봐요. 고시 공부하던 서울법대생에게 한마디로 한눈에 뿅 갔던 겁니다. 당시 저를 짝사랑하고 상사병에 걸린 수많은 총각들을 울려놓고, 그만 앞뒤 안보고 덜컥 일 을 저질렀지요. 그렇게 우리는 만났고 5남매 자녀들을 낳고 기르면서, 승승장구 남편의 성공적인 인생길에 저는 콧노래 부르면서 살아왔기에, 남편과 함께한 그 모든 시절이 너무도 그립고 행복한 순간들이었습니다. 반면 가장 어렵고 불행한 일이라고 한다면 사랑하던 남편이 떠났을 때입니다. 제 남편이 제 곁을 떠난 것은 꼭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멀쩡하게 새벽에 골프모임나간다고 가셨다가, 그게 저와 마지막 이별이 되었기에 말입니다. 당시 회사에서 노사조정문제로 시달려 피곤이 역력한 남편이셨는데, 새벽녘에 골프모임가신다기에 가지 않는게 좋겠다고 만류를 하였지만, 그냥 갔다 오겠다고 가시어 필드에서 그만 쓰러지셨답니다. 오전 8시쯤 전화가 왔어요. 그 불길한 전화의 내용은 부군이 돌아가셨다는 메시지였고, 우리나라 모든 8대 일간 신문에 대서특필 보도가 나갔습니다. 예상치 못한 비보를 받고 저의 눈앞은 암흑천지였지요. 어찌 말 한마디 없이 이토록 어이없게 떠나실 수가 있는가 싶어, 하나님도 무심하다 생각했습니다. 당시 저는 전화를 받고 앞이 안보였고 그만 기절하고 말았지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기를 반복했지만, 그러나 저를 가만히 있게 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어린 자녀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고, 제 일생을 두고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감내하기 어려운 일을 당한 게 바로 그때입니다.
*ㅡ문학에 입문한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 환갑을 맞으면서 뭔가 쓰고 싶더라구요. 문학이란 엄숙한 명제에, 가두어 두는 글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 속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삶의 애환 같은 것을 그냥 쓰고 싶었던 것이지요. 이 정도의 세월을 살아왔다면, 누구나 자서전 한권정도는 쓸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그것이 넋두리라도 좋고, 뭐라도 남기고 싶다는 생각에 글쓰기에 발을 들여 놓았답니다. 그런 동기는 실상은 느닷없이 세상을 떠난 부군의 죽음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고백함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틈틈이 글도 쓰고 아이들 건사도 하고, 그렇게 하여 나온 책이 "다시 태어나도 "란 312쪽의 수필집이었습니다. 아무튼 책을 내고 나서 본격적인 글쓰기 작업을 하니 여러 군데서 등단을 하라고 권유를 해오더군요. 그러나 별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 일을 인연으로 시인인 이양우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여서 "문예춘추"를 통해서 수필등단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큰 시인이신 이양우 대표님께 마냥 감사드리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시인등단은 한국 육필문학에서였는데, 충남 보령 개화 예술 공원에는 저의 육필시비가 세워져 기념되고 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는 육필들을 한곳에 모으는 문화유산 살리기 작업의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지요.
*ㅡ정의구현 사제단과 맞서 1인 시위도 하셨다던데?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간판은 내려져야 마땅합니다. 제가 그들과 맞서 1인 시위를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거슬린 불의의 세력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70년대 이후 민주화투쟁에서 쌓은 명망을 엉뚱하게 친북, 반미활동에 탕진하고 있고, 반정부활동에 앞장서서 사사건건 태클을 걸고 있는 명백한 종 북 세력이라 그렇게 여겨집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자신들의 명칭 앞에 천주교를 내세워 마치 천주교를 대표하는 가장 정의로운 사제단인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교회안팎을 다독여야할 사제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온갖 편견과 독선으로 교회를 태질질 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스런 무리들입니까? 그들의 언행에는 어디에도 거룩한 사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맑은 정신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패륜을 저지르는 마귀의 거친 소리만이 귓전을 울립니다. 그들은 겉으론 정의를 부르짖고 있지만, 눈으로는 시퍼런 증오의 불길을 뿜어내고, 혀로는 더러운 저주의 독설을 쏟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선동과 투쟁일변도의 그들 행동은 수법이 공산주의자들과 너무도 흡사하구요. 사제단 신부님들이 어떻게 받은 사제서품이었습니까? 얼마나 황홀한 주 예수그리스도의 신비였으며, 사제 서품식에 자리를 함께했던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목이 메어 눈시울을 붉혔을 것입니다. 평화의 씨앗을 세상에 가져다 뿌리는 좋은 몫을 그들은 차지하였고, 그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한 목숨 바쳐 복음전파에 정진할 것을 주님 앞에서 다짐하였던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벨탑을 다시 쌓기 시작했고, 엉뚱한 거짓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추악한 사탄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거짓 사제들 아니겠어요? 우리는 교회의 이름으로 그들을 규탄해야 마땅하고,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애국의 이름으로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저 혼자만이라도 언제든 당당히 1인 시위를 펼쳐 나갈 것입니다.
*ㅡ인생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따로 거창한 좌우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살고 싶다는 저의 소박한 꿈은 있지요. 다시 태어나도 고운 나! 웃는 나! 인류를 사랑하는 나로 남고 싶다. 이것이 저의 소망이자, 꿈이기도 합니다.
*ㅡ심정문학 시낭송을 보고 느끼신 소감은? 저는 시낭송이 그렇게 좋은걸 미처 몰랐습니다. 시 낭송회를 한다는 소식을 열린 문학 오 문옥 회장을 통해서 소개받았는데, 주최가 심정 문학이라 해서 그때는 퍽 궁금하였지요. 그런데 막상 현지에 가보니 통일교회라서 이거 잘 못 온 것이 아닌가 싶고, 마음이 솔직히 불편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진 통일교회는 이단종교라는 인식이었기에, 절대 가서는 안 될 종교집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처음 참석한 곳은 구례였고 두 번째는 경기도 광주였는데, 구례를 갔을 적엔 하룻밤을 보내면서 산수유축제와 광양매화축제, 그리고 사 선대와 하동 최 참판 댁 등을 돌아보는 아주 좋은 관광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우리가 묵었던 황토방에서 소감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시 낭송이 가져다주는 위대함은 대단하다 생각합니다. 우선 제 마음의 벽을 확 열어 재낀 것 같아요. 그날 행사에 참여한 분들은 다양한 종교, 여러 계층의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 하였지만, 모두가 마음의 담 벽을 헐고 어울리는 모습이 참 보기에 좋았습니다. 서로 불신하고 담 벽을 쳐놓고 산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 아니겠어요. 주최 측 심정문학회원들이나 교회 목사님과 여러 교우들이 하나같이 친절함과 따뜻함을 보여줌도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어 기뻤습니다. 시와 음악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언어라고 볼 때, 시 낭송은 매우 훌륭한 공감대를 가져다주는 예술의 장르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어 감사합니다.
*ㅡ최근의 주요활동과 앞으로도 해보고 싶으신 일이 있다면? 저는 본래 대학시절 정치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저의 전공분야도 그런 쪽이었구요. 제가 성장했던 환경도 큰 영향이 미쳤으리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정치일선에 나서본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저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좀 남다른 면이 있지요. 또한 나라를 위하고 국가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깊이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정치일선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국제안보포럼이나 민주 평통등의 활동에도 늘 관여하여 열성을 다해 보았습니다. 숙대 동창이신 이 경숙총장이 발표한 S리더십에 대한 실천자의 역할을 하기에도 앞장서 보기도 했구요. 이 총장의 숙대 S리더십이란 봉사적인 성품, 건강한 심신, 창조적 지식, 미래형 기술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21세기에 반드시 필요한 인간적 자질이라 봅니다. 반면 이 명박대통령캠프에선 외교정책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박근혜대통령을 당선시키기 위해서도 반드시 이런 분이 나라를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마음에서 열성을 다해보았습니다. 지금은 정치인들이 국민위에 군림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킬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 언제나 국민과 공감대를 형성시켜 나갈 때 박수를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정치인들이 많이 나타나길 희망하고 있으며, 저 나름대로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주의 수호의 밑거름이 되고자 합니다. 명심할 것은 우리는 분단국가로써 휴전상태인 대한민국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편 늦깎이로 출발한 문학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그동안 문학지와 동인지등을 통하여 많은 글들을 써왔고, 31편의 가곡을 발표하기도 하여 인생의 새로운 보람과 희열을 느껴왔습니다. 상복도 따라주어 독일의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딴 헤르만 헤세 문학상을 받은 것은 더없는 영광이기도 했구요. 저는 인생마무리를 하게 될 직책 중, 가장 보람 있는 일은 시인으로서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지금껏 해왔던 일들에 더욱 열성으로 다하며, 남은 인생을 글 쓰는 일에 더욱 최선을 다해볼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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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번 출간된 심정문학 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전세원 작가와는 국제문화예술협회와 열린문학활동을 통해서 여러차례 인연을 맺어온 귀하신 분이기에
금번 명사탐방인사로 선정하여 대담을 가졌습니다.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드립니다~^^♥
폭넓게 활동하시는 선배님 멋지십니다^^
댓글 고맙구요
앞으로 보다 귀한 명사들을 찾아 소개할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