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55
3월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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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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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QeDZKQPtls (김윤상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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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는 죄인들이 용서받을 희망을 크게 품게 하시고자,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신분이나 계층의 구분이 확연했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만남도 끼리끼리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지도층 인사들이나 평민이 하층 신분인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곳에 있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거룩한 존재인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적어도 평민들이 속된 존재인 세리나 죄인들과 한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리 레위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새출발하던 저녁, 그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해가 지자 참석자들이 속속 도착했는데,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료 세리들, 인신매매 업자들, 밤업소 종사자들, 거래처 사람들... 각양각색의 뒷골목 사람들이 총출동한 것입니다.
그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였습니다. 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룬 것을 통해 우리는 레위가 보통 세리가 아니었음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는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총 책임지고 있었던 세관장, 다시 말해서 보스였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잔치는 레위가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드린 기쁨과 감사의 잔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면 영등포구나 태안군 전체를 주름잡던 큰 형님, 조직 보스가 회개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동료 세리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또 레위 본인은 얼마나 감지덕지하고 황공무지한 사건이었겠습니까?
뿐만아니라 그런 자리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는 거나하게 차려진 잔치 음식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각만 해도 불결한 존재인 세리와 죄인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머무시며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예수님의 모습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복음 5장 30절)
이 말은 ‘어찌하여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오?’ ‘어찌하여 율법을 어기는 것이오?
어찌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온 소중한 전통을 깨트리는 것이오?’란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죄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복음 5장 31~32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죄인들이 용서받을 희망을 크게 품게 하시고자,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높은 의로움으로 피어나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즐겁지 않습니까?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존자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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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WHXsCT0Yw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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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차려진 식탁에서만 성장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왜 식사하는 것까지 트집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투덜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죄인들을 치료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식탁. 이어서 그 식탁 안에서 치유되고 자라는 자녀들입니다.
먼저 ‘아빠–엄마–사랑’을 ‘성부-성자-성령’처럼 삼위일체로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식탁입니다. 식탁은 아빠가 벌어온 돈과 엄마가 아빠를 위해 자신을 내어줌이 만나는 곳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서도 결혼해서 신혼생활 할 때의 꿈을 꾸었는데 그 식탁에서 아내가 불만을 말하니 꿈속에서도 기분이 나빴던 것이 기억납니다. 나가서 돈 벌어오기 싫은 마음이 확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상황에 아이가 놓여있다면 아이는 당연히 자아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는 생존이 불안할 때 커집니다. 왜냐하면, 생존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아내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싫거나 아내가 남편을 위해 제대로 된 식탁을 차려주기 싫으면 그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녀는 ‘불안’을 느낍니다. 부모의 불안함이 자녀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스스로 생존하려는 마음이 커지는데, 그렇게 자아가 큰아이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그래서 식탁에 앉은 자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생존의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 안에서 자녀는 돈에 대한 집착이나 자신만 아는 마음이 성장할 수 없고 오히려 치료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서 오고 가는 사랑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세리는 특별히 돈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 안에서 돈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지고 세리는 그렇게 돈 좋아하는 마음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런 삼위일체로 만들어진 환경 안에서 자라지 않는 아이는 반드시 돈에 대한 욕구이든, 육욕에 대한 욕구든, 힘에 대한 욕구든 간에 치유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6회 ‘힘 과시하는 감당 안 되는 아이의 폭력성은 ADHD 때문일까요?’가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여자아이인데도 친구 사귀는 법을 모릅니다. 자신과 놀아주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하고 하늘나라 보내버리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엄마에게도 대듭니다. 식탁에서 지시하는 것은 거의 따르지 않습니다. 생떼를 쓰고 욕을 하고 음식을 엄마에게 얹어놓기도 합니다. ADHD로 약을 먹어도 상태가 악화하여 유치원에 등교시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금쪽이는 자신이 아빠를 대신해 엄마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빠가 폭력을 가하여 엄마 얼굴에 피가 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혼한 엄마를 보며 아이는 생존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 것이 아빠의 폭력과 엄마의 약함이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를 바꾸려면 엄마에게 자신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합니다. 엄마가 먼저 하느님을 굳게 믿어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먹고 삽니다. 엄마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합니다.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먼저 엄마부터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도 평화를 찾고 그 식탁에서 자아가 죽어가며 온전한 하느님 자녀로 성장합니다.
상황이 안 좋다고 상황 탓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에서 아빠와 엄마는 5살 아이와 함께 독일군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탑니다. 엄마와 아빠는 수용소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빠는 재치있는 행동으로 홀로 떨어진 엄마에게 자신과 아들이 살아있음을 알립니다.
낯선 환경에서 독일군에게 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을 뻔히 하는 아빠는 아들에게 1,000점을 따면 탱크를 탈 수 있는 게임이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빠의 말을 듣고 수용소의 상황이 탱크를 탈 수 있는 하나의 게임이라고 믿어버립니다. 아빠는 죽음 직전도 아이 앞에서 웃으며 나아갑니다. 아이는 끝내 들키지 않고 살아 엄마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탱크를 타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아이가 불안하지 않으려면 부모부터 불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축음기를 이용해 아내와 함께 보았던 오페라 음악을 틀어줍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며 죽음 직전까지 안심시킵니다. 이 때문에 아이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감정이 식탁에서도 벌어져야 합니다. 결국, 먹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일단 맨 밑에 계약의 궤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계명 판과 만나,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하느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구름이 내려옵니다. 그 중간에 대사제가 잡은 소의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그 중간 자리가 속죄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빠를 상징하는 구름과 엄마를 상징하는 계명판 사이에서 차려지는 사랑의 식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식탁에서 자녀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이런 식탁을 마련하여 우리 자아를 죽여 우리를 치료하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식탁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련하는 평화의 자리입니다. 그 평화의 자리에 머물 때 우리는 치유되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항상 이 자리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관상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보는 세상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일지라도 온통 사랑입니다. 그냥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임 환경을 자신이 유리하게 만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또 누군가는 게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생존 걱정을 하는 부모는 자녀를 식탁에서부터 망칩니다.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와 신자 간에 남편과 아내가 마련한 식탁처럼 따듯한 온기가 있는 분위기가 없다면 누군가를 성당으로 데려와도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자녀는 따듯한 밥상이 차려진 식탁에서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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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
예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신다. 그는 돈 욕심이 사납고, 소유욕으로 가득 차, 자기 것이 아니라도 그것을 소유할 욕심에 정의 따위는 관심도 없는 자였다. 세리는 본디 그런 사람들이었다. 돈 외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던 그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27절) 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레위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한때 어부들이 위험한 일터에서 땀 흘려 번 것을 강제로 빼앗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의 재산을 착취하던 직업을 버렸다. 수치스런 자리를 떠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이 가시는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고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누구든지 주님을 자기 안의 집에 맞아들이는 사람은 가장 맛난 음식인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주님을 바리사이들이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림으로 율법을 어긴다고 비난했지만, 많은 군중들이 그분을 따르는 것에 대해 시샘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재판관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의사로 오셨음을 보여 주신다. 그분은 치료받아야 할 사람들 가운데 계시면서 의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32절) 그분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들(로마 10,3 참조)을 부르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그분은 자신의 나약함을 알고 자기가 많은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하는(야고 3,2 참조) 사람들을 부르신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은 그들 바리사이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분은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겸손한 자들을 부르신다. 그들은 끝까지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을 때 사람들은 굶주리며,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지 못한다. 참으로 자신의 덕행으로 즐거움을 맛볼 사람, 그리스도를 자기 집안에 모셔 들인 사람은 큰 잔치를 마련한다. 그 잔치는 선행들로 차린 영적인 잔치로, 교만한 사람들은 맨입으로 돌아가고 가난하고 겸손한 이들은 배부르게 먹는 그런 잔치이다. 레위는 잔치를 통해 자신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죄인들이 용서받을 희망을 품게 하시고자,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의롭게 피어나도록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마땅히 우리의 마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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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구독신청’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본당 신부님의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큰 힘이 됩니다. 며칠 전 홍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한 본당에서 같은 주일에 잡지 두 곳이 홍보를 왔다고 합니다. 젊은 수사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구독신청이 적을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잡지를 홍보하러 왔던 형제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사님이 만드는 잡지를 많이 구독해 주세요. 여유가 있으시면 저희 잡지도 구독해 주세요.’ 그렇게 말을 마치니, 꽉 막혔던 마음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듯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들이 형제님의 잡지를 많이 신청하셔서 놀랐다고 합니다. 수사님의 잡지도 평소보다 많이 신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은 1등만을 알아주고, 경쟁에서 이겨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저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오늘 샬롯 성 이윤일 요한 성당으로 홍보를 가려합니다.
이제 곧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하나이기에 후보들의 경쟁은 치열합니다. 정책을 만들고, 공약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보다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는 후보들이 토론을 통해서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거짓된 정보로 상대방을 모함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국민은 없을 것입니다. 상대의 정책과 공약 중에서 좋은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국민을 위해 충실하게 일하려는 후보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후보들 간의 비열한 경쟁이나 모함의 난장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후보들이 자신들의 정책과 비전을 드러내는 멋지고 아름다운 축제의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난장판을 만드는 것도, 축제의 자리로 만드는 것도 현명한 국민들의 선택입니다. 검증이라는 이유로 후보들의 작은 허물을 침소봉대하는 언론의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후보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아닙니다. 후보들의 정책 실현 능력을 알고 싶어 합니다.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하고,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눔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예수님께서도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신앙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에게 해 주는 덕담이 있습니다. 서로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서로에게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따지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더 큰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좌 신부가 그럴 수가 있나.’라고 험담하기보다는 ‘보좌 신부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면 더 큰 신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죄인을 받아 주셨고, 아픈 이를 위로해 주셨고, 배고픈 이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넘어진 이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탕아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 주고, 품어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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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도 대단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선 레위도 남다릅니다.
사실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 출신 제자들은 밑져야 본전이었지요. 예수님을 따랐다가 여차하면 다시 고기잡이를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위는 사정이 달랐지요. 이제 다시는 세리라는 직업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레위로서는 배수진을 친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들다고,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세례 전의 생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레위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안정된 직업은 잃었지만, 대신 삶의 의미를 찾았지요. 이런 모습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나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라는 자만심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영적으로 문제없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요소가 자신도 모르게 스며들어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 늘 남의 탓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마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립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가장 변화되어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반복해서 범하는 죄가 있다면 그 죄의 뿌리가 무엇인지 캐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의 은총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이번 사순 시기에 힘껏 노력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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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형호 미카엘 신부님]
자주 병원에 가는 이들은 큰 병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기 건강을 맹신하다가 큰 병을 키우는 이들이 종종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고해성사를 보는 이들은 깨끗한 영혼을 갖고 기쁘게 삽니다. 반면에 오래토록 성사를 보지 않은 이는 무슨 죄를 짓고 사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충고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기도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그런데 충고를 무시하거나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이들을 종종 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서 함께 밥을 먹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이 말을 세리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알아듣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은 의인이고 세리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듯이 자칭의인과 자칭죄인은 예수님 앞에서는 반대로 적용됨을 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세리와 바리사이의 차이를 한 번 살펴봅니다. 세리는 자기반성을 통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의 자비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율법학자)는 자기들은 의인이라고 생각하기에 반성의 기회를 갖지 않습니다. 예수님(하느님)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리의 반성은 더 큰 의로움을 위해 악습을 버리고 새롭게 살 수 있는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의 자만은 눈앞에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도 볼 수 없게 눈을 가려버립니다.
정리해보면 세리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바리사이는 예수님마저도 소유하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스스로 죄인이라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의인입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스스로 의인이라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사순절 재계의 시기를 매일의 자기반성을 통해 하느님 앞에 새롭게 거듭나는 은총의 시기로 채워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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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난 오늘 기꺼이 병자요 죄인이고 싶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얼마 후 길을 가시다가 레위라는 세리를 불러 제자로 삼으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공생활 개시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주변으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복음선포의 활동을 시작하셨다.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온갖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어부들을 뽑아 제자로 삼는 등 예수님의 복음선포 활동은 크게 하느님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병자치유·구마기적의 활동과 제자교육의 세 가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이 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 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선포된 복음이 인간 측에 수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포된 복음이 무조건 인간에 의해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그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에 의해 선포되는 복음은 하느님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며, 이는 곧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을 베풀 때 다른 무엇을 주시지 않고, 당신 스스로를 주신다면 인간이 과연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인간이 이 선물을 받는데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죄(罪)다. 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허물어뜨리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 장애물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선물은 수용되기 어렵다.
따라서 예수께서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눕힌 채 지붕을 뜯어 내려보냈을 때 그들의 용기와 믿음을 보시고 병자의 병만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병인 죄까지도 용서해 주셨던 것이다.(5,18-26)
이 일로 말미암아 루카복음에서 예수와 바리사이파 율사들 간에 본격적인 반목이 시작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그들이 예수 안에 육체의 치유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지만, 죄의 용서까지는 능력 밖의 일로 믿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창조 이래로 깨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친분관계를 회복시키는 메시아이심을 계시하는 일은 복음서의 중요한 목적이다.
따라서 루카는 중풍병자를 놓고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당시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세리를 제자로 삼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식탁공동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레위라는 세리를 '나를 따라 오너라'(27절)는 단 한마디의 말씀으로 당신 제자로 삼았다. 죄인을 제자로 삼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레위가 친구들을 모아놓고 송별만찬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여기에 예수님도 당연히 함께 자리하셨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죄인들과 식탁에 함께 앉으신 것이다.
이는 의사가 앉아서 병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손수 찾아 나섬이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인자(人子)의 사명인 것이다.
사순시기는 이렇게 하느님께서 손수 병자와 죄인을 찾아 나서시는 때이다. 하느님 친히 병자와 죄인들을 당신 식탁에 초대하여 식사와 친교의 공동체를 마련하시는 것이다.
초대받은 병자와 죄인들 중에 스스로 자격이 있어 그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것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죄인들도 마찬가지다.
식탁에 들기 위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일은 허물을 벗고 죄를 씻는 일이다. 따라서 세관에 앉아 업무를 수행하던 레위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는 말씀은 곧 '죄로부터 떨어져라'는 말씀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순시기는 은총의 때인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식탁공동체에 앉을 수만 있다면,b나도 기꺼이 병자요, 죄인이고 싶다. 아니, 이미 병자요 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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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죄를 지었습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우리 가운데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되이 주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며 우리 보다 더 낮게 우리의 음식이 되어 오시는 주님께 우리의 교만과 아집을 봉헌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저는 양성 기간에 있는 수녀님들의 고해성사를 들을 때 가끔씩 “지극히 정상이십니다.”라고 다음과 같이 훈화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환자가 의사에게 가서 자신의 아픈 증상을 말하며 의사는 여러가지 검사를 한 후 진단을 하고 필요하면 약을 처방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수술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제가 수녀님의 영혼과 마음의 아픈 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집에 가셔서 밥 잘 먹고 운동하고 기도 제 때 잘하고 기쁘게 지내셔요. 때가 되어야 그 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춘기를 거치는 것처럼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신이 부서지는 아픔의 성장통을 겪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거짓 자아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체험이 있어야 진정한 내적 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지 때문에 그런 과정에서 겪게 되는 작은 아픔들과 시련은 지나가는 과정이기에 지극히 정상인 것이죠! 그리고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주어도 지금 그 과정 중에 있을 때는 잘 알아 듣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기다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을 다 겪고 나야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의인과 악인, 거룩함과 속된 것이 엄격히 구분되는 유대 율법 안에서 죄인인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삼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잔치를 벌이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수련소에 있을 때 농장에 일을 나가면 담당 수사님께서 간식 시간에 막걸리를 주셔서 불평이 가득했던 적이 있습니다. 선배가 주시는 것 마시지 않을 수도 없고, 그래서 막걸리 마시고 오면, (잘 아시듯이 막걸리나 동동주는 마실 때는 모르는데, 일어나면 취합니다) 저녁 기도 시간에 몸이 흔들흔들, 정신이 몽롱해 집니다. 수도자가 이래도 되는가 늘 마음 속에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도 신부님께 고민을 말씀 드렸더니 “안셀모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런 시간도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정말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지금은 이해를 합니다. 일과 기도는 분리된 것이 아니며 서로 나누는 친교도 기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은 명상의 집에서 우리 수사님들과 공동 작업을 할 때면 "제가 먼저" 주방 자매님께 김치전과 막걸리를 준비해 달라고 말합니다. ^^
자매 형제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유대 사회 안에서 죄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죄인이라고 여기던 이들이었습니다.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가운데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여기 계신 수도자들은 죄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의인일까요? 이 성당에 모인 우리는 의인이고 가톨릭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죄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엄밀이 말하면 죄인이었다가 의인이었다가를 반복하는 의인같은 죄인들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사랑의 결핍이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해야 할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할 우리가 자신의 뜻만을 고집하고 있다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의사 예수님이 필요한 환자들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겼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요 죄인들인데 그들은 스스로를 환자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환장할 노릇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랑이 결핍되었고 하느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뜻을 찾았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고정 관념이나 생각의 틀에 얽매여 진정한 사랑을 나누지도 베풀지도 못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가 필요한 죄인들인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 역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에 감사드리며 세리 레위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예” 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단죄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심판하거나 단죄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의 묘약을 전해 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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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인 까닭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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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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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게 필요한 사람과 내가 필요한 사람>
루카 5,27-32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내게 필요한 사람과 내가 필요한 사람>
내게 필요한 사람과
내가 필요한 사람
사이에
내가 있답니다
내게 필요한 사람보다
내가 필요한 사람
먼저
내가 함께해야 한답니다
내게 필요한 사람과
내가 필요한 사람
모두
내가 품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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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아프면 아프다고 하세요>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했고, 죄인이면서도 죄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의 측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말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겠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 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겠습니다(성 베르나르도). 고해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죄인들이여! 여러분은 죄의 용서로 초대받았으니 기뻐하십시오. 아픈데도 아프지 않다고 우기는 병자는 치료받을 길이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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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세리 레위가 베푼 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벌인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것을 정면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께 반감을 드러내었습니다.(루카 5,20-21 참조) 죄의 용서에 대한 선언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배경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하신 논쟁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단식과 관련한 논쟁으로 이어집니다.(5,33-39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불만을 담아 던진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께서 파견되신 목적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되신 분이십니다.(5,32 참조)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어 회개시키러 오셨기 때문에 앞서 세리 레위를 부르신 것입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며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잔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따르겠다는 레위의 의지와 결심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위는 하느님께 향함, 곧 회개로 부르심을 받은 세리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병자’일 수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치료를 받으려는 의지와 결심 또한 필요합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분을 만나는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과 자세를 살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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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책을 보다가 인상 깊은 글을 봤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원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직선 위에 살면 항상 누군가가 내 앞에 있기에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직선 위에 있기에 늘 1등을 위해 애를 쓰고, 1등이 되면 이 1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직선이 아닌 원 위에 사는 인생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직선이 아니기에 항상 선두주자입니다.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며 살면 그만입니다.
세상에 놀라운 업적을 남긴 사람을 떠올려보면 직선의 삶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직선의 삶은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올라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좌절과 박탈감만 느낄 뿐입니다.
원의 인생을 살기 위해 우선 남의 눈, 세상의 눈으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고유한 나의 눈, 특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하느님의 눈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하느님의 눈보다는 세상의 눈으로 직선의 삶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던 갈릴래아 해안에는 로마인들이 세워 놓은 세관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외국 상인이 드나들고, 유다인 상인들이 물건을 밖에 내다 팔려면 이곳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는 로마인들을 위해 그 상품에 관세를 물립니다. 세리는 보통 로마인이었지만 유다인도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유다인은 자기 동족들의 눈에는 민족 반역자인 죄인이었습니다.
제자를 뽑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먼젓번에는 흙투성이 발과 비린내 나는 손으로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어부를 선택하더니, 이번에는 사람들의 증오 대상인 세리를 부르시니 말입니다.
유다인이 생각하는 죄인이란 율법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 자, 이방인들과 사귀는 자, 그리고 매춘부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반율법행위에 해당했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식사 자체가 곧 종교 예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에 붙어서 사는 죄인인 레위의 집에 가셔서 식사까지 하고 있다는 것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가져온 행동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수 부류의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마음을 돌려 회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삶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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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부르심, 버림, 따름-
“나는 누구인가?”
누구나의 궁극적 물음입니다. 참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도 주님이 없으면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답은 우리 주님뿐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참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회개와 겸손이요 비로소 참나를 알 수 있고, 이 또한 평생 과정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의 말입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의 말입니다.
주님께 불림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감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깊어가는 관계의 여정을 통해 존재감 충만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부르심하면 떠오르는 김춘수의 대표적 시, 꽃이 생각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그분이 주님이라면 우리 하나하나는 고유한 색깔과 향기, 크기와 모양을 지닌 꽃입니다. 사실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께 불림 받아, 참나인 주님의 꽃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부르심의 은총입니다. 우리의 따름에 선행하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먼저 부르셨기에 따름의 응답입니다. 부질없는 물음이지만, 만약 주님이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시지 않았다면 레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약 우리를 주님께서 부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정말 부질없는 상상이요 질문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은총이요 구원 섭리입니다. 주님은 어쨌든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하나하나를 최선의 길로 이끄셨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다시 살라해도 이렇게 살 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르심에 앞서 주님은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내적 갈망을, 열망을 한 눈에 알아채셨음이 분명합니다. 레위 역시 주님을 보는 순간 평생 갈망해 왔던 그분임을 알아챘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영혼과 영혼의 참만남입니다. 누구나 내면 깊이에는 이런 만남을 갈망합니다.
“나를 따라라.”
전광석화, 주님께서 부르시자 지체없이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 둔 채 그분을 따라 나섭니다. 오매불망 꿈에 그리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비로소 참나의 존재감 있는 삶을 살게 된 레위입니다. 부르심-버림-따름이 하나로 이어짐을 봅니다.
혼자의 외로운 삶에서 예수님 제자 공동체에 합류한 레위는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풉니다. 주님을 만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비로소 참나를 발견한 레위의 감격에 벅찬 잔치입니다. 흡사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생일 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어찌하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투덜거리며 불만을 토로하자 예수님의 지체없는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치료받아야 할 환자로 여기시고 당신 자신을 의사로 비유하십니다.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죄인아닌 사람, 병자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잘 들여다보면 누구나 무지라는 병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인으로 보기 보다는 병자로 보아야 합니다. 병자이면서 병자인줄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회개 은총이 결정적입니다. 부르심-버림-따름의 일련의 과정은 바로 회개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신원은 ‘회개한 죄인’이자 ‘치유받은 병자’입니다. 그러니 무지의 병에 대한 근원적 치유는 주님과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라는 근원적 병을 치유해 주실분은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단 하나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의 여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 반복되는 부르심과 버림, 그리고 따름입니다. 날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안팎으로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관계와 더불어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회개의 여정은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아 가면서 주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회개의 은총을 보여줍니다. 어제에 이어 참된 단식의 정신을 보여줌과 동시에 실천적 회개를 통한 주님의 놀라우신 축복의 은총을 보여줍니다. 이런 실천적 이웃 사랑이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새삼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네가 내 가운데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께서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성한 정원처럼, 물이 끊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얼마나 아름다운 묘사인지요! 참으로 회개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회개할 때 주어지는 넘치는 은총의 선물들이요, 고단한 이들에게 우리는 주님의 샘터가 될 것입니다. 새삼 회개가 이처럼 구체적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날 때 주님의 넘치는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회개는 안식일의 준수로 드러나는데 저는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 읽고 싶습니다. 주일도 이렇게 거룩하고 아름답게 지내야 하지 않을까요.
“네가 삼가 주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주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주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잘 먹게 해 주리라.”
주님을 믿는 이들이 정말 주일을 이렇듯 ‘안식의 날’, ‘관상의 날’, ‘치유의 날’로 보내며 거룩한 휴식을 누린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요! 한 번 실행해 보지 않겠습니까? 활동주의의 중독中毒의 병도 치유되고 웬만한 영육의 병들 역시 다 치유되리라 믿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참으로 아름다운 안식일에 관한 묘사를 통해 도대체 쉴 줄 모르는 우리 사회가 정상 사회가 아닌 말그대로 죄도 많고 병도 많은 미친 사회, ‘광란狂亂의 사회’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광란의 사회, 무지의 사회같습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의 어리석은 사람들 같습니다.
참으로 이사야의 이런 실천적 이웃 사랑과 안식일(주일)의 준수가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부르심-버림-따름의 회개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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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시고
그가 자기의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라시니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며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 나의 하느님!
다른 사람에게 멍에를 지어주거나
삿대질과 험담을 하지 않고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위로해 주기만 하면
그것이 나의 축복과 영광이 된다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일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며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주님의 자녀답게 살기만 하면
제가 기쁨을 얻고
축복을 얻게 되고
먹고 사는 것도 넉넉하리라 말씀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 나의 주님!
죄인이고 악인인 제가
회개하여 당신께로 돌아설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리하여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면서
늘 기쁨과 축복으로 충만케 하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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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tNzvoUBiq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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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 28)
모든 것을
버려야
길은 다시
새롭게
열린다.
따르면서
새 삶은
시작된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는 은총의
사순이다.
따른다는 것은
욕망에 빠진
우리 삶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고서는
올바로
따를 수 없다.
따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사순시기는
삶의 정체성을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일상에서
새로운 뜻의
전환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다시금
영원한 것을
따르는
마음의 전환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따르는
마음이 있다.
인생 전체를
주님께 던지는
마음이다.
그 마음의
실천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실천 없이는
다다를 수 없는
복음의 관계이다.
복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기쁨이다.
일어나
따라야 할
사순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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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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