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어록 출판 기념회에 참석해서 고건전총리가 한 연설입니다>
1961년 당시 우리나라는 625전쟁의 폐허에서 아직도 채 복구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물론 전쟁끝난지 8년이나 지났는데 그게 말이되느냐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자유당정부의 부정부패 폐해가 그 큰 원인이고 또 우리나라는 서구유럽처럼 대대적인 원조도 받지 못했고 기껏해야 어느정도의 식량원조밖에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또한 국민들은 2번의 전쟁과 매년겪는 보릿고개로 인해 피폐할 만큼 어지러운 상황이었고 "조선인은 뭘 해도 안돼"라는 엽전논리에 파묻힌 상황이었었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나라는 전쟁폐허에서 채 복구도 안되었음은 물론 항만, 공장, 전력, 도로, 수도 등 기반시설조차 제대로 있는것이 없었습니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공장이나 발전시설은 대부분 북한에 남아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지요 ( 그 덕분에 북한은 소련의 원조와 함께 그 기반시설로 전후초기에는 남한보다 크게 발전했지요. 물론 강제노동도 한몫 했고...)
그나마 남한에 남아있는것이라곤 변변치 못한 농토 뿐이었고 그리하여 장면 정부때 세운 경제개발 계획은 "토지개간을 병행한 농업위주"의 경제개발 계획이었습니다.
절대로 박대통령이 세웠던 "중화학공업과 수출 위주의" 경제개발계획과는 확연히 다른 계획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이 처음 집권한 뒤 농업위주의 경제개발계획을 "제목"만 놔둔 채 모조리 뜯어 고칩니다.
여기에는 외국에서 유학하고 애국심 하나로 돌아온 우수한 경제전문 인력들이 한몫했구요...
모든걸 다 차치하고....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현대, 삼성, 선경,울산공단등 ....
그 누구라도 부인할수 없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입니다.
경부고속도로는 박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했을 때의 받은 영감과 자금 등으로 귀국한 뒤 바로 건설을 추진했고 포항제철은 한일수교때 받은 보상금과 신일본제철의 지원과 기술력으로 건설된 회사입니다.
울산공단등은 베트남전쟁의 파병 보상금과 지원금으로 항만시설정비와 중화학공업 기업들과 수출기업 전폭지원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이때 장면과 윤보선,김대중,김영삼 등의 민주당은 뭐라고 했습니까?
먹고살기도 힘든 나라에 고속도로가 웬말이냐고 격렬히 시위했고 당시 민주당의 간부들은 아예 고속도로 공사현장에 드러눕기도 했지요.
포항제철건설때는 어땠습니까?
이 역시 민주당에서는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나라에 그깟 철 만드는 공장 지어서 뭐하냐고
일본에게 받은 보상금으로 차라리 굶고 있는 국민들에게 쌀밥이나 수입해서 사먹이자고 했습니다.
이때만해도 조선시대의 썩어빠진 사농공상 사고방식이 어느정도 남아 있어서 제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마치 조금 큰 대장간에서 일하는 대장장이쯤로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장면의 민주당은 베트남전쟁 파병도 반대했구요.
자, 그럼 생각해봅시다.
과연 , 反박정희 들의 말대로 박대통령이 없었어도 우리나라가 더 발전했을까요?
박대통령 집권없이 박대통령의 업무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저 따위 헛소리나 했던 장면의 민주당정권이 쭈욱 계속 집권했으면 우리나라 더 잘살았을까요?
물론 그들말대로 포퓰리즘 정책으로 굶고있는 국민들에게 일제 보상금과 빌린 돈으로 쌀밥이나 수입해서 사먹이면 그때 잠깐은 지지율도 확 올라가고 배부르고 좋겠지요.
하지만 돈이 떨어지고 수입했던 쌀밥도 떨어지고 배도 다시 고파지면 그때는 어떻하겠습니까?
다시 구걸하거나 미국에게 계속 식량원조나 받아가며 근근히 살아가야합니까?
역사엔 만약이란 없습니다.
지금 다들 먹고살기 편하고 등따시고 배부르니 입에서는 헛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세계 1위의 조선생산국, 세계 5위의 자동차생산국, 세계 3위의 철강생산국이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게 아닙니다.
세계 12위의 경제대국.
바로 박대통령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추진력, 박대통령의 지원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인것입니다.
요즈음 사회 일각에서 朴正熙 대통령 때리기, 죽이기가 한창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죽이려 해도 朴대통령이 남긴 위대한 업적을 역사에서 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 (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전에 머리를 조아리며
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전에 머리를 조아리며 이동호(李東湖*47, 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現 한반도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북한민주화포럼 간사)
몇 일전 「민족문제연구소」 등 세칭 진보단체와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시대 친일파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 속에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의 명단 속에 당연히 포함되리라는 것은 사전에 충분히 예상되었던 일이다. 그들이 이 시점에 굳이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그와 같은 일을 벌이는 이유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동호 북한민주화포럼 간사
그러나 막상 공개적으로 돌아가신 분의 휘자가 함부로 폄하되는 현실을 접하면서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죄스러운 맘을 금할 길 없다. 수천 년을 지속되어왔던 숙명과도 같았던 절대적 가난을 우리운명 속에서 지우고자 평생을 노력 하신 그 분이셨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막상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이토록 수모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젊은 시절의 오판
제가 그분을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이다. 물론 그 전에도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분으로 배워서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그 분에 대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 선배들과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그분은 이제까지 내가 알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일본군 장교출신이라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대학에서 만난 그분은 독재의 화신이었다. 일제의 앞잡이었던 그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민중을 수탈하고,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는 독재자의 전형이었다.
그가 이룩한 산업혁명은 정부의 선전과는 달리 우리민족의 자주적인 발전을 왜곡시키고 미국과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수탈을 원활하게 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였고 미국의 식민지적 지배의 선봉에 선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다. 그가 이룩한 대한민국은 점점 외국의 노예로 가는 길이었다. 종국에는 외국자본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최악의 나락으로 빠져갈 기가 막힌 현실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 36년의 노예생활도 부족해서 이제는 서양 사람의 노예에서 영원히 헤어 나올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노예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혁명 밖에는 다른 수단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나의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민중의 수탈자였고 한줌도 안 되는 민족과 민중의 배반자들이었다. 반면 사회주의에는 민족낙원의 길이 보장되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의해서 강제적 지배나 억압이 없고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갖는 모두가 꿈꾸는 이상사회였다.
공산주의는 민중을 억압하는 사상
북한의 김일성을 알게 된 것도 그 시기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절세의 애국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만주로 건너가 평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영웅이었다. 이미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해서 조선 공산당의 효시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북한에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한 것이다. 남쪽의 식민지 나라와 북쪽 자주의 나라 더 이상 비교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억울한 것은 6·25민족해방전쟁이 미제국주의자들의 개입으로 좌절된 일이었다. 남쪽에서도 민중이 주인 되는 이상사회를 건설할 절호의 기회가 좌절된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그 후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나에게 이데올르기는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가끔씩 사회주의에 대한 다른 증거가 제시되고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적 요소가 눈에 띄어도 이는 나의 철저하지 못한 혁명의지 때문이었다. 나의 사회주의와 북한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였다. 소련이 무너지고 연이어서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졌다. 그것도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낙원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서다.
영원한 사회주의의 낙원이고 고향인 소련과 사회주의 나라는 우리가 꿈꾸었던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 반대자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진행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이 가장 억압받는 인류 최악의 사회였다. 소수의 지배자들의 천국이었다. 민중이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이 가장 억압받는 그런 곳이었다. 이제 까지 내가 믿었던 사상은 의심받기 시작했다. 어디서 부터 어떻게 틀렸단 말인가. 근본부터 흔들렸다. 그러나 도피처가 있었다. 북한은 소련과 동구권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재했다. 소련과 동구권의 물질중심주의적 철학의 실패이지 인간을 중시하는 주체철학의 실패는 아닐 거야. 당시의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도 오래 가지 못했다. 연이어 탈북자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그래도 버텼다.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죄를 짓고 그 사회에 살수 없어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기위해서 자신들의 고향을 저주하는 거라고. 그런 나의 생각이 결정타를 맞았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황장엽 선생이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온 것이다.
중국의 고도성장,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 혁명 벤치 마킹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졌다. 탈북자들의 증언은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북한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악의 나라’였다. 300만을 굶주려 죽이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그 토록 소리 높여 외치던 인류의 낙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은 어디가고 최악의 독재자가 그 자리에 있단 말인가. 자신의 백성이 그토록 굶주려 죽어 가는데 호화로운 궁전에 앉아 최고의 호사를 누리는 후안무치가 그 자리에 있단 말인가.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놀아난 지적 저능아였다. 거짓을 사실로 알고 있었고 이를 소리 높여 외쳤던 판단 능력이 상실된 문제아였다. 다시 원점에서 검토해야 했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확신했던 사실을 확인 해야만 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만난 것은 그 때였다. 그분에 대한 것을 다시 보아야만 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선 그분이 이룩한 산업혁명을 다시 보았다. 분명히 사회주의를 동경하던 당시 책들과 선배들의 판단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수탈에 망해 있어야 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분이 이룩한 터전위에 대한민국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세계10대 무역국으로 진입해 있었다. 모든 제3세계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대한민국이었다. 제3세계나라가 산업혁명을 이루는 거의 유일한 성공사례가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이었다. 오랜 기간 우리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오히려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근대화의 기수 등소평이 가장 본받고자한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혁명이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오늘 중국의 고도의 경제성장의 배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산업혁명 전략의 벤치마킹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우리 민족에게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 심어줘
베트남을 취재차 방문했던 후배가 그곳에서 만난 기자와의 대화 가운데 들었다는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현재의 엄청난 격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대한민국은 박정희 같은 지도자를 가졌고 베트남은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그 후배 또한 얼마간 사회주의에 물들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는 타국에서 만난 외국사람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스스로 자부심이 느꼈다고 나에게 고백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가난을 숙명처럼 여겼던 우리민족에게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세간의 비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시대적 사명을 안고 그의 길을 간 선구자였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일구는데 무엇 하나 기여한 적이 없는 이들이 과거사 청산이라는 거짓명분으로 돌아가신 대통령을 헐뜯고 있다. 그들은 답해야 한다. 당신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고 당신들이 꿈꾸던 나라는 어디에 있는지. 당신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대한민국을 전복하여 최악의 독재자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헌납하려 했던 당신들의 죄악을 먼저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 인간의 도리이다.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벗고 자신이 이 사회에 끼쳤던 죄악을 참회하는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위대한 대통령을 헐뜯는 당신들을 역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난날 그분을 모욕했던 죄인이기에 오늘의 현실이 더욱 견디기 어렵다. 그분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 그분에 대한 과오를 씻는 길이라고 확신하기에 그분의 영전 앞에 머리를 조아릴 용기라도 갖는 것 같다.(konas)
written by. 이동호
(18) 박정희를 지켜야 하는 이유
지만원
사람들은 절대자 앞에 동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절대자로부터 특유의 재능과 건강과 환경을 부여받고 태어났습니다. 가진 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절대자로부터 부여받은 재능-환경-건강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것입니다. 얼마나 쌓는가는 자유의 폭에 달려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그 자유의 폭을 늘려 줌으로써 다양한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제도입니다. 사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자유를 무절제하게 남용하면 다른 사람의 자유가 침해당합니다. 이는 절대자의 명령에 어긋납니다. 국가는 이런 무절제한 자유를 제한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기 전에 민주 시민들은 타인을 배려하는 방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바로 민주시민적 매너인 것입니다. 매너도 멋입니다. 학정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고통과 절규와 악취가 범람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멋들이 피어납니다. 멋이란 '인간에서 피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꽃'입니다.
정치가의 재능을 가진 사람은 정치를 하고, 과학에 재능을 가진 사람은 과학을 해야 개인도 행복해지고 멋쟁이가 되며 사회도 발전합니다.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그 후로도 사람들은 한동안 어두운 세상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한 사람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정치만 하겠다고 나서는 사회를 가상해 보십시오. 좁은 한 길에서 머리가 터지도록 싸울 것입니다. 이런 사회는 무질서와 불행으로 얼룩질 것이며, 민주주의는 사라질 것입니다.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은 수도 없이 많이 쪼개진 과학의 왕국에서 서열을 차지하고 그 서열에서 열심히 일하며 또 다른 서열로 행진해 갑니다. “나는 피아노 왕국에서 몇 번째 의자에 앉은 사람이다, 나는 통계학 왕국에서 몇 번째 의자에 앉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발전에 만족해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사회가 이름다운 사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장관자리나 국회의원 자리는 오히려 초라해 보일 것입니다.
사회가 다양하면 할수록 행복해 하는 사람의 수가 늘어납니다. 반면 사회가 다양하지 못할수록 사람들은 권력 하나에만 집착합니다. 신분상승!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신분을 하루아침에 상승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사법고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지금은 노사모와 적화운동에 젊음을 보낸 괴팍한 이단아들이 가장 화려한 신분상승을 합니다. 배운 게 없기 때문에 기준과 원칙을 모릅니다. 기준과 원칙이 없는 사회에서는 세도와 주먹이 횡행할 뿐 민주주의는 절대로 자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경제성장이 없었다면 그 나마의 다양성이 자라지 못했을 것입니다. 배우고 깨인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 만족하며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고 생각이 촌스러운 사람들은 오직 신분상승 만을 위해 투쟁합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가꾸지 못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신분상승해서 사회를 좌지우지하면 국가는 파괴됩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20% 정도만이 현정권을 지지하는 모양입니다. 살아있는 한국의 정치적 인물들 중에서 국민의 20% 이상의 지지를 받는 사람도 드문 모양입니다. 그러나 살아있지 않는 박정희가 80% 정도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 이 순간 박정희가 다시 살아온다면 정신적으로 빗나간 소수의 사람들만 빼놓고 모든 국민이 그를 대통령으로 뽑을 것입니다.
정신이 건전한 사람들은 대부분 우익입니다. 우익이란 좌익화 세력에 심정적으로라도 저항하는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지금 현재, 우익의 정신적 지주는 박정희 한 사람 뿐입니다. 저간에는 저들이 박근혜 대표를 때리기 위해 박정희를 격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차기 대선에서 박근혜씨가 1등을 하리라고는 저들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당에서만 해도 박근혜씨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저들이 박정희를 격하하는 이유는 그를 향해 뭉쳐있는 국민 80%의 결집력을 깨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80%의 결집력을 보호하기 위해 박정희를 보호해야 합니다. 억지로 소설을 써서 보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대한 정확한 자료, 다양한 자료를 발굴해 가지고 보호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결집력을 가지고 다양함이 꽃피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재건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대한민국은 "멋과 힘"이 넘치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재산을 모으는데도 멋이 있어야 하고, 대통령이 되는 데에도 멋이 있어야 합니다. 멋은 청와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초라한 선술집에 더 많이 피어나는 '인간꽃'입니다. 멋없이 대통령이 되면 아이들도 손가락질을 합니다.
누군가가 박정희 이래 쇠퇴해가는 이 사회에 제2의 신화를 피워내야 합니다. 그 일은 가장 먼저 박정희 신화를 소중하게 보호하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2005.1. 23
(17) 朴正熙를 미워했던 기자의 이야기
나는 1971년 기자생활을 시작하면서 親朴노선에서 反朴노선으로 전환했다. 부산에서 일선 기자를 하면서 나는 정권이나 정부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좋은 기사의 제1조건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언론의 일반적 분위기이기도 했다. 경찰출입 기자를 할 때는 매일아침에 즉결심판자 대기실로 찾아간다. 밤에 통행금지 위반, 노상방뇨, 無錢取食(무전취식), 소란 등의 경범죄 혐의로 연행되어온 사람들의 서류를 읽다가 새마을 운동 단체의 간부 이름이 나오면 꼭 꼬집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특종에 눈이 먼 나에게는 새마을 운동이 가진 역사성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1974년에 중금속 오염의 추적이란 기사로 제7회 기자협회 취재보도 부문 상을 받았다. 내가 다녔던 부산수산대학교의 교수가 조사한 어패류의 중금속 함유 상황을 기사화했더니 이 교수는 문교부의 압력으로 징계를 당했고 학장은 물러났다. 이런 일도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정의감을 충족시켜주었다.
어둡고 썩었으며 협잡이 있는 곳만 찾아다니던 젊은 기자의 눈에는 朴대통령의 위대한 국가발전 전략이란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민주주의와 서구수준의 저널리즘 원칙이 세상 만물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이 되어 있었으니 유신통치기의 朴대통령이 하는 일들중 곱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1974년8월15일에 陸英修 여사가 피살되었을 때도 나의 가슴속에선 별다른 애통심이 생기지 않았다.
1974년 가을 동아일보 기자들이 시작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계기로 전국의 기자들이 朴정권 비판을 위한 조직에 나섰다. 기자협회가 그런 운동의 중심이었다. 국제신보 기자협회 분회는 '밝힘'이란 소식지를 내면서 외부압력으로 기사가 줄어들거나 사라지는 것을 감시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여기에 끼였던 나는 마치 독립운동하듯이 정권비판과 진실보도란 대명제에 보람을 느끼면서 일했다. 그 과정에서 기자들이 외부압력에 흔들린다고 편집국장을 몰아세우는 일에 동참하기도 했다. 金泳三 金大中이란 이름은 나에게 희망이고 용기의 근원이었다.
한 편집기자는 1978년12월에 金大中씨가 감옥에서 나와 병원에 입원하는 기사를 1면 옆구리 기사로 크게 취급했다가 정보부의 압력을 받은 회사에 의해 3개월 정직을 당했다. 우리는 그를 순교자처럼 우르러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시대를 다른 눈으로 되돌아보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1996-1997년 사이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국제기자연수프로그램인 니먼 팰로우 과정에서 수학하면서 박정희식 개발에 대해서 외국기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 나는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한 미국인을 원군(援軍)으로 삼아 東아시아식의 국가발전 전략을 옹호하곤 했다. 그는 「중국의 부상(浮上)」이란 책을 쓴 윌리엄 오버홀터씨였다. 이 책에서 오버홀터씨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한때 카터 대통령의 선거참모였던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전략의 정당성에 설득당하게 되었나를 흥미 있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는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민권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문화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모택동(毛澤東) 신봉자들이 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터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주한(駐韓)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인권외교의 한 상징으로서 여론조작을 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터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인권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으로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인권문제와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선행(先行)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후진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서구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목격한 뒤 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식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식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도 했다. 오버홀터씨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
오버홀터씨의 이 책은 중국에 관한 주요 저서로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朴正熙를 보는 시각의 교정을 통해서 이 세계를 보는 눈이 맑아져간 그의 과정은 기자의 경험과도 비슷하다. 기자는 朴正熙 시대에는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기자됨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의 사후(死後)에는 박정희의 비행을 비화(秘話)로써 폭로하는 것이 정의로운 일이라는 생각을 견지하였다.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하여 시작한 탐구작업은 그에 관한 많은 어두운 면을 노출시키기는 했으나 더 많은 긍정적 자료도 함께 발굴하게 되었다. 아무리 찍고 깎고 해도 그 덩치가 줄어들지 않는 거목(巨木)이 박정희였다. 여기에다가 집권 과정에서 드러난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세력의 위선, 독선, 무능, 부패, 그리고 非민주성이 박정희를 보는 기준을 달리하게 했다.
김일성(金日成)과 김정일의 북한도 상대적으로 박정희를 더욱 빛나게 했다. 한국의 가장 적절한 비교대상은 일본도 서구도 아닌 북한인 것이다. 북한보다 남한이 더 발전했다면 일단 성공한 것이 아닌가. 동구권의 붕괴와 중국의 성공, 그리고 많은 開途國(개도국)이 박정희 모델로써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박정희의 세계사적 위치를 객관적으로 점찍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싱가포르의 李光耀도 월간조선(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를 등소평, 요시다(戰後의 일본 수상)와 함께 20세기 아시아의 3대 지도자로 꼽았다. 기자뿐 아니라 많은 한국인들이 거의 비슷한 변화 과정을 거쳤으리라 짐작된다. 이것은 역사와 인물에 대한 평가가 사람들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성숙해지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와의 대화이며 오늘과 내일을 비추어주는 역사의 힘일 것이다.
조갑제
(16) 朴 대통령과 金壽煥 추기경
1974년12월11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비서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박정희 대통령은 대뜸 金壽煥 추기경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피력했다.
“김 추기경 못 쓰겠더군. 젊은 사람이 추기경이 되니까 자세가 많이 달라진 모양이야. 김 추기경은 내가 보기에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사사건건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것같더군.”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선우련 공보비서관이 입을 열었다. “지난번 봄에 진해에 갔을 때도 각하 내외분께 인사도 안 드리고 가는 등 냉정한 사람이더군요.”
“집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술도 보내고 대접을 나름대로 잘해 줬는데….”
대통령이 金추기경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된 배경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74년 4월경, 당시 대통령과 추기경의 소원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陸英修여사는 일부러 중재역을 맡고 나섰다. 陸여사는 대통령이 모르게 金 추기경과 대주교들을 초청한 후, 그날이 되어서야 그 사실을 대통령에게 알렸다.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은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陸 여사의 재치로 의외의 좋은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다.
그 후 金 추기경 일행과 대통령 내외는 벚꽃놀이를 가기로 약속했으며, 며칠 뒤 실제로 동행하여 진해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 진해에서 일행은 함께 재미있게 즐겼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金 추기경이 혼자서 먼저 상경해버린 것이다.
선우련 비서관은 아침 식사를 차려 놓고 김 추기경을 모시러 갔는데, 盧基南 대주교가 하는 말이 “벌써 떠났다”는 것이었다. 추기경은‘이러다가는 신도들에게 면목이 없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 떠났다는 것이다.
다시 朴대통령이 교회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교회에서 정치에 간섭하면 우리도 교회에 간섭할까?”
다시 화제는 가족 이야기로 돌아갔다. “각하 선친께서 무과(武科)에 급제하셔서 영변 군수 첩지까지 받았으나 현지에 부임하지 못하셨는데, 아마도 교제하실 줄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선우련의 이 말에 좌중에선 폭소가 터졌다. “매관 매직 때니까 선친께서 첩지를 산 것 같아.” “그렇지 않습니다. 정당하게 받았는데 매관한 군수가 이미 가 있어서 못 가셨답니다. 샀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시대가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 거지.”
조갑제
(15) 朴正熙의 향수, "두 다리 뻗고"
1974년 12월 11일,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李元洪 駐日 공보관장이 朴대통령에게 일본 언론계의 동향에 대해 보고했다. 공보비서실 직원들이 배석했다. 그는 특히 일본 마이니치(每日) 신문의 요시오카 다카오(吉岡忠雄) 논설위원이 자진해서 한국에 유리한 논설을 많이 쓰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내가 고맙다고 하더라고 대신 인사를 전해 주게.”
朴 대통령은 李 공보관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올 연말이나 내년 초 마이니치 하고 산케이(産經) 인사들 중에서 괜찮은 사람 명단을 장관께 제출하여 訪韓 초청토록 하시오.”
잠시 후 일본 政局으로 화제가 바뀌자, 대통령은 일본의 전 외상이었던 기무라 도시오(木村後夫)에 대해서 혹평을 했다. “그 사람 아주 못된 놈이야.” 좀처럼 심한 말을 하지 않는 대통령이 화를 낸 것은 陸英修 여사 피살 이후 일본이 文世光 배후 수사에 비협조적일 때 기무라 외상이 “한국만을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볼 수 없다”는 등 문제발언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화제는 대통령 生家가 있는 구미로 옮아갔다. 선우련 비서관이 생가에서 일본 기자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에 각하의 심부름으로 생가에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아사히 신문기자를 만났습니다. 각하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그나저나 형수도 안 계셔서 쓸쓸했을 텐데.”
“계셨습니다. 서울로 왔다갔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경관(생가 관리 경찰)은 지금도 있던가?”
“네, 장 경위가 아직 그대로 있었습니다.”
“일본 기자에게 각하가 쓰시던 방을 보여 주었더니, 방에 있는 책들을 보고는 ‘대통령이 보았던 책들이냐’ 하고 물어서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6·25 전까지는 책이며 노트, 그림 등이 많았었는데 동란 때 다 없어져버렸지.”
대통령은 옛 추억이 떠오르는지 미소를 머금고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고향집은 역시 좋은 거야. 비록 나지막한 집이지만, 방학 때 내려가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어. 그런데 형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고향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잘 생기지 않는구먼. 아마 형님(朴東熙 옹)은 나 때문에 빨리 돌아가신 것 같아.”
한탄스런 어투로 자신을 질책하듯 대통령은 이런 얘기를 했다. “대통령의 형이라고 해서 주위 사람들이 막걸리며 돼지고기 등을 많이 사드려서, 그 탓인지 중풍에 걸려 일찍 돌아가신 것 같아. 그러지 않았으면 훨씬 오래 사실 분이었는데…. 선우 비서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조갑제
(14) "미신을 타파하고 과학생활 이룩하자"
어제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에 가서 조선일보가 주최한 '아, 어머지'전시회를 구경했다. 해방후 60년간 한국사회를 버티어간 우리들의 어머니들 모습이 실감나게 전시되어 있었다. 1950년대, 60년대의 우리들 생활 모습을 재현한 집과 골목길엔 그때의 구호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읽어보니 지금도 유효한 내용들이었다.
"미신을 타파하고 과학생활 이룩하자"(보건사회부) -무장집단에 이쪽에서 먼저 발가벗고 퍼주기만 하면 평화가 온다는 미신을 믿는 집단에게 아직 유효한 구호가 아닌가.
"주권행사 바로 하여 바른 일꾼 바로 뽑자"(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동에 속아 좌파정권을 탄생시켜놓고는 그 정권 비판에 열을 올리는 유권자들이 너무 많다.
"외국원조 의존말고 수출로써 자립하자"(부산시수출진흥대책위원회) -自助정신, 自立경제, 自主국방이 朴대통령의 3自전략이었다. 노무현의 자주국방론은 朴대통령의 실적 없이는 불가능했다.
"상기하자 6.25. 아세아의 평화를 위해" -6.25 때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원하에서 버티었기 때문에 일본의 번영과 대만의 안전이 확보되었다.
조갑제
(13) 하늘이 박정희와 김재규를 내신 이유 '朴正熙의 마지막 하루'(월간조선 발행, 주문 02-724-6846)필자의 辯
1979년10월26일에 발생한 朴正熙 대통령 시해 사건은 한국 현대사 60년 가운데 30년을 재구성했다. 金載圭의 총탄은 朴정권 18년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13년에 걸친 全斗煥, 盧泰愚 정권을 탄생시켰다. '朴正熙의 마지막 하루'-이 책은 현대사 최대 사건의 전개과정을 24시간의 시간대에서 거의 분초단위로 재구성했다.
필자가 이 책을 쓰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관련자들을 만나고, 고쳐쓰고 하기를 되풀이했다. 궁정동 현장의 생존자들을 전부 만나고 수사관과 피의자들의 증언을 들었다. 10.26 사건의 후폭풍인 12.12사건과 광주사태도 함께 취재했다.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가지고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朴대통령의 마지막 말 - "난 괜찮아"의 의미였다. 사람의 마지막 자리가 그의 인생을 축약하여 보여준다는 것이 이 사건에서도 확인되었다. 朴대통령의 마지막 하루가 그의 全생애를 상징적으로 요약했다.
필자의 작업을 손쉽게 만들어준 것은 1995-1996년의 5.18 사건 수사였다. 이 수사기록이 공개될 때 10.26 사건 수사기록도 함께 입수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면서 필자는 金載圭를 연구했다. 그는 우직하고 예절이 바르면서도 돌발적 행동을 자주하는 사무라이 영화의 중독자였다. 그의 저돌적 성격에 불을 붙인 것은 車智澈 경호실장의 오만방자함이었다. 10.26 사건 수사관들이 하는 이야기- "이 사건의 주범은 차지철이고 종범이 김재규"란 말은 그래서 핵심을 찌른 것이다.
필자는 朴正熙가 참 잘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총성과 고함이 오고가는 아수라장속에서 영웅답게, 초연하게, 체념한듯 죽었을 뿐 아니라 타이밍이 좋았다. 그가 그때 그런 식으로 가지 않았으면 朴정권은 수년안에 민중봉기로 넘어지든지 군사쿠데타로 붕괴되었을 것이고 그의 최후는 비참하였을 것이다. 그의 후계자가 된 全斗煥 정권은 朴대통령을 격하하려 하지 않았다. 全斗煥이 없었더라면 朴正熙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인의 다행은 朴正熙의 죽음의 타이밍이고 북한인들의 불행은 金日成의 長壽였다"고 말하곤 한다. 하늘이 같은 마을 善山에서 朴正熙를 내고 또 金載圭를 낸 이유를 알 듯했다.
조갑제 날 짜 2005년 7월 11일 월요일
(12) "육사출신 장교까지도 한총련처럼 말해"
일주 전 한 대학생이 나를 찾아오더니 이런 걱정을 했다. 그는 군대에서 제대한 뒤 사법시험을 준비하면서 학교내에서 보수학생운동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육사를 졸업하고 일선에서 근무중인 친구를 만났을 때였다고 한다. 이 현역대위는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란 것이다.
"북한 핵? 그게 왜 우리 문제인가.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해결하면 되지. 김정일이 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거잖아? 통일이 되면 우리것이 되는데"
이 대학생은 친구의 이 말을 듣고 "어쩌면 한총련이 하는 이야기와 그렇게 같은지 놀랐다"고 했다. 정규육사를 나온 장교와 한총련이 북핵 문제에 대해서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사회의 좌경화가 장교단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이것이 장기화되면 장교단의 좌경화도 가능성의 영역안에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된다. 해방 직후부터 1948년10월의 여순14연대반란사건 때까지 한국군에는 좌익이 침투하여 암세포처럼 자라고 있었다. 여순14연대 반란 사건이 계기가 되어 군내의 좌익숙청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6.25 때 한국군의 붕괴를 막았다. 숙군수사가 없었더라면, 즉 6.25 때 기습을 받은 국군장교단 속에 좌익세포가 건재했더라면 한국군은 적전(敵前)반란으로 무너졌을 것이다.
北核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위험에 노출된 국군의 장교가 "그것은 우리 문제가 아니고 미국의 문제이다"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의 극치이자 사대주의이다. 통일된 한국이 核무기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주변의 강대국들은 통일을 저지하려 들 것이다. 北核이 통일의 결정적 걸림돌임을 모르고 통일이 되면 우리 것이 된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좌익의 교묘한 선동에 넘어간 바보들인데, 장교들 속에서 이런 바보들이 늘어간다면 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될 것이다.
조갑제
(11) 박정희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다 조국이 없던 시절의 친일과 反日
조국근대화의 기수였던 朴正熙 전 대통령을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박정희는 5년 남짓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장교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군관학교 생도로서, 또 북중국에 주둔한 만주국 부대의 장교로서의 신분이었다. 이 사실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당시 한국인들은 日帝의 지배하에 있었다. 한국인을 보호할 나라가 따로 없었다. 한국인은 親日이냐 조국이냐를 선택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이냐 日帝냐의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日帝를 선택했다면 그런 한국인은 반역자로 불려도, 친일파라고 불려도 좋다. 그때 한국인은 친일이냐 反日이냐의 선택밖에 할 수 없었다. 이 경우 反日은 투옥이나 죽음을 의미했다. 어떤 절대자도 보통인간에게 그런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 너는 그때 反日의 영웅이 되지 않았느냐고 욕할 자격을 가진 인간은 없다.
대한민국이 없었던 시절인데 일제를 거부한다는 것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서였다. 하나는 만주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하는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反日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길이었다. 이 험난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친일파라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인간들은 위선자이다.
모두가 영웅이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지하철에 떨어진 아기를 구하기 위해서 뛰어들어 아기를 살리고 자신은 죽은 시민이 있다면 그는 영웅이다. 그런 영웅의 용기는 길이 길이 기려야 한다. 이는 산 자의 의무이다. 그렇다고 그때 왜 다른 사람들은 뛰어들지 않았느냐고 욕을 하고 그런 방관자들을 비겁자라고 두고 두고 매도한다면 그러는 이는 자신도 지킬 수 없는 기준을 남에게 강요하는 위선자이다.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지상 천국이 이뤄지기 전에는.日帝 시대에 이 땅에서 태어나 죽지 않고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日帝에 형식상 순응해야 하는 것이 그중의 하나였다. 일제가 만든 법이 비록 아니꼽더라도 지켜야 했다. 日帝의 교육제도가 비록 皇國臣民을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더라도 학교에 다녀야 했다. 日帝가 만든 경부선을 타고 電氣와 水道를 이용하여야 했다. 이런 일을 했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 있는가. 朴正熙가 대구사범에 들어가 교사가 되어 문경에서 교사 노릇을 했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는 나라 없는 朝鮮人으로서 日帝에 겉으로 순응하면서 살아간 것뿐이다. 그가 이 무렵 金九처럼 초인적 행동을 하지 못했다고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한국인 전부가 金九처럼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만 했다면 해방이 왔을 때 누가 공장을 돌리고 누가 군대를 만들었겠는가. 日帝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그 日帝로부터 先進 과학과 기술을 배우고 그렇게 배운 기량을 대한민국 건국 후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 썼던 많은 사람들은 만주의 독립운동가 못지 않은 애국자들이다.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던 만군장교였다
그러면 누가 친일파인가. 日帝에 순응한 정도가 아니라 日帝에 적극적으로 복종하여 그들이 시키는대로 하다가 조선인을 괴롭힌 사람들이 친일파이다. 두 가지 조건이 중요하다. 日帝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복종한 것과 조선인을 괴롭힌 일.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친일파이다. 일본의 경찰에 취직하여 파출소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도적을 잡는 일을 했다면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가 日帝 경찰의 特高형사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잡는 일에 종사했다면 그는 친일파이다. 친일파 조사 입법에 앞장섰던 여당의 두 의원 아버지는 헌병간부와 특무경찰로 밝혀졌다. 그런 사람이 친일파이다. 또 하나 대한민국이 건국하여 조국이 생겨났는데도 일본에 계속 충성하겠다고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친일파이다.
朴正熙가 조선인 탄압과는 무관한 만주국의 장교가 되었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몰아가려는 사람들은 만주국 장교로서 朴正熙가 독립군을 사냥했다는 거짓말을 퍼뜨린다. 朴正熙 전기를 쓰면서 그의 하루 하루 행적을 추적했던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북중국의 만주군에 배치되어 毛澤東 군대와 싸웠다. 毛澤東 군대와 싸운 것을 가지고 친일파라고 비난할 수는 없다. 毛澤東 군대는 당시 일본의 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 뒤엔 대한민국의 敵이 되었다. 朴正熙가 만주국 장교 군복을 입고 있을 동안 그가 장교로서의 힘을 이용하여 조선인을 괴롭히거나 日帝에 아부했다는 증언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 증언은 많다. 즉, 비록 만주국 군인이었지만 항상 조국의 독립을 생각했고 독립군 노래를 즐겨 불렀으며 만주군내의 독립운동 조직이 그를 포섭대상으로 여길 만큼 민족정신이 강했다는 등등의 이야기이다.
근대화를 부정하려는 역사파괴 행위
그가 만주군의 장교가 되어 군인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득을 본 점이 있다. 朴正熙 장군이 주도한 근대화 혁명은 군인으로서 그가 갈고 닦은 기량과 지도력 덕분에 가능했던 측면이 많다. 조직운영에 대한 탁월한 리더십, 국가개조에 대한 비전,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정신,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국가 운영술, 군사문화에서 우러나오는 책임감,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민감한 개방적 정신 등등은 그가 군인으로서 배운 것이다. 朴正熙가 장교가 아니었다면 그가 주도한 한국의 근대화는 이처럼 성공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朴正熙가 만주국 장교였다는 사실로 해서 失보다 得을 더 많이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친일파가 아닌 것이다. 참고로 중국 사람들은 蔣介石이 청나라 시절 한때 일본의 예비사관학교에 3년간 유학을 했었고 사관후보생으로 일본 군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친일파라고 욕하지 않는다. 朴正熙를 친일파라고 부른다면 나는 매국노이다. 왜냐 하면 어제 저녁에도 나는 日食을 먹었기 때문이고 나의 부모가 일본에서 7년간 일했으며 창씨개명을 했고 나도 일본의 사이다마縣에서 났으니까 말이다. 더구나 나는 일본어를 할 줄 아니 朴正熙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이다 조국이 없던 시절 식민지의 한 청년이 일본의 괴뢰국 군인이 되어 공산군과 싸웠다고 해서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려는 것은 그가 대통령으로서 이룩한 조국 근대화의 업적을 말살함으로써 민족사의 가장 찬란한 한 章을 없애려는 의도를 깐 역사파괴 행위이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모독
人生의 복잡하고 기복 많은 본질을 무시하고 일순간의 약점을 캐내어 그 사람과 한 시대의 모든것을 깡그리 부정하려 드는 선동술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40년 전 한일수교를 결단함으로써 일본의 자금과 기술을 받아들여 낙후한 한국경제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런 경제발전 과정에서 만들어진 三星은 지금 일본의 대표기업인 소니를 능가하는 세계최고의 전자회사로 컸다. 이것도 親日인가. 경제발전으로써 우리가 일본인을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도록 만든 가장 큰 공로자는 朴대통령이 아닌가. 그런 그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이고 도요다로 창씨개명한 전 대통령도 나을 것이 없다. 한 나라의 품격은 국민들이 어떤 사람을 기리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동족 600만 명을 희생시킨 金日成 金正日 부자를 추종하던 자들이 민족사에서 처음 보는 경제적 풍요와 국가적 自尊(자존)을 가져온 위인을 온갖 악랄하고 치사한 방법을 동원하여 매장하려고 한다. 이런 세력의 득세를 보면 한국은 내일이라도 망할 것 같은데, 다행인 것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국민들이 다수라 朴대통령은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역대 인물 1위로 꼽히고 있다.
민주 국가에서 70%가 넘는 지지는 전체주의 국가의 100% 지지보다 더한 거의 우상숭배 수준의 인기이다. 그런 朴대통령을 무덤에서 불러내 조사하겠다는 자들은 그 무덤에 대신 파묻히고 말 것이다. 죽은 朴대통령과 결투하여 살아남은 선동가를 본 적이 없다. 국민들의 가슴속에서 살아 있는 朴正熙를 거짓선동으로 말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반드시 그 代價를 치르고 말 것이다.
조갑제
(10) 대학생과의 대화/군사문화를 위한 변호
대학생의 질문: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시작된 군사문화의 확산은 한국 사회에 독재와 부패, 그리고 획일성을 강요했다.
필자의 대답: 1961년 5.16 군사혁명 직후에 부임했던 사무엘 버거 주한미국대사는 혁명주체 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에서 출발했다가 곧 朴正熙 칭송가로 바뀐 경우이다. 그는 물론 내심으로는 朴장군의 리더십을 높게 평가했으나 겉으로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받들어 군사정권을 심하게 견제했다. 1961년8월13일자 보고 電文에서 버거 대사는 이렇게 썼다. <박정희는 중재하고, 조화시키고, 모든 상황을 신중히 생각하게 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최고위원회 안팎의 사람과 파벌을 놀라운 솜씨로 조정하곤 한다. 그가 어디서 이런 재능을 얻은 것일까. 정보보고서를 읽고, 朴과 그 동료들에게 보고를 듣고 말하면서 이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않고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을 인기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자질은 없지만 힘에 대한 확실한 감각, 타이밍에 대한 뛰어난 감각, 상식, 문제를 非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는 태도, 그리고 중요한 것과 가능한 것을 가려내는 본능을 소유한 인물이다>
버거가 본 朴正熙는 사물을 관념적으로 보지 않고 인기에 매달리지 않는 실용주의자이다. 그는 중요하다고 해서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고 가능한 것을 먼저 추진하는 현실주의자이다. 버거가 본 朴正熙는 또 조직을 민주적으로 타협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다. 딱딱한 외모 속에는 유연한 思考가 들어 있다는 이?薩袖甄?. 버거가 지적한 이런 덕목은 朴대통령이 군인이 아니었다면 배울 수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인격으로 體化된 실천력, 힘에 대한 감각, 타이밍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과학적 접근, 타협적 유연성은 군사문화의 장점을 축약한 것이다.
군사문화는 전쟁에 이기기 위한 조직과 규율과 사상의 집합이다. 관념과 명분과 위선이 들어설 자리가 아주 좁은 문화이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수집과 판단, 계획의 수립과 준비, 특히 병참의 중요성, 끊임 없는 훈련과 교육, 각급 지도자로서 장교들의 중요성, 애국심과 희생정신, 불굴의 도전정신, 선진전투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패배한다는 데서 출발한 개방성. 이런 문화가 박정희로 대표되는 국군의 장교단을 통해서 낙후된 한국의 공무원 사회를 개혁하고, 기업을 이끌었고, 드디어는 장교단을 대체할 관료 및 기업 엘리트를 키워냈다. 한국 군대의 근대성이 한국사회의 근대성으로 확산된 과정이 조국 근대화라고 불리는 박정희 개혁의 과정이었다.
朴대통령은 경제발전 없이는 민주주의의 정착이 불가능하다고 당당하게 말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단 하루도 없는 나라에서, 그 민주주의를 수입해놓고도 민주주의를 모든 가치의 위에 놓으려고 했던 당대의 지식인, 언론인, 정치인들을 경멸하면서 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란 탄탄한 경제적 바탕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경제를 통해서 발전될 수 있는 것이며 민주제도는 공산제도보다 발전과 성장에 보다 능률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朴대통령은 민주주의뿐 아니라 자유통일도 경제건설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족통일의 지름길은 경제건설과 민주적 역량을 제고시키는 데 있다. 건전한 경제적 바탕이 없이는 공산집단을 이길 수 없으며 나아가서 북한해방과 통일도 할 수 없다"
정치, 통일, 인륜의 문제까지도 돈을 중심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박정희와 군대의 선진성이 있다. 돈벌이를 경멸하고 죄악시하기까지 했던 주자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조선조를 쇠약시켰고 그 풍토에서 자란 엘리트는 실천력이 취약한 말과 글의 인간이었다. 이런 조선조 양반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민간정치의 생리이다. 이들이 근대화의 주체세력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과학성과 합리성과 애국심이 결여되고 미신과 파당의식과 분열성을 근사한 명분으로 포장하여 국민들을 선동하는 전문가들이, 국토를 개조하고 공장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다 팔면서 북한정권의 도전에 맞서는 역사적 임무를 맡을 수는 없었다.
한국 군대는 국가의 안전보장뿐 아니라 국가의 근대화에서도 主役이 되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기의 화랑도와 더불어 우리 민족사상 가장 위대한 일을 한 집단으로 평가될 것이다.
군사문화가 불렀다는 획일성 부패 독재의 뿌리는 군사혁명 이전의 민간정치풍토에까지 연결되는 것이고 군사문화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공직사회가 언제 깨끗했던 적이 있었나. 다만, 군대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완수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명령적으로 획일적으로 독재적으로 한 부분이 있다. 국가 지도부가 그런 부작용이 두려워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지금 필리핀 수준의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계사의 한 원리는 부자일수록 부자나라일수록 도덕성과 청렴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는 가장 가난한 북한이 아닌가.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성공시켰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가 부패를 줄였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조갑제
(9) 대학생과의 대화/維新의 두 얼굴
대학생의 질문: 朴대통령이 1972년10월17일 소위 유신조치를 통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시킨 다음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은 제2의 쿠데타로서 영구집권을 획책한 것이 아닌가? 이 기간에 야당과 언론과 노조의 활동이 탄압을 받았다.
필자의 답변: 유신조치는 불법적으로 헌정을 중단시킨 점에서 朴대통령의 두번째 쿠데타였다. 그가 1979년10월26일 피살될 때까지 정치적 자유와 언론 자유가 제약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헌법적이고 정치적 측면에서 평가하면 부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헌법적 평가를 포함하여 國政에 대해서 종합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므로 7년간의 유신기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을 입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 기간중 3차5개년 계획(1972-1976년)이 추진되었다. 이 5년간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1%였다. 1977년은 10.3%, 78년은 11.6%, 79년은 6.4%였다. 이 7년간 세계는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맞아 경제에 큰 타격을 받고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선 나라들도 많았다. 朴대통령은 야당과 언론의 견제를 덜 받는 상황을 만들어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를 통해서 위기를 극복했다. 유신기간은 중화학공업건설 시기와 일치한다. 투자비가 많이 드는 중화학공업건설을 오일쇼크 중에 추진했고, 고도성장을 지속했다. 이로써 한국은 동남아의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한때 우리보다 앞섰던 나라들을 멀리 따돌리고 개발도상국의 선두에 나섰다.
유신기간중 노조의 활동이 제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세계에서 가장 큰 폭으로 오른 것도 이 시기였다. 1975-79년 사이 제조업 근로자의 연평균 실질임금 성장률을 보면 미국은 0.2%, 일본은 1.3%, 태국은 2.4%, 말레이시아는 4.5%였는 데 반해 한국은 13%로 최고였다. 한국 다음이 칠레로서 11.8%였다. 칠레에서도 이 기간중 피노체트가 군부쿠데타로 등장하여 박정희식 모델을 참고하여 이 나라를 개혁하고 있었다. 오일쇼크 같은 큰 경제위기가 닥쳐오면 개발도상국에선 강력한 지도력이 요긴하게 쓰인다. 세번째 임금 성장률을 기록한 것도 당시 국민당의 계엄령 통치가 계속되던 대만으로서 11.5%였다. 같은 독재라도 사회주의식 독재는 경제위기 극복에 있어서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보였다. 이 기간 중국의 연평균 임금 성장률은 1.3%에 불과했다.
維新기간에 한국이 貧益貧富益富를 보여 계층간 소득격차가 커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다르다. 소득 하위계층 20%에 대한 상위계층 20%의 비율을 보아도 한국, 대만, 일본이 개발도상국보다 약3분의 1정도를 차지하여 가장 평등한 나라로 꼽혔다. 유신기간중 한국은 근로자들의 실질임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올랐고, 소득격차도 낮은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이야기이다.
朴대통령은 경제발전이 민주주의의 전제조건이라고 확신하고 민주주의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정지시킨 뒤 경제발전에 국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였다. 이때 이뤄진 경제와 안보의 발전이 1980년대 민주화의 소용돌이를 견디게 했던 바탕과 울타리를 만들었다.
조갑제
(8) 빨갱이들과 반역자들이 독재라고 하면.. 독재로 되는 것인가요??
왜, 국민지지를 받고 통과된 유신 헌법이 독재인가요? 빨갱이들과 반역자들을 때려잡는 것이 독재라고 한다면.. 대한민국 수호 세력을 탄압하는 좌익정권은 독재가 아닌가요??
과연 어떤 것이 독재며... 어떤 것이 민주정권인가요??
박정희는 세계 누구도 이룰 수 없는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을 이룬 것입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과 나라를 수호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인간으로써 가능한 일이지만.. 외세의 핍박과 빈곤에 허덕이던 5,000년 우리 민족의 역사를 뒤집어 놓아 선진국 발판을 만들어 잘살게 만든 것은 불가능한 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입니다.
민주주의란 民主主義를 위해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입니다. 自由를 위해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자유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平和를 위해 국민이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평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정치의 목적은 국민을 위하는 것(For the People)이고, 민주주의, 자유, 평화는 국민(For the People)에 비해 수단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체제를 위해 국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유신헌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걸고 평화의 상징인 자유 민주주의를 지키야 하는 이유도 바로 나 자신인 국민의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생채실험을 당하고 있는 북한동포들의 인권은 무시하면서.. 주둥이로만 평화, 반전, 민주주의, 인권을 외치는 자들은 위선이며, 반인륜이며 사기입니다.
(7) 박정희의 국민 비판
*오는 4월30일(토) 오후 2시 조선일보 광화문 빌딩 9층 강당에서 [조갑제의 월례 현대사 강좌-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있습니다. 연락처는 02-724-6845. 아래 글은 [趙甲濟의 朴正熙 傳記-'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 ------------------------------------------ 박정희의 국민 비판
박정희는 처음부터 5·16혁명이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가 장면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공격하는 이면엔 장면 정부가 구현하려 했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가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점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집권후 박정희의 어록에서는 민주나 자유, 평등보다는 국가, 능률, 청신, 기강, 자조, 자립, 자주 같은 단어 들이 더 많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1961년8월15일 광복절 제16주년 기념사?【? 박정희는 조심스럽게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문제제기를 한다.
<우리는 그 동안 주어진 서구 민주주의 제도를 이식해서 그 형태만을 모방해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풍토와 생리에 맞지 않았던지 허다한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치졸한 의회정치와 부패한 정치인들은 파쟁과 이권과 감투싸움에 영일이 없는 나머지, 사회정의를 한없이 어지럽혀 야박한 사고만이 미만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퇴폐한 국가경영이 하루 연장되면 10년의 후진을 가져오는 급격한 시대의 대조류속에서 나날이 기울어가는 조국의 운명을 좌시만 할 수 없어서 자아수술이란 비상조치 를 단행한 것이 5·16혁명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2대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의의 건설이요, 둘째는 경제건설입니다. 도의의 확립은 민주재건의 초석이요 경제건설은 자주독립의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적 흥망의 기로에선 이 마당에 이기적인 방관주의자나 기회주의자가 되어선 안되겠습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기초를 시민윤리의 확립에, 자주독립의 조건을 자립경제에 두고 있다. 민주주의나 자주독립이란 구호에 머물지 않고, 그 좋은 명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과 기초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실천론에 박정희의 관심이 머물러 있었다.
박정희는 근대화 를 추진해가는 데 있어서 자발적인 대중동원의 필요성과 효율성을 끊임 없이 강조했다. 5·16직후 박정희는 국민들이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의 자각과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자조정신을 가장 많이 강조했다. 이런 강조를 하는 박정희는 사범학교 출신 교사의 자세로 돌아가 있었다.
이 무렵부터 박정희는 연설문을 꼼꼼히 챙겼다. 그는 밑에서 올라온 연설문 초안을 자신의 뜻에 맞게끔 고치거나 처음부터 자신이 기초하기도 했다. 따라서 박정희의 모든 연설은 그의 말이며 그의 생각으로 보면 된다. 1961 년 10월3일 개천절 치사에서 박정희는 남북한의 차이점을 예언적으로 지적했다.
+++++++++++ <(전략). 남한은 이와 같은 과업을 국가권력에 의한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 대중의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역량에 의해 실현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한과 북한과의 근본적 인 차이인 것입니다.
북한과 같이 강권에 의해서 지배되어온 사회는 외견상의 힘과는 달리 사회근저의 기본적 역량이 취약한 법입니다. 남한은 이제 근본적으로 축적되어온 발전의 원동력과 혁명정부의 합리적이고 능률적인 지도에 의해 몇 해 안가서 빈곤, 기아, 무지, 질병과 모든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복지사회 건설을 완성할 것입니다.>.
박정희는 국민들을 향하여 "이것은 잘못 되었으니 이렇게 고쳐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지적한 최초이자 마지막 지도자이다.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을 찬양하고 국민들에게 영합할 때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1962년8월 농협 주최 이동조합업적경진대회 치사에서 박정희가 한 연설의 초안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쓴 것이다.
기자가 이낙선(국세청장, 상공장관 역임·작고) 당시 최고회의 의장 공보비서의 유품중에서 찾아낸 친필 원고중 주요 대목을 소개한다. 이것은 육성이나 다름없다.
<(전략) 이와 같은 원인이 과거 위정자들의 정책의 빈곤과 무능의 소 치라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모든 농민들의 자조적 노력과 자각심의 부족이란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5·16혁명 후 정부는 과거의 욕된 역사를 청산하고 도의국가,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인간개조 와 산업부흥이란 두 가지 대목표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 두 가지 목표 는 다시 말하자면 "잘 살아보자"는 운동인 것입니다.
혁명정부는 허다한 긴급시책중에서도 우선 농촌 부흥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농촌에 잘살기 운동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정부의 중농정책인 것입니다.
전인구의 7할을 점하는 농촌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경제재건이요 산업부흥이요 하는 것은 공념불이라고 본인은 확신합니다. 본인은 최근 호남 일대의 농촌을 다녀왔습니다.
전남의 모범농촌조성운동과 전북의 '보고가는 마을' 운동은 확실히 우리나라 농촌에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상록수 운동이라고 생각하며 이 운동이 앞으로 계속 활발히 추진된다면 우리의 농촌에는 수년 이내에 기적적인 현상이 일어날 것을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다니면서 본 몇 개 모범 부락에서 공통적인 점을 몇 가지 느꼈습니다. 이러한 부락에는 반드시 건실하고도 의욕적인 농촌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과 같은 애향심이 강하고 부락민들을 단합시키고 부락민들의 의욕을 북돋워줄 수 있는 지도자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야말로 우리 농촌의 등불이요 참다운 애국자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중략). 본인이 항상 강조 하는 바와 같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자조심이 없는 농민들을 정부는 다같이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정부는 앞으로 자조심이 강한 모범부락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중점적으로 도와서,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농민은 빨리 잘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신문, 잡지, 영화를 통해서 선진국 농촌을 보았을 것입니다. 농가 마다 전기, 수도가 들어가고 텔레비전이 있고 자가용 승용차까지 가진 선진국가의 농가들을 보시고 부럽게 생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노력하면 그와 같이 살 수 있다는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정부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가 남이 좀 도와주지 않는가 하고 의타심만 많고 게으르고 노력하지 않는 농민은 언제까지나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입니다. (하략)
( 계속 ).
조갑제 날 짜 2005년 4월 27일 수요일
(6) 벙어리인가? 바보, 등신, 천치인가? 전직 국정원 간부가 퇴직직원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2005-02-15 10:05:09
세계10대 경제대국인 오늘의 대한민국이 5.16혁명과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과연 존재 할 수 있었던가? 5000년 역사 상 유일무이한 위대한 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단 말인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전 세계인(김정일과 좌경용공세력들을 제외하고)들이 인정하고 존경하고 있는 특히나 중국 근대화의 국부라고 칭송받고 있는 등소평까지도 칭송하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농락하고 있는, 좌경화 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대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위대한 지도력의 밑받침의 첨병으로서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청춘을 불살라왔던 양지회(국정원 퇴직직원 모임) 동지 여러분! 우리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김일성 김정일 공산주의자들의 직, 간접침투를 막아내며 경제대국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국내외적으로 피눈물 흘리며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고초를 감내하여야만 하였습니까?
5000년 역사속의 생각하기만하여도 끔찍한 굶주림과 가난을 극복하는 것만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공직자의 최선의 의무인양 앞만 보며 달려왔던 우리 양지회 동지 여러분!
우리가 앞만 바라보며 국가발전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때 공산화를 감춘, 겉으로 민주화를 내세운 좌경용공세력들의 뿌리를 완전하게 척결하지 못한 업보를 우리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애국시민들에게 진솔하게 엎드려 사죄하고
좌경용공세력들의 대한민국 전복음모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하여 나갑시다.
더 이상의 벙어리 행세는 바보 천치 등신의 행동으로 후세에 씻지 못할 오욕만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역사를 왜곡 모욕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부정하려는 者 그들은... 지난 30여년간 세계10대 경제대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배고픔 서러움을 이겨내려 울부짖으며
열사의 땅 중동에서, 꽃피는 청춘의 꿈을 다 피우지도 못한 채
정글의 땅 월남에서 한줌의 재로 변하여 귀국한 애국 국군의 전사자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몸바칠 때
그 者들은 대한민국 그 어느 곳에서 무위도식하며 빈둥거리는 식충이던 者.
그 者들이 청와대 국회 광화문 사거리를 활보하며 대한민국을 붕괴시키려는 음모를 보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벙어리 행세를 하고 있는 양지회라면
이는 벙어리 행세가 아니고 바보, 천치, 등신이라고밖에 국민들은 생각지 않을 것이다.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양한다는 부훈에 따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서 밑거름의 충실한 원동력을 하여온 정부 중추기관의 역할을
한순간에 무참하게 짓밟아 반역의 집단으로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음모를 보고도
벙어리 행세를 하고 있는 양지회.
이는 대공전선의 최일선에서 국가경쟁력의 제고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목숨 바쳐 일하여 왔던 전직동료들의 모임체라고 현직 후배들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양지회는 바보 천치 등신이 아니라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 줄 때가 되었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사진상위원회의 구성과 활동의 잘못을 명확하게 지적,
즉각 활동중지와 함께 해?션? 것을 촉구해야 한다.
8개월 부장 재직하였던 전임 안무혁 회장님이 5년간의 양지회 회장직을 재임하면서 처럼의 양지회가 또다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안무혁 회장님 밑에서 몇백만원 받기 위해 상근부회장이니 무엇이니 하며
전체회원들의 친목도모와 양지회의 활성화를 저해한 분들은 이제 스스로 떠날 때가 되었다.
또한 양지회의 진정한 활성화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대의원, 이사들도 스스로 판단,
물러날 때가 된 회원은 자리에 연연 하지 말고
새로운 회장님의, 활성화된 양지회의 한층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활성화를 위해 평회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벙어리, 바보 천치 등신이 아닌 진정한 양지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異意가 있으신 회원께서는 양지마당을 통하여서나 전화 등으로 연락, 대화를 나누면 고맙겠습니다.(사무실 02)581-4811 H.P(011-896-9211)
국 사 모 (국가사랑모임) 회 장 송 영 인(국정원 전 제주지부 부지부장)
송영인씨는 국정원에 근무하다 DJ시절 억울하게 직권면직 처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국가사랑모임(국사모) 회장입니다.
[송영인 국사모 회장] midan94@hanmail.net
(5)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많았다. 그런데 뉴톤의 눈에는 그것이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보였다. 열 사람에게 특정 코스를 견학시켰다. 돌아와서 각자에게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본 내용들이 각기 달랐다. 똑같은 것을 보여주었는데 어째서 본 것이 각기 다를까? 각자는 자기의 머리 속에 있는 것만큼만 본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늘 어제를 평가한다. 어제 우리가 무엇을 잘 못했는지, 어떻게 하면 그걸 개선(KAISEN)할 수 있는지를 토의한다. 이 토의문화(QCC)는 일본기업 고유의 독특한 문화다. 어제로부터 무엇을 관찰해 내며 무슨 교훈을 이끌어 내는지는 토의팀에 따라 다르다. 이렇게 어제를 보는 눈을 기른 사람들은 관찰력도 매우 뛰어나게 훈련된다.
직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에 간부들은 응모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사람의 됨됨이를 관찰한다. 마츠시타고노스케는 다른 회사 사장이 문제아라고 내버린 사람을 데려다 썼다. 그 문제아가 고노스케의 눈에는 귀한 인재로 보인 것이다. 학문적 이론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 분석에 훈련되지 못한 사람은 말귀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다. 욕심이 있는 사람, 고정관념이 있는 사람은 사물을 왜곡되게 관찰하고 말과 글을 소화하는 데에도 왜곡과 한계가 따른다.
위의 표현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진리이기 때문이다. 박정희라는 역사적 인물을 보는 데에도 위에서와 같이 관찰력이 좌우한다. 경영, 경제, 과학을 공부한 사람, 스스로 기업을 해본 사람, 스스로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일자리 없는 ‘경제 황무지’에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었고,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과학기술자들을 어떻게 양성해놓았는지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조센진이 무얼 해“. 거리에 침을 뱉고, 말끝마다 자조와 욕설이 난무했던 시절, 집집마다 집 앞에 쓰레기가 쌓이고 마약, 놀음, 술주정으로 폐허가 됐던 마을에 새마을 운동을 펴서 ’하면 된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역동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잠자던 국민을 일깨워 가지고 국민에너지를 한 곳으로 집중시켜 거지의 나라를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국가로 일으켜 세운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여 많은 국민들은 그 같은 지도자가 다시 태어나기를 심정적으로 바라고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박정희 향수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
그러나 낮이나 밤이나 오직 적화통일을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를 평가한다면 그는 적화통일의 방해자다. 그가 얼마나 밉겠는가? 국민 대부분이 그리워 하는 지도자, 국민을 배부르게 해준 지도자를 저주하고 나서는 저들의 정체는 묻지 않아도 판단이 가는 일이다. 지금의 박정희 때리기와 ‘국가 허물기’는 지금의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주사파(NL계)들의 신앙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의 신앙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을 망하게 해서 적화통일을 하려는 것이다. 이들의 사상은 ‘주사파’라는 낱말이 의미하듯이 김일성을 민족의 지도자도로 모시고, 남한을 빠른 속도로 망하게 하여 주체사상이라는 궁극적인 이상을 실현하자는 사상이다.
지금 이 나라는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공산체제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공연히 수도를 옮긴다고 떠들어 경제를 한 순간에 허물고 있다. 30평생 뼈골 빠지게 벌어 2층집을 마련했다. 1층은 주인이 살고 2층을 1,000만운 보증금에 월 50만원에 내놓고 그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서민, 지금은 500만원에 월30만원으로 내렸다. 살 길이 꿈만 같다. 두 사람만 달랑 놓고 보면 집주인이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세 들어 사는 사람의 수입이 더 높다. 지주를 절단내겠다는 발상이다.
단지 수도를 옮긴다는 분위기 하나 때문에 서울시민이 가진 부동산 가격이 하락한다. 가지고 있는 건물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 생각할 때 사람들은 돈을 쓴다. 그러나 재산 가치가 하락한다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위기감을 갖는다. 서울 시민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인데 어떻게 경제가 돌아가겠는가?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은행은 또 어찌 되는가? 은행도 망하게 될 것이다. 국가를 무너트리려고 작심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다 .
아래에 박정희를 보는 필자의 시각과 붉은 정권의 경제죽이기에 대한 관찰 내용을 다시 옮긴다. --------------------------
일자리, 누가 만들었고, 누가 죽이는가?
최초의 일자리는 박대통령이 서독에 만든 광부-간호사 자리였습니다. 종전 후, 한국은 거지의 나라, 120개 나라중 119등, 북한은 우리의 2배, 태국은 3배 더 잘 살았습니다. 미국으로부터 연평균 1.5억 달러 어치의 잉여농산물, 유연탄, 석유를 원조받아 이를 팔아 가지고 정부예산을 세웠습니다. 실업률 30%! 기업이 없어,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1961, 박대통령은 미국에 돈을 얻으러 나갔다 울고 돌아와 서독에 500개의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500명을 뽑는데 46,000명! 광부는 지하 1km에서 일했고, 간호사는 매일 시체만 닦았습니다. 위로하러 나갔던 대통령은 여위고 찌든 모습들에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수출할 게 없을까?". 엿장수들을 동원했습니다. "머리카락 삽니다". 배고픈 국민이 너도나도 잘랐습니다. 유명한 한국의 가발산업, 박대통령이 만든 최초의 산업입니다.
두 번째 일자리는 월남-중동 특수였습니다. 보리고개! 보리가 나올 때까지 굶으면서 살았습니다. 김일성이 무장공비를 내려보내 산골 양민을 학살하며 대통령을 협박했습니다. 미국마저 원조를 삭감하고 철군을 거론했습니다. 사면초가! 월남참전은 안보와 일자리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월남건설 용역에 한국기업이 참여, 천막회사에 불과했던 현대, 한진, 새한 등이 대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참전용사들이 제대하여 현지에서 고용됐고, 기술을 습득한 이들이 사막으로 날아가 중동특수를 일구어냈습니다. 가족이 보고싶어 매일 울었습니다. 한국군의 활약상에 선진국들이 감동하여 돈을 빌려주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선진국들이 한국의 상품을 환영했습니다. 파월 한국군이 일구어낸 명성과 땀이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통령은 기회를 만들었고, 국민은 따랐습니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들은 파병과 고속도로 건설을 놓고 온갖 악의적인 표현으로 물고 늘어졌으며, 현재의 좌익들은 파월장병을 더러운 용병이요 양민학살자라 지금도 매도합니다.
세 번째 일자리는 외국기업을 유치해서 만들어 냈습니다. 박대통령이 갑자기 기능공을 양성했습니다. 기능공들은 서독 기능올림픽에 나가 금,은,동을 석권해 왔습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로 유명해졌습니다. 대통령이 선진국들에 특사를 보내 한국에 질 좋고 온순한 기능공들이 많으니 공장을 세워달라 종용케 했습니다. 너도나도 들어와 공장을 세워 일자리가 폭발했습니다.
네 번째 일자라는 선진국에서는 한물 간 사양제품을 복사생산 하면서 폭발했습니다. 한 가지 제품에 대한 기술자료의 양이 몇 트럭이나 되었습니다. 이런 기술자료를 얻어다 기업에 나누어주었습니다. 외국어로 표기된 자료를 소화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외국에 나가있던 과학기술자를 불러들여 기업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다섯 번째, 박대통령은 일자리를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자생능력을 갖추기 위해 과학기술단지를 만들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남이 개발한 제품을 원숭이 식으로 생산해서 먹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설계능력이 일자리를 만든다!". 대통령은 홍능과 대덕단지에 과학촌을 만들어 수시로 방문해 과학자들과 커피를 마셨습니다. 1929년, 루즈벨트는 대공황을 탈출하기 위해 빚을 내서 도로와 댐을 건설하여 850만 일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경제학의 모범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일자리, 박대통령의 영구적인 일자리 만들기는 이와 비교될 수 없는 천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만 나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실업공화국의 일자리, 누가 죽이고 있나요?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경제개발의 스승, 세계적으로는 잠자는 국민을 깨운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 받는 아시아 10대 인물 박정희, 우리는 존경하지만 좌익들은 그의 덕에 잘 살면서 오늘도 깎아 내립니다. "재벌은 박정희 작품이다". 자본이 있어야 신기술이 개발되고, 신기술이 개발돼야 일자리가 생깁니다. 세계 굴지의 회사들은 '보다 큰 자본'으로 '보다 큰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합병을 합니다. 한국재벌을 다 합쳐도 미국재벌 한 개보다 작습니다. 그런데 좌익들은 이를 키워주기는커녕 해체해서 나누어 갖자 합니다. 자본을 죽이면서 무슨 수로 일자리를 만든다는 말입니까? 지금 중국과 베트남은 박정희 모델에 따라 재벌을 키우며 일자리를 만듭니다.
적장에 군자금을 대준 사람이 수십만 일자리를 없앴습니다. "준비된 경제대통령"! 정권을 잡자 그는 대덕단지를 축소, A급 과학자들을 내쫓았고, 능력 없는 젊은이들에 카드를 남발케 하여 가정파탄과 도덕적 해이를 부추겼으며, 공적자금으로 은행을 소유함으로써 은행에 잡혀있던 기업담보물을 마구 팔아 경제기반을 축소시켰습니다. 일자리를 만든다는 게 겨우 공공근로, 들에 나가 적당히 때우면 일당 22,000원, 산에서 때우면 37,000원, 그런데 누가 공장과 밭에 나가, 험한 일을 하려 했겠습니까? 근로정신을 병들게 하고, 기업과 농촌을 망친 것입니다.
호전적인 이념노조가 일자리를 죽입니다. 선진국 근로자들은 몇 개의 기술을 가졌는가에 몸값이 다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기술을 익히려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노조는 "통일노동"을 외치며 간단한 기술 하나로 편히 삽니다. 간부들은 노동도 하지 않고 최고급 승용차와 판공비로 귀족생활 합니다. 고용인력의 12%에 불과한 노조가 노동시장을 독점하면서 억지를 씁니다. "성장정책을 쓰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일자리가 늘어나면 노동자가 고생한다. 못 살아도 민족자본만으로 해야 한다". 말이 안 통하는 붉은 띠! 이들이 무섭다며 한국 제조업들조차 70%의 일자리를 외국으로 옮겼습니다. 이들 때문에 대학졸업생 30만 명 중, 겨우 5천 명만 취직합니다. 수출고? 외국에 나간 우리 업체의 제품이 들어왔다 나가면서 잡힌 허수아비 통계숫자일 뿐입니다.
리-엔지니어링 경영혁신! 선진국들은 500명이 하던 일을 50명이 하는 방법으로 고안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노조는 거꾸로 갑니다. 1명이 할 수 있는 일을 여러 명이 합니다. 국영기업에 12년 근무하면 교수보다 더 높은 연봉, 6,000여 만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서울 지하철만 해도 해마다 빚이 1조원씩 쌓입니다. 선진국은 2명이 운영하는 전철역, 우리는 22명이 운영합니다. 국민세금으로 자기들만의 일자리만 늘리면서, 젊은 졸업생의 일자리와 국제경쟁력을 모두 죽입니다. 이념노조가 있는 한 희망이 없습니다.
교육도 의료도 이미 사회주의![공부 잘 한다고 위화감 조성마라, 나랑 한 교실에서 공부하자]. 국가경영에 적합한 수재,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천재과학자가 양성될 리 없습니다. 북한에서처럼 남한에서도 아프면 안 됩니다. 위장병이면 내용과는 관계없이 치료비가 동일합니다. ‘붕어빵 진료'를 하라는 것입니다. 유능한 의사나 신출 인턴이나 진료수가가 같습니다. 빨리 낫는 약을 처방하면 고의로 비싼 약을 처방했다며 수가에서 공제합니다. "유능한 의사야, 좋은 병원아, 위화감 조성하지 마라. 똑같이 돈 벌자", 누가 좋은 기술, 좋은 장비를 마련하겠습니까? 보험료는 2배로 늘었지만 혜택은 반으로 줄었습니다. 이게 사회주의입니다.
2004. 8.11
이름 : 지만원 작성일 : 2004-08-20 20:41:25 조회 : 83
(4) 박정희에게 반기를 들었던,백기완은 이렇게 박정희를 평가한다.
- 박정희의 유신과 백기완 선생의 고백 -
1972년 유신이 채택됐었고 사람들은 '유신독재'라 불렀었다. 그 시대는 세계적으로 어떤 시절 이었는가?
그 당시는 이미 민주주의 역사가 300년 되었다는 영국도 자치구인 '북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연방선거권을 주지 않았을 뿐 만이 아니라 '북아일랜드' 사람들을 구속할 때 재판받을 권리조차 가질수 없도록 법을 제정하기도 했었다.
1972년. 그 유명했던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바로 이 불평등한 법의 통과에 저항하여 평화롭게 행진하는 시위대 민간인들 을 향하여 영국군들이 무차별 학살했던 날이었던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라는 미국은 어떠 했는가? 비록 흑인들의 저항과 희생으로 폐지되었지만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반민주적이고, 반인류적인 '분리주의정책' 이라는 '인종차별법' 이 버젓이 통과되고 있었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을것이다.
멀리 갈것도 없다. 당시 아시아에서 제대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나라가 한 국가라도 있었던가.
대만은 장개석이 국민당정부에 저항하는 대만인들을 수만명 무차별 학살했었고 이북의 김일성, 김정일부자처럼 아들까지 대대로 이어 40 년간 세습통치를 하면서 정치적 반대자들을 피의 숙청으로 100 만명을 죽게 만들었다.
여타 다른 아시아국가도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던 시절이었다.
대만에 가 본적 있었더냐. 그렇게 많이 허물었다 하는데 불구하고 대만 곳곳에 서있는 '장개석' 동상은 마치 '김일성' 동상마냥 수백 군데 버티고 서있다.
유신을 마치 대한민국의 나치정권처럼 떠드는 사람들이라면 장개석 이 수 만명의 대만인들을 학살한 대만의 '2.28 사건' 정도는 알고 떠들어야 한다.
박정희 유신시절. 당시 전세계 어느나라도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오늘날 굶어죽는 쥐새끼 보다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것 해결하는 것도 솔직히 막막했을 것 이다. 박정희 집권시절. 김일성이 남한에 무장테러를 일으킨 사건만 도 600 여건이 넘는다. 철책선에서는 자고 일어나면 목없는 전우의 시체가 나딩굴고 있음을 흔히 볼 때였다.
밖에서는 공산주의와 싸우며 나라를 지켜내야 했고 안으로는 '민주주의' 와 '인권' 으로 포장한 당신들과 같은 인간들이 저지르는 사회 혼란속에서 국력을 극대화 시켜 잘 사는 나라로 만들고자.. 힘이 없어 나라를 그냥 빼앗겼던 식민지 시절의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고자 절치부심하며
처절하리만치 비장했던 박정희의 차가왔던 가슴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봤더냐.
60년대 초의 대한민국 상황이란 어떠 했는가? 일년 정부예산의 80% 를 미국이 지원해 주었고 춘궁기만 되면 굶어 죽는 사람이 각 동네마다 흔하게 발생했었지만 뉴스거리 조차 안되 었던 나라였었다. 어딜가나 영양실조로 인하여 얼굴에 '버짐'피운 얼굴들이 가득했었다.
현재 아시아 4대 작은용이라 불리는 싱가폴, 대만, 한국, 홍콩... 그당시 이북과 태국의 GNP가 150 불 일때, 다른 아시아의 용들이 약 400~500불 일때, 남한은 76 불이었다.
박정희가 집권하고 나서 부터 '잘 살아보세' 라고 외치면서.. 자본, 자원, 기술 어느 것 하나 구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미 그 3대 龍들과 어깨를 견줄만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이것에 세계는 깜짝 놀랐던 것이다.
그 때가 그대들이 거품물고 독재였다 말했던 유신시절이었다.
일컬어 세계인들이 '한강의 기적' 이라며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나라에 우리의 안보를 맡길 수만 없다.' 하며 자주국방 을 외치며 흔한 총탄 한알 만들지 못했던 상황에서 무수한 방위산 업을 육성하여 국산탱크와 미사일을 비롯한 여러 국산장비들을 양산하고 있었다.
가발팔고 와이셔츠 팔고 쉐타 만들어 팔던 경공업 시대에서 지금 껏 한국인이 먹고 살아갈 수 있었던 중화학 공업체계로 바꿔놓고 있었다. 이 때가 '국력의 조직화'를 꾀하자던 유신이었다.
베트남이 패망하자 김일성의 오판이 심히 우려되어 전전긍긍하고 있을때 1979년 미국의 방위정책 변경으로 주한미군을 철수 시키 겠다 하며 방한한 당시 미 대통령 '지미 카터' 와 언성을 높이면서 '철수하면 우리는 살기 위해서 핵으로 무장할 것이다,' 라며 대한민국의 안위를 온몸으로 지켜내면서, 민족의 힘 없음이 서러워 그 힘을 키워 내고자 했던 것이 '국력의 극대화' 라는 유신이었다.
전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오로지 나라만을 위하여 온몸을 불사르며 조국의 영광을 보고 싶어 근대화한 선진조국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 유신이었다.
1979년 박정희 死후, 미국 'CIA 보고서'는 박정희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했다.
『 독단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반면 카리스마와 서민적 이미지를 함께 갖춘 인물이다. 직관력과 통찰력을 겸비하면서 추진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남한의 실질적 발전은 그로 인해 비롯되었고 ..(중략) 그의 일반적 생활은 청렴하기 그지 없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민주화'를 외치던자들이 집권 하여 그들끼리만의 잔치판을 벌이며 희희낙락대고 있을 때 우리는 안에서 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12년째 GNP 10,000 달러선에서 아둥바둥거리고 있는데... 싱가폴은 GNP 32,000달러, 홍콩 22,000달러, 대만 19,000달러로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었고 부러움과 찬사로 대한민국을 배우겠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와 가르쳐 달라 머리를 조아리던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 인도네시 아 등이 성큼 다가와 우리의 목덜미를 끌어 내리고 있는 중이다.
한국을 배우자 하며 전 공무원들에게 하루 한시간 씩 박정희교육 을 시키던 중국이 이제 '한국이 어떻게 망했는가를 배워라' 하며 인민들에게 학습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묻는다. 유신독재를 비난하기전에 유신이후 우리나라가 무슨 이유로 무너지고 있는지 답해야 한다. 다른 아시아국가들은 계속 발전하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거꾸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지 답해야 한다.
인류사 및 세계사 통틀어서 18년간 집권하며 국부를 20배 이상 불려놓은 정치가 한명 있었다면 답해야 한다. 그런 정치인이 '시저'더냐? '나폴레옹'이더냐? 너희들의 대부가 그리 존경한다던 '모택동'이더냐.. 전 세계 통털어 이러한 위대한 정치가를 부관참시하는 나라 있다 면 분명 답해야 한다
'민주'로 포장된 정권이 들어선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들은 국가 비젼도 없으면서 '준비된 지도자'라 국민들을 속이고 '민주주의의 화신' 이란 狡言으로 미혹하고
'행동하는 양심'이라며 예수님보다 더한 '선한 양'으로 행세하며 '대중경제론' 이란 싸구려 만화같은 책을 마구 흔들면서 조국의 근대화를 앞장서 이끌었던 경제석학들을 조롱하고 신처럼 군림하면서 온 국민들에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도덕군자인양 행세했었다.
'김대업' 사기꾼이란 자를 앞세워 온갖 거짓말과 흑색선전으로 깨끗하고 맑은 순백의 젊은이들을 사기쳐서 정권을 훔쳤으면서도 부끄러움조차 전혀 못느끼는 전형적 모리배의 얼굴을 들이 밀고서 지금도 우리를 기만하고 백성들 한숨짓게 한다.
정권을 훔친 뻔뻔함을 바탕으로, 본성 자체가 선한 국민들을, 현란한 수사로 미혹하고 선동하여, 억울하게 돌아가신 우리의 대통령 박정희를 불러내어 부관참시 하려 한다.
삼천만명의 백성을 죽인 모택동을 그리 존경한다 하면서 실제 민족의 영웅이었던 박정희를 부관참시 하려 한다.
'박정희는 독재자'라며 역사의 심판을 받으라고 목에 핏대 세우고, 친일의 개념조차 모르면서.. 없던 사실도 흑색선전으로 호도하고 '친일파'라고 악다구리 쓰면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박정희 묘소를 파내라 한다.
정작 파내야 할 ?
(3) 욕쟁이 할머니와 朴正熙 대통령
욕쟁이 할머니가 박정희 대통령을 욕먹인 재미난 일화 ! ======================================== 번호:40769 글쓴이: 나의조국 조회:0 날짜:2004/08/25 16:52
70년대에 욕쟁이 할머니가 박정희 대통령을 욕먹인 재미난 일화가 있다.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전주에 시찰을 와 그날 밤 거하게 한 잔 하셨다.
다음날 아침 수행원은 박 대통령의 해장을 위해 삼백집에 가서 콩나물국밥을 배달해 달라고 했다.
욕쟁이 할머니 왈, “야 이놈들아, 니놈들은 발도 없냐. 와서 처먹든지 말든지 해.”
욕만 잔뜩 먹은 수행원이 박 대통령에게 콩나물국밥이 배달 안된다고 보고를 했다.
털털하기로 유명했던 박 대통령, 껄껄 웃으며 “내가 가지 뭐” 하고 나섰다.
허름한 콩나물 국밥집에 들어선 박 대통령. 그러나 욕쟁이 할머니는 설마 우리 집에 대통령이 오셨을까 싶어 평소대로 욕지거리를 퍼부어댔다.
“이놈 봐라.!! 니놈은 어쩌믄 박정희를 그리도 닮았냐. !!
누가 보면 영락없이 박정흰 줄 알겄다, 이놈아. 그런 의미에서 이 계란 하나 더 처먹어라.!!”
전주에는 지금까지 이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한다.
(2) 고건 前총리 “박정희 전대통령의 가난극복 집념에 숙연”
‘민족중흥’ 신년호 기고문 통해 박 대통령 산림녹화 정책 등 회고 2005-01-06 12:57:09
고건 전 국무총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산림녹화 정책에 대한 열정을 회고하며 쓴 글이 민족중흥회의 소식지인 ‘민족중흥’ 신년호에 실려 주목되고 있다.
고건 총리는 이 책자에 기고한 ‘박정희 대통령의 술과 한, 그리고 집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푸른 산을 볼 때면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난다”며 내무부 새마을담당관 시절 박 전 대통령의 산림녹화 정책을 추진하던 때의 이야기들을 소개했다.
그는 “박 대통령과의 첫 만남이 산에 나무 심는 일을 매개로 이루어졌다”고 서두를 뗀 뒤, “박 대통령이 새마을사업에 대해 가졌던 열정은 잘 알려진 바이지만, 매 회의마다 그 분이 우리 농촌과 국토에 대해 가졌던 뜨거운 애정, 빈곤했던 우리 역사에 대한 한에 가까운 처절한 심정,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여 경제대국을 이룩하려는 치열한 집념에 숙연해지곤 했다”고 밝혔다.
그는 “모두 21번의 보고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고 중간 중간 대통령은 질문을 하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하나같이 산림녹화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느껴지는 말씀들이었다”며 “(박 대통령이)플라타너스 가지를 지팡이 삼아 꺾어 짚고 다니다가 무심코 거꾸로 꽂아놓았는데, 그곳에서 싹이 돋아났더란다. 나무의 생명력에 감탄을 했다 하시며 박장대소를 하셨다. 그때 웃으시는 대통령 입안에 덧니를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떠올렸다.
그는 박 대통령의 술자리에 대해 “1979년 (대통령)행정수석비서관으로 있을 때 거의 매주 술자리를 했다. 그전에는 잘해야 한달에 한번 정도 만찬이 있었는데, 이 시절에는 매주 한번 이상이 될 정도였다.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외로우셔서 그러셨으리라 짐작한다”면서 “박 대통령은 막걸리 아니면 양주를 드셨는데 막걸리도 특별한 것이 아니고 고향군에서 만든 일반 막걸리였고 양주는 시바스 리갈이 고작이었다. 가끔 흥이 나시면 ‘비탁’칵테일을 만들어 돌리시곤 했는데 비탁이란 맥주 한병을 탁주 한 주전자에 섞은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어린시절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도 전했다. “지주 집에서 모내기를 할 때면 온 동네사람 모두가 품앗이를 했다 한다. 이 때 마을 아이들과 함께 박 대통령도 따라 가곤 했었는데 그 때 지주 집에서 주던 밥과 반찬이 어른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호박잎에 얹혀진 ‘자반고등어’ 한 토막이 그렇게 맛있었더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대통령이 마음속에 간직한 가난한 시절에 대한 한과 어떻게 해서든 가난을 극복하려는 무서운 집념이 상대적으로 안녕하게 성장한 나에게도 절절하게 다가오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윤경원 기자] kwyun715@independent.co.kr
(1)해방둥이의 이력서(1)
2005년에 만60이 되는 해방둥이인 나는 1945년10월에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났다. 그 여섯 달 뒤 우리 가족은 부산항을 거쳐 귀국하여 고향인 경북 청송에 재정착했다.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일본 항복 후 미군이 우리 가족이 살던 마을에 진주했다. 村長이 자신의 딸을 미군 부대장(그는 흑인이었다고 한다)의 情婦로 내어주고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고 마을에 유리한 조치를 얻어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 어느 누구도 그 村長을 욕하지 않았고, 村長도 자신의 딸을 이용하여 私益을 추구하지 않더란 것이다.
아버지는 1946년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괜히 돌아왔구나"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귀국자들을 에워싼 아이들이 물건을 서로 팔려고 싸우고 속이고 하는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패전후 일본사람들의 가난속의 질서를 목격했던 아버지였다. 경부선 기차를 탔더니 의자에 붙은 것들을 다 뜯겨나가고 뼈대만 남아 있더란 것이다. 아버지는 당장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아이들 교육 때문에 참았다고 말하곤 했었다.
청송에서 6. 25전쟁을 소년기에 겪은 나는 국민학교 2학년 때 가족을 따라 부산으로 옮겼다. 지난 60년의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남았다.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을 비교하면 떠난 사람들이 출세하고 치부한 경우가 더 많다. 격동의 시대에 이동한 사람은 성공하고 머문 사람은 정체했다.
이동은 모험이다. 고향을 떠나는 것, 조국을 떠나는 것, 직장을 옮기는 것, 계층을 탈출하는 것, 집을 옮기는 것. 이 여러 이동에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이동을 결심한 사람은 준비를 하고 계산을 하고 정보를 모으며 친구를 만든다.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이동이다.
지난 60년의 본질은 한국인이 이동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지구 전체를 활동공간으로 확보했다. 반대로 북한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가는 것도 외국에 가는 것처럼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정지된 공간이었고 그로 해서 한국인의 위대한 잠재력이 억압되었으며 오늘의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1963년 고교 시절 나는 가족과 함께 사진관에 가서 여권용 사진을 찍었다. 남미의 파라과이라는 곳으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고 있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으로 이민수속은 잘 되지 않아 나는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
그때는 그러나 대한민국을 떠난다는 희망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근대화의 불씨가 막 피어나고 있던 초입에서 한국의 그 누구도 아직은 조국의 장래를 낙관할 수 없었다.
3년4개월간의 군 복무를 끝내고 1971년 부산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시작한 나는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운동노래만 들으면 기분이 나빴다. 朴대통령이 좀 고상한 주제를 들고나오지 왜 저런 저차원의 국가목표를 설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소중한 그 무엇, 예컨대 민주주의 평등 자주 자유 같은 것!
1970년대 부산은 세계로 뚫린 對外 개방형 산업화의 창구로서 활기에 차 있었다. 나는 기자의 눈으로써 이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산업화의 그늘, 철거민의 불만, 관변단체 사람들의 부정들을 주로 파헤치는 것이 기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기 朴正熙와 대한민국이 세계사적인 巨步를 내딛고 있다는 사실을 이 젊은 기자는 알지 못했다.
조갑제 날 짜 2004년 12월 10일 금요일
해방둥이의 이력서(2)
기자와 역사가 만난 것은 1979년 10월이었다. 10월16일 부산사태, 10월18일 부산에 비상계엄령, 그 이틀 뒤 마산에 위수령, 그리고 10.26사건. 朴正熙가 총맞아 죽은 날,
그 화창했던 가을날, 나는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지루한 장기집권이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되는구나 하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1980년 5월 나는 광주사태를 취재하러 갔다가 회사에서 해직당하고 그 몇달 뒤에는 신군부에 의해서 강제퇴직대상 언론인으로 지정됨으로써 확인사살을 당했다.
1980년은 朴대통령의 서거를 민주화의 호기로 보았던 세력과 이를 국가의 위기로 보았던 세력 사이의 대결에서 後者가 승리한 해였다. 중산층이 학생층과 야당정치인들의 행동을 과격하다고 판단하여 중립을 취하는 바람에 신군부의 집권 드라이브는 성공했다.
실직한 나는 먹고살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이동했다. 나로서는 생애 세번째의 이동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1980년대의 한국은 연평균 경제성장률 10.5%를 기록하여 세계1등이 되었다. 민주화의 열풍이 가장 거세었던 1986년과 87년에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은 그 절정을 구가했다. 민주화 운동의 절정과 경제성장의 절정이 한 사이클로 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한국 경제의 호황과 튼튼한 안보가 민주화의 부작용을 견디어내게 했다. 1980년대 '야당+학생 對 신군부'의 구도에서 중립을 취했던 중산층은 1987년에는 학생 야당편을 들었다. 이로써 대세가 결정되었다. 신군부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6.29 선언으로 대결을 모면하고 평화적이고 타협적인 한국형 민주화의 모델을 만들었다. 兩金의 분열은 盧泰愚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었고 군인 출신 대통령에 의한 민주화가 추진되었다.
月刊朝鮮은 1980년대 민주화의 열망에 부응하는 기사로써 시사종합지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月刊朝鮮은 40만 부 이상의 발행부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노점상 아줌마가 월간조선을 읽고 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인의 善意가 모여서 만든 작품이었다. 이것은 국민국가 건설 과정의 찬란한 한 章을 넘기는 장면이기도 했다. 그 뒤 한국은 정신적 사회적 이념적 갈등의 시대로 접어든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드디어 경제에 부담을 주기 시작한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대로 떨어진다. 소위 역사바로세우기, 외환위기, 카드빚 사태, 친북좌파의 득세, 노사갈등, 지역갈등. 어둠과 회색이 主調인 이 시대에 월드컵 같은 반짝거림, 정보화의 전개 같은 好材도 있었으나 한국인들은 대체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북한사람들의 1990년대는 지옥圖였다. 변화를 거부함으로써 300만의 주민들을 저승으로 보낸 북한 김정일의 단말마적 북핵 개발과 對南공작은 남한의 갈등을 부채질했다.
1980년대 한국사회에 씨가 뿌려졌던 좌익이념의 세례자들은 1990년대에는 한국사회의 불안요인이었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국가건설, 국가방어, 그리고 공업화와 민주화라는 거대한 흐름속에서 생긴 그늘과 상처속에서 기생했던 친북좌익세력은 이제 대한민국의 국체변경까지 시도할 정도의 힘을 갖게 되었다. 근대화와 민주화는 그러나 민간부문의 자율성을 엄청나게 키웠다. 60년간의 국가건설과정에서 생겨난 자유민주적 시장경제적 가치관과 제도는 그 뿌리를 깊게 내렸다. 친북좌익이란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무성한 나뭇잎은 흔들리지만 깊게 박힌 뿌리는 뽑히지 않을 것이다.
|
|
첫댓글 필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승 한 5회에 걸처서 시리즈로 주세요 바쁜 시간에 모두 일기가 무쟈게 힘ㄷ,ㅡㄹ어요
넵 지켜야합니다 우리모두가 열심히 지킵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