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의 알이 한자어로는 계란이다. 순 우리말로 닭의 알을 닭알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쌍받침이 발음하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발음하기가 쉬운 달갈을 거쳐 달걀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달걀을 처음 본 것은 시골에 살 때인 유년시절이었다. 초등학교 1~2학년때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우리집에는 암탉이 한마리 있었다. 닭장이 비좁아서 알을 낳을 때에는 닭장 바깥에 짚으로 둥지를 따로 만들어 주었더니 점심때쯤 그곳에 들어가선 알을 놓고 둥지를 나와서 목청을 한껏 돋우고는 '꼬끼요!'하고 울어 댔다. 터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면 '점심 때가 됐구나!' 또 '알을 낳은 모양이구나!' 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시계가 귀했던 시절이어서 시계 대신 시간을 알려주는 역할도 했다.
바깥에서 일을 하시다가도 어머니는 닭울음소리를 들으시면 나더러 달걀을 내어 오라고 하셨다. 둥지는 사랑채 헛간 위에 만들어 놓아서 계란을 꺼내기 위해선 발판을 밑에 놓고 올라 서야 했다. 사랑채는 서향이었는데 마루청에서 저멀리 서쪽을 바로 보면 할머니 산소가 까막득히 보이곤 했다. 6.25사변으로 몸채는 불 타버리고 , 할머니는 피란가셨다가 집이 불탄다는 소문을 전해듣고 가재도구 하나라도 건지러 줄달음질쳐 뛰어오시다가 미군이 쏜 흉탄에 그만 목숨을 잃어셨다. 그 땐 전쟁중이라 정황이 없어 임시로 그곳에 가매장을 해 두었다가 전쟁이 그친지 서너달 뒤인 시월달에 정식으로 도장골로 장례를 치뤘다고 들었다. 사랑채도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었는데 제일 바깥쪽에 마루가 놓여 있었고 그 안쪽에 방이 한 칸 가운데가 부엌 나머지 한 칸이 헛간이었다. 헛간은 ㄱ 자 모양의 담은 둘러쌓여 있었지만 드나드는 문도 없어 난달이었다. 창고처럼 곡식을 쌓아두기도 하고 비가 올땐 땔감을 넣어 두기도 하였다.
닭울음 소리를 듣고 둥지로 달려가면 그 속엔 이쁘고 고운 계란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내 눈에는 마치 황금알처럼 보였다. 손을 뻗쳐 계란을 잡으면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계란을 손에 들고 어머니한테 보이면 어머닌 아들이 사랑스러운지 그냥 날 것으로 깨어 먹으라고 하셨다. 그렇지만 아까워서 혼자 먹을 수가 없었다. 조심조심 걸어서 방안에 있는 쌀독 속에 넣어 두었다가 간혹 손님이 오시거나 하면 밥솥 위에 쪄서 반찬으로 내었다. 당시만해도 계란찜은 시골에선 별미였고 학교에서 소풍갈 때나 도시락과 함께 삶은 계란 하나를 호주머니 속에 넣어 갈 수 있었다. 대부분은 쌀독 속에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한 두 꾸러미가 되면 짚으로 묶어서 장날에 내다 팔아서 등잔불에 부을 석유도 사고 빨래할 때 쓸 비누도 사곤 했다. 비누라는 말보다 사분이라 했는데 양잿물로 만든 검은 색의 비누였다. 흰 빨래 비누는 약간 더 비쌋고 세수비누는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다.
어느날 잠을 자고 있는 한밤중에 닭장에서 닭이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나서 아버지가 일어나 뛰어나가 보니 닭장속에 집지끼미라고 하는 큰 구렁이가 닭을 잡아 먹으려고 하는 찰라였다. 닭장 문을 열어주니까 닭이 뛰쳐나와 위기를 모면했다. 닭장은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져 있어서 뱀이 얼마든지 닭장 안으로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로 닭은 겁이 나는지 다시는 닭장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난달인 헛간 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 몇달 후 추운 겨울 어느날 밤이었다. 닭의 비명소리와 함께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뛰쳐 나가보니 씩(삵)이 우리닭을 물고 도망을 가고 있었다. 막대기를 들고 뒤쫓아 갔더니 물고가던 닭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친채 도망을 쳤다. 닭은 찾았지만 이미 숨이 멎은 뒤였다.
몇년전인가 조류인플렌자(AI)로 방역당국이 닭 수천만마리를 살처분하였다. 그러자 계란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정부에서는 계란값 안정을 위해서 중국과 미국에서 급히 수십톤을 비행기로 수입하였다. 코스트코에서는 통상 계란 두 판을 한 묶음으로해서 판매를 했는데 어느날 한판씩만 판다고 했다. 계란값이 올라 품절을 우려해 1인당 한 판으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조류독감이나 돼지 열병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신문기사를 보면 일본의 피해상황은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미미하였다. 한일간 배타적경제수역(EEZ)협상때의 준비상황을 되돌아 보면 일본실무자는 6개월전부터 어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반해 우리측 담당자는 쌍끌이라는 용어조차 모르고서 협상에 임했으니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최근에는 '에그플레어션'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계란 값이 계속 오르자 인플레이션에 빗대어 지어낸 말이다. 6월과 7월에 이어 8월에도 계란값이 50%이상 오르면서 기재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기재부는 계란가격 안정화를 위해 지난달부터 차관보 주재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운영하고 주 2회이상 '계란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기재부가 이렇게 긴장하는 이유는 계란값이 밥상물가의 지표같은 역할을 하기 땨문이다. 평상시에도 활용도가 높은데 최근 신종 코로나 감염증이후 수요가 더 높아졌다고 한다. 한때 1만원대까지 치솟던 계란값이 정부가 공급량을 늘린 탓에 6천원대로 내려갔지만 유럽과 아시아지역에서 조류인플루엔자의 발생증가와 추석 수요 및 태풍 등 기상이변이 복병으로 숨어 있어 계란파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첫댓글 유정란 싸게 먹어려면 우리농 가세요.. 초등시 하교 하면닭장 뛰어 나와 마루청 아래 흙속에 낳은 달걀 몰래 집뒷칸가 먹어면 꼬소하고 별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