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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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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경제현안 스크랩 자본이란 무엇인가 펌, 구조론
참현자 추천 2 조회 465 11.03.28 18:5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경제는 사기다.

미국발 금융거품경제가 붕괴되면서 폰지사기, 메이도프사기 따위가 언급되고 있다. 심지어 신자유주의가 총체적 사기극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본적으로 ‘경제’라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청맹과니 좌파들이 하는 소리다.


 

경제는 통째로 사기다.(역설적 표현이지만) 원래 사기가 맞는데 새삼스럽게 폰지사기 따위를 강조한다는게 말이 되느냐다. 물론 ‘경제가 사기’라는 당연한 사실도 몰랐던 바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는 정도의 의미는 있다.


 

경제하는 시스템에 대한 무지를 무슨 훈장이라도 되는듯이 자랑하고 다니는 좌파들의 주장을 액면에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경제 자체를 원천부정한다는 점을 고발하려는 것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하자.


 

오늘날 지구가 이 모양 이꼴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가 고작 이 정도이기 때문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양차세계대전 직후는 더 엉망이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미미한 존재다.


 

별 볼일 없는 존재인 인간의 원초적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자본주의, 금융제도, 경제 시스템에 대한 원천부정은 결국 그 제도를 만든 인간에 대한 부정이다. 자본주의를 없애라는 말은 인간을 없애라는 말로 된다.


 

비판은 좋으나 뭘 비판할 건지 가려해야 한다. 오늘날 인간의 수명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되는 것은 의사들의 역량이 그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학을 없애고 주술을 찾으랴?


 

만병통치약은 원래 없다. 병을 못 고치는 것은 전문가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가 이렇게 된 것은 경제가 고도화 된 데 비해 그 시스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제대로 된 명의가 없기 때문이다.


 

의사 멱살잡는다고 환자가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가 너무 나서면 안 되고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문제 있는 시스템은 보완되어야 하지만 의학을 부정하고 무당의 주술로 돌아가자는 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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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경제가 ‘사기’인가? 모르기 때문에 사기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과 같다. 아는 사람에게는 사기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백퍼센트 사기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는 당연히 사기다.


 

자신이 ‘돼지’라는 판단이 서면 예술이라는 진주목걸이는 던져버려야 한다. 묻노니 그대는 돼지인가? 그대가 돼지라면 예술은 확실히 사기다. 돼지인 그대에게는 그 어떤 예술도 우스꽝스런 코미디일 뿐.


 

마찬가지. 경제를 모르는 그대에게 경제는 통째로 사기다. 주식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주식은 당연히 사기고, 부동산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부동산이 사기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역설’이다.


 

역설을 이해못하는 사람에게만 사기다. 역설이란 결과가 의도와 반대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경제는 항상 반대로 간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한다는 양반 있는데 그거 유럽에서는 500년 전부터 했다.


 

그게 중상주의. 중상주의가 경제를 망치고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경제를 망친다는 학설이 아담 스미스의 시장경제이론이다. 경제살리기 하면 경제죽는다고 아담스미스가 200년 전에 이미 갈파했다.


 

경제는 의도와는 반대로 간다. 북유럽의 경우 노조가 들고 일어나서 경제를 망쳤는데 그 결과로 경제가 번영했다. 경제의 숨통을 조이면 오히려 경제가 살아난다.(항상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아담 스미스의 시장경제이론도 사기다. 경제가 항상 의도와 반대로 가니까 ‘모르면 놔둬라. 중간이나 가게.’ 이게 시장경제이론이다. 아마추어가 모르면서 손대다가 망치는 것 보다는 시장에 맡겨두는 게 낫다.


 

가만 놔둬도 시장이 저절로 경제를 살리다니!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렇지 않나? 가만 놔둬서 아프리카경제가 살아나고 필리핀경제가 살아났나? 시장이 저절로 경제 살린다는 말은 경제살리기를 실패한 경험칙에 불과하다.


 

저절로 살아나는 수도 있다. 감기 환자는 놔두면 저절로 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환자 나름이다. 암도 저절로 낫는 경우가 있다지만 감기로 죽는 경우도 있다.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보듯이 가만 놔두면 죽는 경우도 많다.


 

경제는 역설. 항상 반대로 간다. 살리려 하면 죽는다. 비전문가가 환자를 손대면 어떤 경우에도 죽는다. 전문가라면 다르다. 전문가가 살리면 산다. 문제는 이명박이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시장이 저절로 경제를 살릴 때도 있지만 대개 누군가를 희생시킨다. 명의는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고 경제를 살린다. 문제는 그린스펀이라는 명의가 있어서 경제가 살았는데 지금은 명의가 없다는 사실.


 

상대적이다. 쉬운 병은 전문가가 고치지만, 어려운 병은 전문가도 못고치는 수가 있다. 시장원리니 보이지 않는 손이니 하는 말은 30년대 대공황처럼 전문가도 쉽게 못고치는 중병에 걸렸을 때 답답해서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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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자본주의를 열어젖힌 프랑스의 존 로와 동업자 캉티용은 원래 사기꾼이었다. 존 로는 영국에서 사기치다가 들켜서 프랑스로 튀었는데 미시시피 주식회사라는 것을 만들어 일종의 폰지사기를 쳤다.


 

존재하지도 않는 신대륙의 금광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황금을 엄청나게 실어온다고 속이고 지폐를 발행하다가 한계에 부닥치자 외국으로 튀었다. 존 로와 캉티용의 지폐사기를 지금은 프랑스 정부가 하고 있다.


 

이 양반이 화폐경제로 대변되는 근대 자본주의를 만들었다. 함께 사기치던 캉티용은 살해되었는데 죽은 후 불타버린 집에서 그의 저술 ‘상업론’이 발견되었다. 이 책이 근세 자본주의의 교과서 격으로 되었다.


 

자본주의는 애초에 사기꾼이 만든 것이고, 처음부터 사기로 성장했고, 사기로 지금까지 굴러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여러분을 속일 것이다. 그러니 눈 부릅뜨고 조심하라.


 

항상 언급되는 튤립효과만 해도 그렇다. 네덜란드 자본주의는 튤립소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주식회사 제도와 보험제도 금융제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경제시스템이 그 시점에 생겨났다.


 

누군가가 사기를 친다. 잠시동안은 잘 돌아간다. 사람들은 환상에 빠져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닌다. 졸지에 떼부자가 된 하인과 옛주인이 오페라 극장에서 조우한다. 3~4년간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고장난다.


 

회사는 파산하고 주주는 거지가 된다. 그러나 나중 문제를 보완했다는 누군가에 의해 그 수법은 다시 사용된다. 급기야는 국가가 그 수법을 사용한다. 그러면서 삼백년을 굴러온 것이 자본주의다.   


 

서부시대 미국은행의 달러는 절반이 위조지폐였다고 한다. 은행에 금이 있는 만큼 달러를 발행해야 하는데, 금고에는 금박 입힌 돌을 넣어놓고 달러를 발행했으니 사기다. 사기극 덕에 미국경제는 번영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달러가 가짜라는 사실을 아는 소비자들은 재빨리 그 종이를 남에게 줘버리고 물건으로 바꿔간다. 언제 휴지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에 상품의 유통속도가 높아져서 경제가 번영한다.


 

반대로 양화인 금화는 사용하지 않는다. 금은 믿을 수 있으므로 남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금고에 보관한다. 화폐를 사용하지 않으니 물산이 유통되지 않아 경제가 망한다. 그러니 경제는 사기다.


 

만약 은행들이 정직하게 장사를 했다면? 달러가 없어서 경제는 아예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경제는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누군가가 외부에서 발동을 걸어줘야만 작동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 발동을 거는 과정이 거의 사기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고장나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파산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과정에 문제는 계속 보완되지만 문제의 본질은 여전히 남아있다. 위험은 계속 증가한다.


 

금이나 은이라는 것은 원래 먹을 수도 없고, 입을 수도 없고, 탈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니 사기다.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이걸 믿으라. 믿으면 벌지니라’ 하고 선교를 해대니 사기다.


 

그 사기에 속을 것인가 속지 않을 것인가? 마호멧은 말했다. ‘내가 돼지가 새끼를 치는 것은 봤어도 돈이 새끼를 치는 것은 못봤다. 사기다.’ 그래서 아랍에는 이자를 받는 은행이 없다. 이자를 안받으니 정직하게 경제가 망했다.


 

경제는 사기다. 속지 않으면 망한다. 아랍처럼 망한다. 속아도 망한다. 미국처럼 망한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한다면 수백년 동안 계속된 무수한 사기와 파산과 실패를 딛고 또 한 걸음 전진해 보는 수 밖에 없다.


 

미국 운하붐에 투자했던 유럽 귀족들은 거진 다 망했다. 왜? 철도가 등장했기 때문에. 철도붐에 투자한 유럽 귀족들은 다 망했다. 왜? 자동차가 등장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속이고 또 속인다.


 

신대륙에 투자한 귀족들은 결국 거지가 되었다. 속여먹은 미국은 대박. 그 과정에 경제의 중심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간다.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사는데 전체적으로는 사는 사람이 많으므로 시스템은 계속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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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지사기를 들먹일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폰지사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단 때로 성공하는 폰지사기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


 

메이도프는 20년 동안 불법다단계를 했는데 그 20년 동안은 순조로웠다. 그 20년을 100년으로 연장하는 기술만 개발하면 안전하다. 사기꾼이 늙어죽고 난 다음에야 부도나든 말든 상관없으니까. 그런 식이다.


 

지폐경제를 실험한 존 로가 사기꾼으로 몰린 것은 그가 조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이고 어쨌든 그 여파로 자본주의가 태동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지금 이명박이 돌려막기 경제를 하고 있는데 미국 자본주의가 그랬다.


 

운하로 사기친거 철도로 돌려막고, 철도로 사기친거 자동차로 돌려막고, 전력으로 돌려막고 그런 식이었다. 줄기차게 사기친 미국은 대박이 나고 줄창 사기당한 유럽귀족은 거덜이 나고.


 

자본주의란 메이도프 20년 사기를 100년 사기로 늘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사기를 치되 손실은 후손들에게 떠넘긴다. 미국경제가 망한 것은 사이클을 너무 빠르게 순환시켰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이 속도조절을 했다면 더 오래도록 사기쳐먹을 수 있었다. 사기가 계속되는 동안 미국경제는 번영한다. 사기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사기가 아니라 마술이다. 마술에 속는 사람이 문제다.


 

주식에 속고 부동산에 속고! 속지 말라. 안속으면 사기가 아니라 예술이다. 경제는 마술이고 또 예술이다. 마술사의 진짜 속임수는 마술사의 손끝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가려놓은 천 뒤에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극장 입구 매표소에서 이미 사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가 알아채는데 성공한다면 자본주의는 예술이다. 그 사기수법을 이해하고 이에 대항하여 위험을 회피하는 전술을 찾아내면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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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세계에서 1+1은 2다. 구조의 세계에서 1+1은 구조를 조직하기에 따라 3이 될 수도 있고 4가 될 수도 있다. 구조는 복제되므로 잉여가 창출된다. 구조는 두 당구공의 사이다.


 

●와 ●의 사이에 무엇이 있나? 접점이 있다. 접점은 혼자서 두 ●를 상대한다. 1로 2를 해결하므로 잉여가 창출된다. 구조는 포지션이다. 포지션은 최적화 될 수 있다. 공격수가 수비수를 겸하는 멀티플레이어라면 가능하다.


 

칼로 무를 한토막씩 썰면 칼질 1회에 토막 1개가 탄생한다. 종이를 여러번 접어서 칼로 자르면 칼질 1회에 무수한 카드가 생산된다. 그것이 구조다. 구조는 명백히 잉여를 탄생시킨다. 구조는 사기가 아니다.


 

백 명의 고립된 마을이 있다. 백 명의 주민이 숟가락 한 개로 순번을 정해서 돌아가면서 사용하면 1개의 숟가락으로 백배의 효율을 얻는다. 이익이 백 배나 된다. 잉여는 여기서 창출된다.


 

문제는 숟가락이 부러졌을 때 백 명이 모두 밥을 굶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위험 역시 백배로 증폭된다. 그러므로 사기다. 공산주의 집단소유개념도 본질은 숟가락 하나로 둘아가면서 밥먹자는 식의 눈가림이자 사기다.


 

일시적 효율을 얻지만 위험이 증폭되므로 지속가능하지 않다. 자본주의도 본질은 같다. 세계의 네티즌들이 MS의 익스프롤러 하나로 밥먹고 있다면 위험하다.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느냐가 자본주의의 발전의 핵심이다.


 

지금의 불경기도 위험분산 실패에 따른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숟가락이 부러진다. 언젠가는 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시간을 벌 수 있다. 경제의 본질은 시간차를 어떻게 활용하는가다.


 

시간차를 활용해서 요소투입 최적화로 얻은 잉여를 에너지로 돌려 시스템에 재투입하면 생산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백명이 숟가락 하나를 공유하고 남는 99개로 산업을 건설하면 이익을 낼 수 있다.


 

시간과의 경주가 벌어진다. 위험의 증대가 생산력 혁신보다 빠르면 시스템은 붕괴한다. 자본주의 엔진의 시동이 꺼져버린다. 생산력 혁신이 더 빠르면 위험을 해소할 수 있다. 이는 경제의 선순환이다.


 

메이도프가 20년 동안 조용히 사기쳐서 번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해서 큰 이익을 낸 다음 피해자를 구제하면 된다. 경제는 이런 식으로 순환된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통째로 이 수준의 불안정한 구조라는 거다.


 

자본주의 핵은 잉여다. 잉여는 최초 단계에서 시스템의 구조화로 인한 요소투입 증대로 얻어진다. 요소투입을 늘리면 잉여가 얻어지고, 회수된 잉여는 에너지로 변환되어 신기술, 신발명, 영토개척, 시작확대, 고밀도화에 투입된다.


 

발견, 발명, 시장개척, 공공투자로 생산력 혁신이 일어나면 재질서화가 일어난다. 요소투입에 의한 구조화를 폐기하고 혁신된 생산력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변경한다. 이 과정이 선순환의 1사이클이다.


 

재질서화가 중요하다. 최초 단계에서 위험의 증대를 수반하는 형태로 설계된 구조화를 해체하는 것이다. 게가 허물을 벗듯이 경제구조는 부단히 교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에는 항상 파괴가 따른다.


 

전혀 경제적이지 않은 파괴가 도리어 경제를 살린다. 그 파괴는 물질의 파괴가 아니라 낡은 패러다임의 해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적 가치와 방법이 일정부분 경제에 기여하는 것이다.


 

30년대 공황은 급격한 생산력 증대를 생활양식이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의 충격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인식이 바뀌자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자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자 불경기에서 벗어났다.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꾸어야 경제는 살아난다. 그러므로 개혁이 필요하고 계몽이 필요하고 사회주의적인 여러 사회안전망이 필요하다. 파괴와 해체에 의한 재질서화는 항상 일어나야 한다.


 

90년대 IT거품 뿐이 아니다. 19세기 운하거품, 그 다음의 철도거품과 전기거품(에디슨 이후 영국에 전기회사 수백개가 난립해서 다 망했다. 그때도 엄청난 투자광풍이 불었고.)


 

자동차거품(포드자동차 등장으로 영세공장 5만개 몰락.) 등 거품의 몰락이 경제발전에 이바지했기 때문에 경제는 사기다. 시장이 재질서화를 위해 교착을 타개하고 방향성을 얻으려면 일정부분 거품이 있어야 한다.


 

거품 때 창업했다가 망하여 생겨난 훈련된 백수들이 살아남은 구글과 NHN에 취업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이익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재질서화를 위해 피해갈 수 없는 필연적인 과정이라는데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기능하는가는 재질서화에 성공하느냐에 달려있다. 시장이 새로이 리더를 선출하고 리더에게 힘을 몰아주고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느냐다. 이 지점에서 거대한 권력교체가 일어난다.


 

마차시대에서 운하시대, 철도시대를 거쳐 자동차시대로, 또 전기시대에서 전자시대로, 가전시대에서 컴퓨터시대로 바뀌면 사회구조가 재편된다. 인식도 바뀌고 삶도 바뀌고 문화도 바뀐다.


 

교육, 문화, 예술까지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느냐에 자본주의 시스템의 운명이 달려있다. 자본주의가 사기인 이유, 그대의 믿음을 배반하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기존체제가 부숴져야 하기 때문이다.


 

경제공황이 일어난 이유는 마차시대에서 자동차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생산력 증대로 자동차는 있지만 팔리지 않는다. 왜? 운전수를 고용할 돈이 없기 때문이다.


 

손수운전 하면 되잖는가? 만약 직접 핸들을 잡고 손에 기름을 묻힌다면(당시 자동차는 고장이 잘나서 기름범벅) 운전수로 신분이 격하된다. 자동차는 마차가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운전수는 원래 마부다.


 

마부는 신분이 맞은 하층민이다. 오너가 직접 핸들을 잡으면 부르주아에서 마부로 신분이 추락한다. 그러므로 생산된 차가 팔리지 않는다. 마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30년대의 문제였다.


 

운전수를 고용하면 식모, 찬모, 유모, 정원수, 소사, 집사까지 고용해야 한다.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 문화적인 수준차가 너무 커서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운전수를 고용하는 마차패러다임을 부수지 않으면 손수운전의 자동차 패러다임에 적응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공황은 필연이다. 중요한 것은 이 힘든 과정을 신속, 명확하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다.


 

김대중 때의 빅딜은 기술적인 실패였다고 볼 측면이 있다. 그러나 빅딜 덕분에 IMF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빅딜의 세부적인 내용은 그렇다치고 시장에 보내는 신호는 건전했기 때문이다.


 

생살을 찢어서 멀쩡한 기업을 죽인 혐의도 있지만 크게 보아야 한다. 망할 기업이 정해지니까 동시에 살아날 기업이 정해져서 이후로 투자가 제 자리를 찾아가고 시장이 안정된 것이다.


 

두 패러다임 사이에서 결정은 신속해야 한다. 내용은 파괴라도 결정의 신속함이 이후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손해보는 수주계약이라도 일단 계약되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재질서화다.



 

본질은 생산력의 혁신


 

경제의 본질은 신기술, 신발명, 신시장, 신대륙과 같은 생산력 혁신이고 생산력의 혁신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초기투자가 있어야 하며 생산력 혁신이 달성된 다음에는 그 패러다임에 맞춰서 재질서화 해야 한다.


 

여기서 시간차에 의한 착시가 일어난다. 정확히 말하면 역설. 그러한 경제의 다이나믹한 효과, 일정부분 파괴를 안고가는 역설적인 진행이 경제가 생물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기로 비쳐진다.


 

대부분 원래 의도했던 것과 다른 쪽에서 재질서화로 인한 엉뚱한 효과가 나타나서 경제를 다시 살리는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에 원래의 의도를 순진하게 믿었던 사람에게 경제는 사기가 된다.


 

대학가서 전공 바꾸듯이, 또 전공과 무관한 다른 직장에 취업하듯이 경제는 항상 엉뚱한 길로 간다. 전기가 발명되었을 때 투자자들은 미친듯이 전기회사에 투자했지만 실제로 돈은 전기가 아닌 전자가 벌었다.


 

전기는 예상과 달리 돈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자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백색가전이 등장하면서 건물구조도 바뀌었다. 삶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었다. 거대한 신규수요가 창출되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이명박 경제도 역설적이다. 지금의 고환율, 저유가는 한국경제에 큰 기회다. 물론 큰 희생을 수반한다. 이명박 경제는 호랑이 입에서 도망치다가 거꾸로 오히려 호랑이 입속으로 들어간 경우다.


 

용케 유가가 하락되는 바람에 치킨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찬스를 잡았다. 한국경제는 당분간 망하겠지만 일본경제와 대만경제가 더 망하면 상대적인 비교우위에 의해 장기적으로 큰 이득을 본다.


 

이명박의 경제살리기가 경제죽이기 효과를 가져왔고 그 여파로 희생자가 발생했고 희생자 덕분에 거꾸로 경제살리기 효과로 나타났다. 반전에 반전. 역설의 역설. 이러한 복잡한 공식을 모르는 사람에게 경제는 사기다.


 

이명박이 침착하게 대응해서 경제를 살렸다면 치킨게임은 일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피해자도 생겨나지 않았고, 국민지지도는 올라갔겠지만 기회는 잡지 못했을 수 있다. 중요한건 재질서화이기 때문이다.


 

어중간하게 경제가 살아나면 이도저도 아닌 교착상태가 장기화되어 재질서화에 실패하게 되기 때문에 더 나쁘다. 엎어졌을때 신발끈을 고쳐매듯이 이 기회에 패러다임을 확 바꾸어야 한다.


 

북한을 의식한 박정희의 중공업 과잉투자가 80년대초 한국경제를 죽였지만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났다. 일본은 80년대초 오일쇼크로 망했기 때문에 대박을 맞았다. 경제죽이기가 경제를 살린 대표적인 예.


 

노조와 시민단체가 대기업을 감시하면 대기업이 기술개발을 해서 경제가 산다. 반면 정격유착을 해서 비즈니스프렌들리를 하면 대기업이 생산을 기피하고 유통을 장악해서 경제가 망한다.


 

돈버는 방법은 간단하다. 입구와 출구를 지키는 것이다. 입구는 자원이다. 토지를 독점하거나 광산을 개발한다. 석유를 캐는 것이다. 출구는 유통이다. 산업은 하지 않고 백화점과 부동산 장사만 하는 거다.


 

이렇게 땅짚고 헤엄치기식 돈벌이 방법이 있는데 왜 힘들게 그 중간의 제조업을 하느냐다. 입구와 출구를 장악하는 거저먹기 돈벌이를 하려면 정경유착을 해야한다. 입구와 출구는 이권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가 부패한 나라들은 재벌들이 그 입구인 매장자원의 독점, 출구인 유통과 부동산에 전념해서 경제가 망한다. 시민에 의해 감시되지 않는 청맹과니 재벌경제는 필연적으로 망하게 되어 있다.


 

중상주의를 하면 경제가 죽고 중상주의를 폐지하면 경제가 산다. 사회주의적 가치와 공공투자를 도입하면 경제가 살고, 자본주의를 극단적으로 신봉하면 경제가 죽는다. 결국은 밸런스다.


 

밸런스는 50대 50의 어중간밸런스가 아니라 좌로 1보 후 우로 1보의 살아서 움직이는 밸런스, 파괴와 재질서화를 수반하는 다이내믹한 밸런스다. 끊임없이 시장을 흔들고 부단한 재질서화를 시도해야 한다.


 

정기적으로 불경기가 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옥석이 구분되고 시장을 주도할 새로운 리더가 선출되며 고급두뇌의 재배치가 일어난다. 진정한 강자는 불경기에 기회를 잡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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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면 태산 서쪽의 산서상인이 유명하다. 근본을 더듬어 보면 고대 은나라 곧 상나라가 망해서 상인이 되었고(상인이라는 말의 어원은 상나라 사람이라는 뜻) 상인조합을 ‘행’이라고 한다.


 

예컨대 ‘은행’ 따위다. 비단행, 소금행, 차행, 도자기행 등 많은 행들이 있다. 행(行)은 ‘걸어갈 행’ 자라 상나라 사람이 나라를 빼앗기고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행이 생겨난 것이다.


 

유태인도 나라를 뺏기고 세계 곳곳으로 떠돌아다니다가 금융업 위주로 장사를 하게 되었고 개성상인도 고려가 망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상업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경제의 역설이다.


 

망해야 흥한다는 것. 한 번 망해본 사람이 흥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 항상 그렇다. 자본주의는 무수히 속고 무수히 망하면서 커왔다. 자본주의 본질은 위험관리. 망해보지 않은 자는 위험관리 노하우를 쌓지 못한다.  


 

경제는 시스템이고 시스템에는 사이클이 있다. 요소투입에 의한 최적화≫잉여창출-그러나 위험의 증대≫시간차 획득≫생산력 혁신≫재질서화가 경제의 1 사이클을 이룬다. 여기서 시간의 경주가 벌어진다.


 

생산력 향상이 위험의 증대를 따라잡으면 경제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위험의 증대가 생산력 혁신을 따라잡으면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경제의 본질은 혁신에 있다. 혁신은 결국 과학이다.


 

생산력 혁신은 정복(영토개척, 신대륙 개척), 밀도상승(고층건물, 전화, 인터넷 등에 의한 고밀도 집적), 전쟁(인구감소), 발명과 발견, 공공투자, 교육과 계몽, 신기술에 의해 얻어진다.


 

만약 이것이 없는 상태에서의 기술적인 최적화만을 추구하면 시간차를 소모한 다음 필연적으로 경제는 붕괴한다. 최적화는 위험을 증대시키며 위험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반드시 폭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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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비판한다면서 알고보면 폰지사기에 지나지 않는 경제시스템 그 자체를 부정하면 안 된다. 자본주의를 맹신해도 안 된다. 경제는 시스템이고 시스템은 살아있고, 살아있기 때문에 역동적이다.


 

시스템은 그 역동성을 따라잡지 못하는 그대를 배신한다. 정답은?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전문가 양성 뿐이다. 전문가라도 충분하지 않다. 전문가도 다만 고칠 수 있는 병을 고칠 뿐이다.


 

결국 앓으면서 크는 거다. 그 과정에 공론에 의한 집단지능의 건설이 중요하다. 불경기는 피할 수 없고 불경기라야만 새로운 리더가 떠오르고 새로운 리더 중심으로 질서를 재편하면서 경제는 계속 가는거다.



 

자본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란 한 마디로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이라 하겠다. 인노동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스스로 가치를 창출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일정한 조건에서 실제로 가능하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과 또 ‘돼지가 새끼를 치는 것은 봤어도 돈이 새끼를 치는 것은 못봤다’며 아랍에서 고리대금업을 금지시켜버린 마호멧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마르크스와 마호멧은 틀렸다. 노동이 아니라 돈이 돈을 낳는다. 돈이 새끼를 친다. 그래야만 한다. 만약 그러지 않으면 돈은 죽는다. 새끼를 낳지 못하는 돈은 반드시 죽는다.


 

죽어서 휴지가 된다. 이건 절대적이다. 경제는 시스템이며 엔진과 같다. 엔진은 계속 돌아야 한다. 출력측의 입력전환이 있으므로 출력이 입력보다 커야 한다. 입력과 출력이 같으면 부하가 걸려서 시동 꺼진다.


 

노동하여 돈 버는 시스템은 옛날부터 있었다. 그러나 돈이 돈 버는 시스템은 명백히 근대의 산물이다. 그 역사가 길지 않다. 금융제도, 주식회사 제도, 보험제도는 18세기 이래 불환권의 등장과 함께 생겨났다.


 

그러나 중국의 진상(晉商)은 서구 자본주의 시스템이 도입되기 이전부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여, 주주가 자본을 투자하고 결산기에 이윤을 배당받는 근대적인 경영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송나라 때 이미 자본주의 맹아단계에 도달해 있었다는 설이 있는 것을 보면, 돈이 돈 버는 현상은 18세기 이래 유럽에서 생겨난 근대의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자연법칙이라 하겠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돈을 벌기 때문이다. 사람의 논리가 아니라 돈의 논리를 쫓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돈의 논리가 무엇이냐다. 위험관리다.


 

‘돈이란 무엇인가? 또 자본이란 무엇인가’가 궁극의 문제다. 자본은 인간이 생산해놓은 물화나 혹은 그 물화를 생산하기 위하여 투입한 노동을 숫자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권리’를 숫자로 표시하여 나타낸 것이다.


 

말했듯이 ‘권리’는 저울이다. 저울이 기울어지는대로 결정한다. 저울의 결정이 문제다. 저울이 무엇을 결정하는가? 연동을 결정한다. 연동이 문제다. 연동에 따라 관리되어야 할 위험이 증대하기 때문이다.


 

연동된다는 것은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길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맨 앞에 가는 사람이 비뚤비뚤 가면 길이 비뚤게 나서 무수한 비효율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때문에 권의 법칙이 문제로 된다.


 

수렵과 채집에 의존하던 원사사회에서도 영토가 있다. 영토에 대한 소유권이 있다. 권리가 있다. 그것은 노동의 결과가 아니며, 인간이 생산한 물화가 아니다.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권도 일종의 권리다.


 

이를 숫자로 표기하여 교환가능성을 나타내면 자본이다. 자본은 권리다. 권리는 어떤 대상을 통제하는 원리다. 권리는 일(work)에 의해 탄생하며 일의 연동법칙이 권리를 낳는 근본이다.


 

인간이 일하면 그 일에 연동되어 아직 확정되지 않는 미래의 성과에 대한 권리가 생겨난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 가을에 추수할 이익에 대한 권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봄의 파종이 가을의 추수를 통제함이 권리다.


 

권리란 원인과 결과의 호응 형태로 존재하며 그 사이에 시간차가 있다. 그 시간차에 의해 앞으로 전개될 미지의 다양한 결과적 현상에 대해 원인측이 미리 인과관계를 규정시켜 확인해 둔 것이 권리요 자본이다.


 

구조론이 자본을 설명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물질에 있어서는 1+1의 값이 2가 되지만, 구조는 집적하기에 따라 3이 될 수도 있고 4가 될 수도 있다. 도마에 무를 올려놓고 칼로 썰되 1회 칼질에 1토막을 얻는다.


 

그러나 종이를 반복하여 접은 다음 1회의 칼질로 무수한 카드를 생산할 수 있다. 이때 종이를 몇 번 접었느냐에 따라 칼질 1회로 생산되는 카드의 숫자가 많아지지만 동시에 칼질이 잘못될 경우 자원 전체를 못쓰게 된다.


 

구조론에 따르면 일은 기본적으로 5회 집적된다. 하나의 일은 다섯차례에 걸쳐 종이가 접힌다. 구조는 정확히 다섯이다. 막대는 5, 바퀴는 25, 저울은 125, 엔진은 625, 컴퓨터는 3125회 종이를 접어 집적한다.


 

종이를 접은 횟수와 집적구조의 효율은 비례하며 만일 일에 실패할 경우, 칼을 잘못 휘두를 경우 위험 역시 같은 비례로 증가한다. 이때 성공과 실패가 결과를 통제하는 현상이 권리다.


 

고립된 마을에 백 명이 산다고 치자. 숟가락 한 개를 100명이 공유하면 효율은 백 배로 증가하지만 숟가락이 부러지면 백 명이 밥을 굶어야 하므로 위험 역시 백 배로 증가한다.


 

공유개념의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도 이것이다. 자본주의에도 이와 같은 본질은 명백히 존재한다. MS의 익스프롤러 하나를 네티즌 90프로가 공유한다. 빅브라더가 되었다. 그만큼 한꺼번에 망할 위험이 있다.


 

집적구조에 따른 효율과 함께 가는 위험을 숫자로 표시하여 나타내면 돈이다. 돈이 새끼를 치는 이유는 위험이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실현 결과를 통제하기다. 큰 이윤은 큰 권리다. 큰 권리는 큰 통제다.


 

왜 위험이 따르는가? 구조론의 연동원리에 따라 후자가 전자에 연동되기 때문이다. 질≫입자≫힘≫운동≫양 순서로 연동된다. 전자가 후자를 결정한다. 상위포지션이 하위포지션을 통제한다.


 

사(士) 계급은 원래 문사가 아니라 무사였다. 사(士)가 전쟁하여 지키지 않으면 공(工)이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할 수 없고, 공이 생산하지 않으면 상(商)이 그 소금을 돌아다니며 팔 수 없다.


 

앞의 결정이 뒤의 결정을 지배한다. 이것이 권이다. 이때 연동되는 횟수가 종이를 접은 횟수다. 종이를 5회 접으면 이러한 연동이 5회에 걸쳐 일어난다. 그만큼 위험이 커진다.


 

사(士)가 염전을 뺏기면 공(工)도 상(商)도 일자리를 잃는다. 그만큼 사가 큰 몫을 가져간다. 사(士)를 양성하여 위험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위험이 없는데도 계속 많이 가져가는 수가 있으므로 경제는 사기다.


 

돈은 권리다. 권리는 집적구조의 연동원리에 따른 효율과 위험의 통제권이다. 위험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하므로 권리는 특정한 누군가(개인이나 법인)에 주어져야 한다. 공유는 의사결정을 못하므로 위험의 통제가 아니다.


 

위험과 이익의 통제는 결정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결정은 본래 저울이 내리는 것이며 저울이 권이다. 잠재적인 위험의 증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여력을 사전에 비축해야 하므로 이자가 존재해야 한다.


 

자본주의 발달사는 효율의 증대에 따른 위험관리기술 발달의 역사다. 미국경제가 망가진 것은 위험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위험이 재질서화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이면에 축적되고 있는 긴장이 있다. 신자유주의가 그 긴장을 극대화 시켰다. 효율과 위험은 한 쌍이므로 효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축적되는 위험이 있다. 뭔가 잘 돌아간다면 불안한거다.


 

어딘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면 위험이 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한다는 증거이므로 오히려 안심할 수 있다. 전혀 이상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곳에 위험이 축적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매우 긴장해야 한다.


 

경제는 요소투입에 의한 최적화-구조화≫효율과 위험의 증대≫원인과 결과 사이 시간차 획득≫생산력 혁신≫재질서화(패러다임의 변화)로 1 사이클을 그린다. 위험이 증대되므로 시간차가 소진되면 필연 붕괴한다.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이윤을 모아서 보험으로 대비하는 한편 정해진 시간 안에 생산력을 혁신하여 재질서화에 성공해야 한다. 시장이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여 그쪽으로 패러다임을 옮겨가는 것이다.


 

저울을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권리의 교체다. 돈은 그렇게 돌고 돌아야 한다. 멈추면 죽는다. 돈이 돈을 낳지 못하면 반드시 죽는다. 포드시스템이 레일을 따라 움직이듯 주도권은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만약 한 곳에서 자동차를 계속 조립하면 반드시 비효율이 발생한다. 위험은 시간차에 의해 일어나므로 그 시간이 되기 전에 반드시 옮겨야 한다. 그래서 인류문명은 한 국가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중심지를 바꾼다.


 

문명이 처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일어나더니 이집트≫지중해≫그리스≫이탈리아≫아랍≫스페인≫프랑스≫영국≫미국≫아시아로 계속 거점을 옮겨다니는 데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생산력 혁신이 극도로 향상된 미래사회에는 육체노동의 강도가 축소하는 대신 그 저울의 교체와 사용은 더욱 활발해져서 인간은 짧은 시간에 더 많은 판단과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


 

육체노동은 감소하지만 결정해야 할 일의 절대량은 결코 줄지 않는다. 컴퓨터를 시켜서 대신 결정하게 해도 역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따라 총결정량은 끝없이 증가한다.


 

부자가 돈을 함부로 써버리면 위험관리 포기다. 결국 망한다. 부자가 빈자에게 돈을 나눠줘 버려도 역시 위험관리 포기다. 나눠줄 것은 나눠줘야 하지만 자본 자체는 일정한 규모로 보존되어야 한다.


 

자본의 과도한 집중은 위험의 과도한 집중이다. 산업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위험 역시 규모가 커지므로 자본은 일정한 정도로 집중되어야 하지만 그럴수록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


 

자본의 집중과 분산이 동시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증권제도다. 주가가 오르면 자본이 집중되지만 오너가 멍청이라는 사실이 시장에 공개되면 주가가 폭락해서 자동으로 위험이 헤지된다.


 

주가상승은 오너의 옳은 결정에 힘을 몰아주는 것이며 주가하락은 잘못된 결정에 따른 위험분산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스템이 인류의 집단지능으로 함께 지혜를 모아 만든 것인데 왜 이익을 대자본가가 독식하는가다.


 

이 부분은 정치가 해결할 일이다. 자본의 증식 시스템은 다치지 않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자본이 새끼를 치지 못하면 시스템은 사망하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 외에 다른 구조는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란 인간이 힘과 지혜를 모아 출력측의 입력전환에 의해 저절로 돌아가는 커다란 엔진 - 그러나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고장나게 되어 있는 - 을 하나 만들어놓고 그 엔진의 가동에 따른 잉여를 비축한 것이다.


 

그 고장의 위험에 대비하며 한편으로는 옆구리에 빨대를 꽂아 조금씩 빼먹는 것이다. 빼먹는 이유는 인간도 그 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자본을 비축하여 시스템 붕괴의 위험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비도 재투자의 일종이다. 자본을 소비하여 양질의 교육받은 인간을 양성하여 두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이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집 아이가 더 우수한 인재일 수 있다.



 

 

이명박의 무개념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다. 이것만 알아도 개념있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통제원리를 안다는 것이다. 재투자와 위험관리 그리고 재질서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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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던 강만수도 갔다. 조용해졌다. 진작에 보내버렸으면 진작에 조용해졌을 것을! 강만수는 한 마디로 ‘?일 넘’이지만, 진보-보수진영을 망라하여 강만수 정도 되는 사람도 이 나라에 몇 없다는데 진정한 비극이 있다.


 

다들 강만수를 욕했지만, 단지 욕이나 해댈 뿐 확실한 대안을 가지고 제대로 꺾어주는 인물 하나를 나는 보지 못했다. 진보진영에도 진짜 전문가는 없었다. 그러니 졸지에 미네르바가 뜬 것이다.


 

아마추어 미네르바가 난다긴다 하는 이쪽저쪽의 프로들을 갖고 놀았다. 미네르바가 돌연히 스타로 부상했다는 사실 자체로 이 나라 경제전문가 모두는 확인사살된 셈이다. 그들은 이미 시체다. 좀비다.


 

이제 그 어떤 경제연구소도, 그 어떤 경제전문가도 큰소리칠 자격이 없다. 강만수 뿐 아니라 그들 모두가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그렇다. 네티즌의 집단지능만이 이 나라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제 우리 스스로 머리를 맞대고, 우리 자신을 믿고,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갈 밖에.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공론’이 정답이다. 네티즌의 집단지능 외에 믿을 것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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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이 없다. 무개념의 증거는 선제적 조치, 선제적 대응의 결여다. “외국언론이 한국을 죽이려고 한다.”는 이명박 정권의 호소는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리는 어린아이의 행동과 같다.


 

“바보야! 그럼 죽이려 하지 살리려 하겠나?” 외국언론사가 국제투기자본과 한통속이라는 경고는 오래전부터 나왔다. “당연한 사실 가지고 새삼스럽게 왜 그래?” 이게 개념이라곤 없는 것.


 

알아야 한다. 투기세력은 외환보유고가 적은 나라를 공격하는게 아니라, 가장 약한 나라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한국이 만만해 보이니까 공격하는 것이고, 그렇게 만만이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치명적이다.


 

왜 만만이 보였겠나? 이명박에 강만수니까 만만이 보인 것이다. 뭔가 약점을 보였으니까 공격받은 거. 저쪽에서 이명박, 강만수의 존재를 발견하고 “한국은 저쪽이 구멍이다. 저리로 서브를 날려!” 이렇게 된 거.


 

이명박, 강만수의 “다 세계 경제위기 때문이지. 내가 잘못한게 뭐 있나?” 하는, 미네르바탓이나 하는, 남탓전문의 무개념 때문에 만만히 보인 것이다. 호구로 보이고, 구멍으로 보인 것이다. 잡아먹으려고 덤빈다.


 

비행기가 추락하려 한다. 누군가 한 명이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려서 무게를 줄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때 모진 놈이 옆자리에 가만이 앉아있는 사람을 비행기 밖으로 떠밀어버리는 이유는?


 

지가 살려고 그러는 것이다. 그게 놈들의 선제적 대응. 이에 이명박 어린이 울며 호소한다. “나는 잘못없걸랑요. 그냥 가만있었걸랑요. 근데 외국언론이 나를 비행기 밖으로 떠밀었걸랑요. 저놈이 날 죽이려 했다구요.”


 

이러면 불쌍히 여겨서 낙하산이라도 던져준다던가? 누군가가 죽어야 나머지가 살아난다면 누군가를 고의로 죽이는 거다. 누굴 죽이겠나? 반드시 외환보유고가 적은 나라만을 죽이려 드는 것은 아니다.


 

죽여보아서 죽어지는 자를 죽인다. 죽을 때까지 죽이려고 달려든다. 지가 살려고 남을 죽이는 거다. 이거 알아야 개념있다는 소리 듣는다. 한국경제가 위험하다는 외국언론의 보도는 한국의 외환사정이 좋지 않다는게 아니다.


 

사정이 안좋아질때까지 공격해서 기어이 숨통을 끊어놓겠다는 선언이다. 왜? 만만하니까. 하는 짓이 어리버리하니까. 지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하니까. 그게 냉혹한 국제사회 정글자본주의 법칙이니까.


 

무엇인가? 미네르바가 3월위기설의 한국경제를 살렸다. 그것이 바로 미네르바의 ‘선제적 대응’이었다. 국제투기자본이 한국을 공격하려고 노린다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수출기업들은 달러를 쟁여놔야 한다.


 

그들이 한국을 맹렬하게 공격할 때, 수출기업이 쟁여둔 달러를 일시에 풀어버리면 누가 죽겠는가? 양을 공격하는 늑대는 당연히 발톱을 숨긴다. “나 공격하겠소.” 하고 미리 선포하면 그 공격이 먹히겠는가?


 

외국자본이 한국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느닷없이 뒤통수를 치는 식이어야 한다. 느닷없는 공격을 역시 느닷없는 되치기로 막아야 한다. 국내에 외국자본의 공격을 역이용하여 한몫 잡으려는 세력이 있어야 공격을 못하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사전 경계경보가 외국투기자본의 준비된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경제가 계속 나빠질 때는 비관론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낙관론을 전파하고 있으면 그게 바로 치명적인 급소가 되기 때문이다.


 

정글에서 사자는 다친 사슴을 노린다. 뭔가 약점을 보이면 이심전심으로 전파되어 공동의 표적이 된다. 공격은 느닷없는 집단기습 형태로 전개되며 기습공격은 시장에 거대한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그 공포가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는 거다. 미네르바의 무수한 경고에 의해 충분히 면역이 된 한국시장은 외국자본의 준비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패닉으로 치닺지 않았다. 진짜 무서운건 시장의 패닉이다.


 

패닉은 예상하지 못한 경우에만 일어난다. 당국은 경고하여 시장의 패닉을 막은 미네르바에게 상을 줘야 한다. 이명박 말 듣지않고 원하의 하락을 예상하여 달러를 쟁여둔 수출기업들에게도 상을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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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은 5천만원 출자로 시작해서 10년만에 굴지의 재벌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 5천만원이면 지금 화폐가치로 십억을 넘겠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에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는가다.


 

필자의 산수로는 아무리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단순히 노동자를 착취하는 방법 만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숫자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면 일단 착취당할 노동자가 공장에 모여있어야 한다.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은 노동자를 불러모으기에도 벅찬 시간이다. 시골에 있는 농부들을 버스로 실어나른다고 해도 불능이다. 언제 그들에게 일거리 줄 공장을 짓고 일을 가르치고 하겠는가?


 

김우중의 방법은 다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방법이 아니라 권력의 방법이다. 러시아 피터대제가 서구를 모방하여 급속한 경제개발을 추진하거나, 일본의 덴노가 봉건영주를 시켜 반강제로 재벌을 일으킨 예와 유사하다.


 

김우중은 미국 백화점들을 순회하며 독점납품을 조건으로 구매담당자와 이면계약을 맺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저임금이라는 기초 외에 밀어내기식 물량공세라는 카드가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원가 얼마에 이윤 얼마를 붙여 얼마에 팔겠다가 아니라 ‘가격은 원하는대로 쳐드릴테니 물량만 넉넉히 받아주시오. 얼마로 해드리면 될까요?’였다. 국내 하청기업에도 같은 방법을 쓴다.


 

단가는 사정없이 후려치고 대신 물량을 두배도 아니고 열배, 백배로 받아주는 식. 이 수법이 먹혀서 한국의 하청기업과 미국 백화점 양쪽을 동시에 갖고 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가격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이런 재주로도 엄청난 돈을 벌기는 불가능. 김우중이 돈을 번 비결은 다른데 있다. 본질은 달러권력이다. 당시는 양담배만 피워도 경찰이 잡아가던 시절. 그 시대에 달러는 권력이었다.


 

김우중이 달러를 쟁여놓고 풀지 않으면 당국이 경제계획을 꾸리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김우중은 달러로 권력을 쌌다. 기업사냥에 나선 것. 처음은 무역이나 하는 종합상사였을 뿐인데 졸지에 무수한 기업을 거느린 재벌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돈을 벌 수는 없다. 결국 돈은 부동산에서 나왔다. 기업을 하려면 땅이 필요하다. 문어발 확장은 문어발 부동산 사재기의 구실에 불과하다. 김우중이 거느린 그 많은 계열사는 대개 적자였다.


 

그룹이 해체되고 김우중이 손떼자 대부분 흑자로 돌아섰다. 그렇다면 본질은? 부동산이다. 종합상사와 재벌계열사는 부동산으로 가는 정거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부동산 가격은 왜 올랐나?


 

한국이라는 국가의 가치가 상승했기 때문. 무엇인가? 기업이 주식을 상장하면 주가가 오른다. 요즘 기업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주가상승으로 돈을 벌었다. 빌게이츠도 그렇고 스티브잡스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주식회사가 경제성장을 하면 땅값이 오른다. 기업의 주가상승과 국가의 지가상승은 본질에서 같다. 특히 한국과 일본처럼 국토가 좁은 나라는. 김우중이 돈벌던 70년대는 주식으로 벌던 시대가 아니었다.


 

거의 지가상승으로 번 것이다. 대한민국의 총체적 가치상승을 김우중이 자기 명의로 명의이전하여 돌려놓은 것. 그 본질은 달러권력. 그때 그시절 달러와 원화의 가치는 비교될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이러한 집금메커니즘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역시 개념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버는 것이 개념. 요즘 기업들은 주가상승으로 돈을 벌지만 주식도 역시 권리들의 집합이다.


 

핵심은 시장에서의 주도권. 일정한 영역을 얼마나 통제할 수 있는가가 문제다. 조금씩 잉여를 남겨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여 돈을 버는 것이며, 그 무에서 창조된 유는 권력이다.


 

이윤은 현물에서 나오는 것이다. 유에서 유를 남기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결코 천문학적 거액의 돈을 벌 수 없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돈을 번다. 무에서 만들 수 있는 유는 권력밖에 없다.


 

아무 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사람이 모이면 권력이 생겨나고, 권력이 작동하면 신용이 발생한다. 권력이 위태로울수록 신용은 1인에게 집중된다. 권력은 집중될수록 의사결정은 신속, 명확해진다.


 

그러한 신속성, 명확성이 신용의 창출이며 그것을 종이에 숫자로 나타낸 것이 화폐다. 시장에서의 신용 그 자체가 돈이다. 그러므로 돈은 물질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근본 무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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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뉴스에서 본 내용이 참고할 만. 독일의 어느 동물원에서 대장 침팬지가 아침 일찍 마당으로 나와서 관광객이 오기 전에 미리 돌을 모아두었다가 관광객 중에 야유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을 던진다고 한다.


 

침팬지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이다. 그 침팬지는 같은 동료 침팬지에게는 던지지 않고 오직 침팬지를 놀리거나 보고 웃는 인간에게만 던진다고 한다. 관객의 웃음을 모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왜 두목 침팬지는 돌을 던졌을까? 전문가의 견해에 의하면 그들은 자기 영역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 그게 권력이다. 권력은 인간의 영역통제본능이다. 인간의 모든 추구는 이 부분에 닿아있다.


 

자유란? 사랑이란? 행복이란? 자유란 자기만의 독립적인 영역을 가지려는 본능적 몸짓이며, 사랑이란 상대방과의 공유를 통하여 영역을 확대하려는 본능이며, 행복이란 그 영역을 통제하는데서의 안정감이다.


 

경제도 마찬가지. 경쟁자를 눌러서 비교우위가 되면 통제가능하게 된다. 개념있는 기업가는 몇 푼의 이윤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장악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김우중의 방법도 그런 것이었다.


 

김우중은 수직계열화를 통한 대규모 물량소화의 방법으로 영역을 통제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곧 성공적인 집금으로 연결되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돈은 주식의 가치, 부동산의 가치에서 얻어진다.


 

이 가치는 결국 영역을 통제하려는 의도의 가치다. 그러므로 영역을 통제할 수 있느냐가 성공의 관건이 된다. 지금 경제가 위기다. 위기 때는 재질서화를 추구하게 된다. 새로운 통제방식과 리더의 출현이다.


 

시장이 스스로 움직여서 새로운 리더를 선출하고 방향성을 얻어 교착을 타개하고 돌파하려고 한다. 이때는 몸집을 줄이고 속도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앞길이 막혀 있는데 한곳이라도 뚫리면 모든 힘이 그쪽으로 집중된다.


 

강둑에 구멍이 나면 그 강물 전체의 수압이 그 작은 구멍으로 쏠려서 구멍은 더욱 커지게 된다. 큰 둑이 터져서 일제히 범람한다. 경제란 강물과 같아서 방향성만 결정되면 신속하게 진도나간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그 전체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센터가 될 수 있느냐다. 위기에 시장은 그 센터 하나에 전체의 힘을 몰아준다. 그러므로 위기가 기회다. 시장은 위기에 몸집을 줄인다. 일


 

본의 거품경제가 망하자 지방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테마파크가 두바이 망하듯 망했다고 한다. 두바이는 인류의 테마파크다. 한류우드처럼 망하고 한강섬 오페라극장 계획처럼 망한다.


 

이런 것들은 센터가 되지 못하므로 망한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큰 파도를 만나 위기를 당하면 첫째 화물을 바다로 던져 몸집을 줄이고 흘수선을 높인다. 둘째 전속력을 내어 파도를 직각으로 타고 넘는다.


 

시장이 몸집을 줄일때는 전 분야에 걸쳐 조금씩 줄이는게 아니라 사치영역을 먼저 줄인다. 테마파크부터, 한류우드부터, 두바이부터 작살내는 것이다. 속도를 내서 파도를 넘을 때는 평소보다 두배로 가속한다.


 

그 가속의 시점에 한국경제가 엔진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국경제의 엄청난 기회다. 그러한 판단은 한국이 잘하는가 못하는가가 아니라 경쟁국보다 앞서있는가에 달려있다.


 

비행기가 추락하려 할 때 살아남는 방법은 옆사람을 비행기 밖으로 떠밀어버리는 것이다. 자기가 타켓만 되지 않으면 된다. 잘할 필요는 없다. 이명박 강만수가 국제 투기자본에 찍혀 망했듯이, 그렇게 찍히지만 않으면 된다.


 

찍히면 죽는다. 찍히지 않으면 산다. 경쟁국인 대만, 일본보다 경쟁력이 있기만 하면 된다. 일본은 망해가고 있다. 80년대 오일쇼크 때에 일본이 미국을 꺾은 상황과 판박이로 가고 있다. 엔고현상은 일본이 죽어가는 방증이다.


 

왜 엔이 오르는가? 진실로 말하면 엔이 오르는게 아니라 일본에 갑자기 달러가 넘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러를 팔아 엔을 사들이는 것이다. 왜 달러가 넘칠까? 해외에 투자처를 잃었기 때문이다.


 

외국에 투자되어 있던 자본이 투자처를 잃고 일본으로 회귀해버린 것이다. 무엇인가? 엔고는 조선시대의 전황과 같다. 경제가 망하면 금값이 오른다. 금값이 오르면 모두 금을 금고에 쟁여놓는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악화인 달러와 더 악화인 한국원화를 팔아치우고 양화인 엔을 사들여서 금고에 잔뜩 쟁여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화증발이 일어나서 더욱 엔고가 가속화 된다.


 

시중에 통화가 부족해지면 금값은 더욱 오르고 그럴수록 통화는 더욱 부족해진다. 금을 사재기하기 때문이다. 악화는 다르다. 한국 원화와 같은 악화는 언제 휴지가 될 지도 모르므로 재빨리 남에게 줘버린다.


 

화폐의 유통속도가 두배로 빨라져 경제가 살아난다. 지금 엔은 과거 금본위제 하의 금화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시장에서의 화폐기능을 상실하고 금고속으로 급속히 퇴장하고 있다.


 

돈이 갑자기 금으로 변해버렸으니 모두가 돈을 금고에 감추고 시장에 내놓지 않아 돈가뭄이 일어난다. 이러한 본질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자본주의는 금과 같은 양화가 아니라 지폐와 같은 악화에 의해 굴러간다는 본질을.


 

개념이 있어야 한다. 경제의 본질은 몇 푼의 이윤이 아니라 세력화를 통한 시장통제가능성이다. 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주도적 위치에 오르면 모든 권한이 주어진다. 시장을 자기 입맛대로 판을 바꿔짤 수 있다.


 

구글과 NHN의 방식이 그렇다. 그들은 광고를 팔아 집금하고 있는게 아니라 사실상 세금을 받는다. NHN에 광고를 안할 수 없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다. 이건 합법적인 사설세금이나 마찬가지다.


 

물건을 판매하고 제품을 홍보하기 위한 광고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광고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이다. 그들은 사설권력을 만들어낸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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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은 부자들에게 감세해 준다고 하지만 그 감세의 혜택은 외국으로 유출될 뿐이다. 부자들은 언제나 외국에서 돈을 쓰기 때문이다. 반면 근로자의 소득 증가는 직접 소비로 연결된다.


 

경제가 망하는 이유는 하나다. 근로자가 계획을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유는, 계획을 세울 만큼의 자본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집을 사기도 어중간, 차를 사기도 어중간.


 

그렇다고 저축을 하기에는 내일 당장 일거리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불안해서 오랜 기간에 꾸준히 해야하는 저축이 성에 차지 않는다. 결국 술을 먹거나 도박을 할 뿐이다.


 

연변 근로자가 한국에서 번 돈으로 연변에 돌아가서 술집이나 노래방 혹은 식당 외에 마땅히 할 것이 없는 것과 같다. 한국연예인들도 보통 돈 벌어서 식당을 하는데 실패가 다반사다.


 

경제의 본질이 권력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번 돈을 재투자 할 곳이 없다. 중간에서 잘라진 고리를 이어서 순환구조를 완성시켜 주어야 돈이 벌어진다. 중국의 산서상인은 수백년 전에 이미 주식회사를 만들었다.


 

4년마다 결산하여 주주들에게 배당을 나누어 주었다. 번 돈이 재투자되어 계속 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김우중은 달러권력에다 부동산을 연결하여 그러한 순환구조를 만들어 집금에 성공한 것.


 

핵심적인 고리는 역시 권력. 그 권력은 시골 농부나 노동자의 적은 액수 돈을 모아서 어느 한 방향으로 집결함으로써 원양항해를 막아서는 거대한 파도를 타고넘을 수 있는 전속항진의 힘을 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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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상황을 통제하려고 한다. 상황을 통제한다는 것은 일정한 영역 내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의 센터에 집중시켜서 외부로부터의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권력이다.


 

하나의 결정에 모두 연동되어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어 상황을 통제하고 외부 위험에 대응하기.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군대든 사회든 무엇이든 이 원리에 지배된다. 이것만 잘 알아도 개념있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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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비관할 것인가?

‘용기있게 과학의 길로 나서라’


좌파의 도박은 실패다. 경제성장과 침체 중에서 예견해 보라고 하면 좌파는 본능적으로 후자를 선택한다. 이유가 있다. 전자는 경제를 알아야 할 수 있는 말이고, 후자는 경제를 몰라도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장과 거리가 먼 강단에 둥지를 틀고 있으므로, 어차피 경제를 모르므로, 비판만 하는 것이 자기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역할을 좁은 범위로 한정시켜 놓고 있는 거다.


운신의 폭을 좁혀놓고 지는 게임을 벌이려 한다. 예견은 빗나가고, 주도권은 놓치고, 카리스마는 잃고, 세력은 위축되고, 선거에는 참패해도, 강고한 노선을 걷기만 하면 개인의 명성은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인의 명성을 위해 동지를 죽인다. 비겁하다. 지적 용기가 필요하다. 불편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 욕먹을 각오하고 과학에 입각하여 말해야 한다. 과학은 진보나 보수의 편이 아니다.


과학은 때로 불리한 진실을 보고한다. 다 감수하고 진도나가야 한다. 도박하지 말자는 거다. 문제는 이게 50대 50의 확률이 아니라는 데 있다. 경제성장의 확률이 높고 침체의 확률은 낮다.


더구나 한국처럼 좋은 인적자원을 가진 나라는. 비판도 중요하지만 ‘악역’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영리한 여우가 굴을 파더라도 여러 곳에 출구를 두듯이 한쪽에 올인하지 말고 이쪽 저쪽에 전단을 열어야 한다.


미국경제가 엎어지자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며 환호하는 꼴을 보라! “거 봐! 내 말이 맞았지. 내가 뭐랬어? 나는 무려 30년 전부터 신자유주의를 비판해 왔다구!” 이런 주장은 허무할 뿐이다.


30년 동안 계속 틀리다가 30년 만에 한 번 맞혔다는 거 아닌가. 좌파들은 레이건 시절부터 신자유주의를 비판해 왔지만 그들의 예견이 30년간 계속 빗나가니 아무도 그들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왜 재앙이 닥쳤을까? 시장이 그들의 경고를 묵살했기 때문이다. 왜 시장은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했을까? 그들이 30년 동안 틀리는 예측을 계속 내놓았기 때문이다. 냉전이후 제대로 된 예측은 하나도 없었다.


구소련의 몰락과 동유럽의 민주화를 예측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후로도 들어맞은 예측이 없었다. 틀린 예측을 계속 내놓아서 시장이 오류를 범하도록 방조한 그들에게도 경제위기의 책임이 있다.


무릇 지식인 집단은 사회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 눈과 귀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두뇌가 분별하지 못하니 몸이 두뇌를 믿지 않고, 눈과 귀의 경고를 믿지 않고 제멋대로 폭주한 결과 재앙에 직면하게 된 거다.


이명박경제가 추락하면서 아고라를 중심으로 개혁세력이 비관론을 펼쳐 재미를 봤지만, 한번 성공한 건수에 집착한다면 위험하다. 우연히 당첨된 로또에 대한 미련은 버려야 한다. 두 번 당첨의 기적은 없다.


반전은 반드시 일어난다. 경제는 생물이니까. 역사는 기본적으로 진보하도록 세팅되어 있다. 진보와 보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진보편에 서는 것이 맞다. 마찬가지로 경제는 기본적으로 성장하게 세팅되어 있다.


성장쪽에 서는 것이 맞다. 경제가 성장궤도에 오르면 앞에 그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을 때, 오히려 더 크게 성장하는 패턴이 있다. 장애물이 위험한 폭주를 막아주는 숨고르기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IMF가 한국경제의 체질을 강화시켰듯이, 경제위기가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경제는 일정부분 정치와 상관없이 가는 경향이 있으며, 이명박이 경제를 망치면 오히려 경제가 더 잘될 수 있다는 역설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경제는 생물이고 시장은 역설적으로 작동한다. 정치측의 의도와는 항상 반대로 되는 경향이 있다. 경제를 살리려 하면 죽고, 죽이려 하면 오히려 살아나는 경향이 있다.


이명박을 궁지로 몰려고 하다가, 오히려 이명박을 도와주는 결과로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한다. 이명박 때문에 한국경제가 망한다는 비관론에 올인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경제분석은 단편적인 사실을 근거로 해서 안 되고, 긴 호흡의 패턴을 분석해야 한다. 길게보면 조중동이 싫어하는 반시장적(?) 정책이 오히려 경제를 살린다. 국가도 경제의 한 주체라는 사실을 조중동은 모른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만 시장 참여자고 국가는 시장의 주체가 아니라는 발상은 어린아이의 순진한 생각이다. 분명히 말하면 국가도 시장참여자이며 그 역할은 막중하다. 시장에서 깽판치는 자는 국가가 제지해야 한다.


진보는 항상 국가의 역할을 강조해왔다. 작은 정부가 아닌 큰 정부를 주장해왔다. 강만수의 잘못된 개입이 잘못된 거지 국가의 개입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적절히 개입해야 한다.


박정희는 20년간 계속 경제를 망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성장으로 나타났다. 박정희가 경제망치는 것이 뻔히 눈에 보인다고 해서 한국경제가 반드시 망한다고 예견하면 안 된다.


70년대에 김대중이 집권했다면 지금 두 배로 성장했을 것이다. 박정희임에도 불구하고 성장한 것이다. 이 경우 바른 판단은 ‘성장했는가 침체했는가’로 기준해서 안 된다. 원래 성장하도록 세팅되어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시대 성장을 남미나 필리핀과 비교해서 안 되고, 북한과 비교해서 안 되듯이 박정희경제를 논하려면 일본, 대만, 홍콩과 비교해야 한다. 박정희때 한국은 대만보다 못했고 노무현때 한국은 대만을 앞질렀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잘못했고 노무현은 잘했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하면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단위로 판단하지만 실제로 시장은 동아시아 혹은 글로벌경제라는 큰 틀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잘못해도 대한민국은 잘되도록 세팅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이 삽질해도 경제는 언젠가 살아나게 되어 있다. 세팅된 구조로 보아야 한다. 지정학적 구조가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유럽 한 귀퉁이에 붙어있다면 지금 국민소득이 6만불을 넘었을 것이다. 남미에 붙어있다면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비슷하게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에 있다면 볼것도 없다.


경제는 주변환경과 같이 가도록 세팅되어 있었으므로 70년대 한국경제는 무조건 성장하게 되어 있었다. 경제라는 생물이 미국, 일본을 거쳐 한국에 상륙해서 그 영역을 슬금슬금 확장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일본경제는 멈추게 되어 있다. 엔고는 금본위제로 되돌아간 효과를 낸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원리에 따라 양화가 된 엔화는 시장에서 퇴장하는 효과가 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다.


모두들 좋은 엔을 금고에 감추고 나쁜 원을 타인에게 주려고 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이유가 있다. 도시의 성장공식에 비유할 수 있다. 성장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대도시에 자본이 집중된다.


박정희가 그린벨트를 두어 위성도시를 키운 것은 인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고 가만 두면 서울만 계속 성장한다. 인재도 서울로 몰리고 돈도 서울로 몰린다.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고 지방은 피폐해진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서울은 슬럼화되고 지방에 부도심이 성장한다. 지구 전체로 봤을 때, 혹은 동아시아 전체를 하나의 경제단위로 봤을때 일본은 동아시아의 서울 역할을 한 것이다.


아시아의 서울이라할 일본에 돈과 인재가 몰렸다가 어떤 한계를 넘어서 이제는 슬럼화 되는 단계에 진입했다. 이때 도시의 주변부가 서서히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 부도심이 팽창한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서서히 커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교통이 좋고 멀리 떨어진 외곽지역에 새로운 여러 개의 도심이 생겨난다. 이는 하나를 바꾸면 전부 바꾸어야 하는 구조의 양식화 원리에 따른 필연법칙이다.


동아시아는 이 단계에 도달했다. 일본경제는 필연적으로 정체된다. 미국경제도 마찬가지다. 세계경제가 낮은 레벨에 머물러 있는데 미국 혼자 독주하려고 하니 무리를 저지르게 되고 결국 거품이 터지는 것이다.


경제는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리듬이 있다. 함께 간다고 해서 모두가 균일하게 함께 가지는 않는다. 거점식으로 가는 것이다. 생물이기 때문이다. 큰 나무가 씨앗을 퍼뜨릴 때 그러하다.


큰 나무가 무제한으로 자라나지 않는다. 고목이 되면 썩는다. 이때 나무는 주변으로 점점 세력을 키우는게 아니라 먼거리에 씨앗을 날려보내 자라게 한다. 큰 나무 그늘에서는 어린 나무가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원리의 이런 측면을 잘 살펴보면 좌파의 이념과 합치하는 점이 크다. 물론 배치되는 점도 있다. 세계경제는 궁극적으로 함게 가야 한다. 유럽이 대략 함께 가듯이. 일방의 독주는 한계에 부닥친다.


이웃이 가난한데 혼자 잘살기는 잠시 가능할 뿐이다. 물론 잠시는 가능하다. 잠시는 경제원리가 좌파의 기대를 배반한다. 경제는 거점성장을 하므로 특정한 거점만 부유해지고 주변은 피폐해진다.


그러나 계속 거점만 잘살려고 하면 총체적으로 붕괴한다. 강남만 잘살겠다고 하면 대한민국은 질식한다. 어느 단계를 지나면 주변부로 확산되어 외곽에 새로운 거점이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전체적으로 상승한다.


그러다가 다시 거점에 집중되는 순환패턴을 가진다. 60년대에 서울만 성장했다가 70년대에 지방으로 확산되었다가, 2000년대에 IT경제가 대두되면서 다시 서울에 집중되는 현상이 생겼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지방으로 확산되는 순환패턴을 가진다. 이런 순환구조는 국가간에도 나타난다. 일본, 미국이 잘 나가다가 멈추는 이유도 같다. 게가 허물을 벗듯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멈추어야 한다.


인터넷기업이 처음에는 인재가 많은 서울에서 창업하지만 어느 정도 성장하면 환경이 좋은 외곽으로 빠져나간다. 이 단계에는 이미 성장해 있으므로 본사가 외곽에 있어도 인재가 그쪽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노조가 파업하면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향상된다. 환경을 강조하고 규제와 감시를 까다롭게 하면 오히려 기업체질이 강화된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이 아니다. 경제원리에 그런 측면도 있다는 거다.


무조건 파업하고 감시할 것이 아니라, 맹아기에는 씨앗이 뿌리를 잘 내리도록 지원하는게 맞고, 어느 정도 자라면 솎아주기와 가치치기를 하듯이 규제와 감시를 하는 것이 맞다. 여기에도 규칙이 있다.


무조건 비료만 팍팍 주면 웃자라게 되고, 작은 바람에도 대가 부러져 죽는다. 조중동의 '재벌에게 비료주기'가 경제를 죽인다. 이런 점을 종합해보면 경제원리가 좌파의 주장에 합치되는 측면이 상당하다.


그러므로 경제성장은 우파, 비판과 감시는 좌파 식으로 도식화 되면 좌파에 불리하다. 지혜있는 여우가 두 개의 출입구를 만들듯이 성장측면과 감시측면에 동시에 대응하는 것이 맞다.  


진리 앞에서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으로 보면 좌파에 불리한 측면과 유리한 측면이 공존한다. 자기편에 유리한 쪽만 보고 그쪽에 올인하며 진실을 왜곡하려 들다가는 낭패를 본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경제는 생물이므로 움츠리면 더 멀리 뛴다. 장애물을 만나면 움츠렸다가 높게 도약한다. 경제위기는 한국경제를 움츠리게 했다. 그러므로 얼마 후에 더 높이 도약하게 된다.


좌파의 묻지마 비판은 재도약의 공을 이명박에게 몰아주는 결과로 된다. 이명박의 정책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온통 경제죽이기 일색인데도 글로벌 경제가 살아나는 바람에 이명박이 경제 살린 것처럼 보여진다면?


경제는 적절히 쉬어가야 하고 호흡조절을 해야 한다. 과속해도 되는 것은 시장화가 되어있지 않은 중국 뿐이다. 경제가 시장화 단계를 지나면 조중동이 반대하는 반시장적 정책이 오히려 거시경제를 살린다.


실정이 이러하니 경제죽인 박정희와, 죽이고 있는 이명박은 칭찬을 듣고 경제 살린 김대중과 노무현은 욕먹는 잘못된 평가가 나온다. 문제는 그 잘못된 평가에 좌파의 기여도 크다는 점이다.


경제가 망하는 이유는 더 큰 원인이 있다. 정치불안, 교육실패, 인프라 부재, 외교고립 등이다. 외교가 가장 중요하다. 동유럽, 러시아, 중국과 수교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겠는가?


마찬가지로 북한과 잘 되면 훨씬 나아진다. 그 외에는 한번 성장궤도에 올랐을 경우 경제정책을 잘못하면 잘못해서 오히려 더 잘되고, 잘하면 잘해서 더 경제를 망치는 역설이 일어난다.


예컨대 경제가 잘 되어 그 잘 되는 쪽에서 인재를 싹쓸이 하면? 재앙이다. 빌 게이츠가 싹쓸이한 세계의 천재들이 MS에서 지금 뭐하고 있을까? 공기업이 싹쓸이한 한국의 인재들 지금 거기서 뭣하고 있을까?


경제는 좋은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은 것이며 좋지 않은 것이 오히려 좋은 것일 때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위정자가 경제 잘못해서 나라가 결딴난다는 식의 비판은 매우 위험하다. 새옹지마와 같다.


잘못했는데도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는 일은 흔하다. 종합적 안목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긴호흡으로 패턴분석을 하면 올바른 예측을 할 수 있다. 올바른 예측을 해서 우리가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지금처럼 도박을 계속하면 결국 잃는다. 우파가 무조건 성장에 건다고 해서 좌파는 보지도 않고 무조건 침체에 걸면 낭패다. 구조적 접근을 해야 한다. 예컨대 노조가 성장에 도움을 준다고 말했지만 항상은 아니다.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은 조중동이 필요이상으로 노조를 공격하는 배경이 무엇인가이다. ‘노조를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원인이 있다. 바로 그것을 지적하자는 거다. 왜 그들은 좌절감에 빠졌을까?


왜 그들은 자기네의 능력으로는 노조를 설득하지 못한다고 생각할까? 왜 그들은 자신을 노조도 설득하지 못하는 바보멍청이로 여길까? 이유가 있다. 하나는 노조와 적대관계를 맺는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둘은 자신이 부도덕한 집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부도덕한 집단은 원래 약점이 많다. 약점이 많으므로 대화하면 약점을 찔린다. 회사가 노조와 대화하면 노조가 회사측의 비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러므로 대화가 아니라 물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현대자동차노조만 해도 그렇다. 몽구는 뭔가 약점잡힌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러니 약점이 많은 조중동은 노조와 적대관계를 맺는 것이 편하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을 때는 덩치를 키워서 세력을 동원해야 한다. 세력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를 타겟으로 찍어서 괴롭히는 이지메술책을 써야 한다. 비열한 마녀사냥을 벌이는 것이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기만 하면 ‘좌빨이네’ 하는 수법을 쓴다. 이지메 전술을 계속 써먹기 위해서는 적대관계를 유지하며 ‘적이 나타났다’고 소리를 질러 공포를 조장하고 그 빌미로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구조는 좌파진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좌파들은 원래 지식인집단으로서 사회의 눈과 귀가 되고 두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계속 틀린 예측을 내놓아서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신뢰를 잃었으니 대화로 이기지 못한다. 대화에 밀릴 때는 세력을 동원해야 한다. 세력화를 위해 반대편과 적대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수구떼가 노조를 적대하듯이 경제 그 자체를 적대하는 술책을 쓴다.



‘경제는 나쁜 것이여. 돈은 더러운 것이여. 전원생활은 좋은 것이여.’


무엇인가? 좌파들도 좌절감에 빠져 있다. 말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돈을 딸 자신감을 잃은 도박꾼처럼 운에 맡기고 아무데나 올인한다. ‘경제망한다’에 올인한 결과 성장의 과실을 이명박이 독식할 판이다.


과학은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그러나 진보가 먼저다. 과학은 새로운 지식을 내놓는다. 새로운 지식은 신대륙과 같다. 누가 신대륙에 먼저 가는가? 과학자가 먼저가고, 탐험가가 먼저 가고, 자유주의자가 먼저 간다.


먼저 간 진보가 신대륙을 개척하여 사람이 살 수 있을만큼 기초를 닦아놓으면 뒤늦게 무법자가 오고, 조중동이 오고 수구꼴통이 와서 인디언을 학살하고 깽판을 친다. 항상 그런 식이다.


과학은 중립이지만 역사는 진보의 편이다. 왜? 역사는 먼저 가서 터를 닦은 사람의 업적을 기록할 뿐 뒤에 와서 깽판을 친 무법자의 행동은 기록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감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과학은 우리편에 불리한 진실도 보고하지만 결국 우리편이다. 조중동의 발호는 잠시다. 미국과 일본의 독주도 잠시다. 시장이 통합된 EU가 균등해졌듯이 글로벌경제는 거점성장을 거쳐 균등해지는 방향으로 간다.


백년 후를 생각해보라. 지금 EU에 적용되고 있는 모델이 세계 전체에 적용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낙후한 중국 때문에 미국, 일본이 앞에서 끄는 기관차 노릇을 했지만 백년 후에는 전차처럼 기관차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세팅되어 있다. 최후의 승리자는 우리가 된다. 왜? 우리가 저들보다 더 머리가 좋으니까. 저들보다 더 눈과 귀가 밝고 두뇌의 분별이 명석하니까. 최후의 승리는 돈이 아닌 문화에 돌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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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 오후에 업데이트될 아카데미 강의 해설입니다. -


왜 자본은 나쁜가?


‘경제는 사기다.’ ‘돈은 마술을 부린다.’ ‘돈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 ‘자본주의는 원래 사기꾼이 발명했고 위조지폐의 발행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자본주의는 거대한 폰지사기다.’ ‘돈의 가치가 하락해야 경제가 번영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할 뿐 아니라 당연히 악화를 공급하여 양화를 구축시켜야 한다.’


혼란을 느낄 법 하다. 당연하다. 필자도 혼란스러우니까. 문제가 있다. 요점을 콕 찍어서 알게 하는, 똑부러지는 개념이나 단어는 국어사전에 없더라. 필자가 임의로 단어를 만들어내려고 해도 쉽지 않다. 사실이지 용이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된다.


지구상에 경제, 자본, 돈, 시장메커니즘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약 제대로 아는 전문가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작금의 경제위기는 오지도 않을 것이다. 원래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한대서 낙담할 이유는 없다.


만약 이 글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당신이 지구상에서 자본의 비밀을 제대로 이해한 첫번째, 혹은 두번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 깨달음과 같다. 돈의 이치를 안다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아는 거다. 곧 그만두긴 했지만 필자가 경제학을 선택한 이유도 ‘경제는 생명이다’, ‘경제를 꿰면 모두 통한다’는 본질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중요하다.


필자는 머리 속에 하나의 그림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머리 속의 그림을 풀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텍스트를 받아들일 뿐이다.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밭에 경제라는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습이 여러분의 머리 속에 그려졌느냐는 거다. 그림이 그려져야 한다.


돈(미래를 통제하는 신뢰의 체계≪ 이익(현물 or 노동)=≫경제활황


이렇게 정리해놓고 암기하고자 한다면 당황스럽다.(아카데미의 리플에서) 나는 이런 공식을 암기한 적이 없다. 내게는 텍스트가 없다. 그림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머리를 맞대고 함께 풀어가기로 하는 거다.


돈이라는 것이 꼭 반드시 한국은행에서만 발행하느냐다. 개인도 알게 모르게 화폐를 발행하고 있다. 비록 위조지폐이기는 하지만. 서울대 입시제도 역시 일종의 화폐발행과 같다. 돈이 ‘미래를 통제하는 신뢰의 체계’라면 그렇다. 서울대 합격증, 변호사 자격증, 학벌, 인맥, 연고, 빽, 계급, 강남기득권, 신분, 결혼여부, 직업 따위, 라이선스들은 알고보면 전부 돈이다.


변호사 자격증이라면 그 자체로 신부의 열쇠 다섯개를 끌어오는 대단한 돈이다. 현찰은 믿기 어렵지만 귀족증명서는 더 믿을 수 있다. 왜 이 점이 중요한가? 앞에서 누차에 걸쳐 말했지만 단지 화폐를, 그것도 악화를, 단지 위조지폐를 발행하는 것만으로 일정한 범위 안에서 경제를 번영시킬 수 있다.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역사는 위조지폐와 함께 사기꾼의 술책에서 시작된 거다. 그러므로 좌파들이 힘주어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폰지사기와 같다.’ 자본주의 본질은 첫째가 미래세대의 착취이고 둘째가 발행된 기존의 화폐가치를 착취하는 것이다.‘는 폭로는 싱거운 소리가 된다. 당연한 사실을 가지고 호들갑이라니. 그렇다. 자본주의는 원래 기득권 가치의 착취에 기반한다.


생각하라. 봉건의 본질은 무엇인가? 왜 왕은 ‘귀족’이라는 위조지폐를 발행하고 히틀러는 철십자 훈장 200만개라는 위조화폐를 발행하였는가? 중국의 왕망은 작(爵)이라는 그릇(술잔)을 무제한 발행하여 평민에게 나눠주고 상속을 허용했는데 그게 시장에서 거래되었다고 한다.(경은 엄청, 대부는 상당히, 사는 몇개, 평민은 한개 따위로 위계서열을 정하여) 그게 이른바 공작, 백작, 남작 하는 그 작위다. 모든 기득권, 신분, 인맥, 파벌, 학벌, 연고, 라이선스가 본질에서 ‘미래를 통제하는 신뢰의 체계’ 곧 돈이며 위조지폐인 것이다.


왕이 귀족작위라는 위조지폐를 발행했다. 그러자 국가가 번영했다. 민중이 들고 일어나 모든 평민을 귀족으로 만들어버렸다. 대량의 위조지폐가 무제한으로 발행된 것이다. 그러자 경제가 더욱 번영했다. 자 이제 이해가 되었는가?


왜 조선왕조가 훈구공신에게 내리는 공신첩을 남발했겠는가? 중종반정 때는 무려 200여명이 아무런 공훈도 없으면서 공신이 되어 조광조들의 탄핵을 받을 지경이 되었던 거다. 위조지폐를 발행하면 일시적으로 경제가 번영하기 때문이다.


악화를 발행하여 양화를 구축시켜야 한다. 이것이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그 악화는 반드시 현찰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현찰은 너무 쉽게 인플레를 유발한다. 인플레를 유발하지 않게 교묘한 방법을 써야 한다.) 일체의 기득권 진입장벽이 미래를 통제하는 신뢰의 체계라는 점에서 악화다. 민주주의란 악화의 대량발행과 같다. 전 국민을 귀족으로 혹은 왕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생각하라. 왜 왕이라는 것이 처음 생겨났는가? 왕의 존재 역시 위조지폐 발행과 같다.(수구꼴통들이 왕정을 좋아하는 것은 그것을 사회가 공유하는 돈-미래를 통제하는 신뢰의 체계라는 점에서-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왕은 기본적으로 악화지만 더 악화인 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양화다. 귀족도 악화지만 더 악화인 평민보다는 상대적인 양화다. 봉건제도란 이런 식으로 다단계의 악화를 계속 발행하여 사회에 신뢰의 체계를 형성함으로써 미래를 통제하는 제도이다. 이 방법이 일시적이나마 경제를 번영시켰다는 점에 착안하여, 더욱 많은 악화를 무제한 공급하여 전 국민이 귀족이 되어버린 것이 민주주의다.


악화의 발행, 곧 위조지폐의 발행으로 돈의 가치가 하락한다는 것은 서울대가 문호를 개방하여 너무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조중동이 비명을 지른다. 일체의 기득권 진입장벽이 알고보면 다 돈이다.


계급이 돈, 강남이 돈, 부동산도 때로 돈이다. 현물도 돈일 때가 많다. 돈의 가치, 신용의 가치, 기득권의 가치, 봉건군주의 가치, 귀족-승려-기사-농노로 짜맞춘 시스템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해야 한다.


조중동이야말로 그 이미 발행된 구권화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 않은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많은 입시생들이 한의대로 몰렸는데 요즘은 한의도 한물간 모양이더라. 그렇게 한물가지 않고 잘되는건 계속 잘되어야 하고, 귀족은 계속 귀족이어야 하고, 강남은 계속 철옹성이어야 한다는 것이 조중동의 사상이다.


자본의 본질은 바로 그것에 대한 반역이다. 경제는 반역이다. 돈은 반역한다. 돈이 군주제와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돈은 가치를 잃으면서 새끼를 치기 때문이다. 조중동이야말로 가장 반자본주의적이고 반시장적이라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


박찬호에 의해 메이저리그는 권위를 잃었고, 박세리에 의해 LPGA는 권위를 잃었고, 김연아에 위해 미셀콴도 평범해졌다. 한국팀의 선전에 의해 월드컵은 권위를 잃었고, 김대중에 의해 노벨상은 권위를 잃었다. 이 표현은 물론 역설이다. 어쨌든 한국인은 더 이상 메이저리그라는 ‘대단한 이름값’ 앞에서 감탄하지 않게 되었다. 휘둥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지는 않게 되었다. 최희섭의 ‘형저메’는 놀림감이 되었다. 한 때의 봉미미도 그랬듯이.


요지는 돈은 미래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권위를 가지며, 우리가 경제할수록 그 권위는 떨어진다는 거다. 그리고 당연히 권위는 떨어져야만 한다는 거다.


당나라 때는 은자 한 개에 대략 200냥의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아마 요즘 시세로는 500만원 이상의 가치가 될 거다. 청나라 때는 5냥까지 떨어졌다. 은이 넘쳐난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 경제는 번영했다. 은자 한 개에 15만원 안밖에 불과한 정도가 된 것이다. 돈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해야 한다. 왜?


돈 키호테의 부하가 산초 한 명일 때 둘 사이는 절대적이었다. 돈 키호테는 산초의 미래를 전적으로 통제한다. 둘 사이에 신뢰의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 돈이 미래의 통제력이라면 돈키호테의 기사신분이 경마잡이 산초의 미래를 통제하는 거다. 산초는 장가를 가더라도 돈 기호테의 허락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인생이 통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돈 키호테의 부하가 10명, 100명으로 늘어나면 전체적인 통제력은 더 커진다. 그러나 통제의 질은 갈수록 떨어진다.


나중에는 부하들이 두목을 따돌리고 자기네들끼리 결정한다. 두목이 없어도 산채는 돌아간다. 돈 키호테가 산초의 운명을 통제하려고 들면 산초는 대들면서 말한다. “속전 얼마면 놔줄건가요?” 돈을 벌수록 권위는 추락하는 거다.


경제도 같다. 돈은 새끼를 친다. 돈이 새끼를 칠수록 돈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돈의 가치가 하락해야만 새끼를 잘 친다. 돈키호테가 산초를 완벽하게 통제하면, 남편(아내)이 아내(남편)를 완벽하게 통제하면, 상사가 부하를 완벽하게 지배하면 망한다. 통제는 느슨해야 한다. 갈수록 느슨해져야 한다. 사귀는 연인이 서로의 사생활을 완벽하게 통제하려고 하면 피곤해진다.

나무가 작을 때는 가지 하나가 부러져도 죽었다. 왜? 가지가 하나 밖에 없으니까. 잎 하나가 떨어져도 죽었다. 하나뿐인 잎이 떨어지니 죽는다. 나무가 크게 자랄수록 가지가 몇 없어도 살 수 있다. 잎이 무수히 떨어져도 죽지 않는다.


아담 때는 한 명의 목숨이 인류문명 전체의 가치와 같았다. 지금 인간의 목숨값은 1/60억으로 하락했다. 세종 때는 한 명의 자살사건으로 엽전을 유통하려던 국가정책이 바뀌기도 했고, 고종때만 해도 한 명의 사고사로 전차운행이 6개월 중단되었을 정도인데 요즘 부시는 수 만명을 죽여놓고도 눈도 꿈쩍 않는다.


인플레를 잡는 범위 안에서 부단한 혁신을 통해 화폐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하락시켜야 한다. 부단한 혁신이란 다양한 형태의 위조지폐를 발행하는 것이다. 어떻게든 사회가 발전하고 안정될수록 화폐의 통제력은 떨어져 간다.


예전에는 그랜저 한 대만 끌고와도 온 동네사람이 다 모여들어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단번에 마을 사람들의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에쿠스를 끌고 와도 감탄하는 사람이 없다. 외제차가 신용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만큼 통제력이 약화된 것이다. 신뢰가 가지를 치고 증가할수록 통제하지 않게 된다.


이걸 거꾸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국가가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할수록 좋다는 전체주의적 사고에 빠진 좌파와 우파가 있다. 좌파는 주로 계몽이나 교육, 제도를 통해 개인의 사적영역을 통제하려 하고, 우파는 주로 군대나 폭력, 돈을 통해 개인을 감시, 통제하려고 한다. 어느쪽이든 통제만능의 발상은 같다. 틀렸다.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은 더 이상 개인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경제는 ‘미래의 통제’에 의해 성장하도록 세팅되어 있는데 돈의 가치를 하락시켜서 미래를 통제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그렇다. 이 모순을 이해하는 것이 자본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다.


진시황 이전에는 수 많은 왕들이 존재했다. 진시황이 등장하여 통제권을 발동하자 경제가 번영했다. 그러나 그 황제의 통제권이 유지되자 진나라는 몰락했다. 통제가 없으면 경제는 죽는다. 통제권이 그대로 유지되어도 경제는 죽는다. 그렇다면 정답은? 치고빠져야 한다.


통제가 없는 원시사회는 불신의 결과로 전쟁이 계속되어 진보가 없다. 그러므로 통제되어야 한다. 문제는 경제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점이다. 생물이 자랄수록 뿌리에서 줄기로, 가지로, 잎으로 통제권이 이양되어야 한다. 과거가 미래를 통제하면 게딱지가 게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과 같아서 죽는다.


교육도 그렇다. 아기라면 백프로 부모에 의해 통제된다. 부모가 아기를 통제하지 않으면 아기는 죽는다. 그러나 아기가 성장할수록 부모의 통제는 약화되어야 한다. 부모의 강한 통제는 아기의 성장잠재력을 빼앗을 뿐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통제, 집단의 통제, 조직의 통제는 점점 감소되어야 하며 개인의 영역은 점점 커져야만 한다.


무수한 위조지폐를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발행하여 화폐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위폐범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위조지폐라는 나쁜 느낌의 어휘를 쓰는가? 학벌, 연고, 빽, 인맥 따위도 일종의 화폐 역할인데 그것은 근본 쓰레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귀족신분, 학벌, 인맥, 종교, 동아리 등 온갖 신뢰의 체계가 위조지폐 역할을 하여 경제를 발전시키지만 동시에 더 많은 진보에 의해 그것이 무력화 되어야 하며 결국 언젠가는 무력화되도록 되어 있으므로 위조지폐인 것이다.


분명히 신분, 학벌, 기득권, 빽, 계모임 따위가 경제를 발전시켰지만 진보한 사회에 의해 모두 쓰레기로 변해야 한다. 사회의 신용이 형성될수록 신용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사회가 페펙트한 완전신용사회가 되었다면, 그래서 거지도 은행에서 백억원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면 돈은 휴지가 된다. 그러므로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돈은 본질에서 위조지폐다. 금화도 마찬가지다.


저온핵융합이 성공하여 에너지문제가 해결되면 그런 사회가 올 수 있다. 돈의 가치는 문화의 가치로 완벽하게 대체된다. 최종적으로는 문화가 남는다. 조선시대 양반은 단지 문화의 힘만으로 돈 많은 부자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듯이 최종적으로 돈은 문화로 대체되며 돈은 휴지라는 본질을 언젠가는 드러낸다. 화폐라는 나무는 문화라는 열매를 남기고 죽는다.


조중동은 기왕에 발행된 구권화폐의 가치를 높이려 한다. 군주의 힘을 키워 전 국민이 군주에게 충성하게 만들어 군주 1인이 국민의 미래를 통제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일시적으로는 경제에 도움이 된다. 적의 침략에 맞서려면 국민이 군주를 숭배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는 생물이다. 살아서 움직여야 한다. 군주의 권력은 갈수록 하락해야 한다.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위조지폐를 남발하여 모든 독점, 모든 자격증, 모든 기득권, 모든 권위를 타파해야 한다. 현찰만이 화폐가 아니고 귀족, 라이선스, 강남, 따위가 화폐에 속하듯이 화폐를 남발하라는 말은 귀족의 문호를 개방하고, 대학의 문호를 개방하고, 일체의 기득권 장벽을 허물라는 말이다.


봉건사회에서 여자는 결혼이 최고의 화폐가 되고, 남자는 취직이 최고의 화폐가 된다. 결혼만 하면 여자에게는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고, 취직만 하면 남자에게는 신용카드가 나오고, 마이너스 통장을 발급받아 할부자동차를 사고 전세자금을 대출받아 안정된 생활을 꾸릴 수 있다. 직장, 학벌, 연고, 빽이 다 화폐다. 그 화폐의 가치를 하락시켜야 한다. 결혼의 가치, 취업의 가치를 하락시켜야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잘 살수 있어야 하고 또 누구나 쉽게 취업할 수 있게 되어서 구직자의 슬픔이 없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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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다. 내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그림을 통째로 다운받기 바란다. 대한민국이라는 밭에 경제라는 큰 생물이 한 마리 살고 있다. 자! 이제 그림이 그려졌는가? 그 생물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통제가 필요하고 그 생물이 더 크게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통제권의 이양이 필요하다.


봉건질서는 신뢰의 체계다. 봉건질서 그 자체가 화폐다. 훈장이나 공신첩 따위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화폐를 발행해서 봉건사회가 유지된다. 그래서 왕들은 안다. 훈장을 남발하고 귀족을 우대하라. 그러면 나라가 부강해지리라. 실제로 그랬다. 그렇게 위조지폐를 발행했더니 과연 부강해졌다.


가부장의 권위, 이장의 권위, 완장의 권위, 교장의 권위, 사장의 귄위, 기득권의 권위를 세우라 그러면 나라가 부강해진다. 실제로 그랬다. 훈장을 남발하고 귀족을 양성하고 선비를 키웠더니 나라가 부강해졌다. 그러나 거기서 멈췄다. 더 이상 부강해지지는 않았다.


진보주의자가 나타나서 전 국민의 귀족화를 선언한 것이 민주주의다. 전 국민이 공로훈장 하나씩을 나눠가진 것이 인권 개념이다. 인권이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아기는 모두 날때부터 공훈에 따른 훈장 하나씩 목에 걸고 태어난다는 거다. 그러므로 함부로 해치지 못한다. 인구감소 시대에 아기의 출생 자체가 국가에 기여한 거다. 인권이 보호될 때 실제로 국가의 신용은 급격하게 향상된다. 이명박이 인권을 해치니 국가는 그만큼 파괴된다.


조중동은 왕의 수를 줄여 구권화폐의 액면가치를 보호하려 하고 우리는 전 국민을 왕으로 결정하는 신권화폐를 남발하여 구권화폐의 액면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들려고 한다. 이것이 21세기 지금 우리 역사의 본질적인 싸움이다.


경제는 생물이다. 미래를 통제하지 않으면 생물은 죽는다. 계속 미래를 통제하면 역시 그 생물은 죽는다. 경제한다는 것은 통제하면서도 그 통제권을 통제대상에게로 지속적으로 이양한다는 것이다.


임금은 신하에게, 사장은 노동자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과거는 미래에게, 구권은 신권에게, 상위포지션은 하위포지션에, 양화는 악화에게 지속적으로 통제권을 이양할 때 그렇게 얻어진 자율권에 의하여 경제는 발전하고, 반대로 상층부집단이 통제권을 틀어쥐고 있으면 경제는 죽는다.


덧글.. ‘위조지폐’의 의미를 결사적으로, 컬러프린터로 뽑아낸 종이카드로만 한정하여 알아듣겠다는 바보들은 스스로 거세하여 자진멸종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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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길들이기


요지는 자본주의시스템의 ‘돈이 돈 버는 구조’를 긍정하고 과학의 관점에서 탐구하자는 거다. 사실이지 ‘돈이 돈 버는 자본주의 속성’이 우리 사회의 윤리적 의지와 맞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원래 인간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렇다고 불친절한 자본주의를 탓하랴! 생각하라! 우리의 조상들도 들판에서 제멋대로 자라는, 난폭하기 짝이 없는 소와 돼지와 닭을 길들여서 키운 것이다.


소와 돼지, 닭은 원래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소, 돼지, 닭이 인간에게 봉사할 의도로 자기 몸에 살을 보탠 것은 아니다. 인간이 개입하여 이용하는 것이다. 오랫동안의 종자개량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다.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원리가 인간에게 봉사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전기에게는 원래 인간을 이롭게 할 목적 따위는 없었다. 그러므로 잘못 다루면 감전된다. 물은 원래 인간을 이롭게 할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


홍수가 나면 인간이 다친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물이나 전기를 두고 화낼 것인가? 다만 현명하게 이용할 뿐이다. 자본주의 역시 고분고분하지 않지만 과학적인 이해를 통해 상당히 길들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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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경제라는 생물이 있다. 자본주의란 유목민이 들판에서 소 키우듯 시장에서 경제라는 생물을 키우는 거다. 농부가 열심히 일한다고 그 소가 빨리 자라는 것은 아니다.


들판의 소는 농부의 노동과 상관없이 자란다. 가치를 창출하려면 많은 노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적절한 초지, 좋은 기후, 야생동물의 습격이 없는 안정한 환경, 유통과 판매를 돕는 발달한 시장이 필요하다.


이런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지만 본질에서 소의 성장공식은 소 자신의 논리를 따라간다. 자본주의라는 생물 역시 인간의 논리가 아닌 자본주의 자신의 논리를 따라간다. 노동은 보조할 뿐이다.


소가 새끼를 낳듯이 돈이 돈을 낳는다. 가치창출의 주체는 농부가 아니라 소다. 소가 알아서 크고, 시장이 알아서 큰다. 인간은 단지 도울 뿐이다. 농부가 열심히 일해도 기후가 나쁘면 소는 죽고 전염병이 돌아도 소는 죽는다.


농부가 게을러도 기후가 좋으면 소는 살찌고 환경이 좋으면 소는 번식한다. 투자자가 게을러도 경기가 좋으면 수익이 늘고, 경기가 나쁘면 수익이 준다. 소는 소의 논리를 따르고 돈은 돈의 논리를 따른다.


많은 먹이를 줘도 소는 필요한 이상 먹지 않는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소는 더 이상 크지 않는다. 경제는 자기 논리와 독립적인 성장사이클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그 점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속적으로 성장시키려면 다 자란 닭은 염소로 바꾸고, 자란 염소는 돼지로 바꾸고 다시 소로 바꾸어야 한다. 한편으로 닭장을 염소우리로, 염소사료를 돼지사료로, 돼지우리를 소목장으로 바꿔줘야 한다.


오늘날 경제위기는 바꿔줘야 할 때 바꿔주지 않아서 생겨난 현상이다. 인간은 그만큼 경제라는 생물의 성장사이클에 대해서 무지한 것이다. 더 탐구하고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염소를 닭장에 몰아넣거나, 돼지에게 소사료를 주거나, 소에게 닭사료를 주어서는 안 된다. 정밀하게 코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보라. 오늘날 좌파나 우파의 경제논리에는 이런 점이 없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치지 않고 단지 하층민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며 남탓하는 우파의 태도는 더 이상 크지 않는 닭을 나무라는 것과 같다. 닭이 게을러서 더 이상 안 크는 것이 아니다.


닭장의 닭은 원래 그 이상 크지 않는다. 닭장을 염소우리로 바꿔주지 않고는 염소만큼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노동환경을 바꿔주지 않으면 노동자는 더 이상 부를 축적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좌파 역시 소를 닭장에 가두는 우를 범하곤 한다. 소는 들판에 풀어놓아야 잘 큰다. 하루종일 달라붙어서 먹어라, 앉아라, 서라, 자라, 강요해서 안 된다. 그 소 스트레스 받아서 병 걸린다.


가둘때 가두고, 풀때 풀고, 먹일 때 먹이고, 재울때 재워야 한다. 우리가 경제시스템의 성장사이클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점을 고백해야 한다. 정답은 전문가의 활약과 과학의 탐구에서 찾아야 한다.


과학 외에 대안은 없다. 푸닥거리 주술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시스템을 억지로 인간의 사회와 결부시키면 온갖 모순이 드러나지만 인간을 배제히고 보면 독립적인 합리성을 가진다.


자본주의는 인간사회 안에서 확실히 비합리적이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합리적이다. 닭과 코끼리가 한 집에서 동거하면 온갖 모순이 드러난다. 그러나 코끼리나 닭이 원래 모순된 동물은 아니다.


코끼리는 코끼리대로 합리적이고 닭은 닭대로 합리적이다. 인간은 인간대로 합리적이고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대로 합리적이다. 모순은 둘의 위험한 동거에서 일어난다. 어쨌든 인간은 자본주의라는 거대생물과 동거를 결정했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회적 모순은 전문가의 정밀한 코디에 의해 해결된다. 정밀하게 코디하면 닭과 코끼리의 동거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자본주의 역시 키우기에 버거운 생물은 아니다. 초보농부가 많은 시행착오 끝에 훌륭하게 목장을 가꾸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생물을 잘 키울 수 있다. 물론 한 두번의 시행착오와 실패는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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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3.29 14:18

    첫댓글 경제에 대한 폭넓은 통찰과 혜안 또 그에 따른 대안 제시에 경의를 표합니다.
    뱀발로 과학에 대한 지나친 믿음은 좀 걸립니다.

  • 11.03.30 14:44

    님이 전문가 올시다 그런데 님이 대통령하면 나토가 가만있지 않겠지요 그래서 자본주의가 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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