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칼럼
[김대중 칼럼] 머그샷에 담긴 흑백 싸움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니스트
입력 2023.08.29. 03:20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3/08/29/2FHLDFXCFFFKHOMZ3XRIHXCP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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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91가지 혐의에도 불구
트럼프 백악관 재도전 기세등등
흑인·이민자에게 자리 뺏긴
美 백인, 트럼프에게 기대는 듯
인종차별 금지 아랑곳 않고
오히려 ‘이용’하는 전략 펴
세계 최강대국, 어디로 가나
26일(현지 시각)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가게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머그샷(범죄인 식별 사진)이 인쇄된 티셔츠와 모자 등이 진열돼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의 2차 백악관 도전이 점점 기세등등해 가고 있다. 미국 언론들은 트럼프가 4건의 기소에 총 91건에 달하는 혐의에도 불구하고 지지도가 떨어지기는커녕 상승세라고 보도하고 있다. 트럼프 측은 지난 23일 조지아주(州) 교도소에 출두해 찍은 머그샷(범죄 기소자의 출두 사진)을 담은 티셔츠와 커피 컵을 3만~4만원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런지 불과 이틀 만에 무려 7백만달러(약 93억원) 이상이 팔렸다. 미국 사법 체제에 대한 냉소적 도전이다.
적어도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오래 학습해 온 한국인들에게 이런 ‘트럼프 현상’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은 우리가 알았던 미국이 아니고, 한국 정치가 답습하려던 미국 민주주의가 아니다. 과거 같았으면 단 한 건의 기소로도 후보는 사퇴했다. 이것은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고 어느 당이 이기느냐의 문제를 떠나 전 세계적으로 정치권력의 형성 과정이 무섭게 무소불위로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왜 범법(犯法)으로 기소된 정치인이 오히려 득세하는가 말이다. 나는 그것이 미국의 흑백 갈등에 기인한다고 본다.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민주당 대(對) 공화당의 싸움이 아니라 인종 싸움으로 가고 있다. 인구 구조 면에서 열세인 데다 선거에서도 주류(主流) 위치에서 밀려날 위기에 있는 백인 사회가 트럼프의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주의를 중심으로 단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조지아주에서 기소당한 트럼프의 공범 18명 중 16명이 백인이고 이들을 고발한 주(州) 검찰은 흑인 일색이라는 구도가 인종 대립을 상징하고 있다.
한 백인 유권자는 방송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 미국에서 백인은 열세에 몰리고 있다. 지방정권은 흑인 또는 이민자들이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백인 우위를 지켜낼 정치인은 여야 통틀어 트럼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사법적 기소는 미국 주류 사회의 미래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공저인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백인 민족주의를 앞세워 승리를 이어가는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친(親)트럼프 공화당은 백인 선거인단을 확보하기 위해 이민(移民)의 대규모 추방과 제한 및 투표 억제 등을 구현해 나갈 것으로 보았다. 저자는 “힘을 잃어가는 다수 민족이 기존의 지배적인 지위를 평화롭게 넘겨준 역사적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라고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다민족을 기반으로 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없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인종차별의 금기를 깨는 것은 물론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하는 쪽으로 전략을 세운 것 같다.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자들에게 투표 조작이나 문서 보관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미국 내에서 횡행하고 있는 총기 사살 사건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거의 대부분 인종주의적 동기를 갖고 있다. 엊그제 벌어진 플로리다의 흑인 살해 총격이 대표적이다. 2023년 들어 이미 471건의 총기 사건이 터졌다. 한 달에 50건씩 일어난 셈이다. 그 사건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인종적이다. 점차 우세해진 흑인·유색인종의 숫자에 힘입어 이제 웬만한 지역의 시장·시의원·경찰·사법기관 종사자들은 유색인이거나 이민자 출신이 많다. 미국 백인들의 입장에서 미국은 더 이상 백인 우월 국가가 아니다. 그리고 트럼프야말로 그것을 뒤집고 미국을 백인 우월 사회로 지켜낼 유일한 인물이라고 백인 유권자들은 믿고 있는 것 같다. 트럼프의 지지가 어떤 상황에서도 허물어지지 않는 것은 그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한국에서도 트럼프 벤치마킹이 흥행에 성공하고 있다. 과거의 주류(主流) 기반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좌파 세력과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야권 대표의 이른바 ‘정치 탄압론’이 그것이다. 야당 대표에 대한 어떤 사법적 조치도 모조리 정치 탄압, 야당 말소, 사법 폭거로 몰아가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주장은 트럼프의 전략을 많이 닮은 듯하다.
전 세계적으로도 우리가 아는 전통적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그 자리에 권위주의, 애국주의, 자국 이기주의, 인종주의가 올라타고 있다. 국가 간의 자산(資産) 편중은 인구 이동을 불러오고 인구 이동은 인종 갈등을 부추긴다. 미국이 ‘트럼프 현상’으로 그 흐름을 이끌게 될 줄은 몰랐다.
김대중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