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의 붕괴를 보지 못하고 간 趙甲濟
일세를 풍미하였던 여배우 최은희 씨(92)가 별세하였다. 남편 신상옥 감독이 간 지 12년만이다. 日帝, 6·25 남침전쟁, 분단과 냉전, 두 번 결혼(촬영기사 김학성,영화감독 신상옥), 두 번 이혼, 납북, 탈출, 영화보다 더 극적인 삶을 기록한 배우였다. 1926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열일곱 살에 극단 '아랑'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한국적 미인의 외모로 인기를 누렸다.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로 데뷔했고 이때 만난 촬영감독 김학성과 결혼했다. 6·25전쟁 때는 인민군 '경비대 협주단'과 국군의 '정훈공작대'에서 일했다.
2010년 조선일보에 쓴 글에서 최은희는 '목포에서 영화를 찍고 있을 때 인민군이 의정부까지 내려왔고, 곧 서울을 삼킬 기세라는 소식을 들었다.
서울에 있는 식구들이 걱정돼 기차를 타고 올라가 6월 27일 서울역에 도착했다'고 했다.
최은희는 서울에 오자마자 인민군 장교에게 끌려가 북한 경비대 협주단에서 선전 연극에 동원된다.
북한군은 9·28 수복을 앞두고 최은희를 북한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녀는 평남 순천에서 탈출했다. 두 번째 남편 신상옥 감독(1926~ 2006)과 만난 건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를 찍으면서였다고 한다.
최은희씨는 “항상 카메라와 함께하고 있는 신상옥 감독의 모습이 꿈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이후 23년 동안 130여편 영화를 찍었다.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이 이때 나왔다. 최은희 씨는 신상옥 감독이 다른 여배우와 동거하자 이혼했다. 1970년대말, 그녀는 영화광 김정일의 명령으로 납북되었다가 뒤에 납치되어 온 신상옥과 북한에서 만나 재결합하였다.
김정일의 후원으로 영화를 찍었으나 자유를 갈구하던 중 1986년에 비엔나에서 탈출,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귀국, 안양신필름예술센터 학장, 동아방송대 석좌교수,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명예교수로 후배를 키웠다.
유족은 아들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 거주)씨, 딸 명희·승리씨 등 2남2녀.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19일 오전 8시. (02)2258-5940 김정일의 최후를 보지 못한 申相玉 추억(2006년) 
“대담한 것이 아니라 저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였죠” 趙甲濟 지난 4월11일에 만80세로 별세한 영화감독 申相玉(신상옥) 씨의 殯所(빈소)가 모셔진 서울대학 병원 장례예식장에 다녀왔다.
별실에는 부인 崔銀姬(최은희) 여사와 장례위원장을 맡은申榮均(신영균) 씨가 있었다. 崔 여사는 전날 申 감독을 간호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여보, 내일 다시 올게요”라고 말했다.
申 감독은 문으로 향하는 부인에게 곁으로 오라는 눈신호를 보냈다.
申 감독은 누운 채 말 없이 崔 여사의 손을 꼭 잡더라고 한다. 崔 여사가 “이왕 손을 잡으려면 꽉 잡으세요”라고 했더니 손에 힘을 주더란 것이다.
재북(在北) 시절 <탈출기>를 촬영하는 신상옥 감독(왼쪽)과 최은희씨(오른쪽). 김일성도 이 영화를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내가 “申 감독님은 김정일이의 최후를 보고 가셔야 했는데…”라고 했더니 崔 여사도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申 감독과 마지막 통화를 한 것은 지난 연말이었다.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의해 북한으로 납치되었던 崔 여사가 회고록에서 납치되어온 한 마카오 여성에 대해서 썼는데 일본의 납치자 구출단체에서 이 여성의 實體(실체)를 확인한 뒤 崔 여사와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 부탁을 전하려고 申 감독과 통화했을 때 목소리는 쇠약했으나 아직도 김정일에 대한 복수의 일념은 생생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申 감독과 만나고 지낸 지난 17년간 한국에서 김정일을 가장 미워한 사람은 아마도 그와 黃長燁(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김정일의 내면과 실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申 감독은 김정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정일에 대한 그의 증오심과 복수심은 뼈에 사무친 것임을 여러 번 느낄 수 있었다. 김정일은 申相玉 감독을 만난 자리에서 그를 납치해간 이유에 대해서 미안한 듯이 떠듬떠듬 실토했고 이 대화는 崔 여사에 의해 녹음되었다.
김정일은 申 감독을 유인하기 위한 일종의 미끼로 崔銀姬 씨를 먼저 홍콩에서 납치했던 것이다.
申 감독은 1978년에 납북된 뒤 崔 여사와 만나지 못하고 세뇌교육만 받고 있던 중 두 번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였다.
그는 약 5년간 사회안전부 및 국가보위부 감옥에 갇혀 있다가 풀려나 김정일의 개인적 후원하에 영화를 만들었다.
申 감독은 ‘한참 일할 나이에 근 10년간 거기 가서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점을 아쉬워했고 거기서 느꼈던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을 잊지 못했다.
그는 자주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들의 억압이 얼마나 지독한지, 여기 서울에 앉아서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두 사람이 김정일과 나눈 대화를 비밀리에 녹음해서 탈출할 때 가져온 것을 의심했다.
申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녹음은 보다 절실한 문제였다.
“대담한 것이 아니라 저에게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제가 한국에 돌아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였죠.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반공법이란 게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납치되었다는 증거 없이는 도저히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거든요.
우린 신체검사도 안 받았어요. 또 들키면 ‘우린 적을 수가 없기 때문에 녹음했다’고 변명하려고 했고 통했을 겁니다.” 崔銀姬 씨가 핸드백에 녹음기를 넣고 녹음했는데 45분짜리 테이프를 썼기 때문에 다 녹음하지 못했다고 한다.
집요한 성격의 申 감독은 곁에 앉은 崔 여사에게 눈짓으로 화장실에 가서 바꿔 끼우라고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申 감독은 “녹음을 하면서도 이것이 바깥으로나가는 유일한 김정일의 육성이란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申 감독과 崔 여사는 1986년에 비엔나를 통해서 탈출한 뒤미국 CIA의 보호 아래서 생활했다.
“다행히 미 CIA가 김정일의 목소리를 녹음한 게 있었습니다.
동생김경희가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있다가 김정일의 전화를 받는 것을 녹음해두었지요.
이것과 대조해서 저희가 가져온 것이 진짜임을 확인한 겁니다.
그게 없었으면 우리는 미국으로도 못갈 뻔했습니다.” 申, 崔 두 사람의 증언과 녹음에 의해서 김정일에 대한 많은 정보가 알려졌다.
月刊朝鮮(월간조선)은 1995년 10월호 부록으로 문제의 녹음테이프를 발행한 적이 있다.
김정일을 연구하려는 북한 전문가들은 이 녹음 테이프를 듣지 않으면 안된다. 申 감독은 탈출하여 별세할 때까지의 20년간 회고록이나 좌담,기고문 등을 통해서 줄기차게 김정일을 비판했다.
그를 알고 지낸 지난 17년간 필자에게는 申 씨가 영화감독이 아니라 북한정권의 속성과 본성을 꿰뚫어보는 북한 전문가였다.
1989년 맨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가까이서 본 김정일 정권의 성격을 물었다.
그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마적단이죠. 북한이란 마을을 점령하고 노략질하여 주민들을 굶겨죽이면서도 하나도 양심의 가책이 없이 파티를 즐기는 마적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북한을 알면 알수록 그의 마적단論(론) 이상 가는
관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을 북한産(산) 문서로 연구하기 시작하여 관념 속에 근사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 존재하지도 않는 북한을 상대로 굴욕적인 정책을 펴다가 파탄해가고 있는 이종석類(류)의 자칭 전문가들을 가장 경멸한 것이 黃長燁 씨와 申 감독이었다. 申 감독의 요청에 의해 필자는 1999년 초 黃長燁-申相玉 對談(대담)을 마련한 적이 있었다(1999년 3월호 월간조선).
이 對談의 사회를 필자가 보았는데 이런 말을 했다. “申 선생께서는
김정일 측근들이 남한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셨죠?
그 심리가 남한을 동경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자신만만하고 경멸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黃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옮은 말씀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김정일이가 현대감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또 남한 것을 다 알고 투쟁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이죠. 우리에게도 남한 영화를 새벽까지 보여주곤 했습니다. 申 감독이,
북한 사람들은 세뇌되어 있어 통일이 되더라도 몇만 명은 산 속으로 들어가 저항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자 黃 선생은 즉각 반박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들이 밤낮 義理(의리)에 대해서 강조하지만 그것은 도둑집단의 의리일 뿐이지 원칙에 기초한 의리가 아니거든요. 무너지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무너져요. 대장인 김정일이가 무너지면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아무런 사상적 바탕이 없기 때문이죠.” 申相玉 씨가 김정일보다 더 미워하게 된 것은 金大中(김대중)전 대통령이었다.
햇볕정책이란 詐術(사술)로써 무너지는 김정일을 도와주어 북한주민들의 고통을 연장했다는 것이다.
申 감독은 金大中 집권기에도 월간조선을 통해서 비판을 자주 했다.
그때마다 편집장이던 나를 찾아와 이런저런 식으로 글을 쓰고싶다고 의논했다.
미국시민권자인 申 감독은 “이런 글을 써 척하다가 신랄한 글을 써오곤 했다. 특히 2000년 6월 소위 남북정상회담
이후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2001년 10월호 월간조선에 기고한 ‘김대중 앞 공개장’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북한정권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그 바탕 위에 지은 집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평양선언대로통일한다면 반드시 內戰(내전)이 일어납니다.> 申 감독은 또 나를 설득하여, 국민들이 김정일-김대중 야합에 속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자신이 崔 여사와 함께 썼던 회고록을 손질하여 《우리의 탈출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책으로 출판하도록 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있던 2003년 초에는 ‘金大中 대통령 앞 마지막 편지’라는 글을 갖고 왔다.
3월호에 실렸는데 제목은 ‘노벨賞을 위해 민족을 판 당신을,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이 편지의 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거짓투성이의 남루한 옷을 걸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일생 단 한번이라도 솔직해져서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국민과 세계를 향하여 사죄할 것은 사죄하여 국가의 위신을 회복케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이제 막 출범하는 새 정부로 하여금 당신이 파놓은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申相玉 감독이 딱 한번 북한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고실토한 적이 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남한에 있을 때는 로맨티시즘이나 센티멘탈리즘, 이런 거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북한에서도 김정일이가 나에게 정치적 영화를 만들라는 주문을 안해요. 그런 강압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가한국에서 보지 못했던 영화들이나, 과거 카프(일제시대 사회주의문학 조직) 계열의 작품들을 보게 되었고 어느 정도 사회적 開眼(개안)을 했습니다.
그런 걸 두 개 만들었죠. ‘소금’하고 ‘탈출기’라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공부가 너무 값이 비쌌지요.” 예술 이외엔 통 관심도 잡기도 없었다는 申 감독이지만 김정일, 김대중 두 사람 때문에 말년엔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話題(화제)를 영화쪽으로 돌리려 해도 그는 자꾸 남북문제로 돌아왔다. 영화 속의 주인공같은 일생을 산 申 감독은 영화인으로서 평가받는 만큼 또 다른 평가를 받을 것이다.
김정일의 본질을 폭로함으로써 오고야 말 그의 파멸을 앞당긴 인물로서 말이다.
김정일의 최후를 보고 가지 못한 그의 冥福(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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