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막(酒幕)의 어원
주막은 주사(酒肆)·주가(酒家)·주포(酒舖)라고도 불렸으며, 현대적 의미로 볼 때 술집과 식당과 여관을 겸한 영업집이라고 할 수 있다.
주막은 시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도회지에도 많이 있어 주막거리라는 이름이 생겼을 정도이다. 대체로 주막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으로는 장터, 큰 고개 밑의 길목, 나루터, 광산촌 등이었다.
조선시대에 주막이 많기로 유명했던 곳으로는 서울은 물론이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중간인 소사·오류동에 많았는데,
서울에서 출발하면 점심 때쯤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문경새재에 주막촌을 이루었다. 지금도 그곳에는 나라에서 운영하던 조령원(鳥嶺院)·
동화원(桐華院)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천안 삼거리는 능수버들의 전설과 함께 주막이 번성했던 곳이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길목인 섬진강 나루터의 화개(花開), 한지와 죽산물·곡산물의 집산지인 전주 등이 주막이 많았던 곳으로 꼽힐 수 있다.
주막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정확한 고증은 할 수 없다. 기록상으로 주막의 효시는 신라시대 경주에 있던 천관(天官)의 술집으로
볼 수 있다.
김유신(金庾信)이 젊었을 때 천관이 술 파는 집에 다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1097년(숙종 2)에 주막이 등장했다는
설도 있다.
규모가 큰 경우 방이 수십 개에다 창고와 마구간이 있어 행상인들의 물건을 맡아 주기도 하고, 마구간에서는 마소나 당나귀 등
짐승을 관리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골의 작은 주막은 방 몇 개에 술청이 있는 정도이며, 거리의 간이주막은 허술한 지붕에 가리개로 사방을 막아 놓고
낮 동안에만 장사를 했던 곳도 있었다.
주막에는 요즘처럼 간판은 없었으나 이름은 있었다. 이 이름은 주막집 쪽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손님들이 지은 것으로,
오동나무가 있는 집이면 오동나무집이요, 우물이 있는 집이면 우물집, 주인의 뒷덜미에 혹이 있으면 혹부리집 등으로 불렸다.
주막이 주막의 구실을 다하면서 길손의 향수를 달래 준 것은 아무래도 촌마을의 외딴 주막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러한 주막은
대부분이 서민들이 이용하는 곳인데, 길가는 나그네는 물론이고 장을 따라다니는 상인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주막의 기능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첫째는 손님에게 술을 파는 것이요, 둘째는 요기를 할 수 있게 밥을 제공하는 것이며,
셋째는 숙박처를 제공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어서 정보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고, 문화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곳이어서
문화의 전달처 구실을 하였으며, 피곤한 나그네에게는 휴식처가 되었고, 여가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유흥을 즐기는 오락장 구실도
였다.
옛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을 사먹으면 대체로 잠은 공짜로 재워 주었다. 잠을 자는 길손들은 대개 도착순으로 먼저 온 사람이 따뜻
한 아랫목을 차지하게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주막에서 팔았던 술은 탁주가 주종이었고 소주도 팔았으며, 양반 손님을 위해 맛과
향기를 넣어 만든 방문주(方文酒)를 팔기도 하였다.
옛 주막에서는 술을 한 잔·두 잔씩 먹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는 무료 안주가 한 점씩 붙어다녔다. 주막의 목판에는 안주가 마련
되어 있었는데 마른안주로는 육포·어포 등이 있었고, 진안주로는 쇠고기·돼지고기 삶은 수육과 너비아니·빈대떡·떡산적·생선구
이·술국 등이 있었다.
주막에서 파는 술국을 해장국(원래는 解酲 또는 양골국)이라 하였다. 살코기를 발라낸 뼈다귀를 도끼로 토막 쳐서 흐무러지게
끓이면 허연 국물이 된장맛과 어울려서 구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허기를 메워 주는 식사류는 장국밥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이는 순전히 양지머리로만 국물을 뽑기 때문에 국물이 순하다. 간을
맞추기 위해 간장을 타면 연한 국물빛이 장국을 더욱 맛있게 하였다.
주막은 기방이나 색주가·객주집·여각(旅閣)과는 달랐다. 기방은 기녀가 주로 돈 많은 양반들에게 기악(妓樂)과 함께 술을 팔았던
곳이고, 색주가는 접대부들이 술과 색을 팔던 곳이다.
상품판매와 관련해서 번성했던 것 가운데 객주집은 행상인의 숙식과 상품의 중개나 위탁판매를 했던 곳이고, 여각은 행상인들을
위한 숙박업을 주로 하던 곳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막도 변하여 조선 후기에 와서는 내외주점, 거리의 주막, 색주가, 선술집 등이 생겨났다. 내외주점은
여염집 아낙네가 살 길이 막연하여 차린 술집으로, 문을 사이에 두고 술꾼과 거래를 하던 주점이었다.
그 시절만 해도 남녀 사이의 내외가 엄격하던 실정이라 마주 대하지 못하고 문 사이로 팔뚝만 내밀어 술상을 건네주었다고
팔뚝집 혹은 내외주점이라 하였다.
거리의 주막은 막벌이 노동자를 위해 새벽녘에 거리에서 주모가 모주를 팔았다. 모주란 술을 걸러 낸 찌꺼기에 다시 물을 붓고
우려 낸 술이므로 주도도 낮았고 맛이 없었다. 모주의 안주로는 비지찌개를 끓여 팔았다.
색주가란 조선 세종 때 생긴 것으로 그때는 주로 명나라에 사신 가는 이들을 위하여 주색을 베풀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는 값이 비싼 기생집에 가지 못하는 부류들이 주로 색주가를 이용하였다.
선술집은 목로(木櫨)라는 나무탁자를 두고 서서 간단히 마시는 술집이다. 일제강점기에 서울에서 선술집이 매우 번창했는데
일본 사람들도 ‘다치노미’라 부르며 애용하였다.
서울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오늘날에도 술과 해장국을 파는 곳이 더러 보이는데, 이것이 모두 옛 주막의 후신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술집인 맥주홀·스탠드바·카페·룸살롱 등은 주막과 거리가 먼 것들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주막은 정보를 나누는 종합 정보마당이자
문화 교류의 장이었고
피곤함을 달래주는 휴식의 공간이자
여흥을 즐기는 오락장이기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는 곳이군요
첫댓글 주풍방에
술과 떡은 있는데 잠자리가 없으니
서산,음성,목포,부산에 팬션을
서울,하남,수원,의정부엔 호스텔을...
아하~~그라고 봉께롱
방장님이 무슨 건물을 올리고 계시던데
저런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나보군요~~**
그러게요 방장님 건물 올리면 혹시 잠자리도 해결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막의 옛 정취가 우리 풍류방에도 있는 듯 합니다~~
그러게요 ~
주막인데 잠자리가 없었군요 ㅎ
@지호 잠자리까지 해결하면
모두들 집에 안갈 듯 합니다~~^^
@지존 ㅎ ㅎ 당근이쥬 ~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필독사항 이네요 ㅎ
멋도 모르고 마시기만 한 저도
재미있는 내용 이네요
주막은 술 뿐만 아니라
쉼터이자 커뮤니티 공간이기도 한 모양입니다
사람들의 소통 공간인듯 합니다~~^^
주막의 어원을 읽다보니
몰랐던 이야기라
재미도 있지만 풍류방도
앞으로 더 신경좀 써야겠네요 ㅎ
풍류방이 이렇게 의미 있는 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사 및 희노애락이 어우러져 인간미가 넘쳐나는 방인것 같습니다~~^^
주막의 방은 업무차 자는곳이니 죽치고 있으면
업무방해입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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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가족이 있는 내 집에서...그래야 가족이
걱정을 안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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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의 유래 잘 알았습니다.
그렇지요~~
잠은 집에서~~~
업무방해하면 안돼지요~~
행복한 한주 보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