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사에서 ‘불운의 축구 천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김병수다. 슈팅, 패스, 드리블 등 기본기는 물론 경기 감각 등 축구선수로서 갖춰야 할 재능을 모두 가졌다. 그를 가리키는 수식어 또한 ‘천재 미드필더’였다. 천재라는 수식어는 아무에게나 붙이는 게 아니다. 데트마르 크라머 전 올림픽대표팀 총감독을 비롯해 세계 유수의 지도자와 선수들은 김병수에 대해 “한국에 이렇게 뛰어난 선수가 있다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그러나 ‘특별한 축구 천재’ 김병수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의 K리그 기록에도 없으며 1993년 이후 김병수 관련 뉴스도 뜸하다. 부상으로 하늘이 내려 준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던 김병수. 그는 어떤 선수였을까. 그리고 현재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1986년 경신고
김병수는 강원도 홍천초등학교 시절 축구에 푹 빠졌다. 축구부 친구들이 축구공을 갖고 노는 걸 보며 따라하다 축구선수의 길을 걷게 됐다. 1982년 서울 미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김병수의 성장에 결정적인 연결 고리였다.
포항제철의 한흥기 감독이 김병수의 재능을 높이 사 포항제철 선수단 숙소로 데려왔다. 그리고 최순호, 박창선 등 선수들과 함께 훈련을 시켰다. 어려서부터 대표선수들의 경기와 훈련을 보고 배우면서 기량이 몰라보게 늘었다. 경신중, 경신고에 진학해서도 포항제철 숙소에서 계속 생활했다.
김병수는 어려서부터 또래 가운데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당연히 유명세를 탔다. ‘한국축구의 희망’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곽경근 여의도고 감독은 김병수에 대해 “정말 천재였다. 누구에게도 ‘천재’라는 별명이 따르지 않았다. 오직 (김)병수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병수는 “특별히 다른 선수들보다 잘났다고 느낀 건 없다. 선수생활을 빨리 그만둬 어린 시절의 기술일 뿐이다. 그러나 일종의 감각이 있었다. 남들에게 없는 감각이다”라며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가 그 시절 최고의 선수였다. 내 우상이었다. 돌이켜보니 내 플레이가 플라티니 스타일에 상당히 가까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순탄하던 김병수에게 시련이 닥쳤다. 1986년 경신고 1학년 때였다. 왼쪽 발목이 굉장히 아팠다. 뛰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감독의 지시로 며칠을 쉬니까 괜찮아졌다. 통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김병수는 “뛰고 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무리가 갔다. 몸이 굉장히 안 좋아졌다. 발목 인대가 심각할 정도로 늘어난 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고 기억했다.
마냥 쉰다고 낫는 것도 아니었다. 근본적인 문제인 부상의 싹을 잘라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술을 하고 재활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재활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작은 부상이 쌓이고 쌓여 큰 부상이 돼 선수 생명을 위협했다. 그렇게 그라운드를 떠난 선수가 많았다.
김병수는 이에 대해 “단순히 잠깐 아픈 게 아니었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치료와 재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엔 축구선수가 수술을 하면 축구화를 벗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압박 붕대로 감는 등 그냥 버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왼쪽 발목에서 시작된 부상은 방치된 상태에서 왼쪽 무릎으로 번졌고 오른쪽 발목과 무릎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병수는 1987년 7월 캐나다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U-17 월드컵에 출전했으나 부상의 여파로 1분도 뛰지 못한 채 벤치에서 친구들이 뛰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1992년 올림픽대표팀
김병수는 고려대 1학년인 1989년 6월 대통령배대회 때 태극 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뛰어난 플레이로 이회택 감독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회택 감독은 대표팀 숙소인 타워호텔에서 김병수를 따로 불러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 데려갈 테니 수술부터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수술 비용이 없어 하지 못했다. 더구나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 출전을 강행하면서 부상이 악화됐다. 그때부터 1년에 1경기씩만 뛰고 남은 시간은 쉬기만 했다. 당연히 이탈리아월드컵 출전은 물거품이 됐다.
김병수는 “고려대 시절 4경기를 했다. 그 가운데 3경기가 고연전이었다. 난 정기전용 선수였다”며 “당시 고연전의 의미는 상당했다. 1년 쉬고 1,2주만 운동하고 경기를 했다. 아팠으나 그라운드에서 뛰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다만 내 스스로 (부상을)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게 아쉬울 뿐”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김병수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그리고 수술 후 재활 없이 다시 뛰어야 했다. 상태는 점점 악화돼 갔다. 3개월 이상 훈련하지도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크라머 총감독과 김삼락 감독 체제의 올림픽대표에 뽑혔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훈련을 못해도 되니까 경기만 뛰라는 것이었다. 현재 대표팀 체제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때는 가능했다. 그만큼 김병수의 가치는 대단했다.
김병수는 “그냥 쉬고 있는데 올림픽대표팀에서 오라고 했다. 2년 만의 대표팀 복귀였다. 외국인 피지컬 트레이너가 나를 전담해 재활을 도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본 재활 치료였다”고 말했다.
김병수는 올림픽대표팀 코칭스태프의 기대에 부응했다. 1992년 1월 18일부터 30일까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최종예선에서 맹활약하며 올림픽대표팀의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특히 1월 27일 벌어진 일본과의 4차전에서 김병수의 플레이가 빛났다.
한국은 일본전 이전까지 1승1무1패로 본선 출전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일본전에서 반드시 이겨야 했다. 한국은 일방적으로 일본을 몰아붙였지만 수차례 얻은 득점 기회를 놓쳤다. 경기 종료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졌다. 그때 김병수가 일본 골문 앞에서 뒤로 떨어지는 공을 발리 슈팅했다. 볼은 원 바운드로 크게 튄 뒤 골문 위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경기에서 공격수로 뛰었던 곽경근 감독은 “(김병수는)득점 감각이 뛰어났다.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슈팅하는 순간 골이라는 걸 직감했다”고 기억했다. 김병수도 일본전 결승골을 가장 기억에 남는 골로 꼽았다. 김병수는 “최종예선 직전 근육을 다친 상태였다. 그래서 훈련 한번 못하고 경기를 했다. 그 상태에서 어렵게 골을 넣었다. 비껴 차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볼이 떴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승리로 한국은 최종예선 통과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경기가 올림픽대표팀의 최종예선 무패 행진(18승3무, 11월 16일 현재)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김병수에게는 선수로서의 마지막 무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올림픽 최종예선을 마친 뒤 무릎 수술을 해 바르셀로나올림픽 본선에는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해 김병수는 국내에 없었다.
김병수는 포항 스틸러스의 기술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올시즌 포항 K리그 우승의 숨은 공신이다.(사진 김수홍)
1997년 나고야 코스모석유
1993년 고려대를 졸업한 김병수는 K리그 무대를 두드리지 않았다. 부상 후유증으로 각 구단이 김병수의 영입을 꺼린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모든 구단이 그런 건 아니었다. 이회택 감독의 포항제철은 재능 있는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면서 홍명보, 황선홍에 이어 3번째로 김병수를 선택했다. 그렇지만 김병수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발목 상태가 온전치 않아 선수로 뛰기 어려웠다.
훈련도 못하는 선수가 프로 세계에 있다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축구를 그만두려 했던 김병수는 한국이 아닌 일본행을 택했다. J리그가 아닌 실업축구팀(J2리그)이었다. 훈련 없이 경기만 뛰고 팀에서 수술과 재활 치료를 돕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연봉도 수당을 포함해 2억 원 수준이었다. K리그에는 연봉 1억 원 선수도 없던 시절이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나고야 코스모석유에서 뛰었다. 선수로서 가장 오랫동안 운동을 했다. 무리하지 않다 보니 몸도 상당히 좋아졌다. 그리고 26살이 되었을 때 뒤가 보일 정도로 축구에 눈을 떴다. 한국 국가대표팀에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훈련을 하지 못했다. 대표팀 합류는 불가능했다. 김병수는 “가장 행복했다. 일본에서 뛰었던 모든 경기가 다 기억에 남는다. 정말 편안하게 경기를 했다”고 말했다.
김병수는 1997년 28살의 나이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고질적인 부상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미련도 없었다. 모든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 들였다. 김병수는 “내 스스로 관리를 못한 것이다.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부주의였다. 운명론에서 봤을 때 난 정말 이만큼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불운의 축구 천재’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난 절대 불운하지 않다. 또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다만 아쉬운 게 딱 하나 있다. 한 번이라도 아프지 않은 상태에서 90분을 뛰었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다. 다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다.”
2007년 포항 스틸러스
김병수는 현재 포항 스틸러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3년부터 시작해 벌써 5년째다. 공식 직함은 기술부장이다. 1, 2군 코치를 맡았다가 올해부터 기술부장 일을 하고 있다. 국내 유망 선수를 스카우트하고 포철동초-포철중-포철공고로 이어지는 유소년 시스템을 관리한다. 1군 선수들에 대한 평가도 빼놓지 않는 등 포항 구단의 전반적인 운영에 관여하고 있다.
올시즌 포항이 K리그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던 데에는 김병수의 공도 있다. 포항의 한 관계자는 “(조)성환이가 자존심이 강해 외부 지적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김부장의 말이라면 다르다. 바로 자신의 단점을 고친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김병수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3년간 포철공고 코치를 맡았다. 박원재, 황진성, 신화용 등 포항의 우승 주역들과 오범석(요코하마 FC)이 김병수의 지도 아래 컸다. 황진성은 “김부장님의 지도를 받고 싶어 일부러 포철공고로 전학왔다”고 했다.
김병수는 제자들이 어느덧 포항의 주축 선수로 성장한 것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볼은 좀 찼지만 빌빌대던 아이들이었다.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 몰랐다. 내가 가르쳤던 선수들이 커가는 걸 보니 흡족하다. 다만 (남)익경이, (이)수환이(이상 광주) 등 기대보다 못 큰 선수도 있어 아쉽다.”
11월 11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포항 선수단이 우승 후 헹가래를 치고 있을 때 김병수는 한편에서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김병수는 언젠가 다시 지도자의 길을 걷겠다고 했다.
“선수보다 지도자가 더 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과거보단 현재가 중요한 것이다. 난 지도자로서 행복하다. 공교롭게도 고질적인 부상이 내게는 축구를 볼 수 있는 지혜를 더 빨리 줬다. 언제나 그렇듯 운동장이 그립다.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은 그라운드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 삶의 중심은 축구다. 지금껏 축구가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 지도 방식은 휴머니즘을 깔고 있다. 축구도 인간이 하는 것이다. 감동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싶다.”
김병수에게 마지막으로 한국축구에 대해 아쉬움이 없느냐고 물었다. 부상과 재활에 관련된 답변은 나오지 않았다. 돌아온 대답은 색깔 없는 K리그였다. 김병수는 “지도자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있어야 한다. 힘들더라도 어린 선수들을 키워 선수층을 밑에서부터 잘 다져야 한다.
또 각 팀은 우승을 목표로 할 게 아니라 저마다의 특색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축구의 미래가 어디 있겠나. 올시즌 포항의 우승이 자극제가 됐을 것으로 본다”고 강조했다
※“박종환, 병수 보러 안 오나”
소년 김병수는 타고난 천재였다. 거기에 노력파였다. 김병수는 “재능은 타고 나야 한다. 그렇지만 노력 없이 성공할 수는 없다”며 “정말 축구를 열심히 했다. 그래서 잠 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1980년대 포항제철의 숙소는 서울 잠실의 장미아파트 근처에 있었다. 그곳에는 잔디 구장이 있었다. 축구에 푹 빠진 김병수에게는 최고의 훈련장이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쉬지 않고 축구를 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불을 밝히고 기량을 연마했다. 그런데 훼방꾼이 생겼다. 숙소 관리 아저씨였다. 밤마다 운동을 하니 전기요금이 만만치 않았다. 또 당시 잔디 상태도 좋은 편이 아니라 관리가 필요했다. 김병수가 매일 운동을 하니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병수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쫓아 내면 다른 잔디 구장으로 가서 운동을 했다. 숨바꼭질이 이어지면서 훈련장을 한 바퀴 돌았다. 1년간 실랑이가 계속되다 보니 결국 관리 아저씨도 두 손을 들었다. “빨리 대표선수가 되도록 해라. 그런데 박종환은 (김)병수 보러 안 오나.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는 걸 봐야 하는데.”
김병수는 박종환 전 대구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김병수가 대표팀에서 활약할 때에는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지휘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이 대표팀을 맡았으나 그때 김병수는 수술을 하고 쉬고 있었다.
첫댓글 진정한 천재...포항의 전술의 실질적인 브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