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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곡자(鬼谷子)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손빈(孫臏), 방연(龐涓), 범려의 스승 귀곡자(鬼谷子)
사주(四柱) 처음 만들어낸 범려 스승 귀곡자(鬼谷子)
귀곡자(鬼谷子)는 2천여 년 전 중국의 전국(戰國)시기의 노자(老子)와 공자(孔子) 같은 걸출한 사상가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귀곡자는 천문과 수학에 정통하고 또한 선견지명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계략을
결정하는데 능란하였다.
전국 시기의 가장 저명한 유세가인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와 군사가인 손빈(孫臏), 방연(龐涓) 등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제자이다.
귀곡자는 신비한 느낌이 매우 짙었기 때문에 ‘귀곡신(鬼谷神)’이라고 높여 불렀다.
귀곡자는 어떻게 이렇게 이상한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일까? 어떤 기록에는 그가 귀곡에 은거했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또 민간전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귀곡자의 모친은 당시에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집안의 여인으로 한번은 산 위에서 우연히 해골바가지 속에서
자라난 벼를 먹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얼마 안 되어 영문도 모르게 임신이 된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 풍속을 문란하게 했다고 질책했다. 이웃들의 비웃음을
살까 두려워 급히 집에서 내쫓고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산 속으로 도망가 아이를 낳은 후 자살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가 그 어머니가 ‘귀곡’을 먹고 그를 낳았다고 생각하여 그를 ‘귀곡자’라고 불렀다.
귀곡자는 태어나서부터 모친이 없어 매우 불쌍했다. 전하는 바로는 산 속의 신호(神虎) 한 마리가 그에게 젖을
먹여 키워 그는 신호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자라난 후에 그가 거주하는 호랑이굴 속에서 ‘무자천서(無字
天書)’를 한 권 발견하여 귀곡자는 밤낮으로 깊이 연구하여 결국에는 깨달음을 얻어 대단한 학문을 터득하게
되었고 점술과 관상 등의 기술에 뛰어났다.
게다가 그의 탄생에도 신비스런 색채가 강렬하여 사람들은 모두 ‘귀곡은 신이 낳았다’고 하여 신선이라고 생각
했다. 신선이니 수명도 당연히 매우 길었다.
역사서 속에서 귀곡자는 2, 3천살을 살았으니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귀곡자가 태어났을 때는 중국 역사상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였다. 각 제후국이 서로 공격하여 패권을
다투며 모두 천하를 통일하기를 바랐으므로 부국강병책을 서로 연구했다.
따라서 제자백가가 흥기하고 지식인들이 열국을 주유함으로써 평생의 포부를 실현하던 시기였다.
이때 귀곡자는 산 속에 은거하며 전심으로 학문을 연구하여 도술이 깊고 정밀하여 기서(奇書)를 한 권 써서
《귀곡자(鬼谷子)》라 이름 하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싶어 하던 차에 어느 날 마침
근면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두 청년 소진과 장의를 만났고 기꺼이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후에 연달아 아주 많은 제자를 받아 가장 많았을 때는 5백여 명에 달했는데 이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대단한
숫자였다. 귀곡자는 학생들의 서로 다른 특징에 맞추어 각기 유세, 병법, 음양, 술법 등의 학문을 전수해
주었다.
소진과 장의가 귀곡자를 따라 공부한지 11년이 되자 귀곡자는 그들 둘과 유세술을 배운 여러 학생들의 학업을
마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형식의 시험을 보았다.
그는 하인에게 빈터의 땅에 10개의 구멍을 파게한 후 학생들이 차례로 구멍 속으로 들어가라고 한 다음
그들에게 말했다.
“만약에 너희들이 한 말이 나를 울릴 수 있다면 앞으로 군주의 마음을 능히 움직여 공을 세워 명성을 날릴 수
있을 것이니라.”
결과는 소진이 구멍 아래로 내려가 유세할 때, 어조가 때로는 기개가 있고 격앙되며 때로는 완곡하게 사람을
감동시켜 귀곡자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줄줄 흘러 옷섶을 다 적셨다. 장의의 말재간도 아주 좋아 스승의 마음이
아련해져 눈물을 훔치게 했다.
소진과 장의는 학업이 끝난 후에 각국으로 유세하러 떠날 준비를 했는데, 귀곡자는 그들에게 진(秦)나라를 선정
해주었다. 왜냐하면 칠웅(七雄) 중에 진나라가 가장 강대했고 진왕이 패권을 장악하려는 야심도 가장 컸기 때문
이다.
그러나 소진과 장의 두 사람은 제(齊)나라에서 진나라로 가는 길도 매우 멀었고 가는 길도 알지 못했다.
귀곡자가 자신의 신발을 하나 벗어 길가를 향해 던지자 신발이 순식간에 작은 개로 변하여 머리와 꼬리를 흔들
며 앞에서 그들을 데리고 북쪽 방향으로 갔다.
개가 매우 빨리 뛰어 그들 둘도 자기도 모르게 매우 빨리 걸어 당일에 진나라에 도착했다.
훗날 그들 둘은 귀곡자의 학설로 거대한 성공을 이루었다. 장의는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오래지 않아 진은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병법을 배운 학생들 중에는 훗날 유명한 군사가가 된 방연과 손빈 두 사람이 있다.
귀곡자가 그들에게 본 시험도 매우 흥미 있었는데, 목적은 학생들에게 자고로 전투에서는 적을 기만하는 전술을
쓸 수 있다는 원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험은 귀곡자가 방 안에 앉아서 학생들이 자신을 속일 방법을 생각해서 방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먼저 방연이 놀랍고 황당한 얼굴로 방으로 뛰어 들어와 말했다.
“사부께 아룁니다. 원시천존(元始天尊)께서 이미 도착하셨으니 사부께서 나오셔서 영접하시지요.”
귀곡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방연은 또 다시 계책을 세워 급히 뛰어 들어와 신발도 한 짝 떨어뜨리고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사부, 구천현녀(九天玄女)께서 오셔서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귀곡자는 몸을 좀 움직였지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방연은 다급해져 세 번째 뛰어 들어올 때는 마음이 급하여
발이 걸려 넘어져 이가 부딪혀 두 개나 빠졌다. 이번에는 이전의 두 번보다 훨씬 그럴 듯 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큰일 났어요. 싸움이 났어요. 장(張)사형이 소(蘇)사형을 때려죽이겠어요!”
귀곡자는 일어나 그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나가지는 않았다.
손빈(孫臏)의 차례가 되었다. 손빈은 방으로 들어와 발했다. “사부님, 저는 분명히 안 됩니다.” 귀곡자는 어떻게
아직 시험도 보지 않았는데 안 된다고 말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손빈이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과거 5백년과 미래의 5백년까지도 능히 알 수 있는데 제가 어찌 사부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귀곡자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약간 으쓱해졌다. 손빈은 또 말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밖에 계시다면 제가 사부님을 속여 안으로 들어오시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귀곡자가 그에게 왜냐고 묻자 손빈이 대답했다.
“왜냐면 바깥의 일은 하늘의 계획이 있으니 사부님께서 알아내실 수 있지만, 방 안의 일은 하늘의 뜻이 없으므로
사부님께서 나가 계시면 알아내실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있습니다.”
귀곡자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자기를 의자에 앉혀 바깥으로 들고 나가도록 분부했다.
귀곡자가 막 문밖을 나가자마자 손빈이 크게 외쳤다. “제가 이미 사부님을 바깥으로 나가게 했습니다.” 보아하니
손빈의 지략이 방연을 크게 앞섰고, 귀곡자는 자신의 제자로 인해 매우 자랑스러웠다.
귀곡자는 손빈을 매우 신임하여 자신이 비밀스럽게 소장하고 있던 천서(天書)인 병법서를 그에게 전수해 주었다.
방연은 손빈이 천서를 얻었다는 것을 듣고 매우 증오했으나 바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훗날 방연은 위(魏)나라에서 대 책사가 되어 위왕의 신임을 얻었으나 그는 매우 소심하여 자신이 손빈의 능력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고 위왕이 손빈의 능력을 알고 난 후에 자신을 소홀히 할까 두려웠고 또 손빈이 다른 나라에
의탁하여 위나라를 위협하게 되면 어쩌나 두려웠으므로 손빈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오래지 않아 과연 위왕은 귀곡자에게 더욱 재능 있는 제자가 한명 있다는 소리를 듣고 급히 사신을 보내어 청해
왔다. 귀곡자는 아끼는 제자가 하산하는 것을 배웅하며 헤어지기 전에 손빈에게 비단주머니를 하나 주며 생명이
위급할 때 열어보라고 분부했다.
과연 귀곡자의 예측이 빗나가지 않아, 방연은 손빈이 온 것을 보고 위왕의 면전에서 손빈은 제나라 사람이니
위왕에게 충성하지 않을 것이라며 여러 가지로 이간질 시켰다. 또 손빈에게는 천서가 한 권 있는데 이것을
기꺼이 헌납해야지만 그가 위왕에게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위왕은 방연에게 가서 천서를 요구해보라고 했다. 방연은 손빈의 숙소에 와서 진실인 척 한바탕 회유와 질책을
가하더니 손빈에게 천서를 내놓으라고 말했다. 손빈이 말했다.
“내가 위나라에 온 것은 바로 위왕과 백성을 위해 충성을 다하려고 온 것이니 이를 꼭 지킬 것이네.
그리고 천서에 관해서는 내가 이미 머리 속에 잘 기억해두어 내 수중에 지닐 필요가 없다네. 못 믿겠거든 돌아
가서 가져와도 되네.”
방연은 위왕이 이미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아주 그럴듯하게 말했다. 다시 이틀이 지나, 방연은 허둥대며 손빈의
거처로 뛰어와 소리쳤다.
“큰일 났네! 위왕께서 자네가 위나라를 도망치려 하니 반드시 두 다리를 베어 한달 안에 천서를 써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 말씀 하셨네.”
손빈이 놀라 의아해하고 있는데 칼을 든 형 집행인이 이미 들어와 그가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고 두 다리의
슬개골을 떼어내었다. 손빈은 순간 아픔에 정신을 잃었고, 아주 오래 지나서야 의식불명에서 깨어났다.
그는 이것이 분명 방연이 자신을 해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그는 사부가 준 비단 주머니가 생각나 황급히 열어보니 위쪽에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미치광이로 위장하라.”
이리하여 손빈은 일부러 미친척하기 시작하여 방연을 속여 마침내 기회를 틈타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후에 손빈은 크게 수완을 나타내어 방연을 마릉도(馬陵道)에서 포위하여 결국 방연은 패배하여 자살했다.
귀곡자의 문, 무 4대 수제자들의 활약은 스승의 학설을 한층 더 빛냈다. 귀곡자 자신은 또 다시 은거하여 이리
저리 유람하였다고 한다.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귀곡자와 노자는 좋은 친구로, 노자가 세상살이의 혼란함을 싫어하여 우마차를 타고
서쪽 함곡관(函谷關)으로 갈 때 그 우마차에는 또 한사람을 태우고 있었다 하니 그가 바로 귀곡자다.
두 사람이 함곡관에 머물며 도를 논하여 노자가 유일하게 세상에 전해지는 《도덕경(道德經)》 5천자를 썼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우마차를 타고 유유히 서쪽 곤륜(崑崙)으로 떠났다.
아득히 먼 곤륜의 사막의 모래바다는 끝없이 드넓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하루하루, 일년 또 일년 생활해
나가며 어느 때 생애를 마쳤는지 알 수 없으며, 아마도 흩날리는 모래가 되었던지 아니면 구천으로 올라갔을
것이다.(안원전)
* 자평명리 원리의 유래?(자평명리의 뿌리)
1. 자평명리의 뿌리(귀곡자찬,소식부)
명리학은 춘추전국시대의 귀곡자와 낙록자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에 이르러 이허중은 위 귀곡자찬에 주해를 하니, 이것이 바로 이허중명서이며, 낙록자는 소식부를 썼는데 연해
자평과 삼명통회에 전해옵니다. 그런데 소식부에서 귀곡자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낙녹자는 귀곡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고, 귀곡자는 납갑을 창시한 인물임을 감안할 때, 명리학은 춘추전국시대 귀곡자가가
창시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이허중은 귀곡자의 주해자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잠시 명리학 서적을 시대별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춘추전국 : 귀곡자찬(귀곡자), 소식부(낙록자)
당 : 이허중명서(이허중/귀곡자찬의 주해서)
북송 : 연원(서자평/계선편,명통부,조미론,벽연부,만금부)
남송 : 연해(서대승/원리부,희기편,락석부,심경가,현기부,인감론,증애부)
송? : 적천수(경도)
명 : 五行精紀, 蘭臺妙選, 三車一覽, 應天歌, 옥정오결(안동주겸), 삼명통회(육오산인), 명리정종(장신봉)
청 : 난강망(여춘태), 자평진전(심효첨)
귀곡자찬 즉 이허중명서를 보면, 짤막한 핵심의 글이 있고 그것을부연하는 논리체瓮�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위 핵심적인 글이 귀곡자의 글이며, 그 부연 설명하는 부분이 이허중의 주해부분이라고 사료됩니다.
물론 원문이 보존되어 전해진다면, 귀곡자와 이허중의 글을 구분할 수 있겠지만...(이허중명서 참조)
연자자평은 300년의 다른 시대에 살았던 별개의 인물인 서자평(연원)과 서대승(연해)의 글을 서대승이 묶어
놓은 책입니다.(삼명통회 자평변설 참조)
그런데 위 두 학문은 부정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맥의 보완적 관계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日을 主로하는 학문이 연해자평에서 비롯된 듯 언급되고 있지만, 실제로 귀곡자찬 즉 이허중명서를 살펴보면
日을 主로 하고, 年을 本으로 하는 개념이 이미 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本主
귀곡자는 '귀곡자찬'에서,
"大抵年爲本則日爲主 月爲使則時爲輔 年爲日之本日爲命主 如君之有臣 父之有子 夫之有歸 國之有王
是胎月生時爲主本之扶援 欲得以序相承順也"
(대저 년은 本이 되고 일은 主가 되며, 월은 사용자가 되며 시는 보조자가 된다. 년은 일의 본이고 일은 명의
주이다. 예를들어 군은 신이 있고, 아비는 아들이 있고, 남편은 아내가 있고, 나라는 왕이 있는 것처럼,
태월생시는 주본을 돕고 원조하니, 이로써 순서를 서로 있어 순하고자 한다)라고 本主를 설명한다.
그러니까 日爲主 개념은 춘추전국시대의 귀곡자에 의해 이미 정립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송의 서자평이
월령용신과 격국의 개념을 도입하여 보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신살학문이 이허중명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귀곡자찬(이허중명서)에서 볼 수 있는 신살
보다 연해자평에서 더욱 많은 신살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귀곡자찬에서 볼 수 있는 數는 연해자평에서부터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명리학의 뿌리가 되는 근본서적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귀곡자찬(이허중명서)과 소식부입니다.
그리고 짧은 제 실력으로 공부해보니, 짧은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명리책보다도 포괄적이며 훌륭
합니다. 道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리학도라면 당연히 위 두 책을 긴밀히 연구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며, 이것이 바로 명리의 정통학문
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비추어 볼 때, 위 두 책의 원문을 연구하신 분은 그다지 흔하지 않습니다.
아니 읽어보았다고 해도 그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해가 구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귀곡자(鬼谷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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