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149)
곽은 학생이 박정희 정권 때 무엇을 해보았냐고 묻는 건 아니며, 늦춰 잡아 전두환, 그러니까 1980년대쯤을 상상했다고 가정했다. 그 시대에 자신이 한 일이 있다면 하나, ‘태어나는 일’이었다. 곽은 자기가 그렇게 늙어 보이는지, 학생이 근현대사 연표 학습을 게을리한 것인지 잠시 고민했다. 지루한 수업 분위기가 전환되길 기대하며 분유나 기저귀 같은 단어가 포함된 유머로 대답했다. 주름 개선 화장품 2종을 추가해 피부관리 루틴을 체계화했다. 가끔 혼자 재치 있는 대답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했냐고 묻지 그래요?’ 미시사를 포함한 세 권의 역사서를 읽고 ‘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라고 메모했다. 세대론은 의심스러운 도구였지만 젊은 사회학자의 저서는 고등학교의 심성 구조를 상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마흔이 된 지금, 곽은 ‘동시대’라는 단어에 소유권이 있다면 자신보다는 십대들의 지분이 크다는 걸 납득했다. 교사는 어린 학생들과 생활하며 유치해지기 쉬운 직업이라고들 했다. 퇴행보다는 조로(早老)가 나았다.
(204)
세상은 정치적인 음악가에게는 약간의 존경을 적선하지만, 정치하는 음악가에게는 무자비하다는 걸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언론은 정치에 발을 들였던 예술가들의 궁색한 말로와 군소정당의 반복적 실패를 부각중이다. 호사가들은 로나의 선언을 유력 정당 공천을 유리한 조건에 받기 위한 포석으로 폄하하고 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은, 팬들조차 그녀가 ‘순수함’을 잃었다고 손가락질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 또는 아스팔트에 있어야만, 허락된 자리에 머물러야만 보존되는 ‘순수함’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296)
공항이란 무섭다. 들어가도 되는 곳과 들어가면 안 되는 곳과 들어가야 하는 곳이 정해져 있다. 들고 가도 되는 것과 들고 가면 안 되는 것과 들고 가야 하는 것도 정해져 있다. 그렇게나 엄격하면서 정작 중대한 사정들은 내게 알려주지 않는다. 작은 딱지를 붙인 내 가방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사라지는 걸 지켜봤다. 내가 세상 저편이 갈 때까지 가방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내 손에 다시 쥐어질 수 있을까. 내 운명도 가방과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