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날이 옵니다.
(이사야 29 : 17-24)
이사야는 분열왕국 시대의 남유다 선지자로 유다왕 웃시야때부터 시작하여 요담, 아하스를 거쳐 히스기야 이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과 유다가 그들의 죄악을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하고 심판후 유다의 남은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회복이란 좋은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날이 왔습니다.
좋은 날은 기름진 밭으로 변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오래지 아니하여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아니하겠으며,
기름진 밭이 숲으로 여겨지지 아니하겠느냐!”
이사야가 이방나라의 대표로서 ‘레바논’을 거론하고 있습니다(사29:17b). 그 이유는 레바논 땅에서 페니키아 왕국이 발전했는데 그 중심도시가 우상을 크게 섬긴 시돈과 두로이기 때문입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아합 왕의 아내가 그 유명한 이세벨입니다. 그녀는 시돈의 제사장이며 왕인 옛바알의 딸입니다(왕상16:31).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알 신을 섬기는 무당 옛바알이 시돈의 왕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시돈은 우상 바알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시돈이 개척한 무역항이 바로 두로입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기름진 밭’(사29:17c)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를 참고하면, 복음을 받아들여서 싹을 틔울 수 있는 옥토(沃土, 비옥한 토지)인 ‘좋은 마음 밭’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마13:18-24). 따라서 오래지 아니하여(사21:17a) 700년 후가 되면 메시아가 두로와 시돈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전하게 될 것입니다(마15:21-28).
2. 좋은 날은 듣고 보는 날입니다.
18절에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귀머거리가 ..들을 것이며....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 이스라엘이 영적 귀가 뚫리고 영적 눈이 열리는 치유의 역사가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령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지방에 있는 갈릴리 호수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데리고, 사람들부터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을 그 사람의 귀에 넣으신 뒤에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를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깊은 숨을 쉬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열려라”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분명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널리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놀라워하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모두 훌륭합니다. 듣지 못하는사람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을 하게 해 주신다”라고 말했습니다.
회복은 기쁨과 즐거움을 동반합니다. 반드시요! 그 기쁨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에바다!!!
귀는 있는데, 자기 소리만 들으니 귀머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입이 있어서 말을 하는데, 자기 소리만 내뿜으니 말이 상통하지 않습니다. 벙어리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소통은 예수그리스도의 손가락에 와서 뚫어야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침을 발라야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에바다, 하늘이여 열려서 막힌 귓속으로, 굳은 혀 속으로, 딱딱한 가슴속 깊은 데로 들어오십시오. 이 사람들은 제 소리만 듣습니다. 뚫어서 하늘 소리 듣게 하십시오. 제 소리만 말합니다. 하늘의 음성을 말하게 하십시오."
"에·바·다!" 외치면 사람이 변합니다.
에바다는 우리가 만든 장치가 아니고, 변화시키는 하늘의 소리입니다. 한번 "에·바·다!" 해보십시다. "하늘이여 오소서. 나를 변하게 하옵소서.“
성서에서 죄란 무엇입니까?
귀를 막고 하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들은 대로 입으로 전하지 않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따로 잘못을 범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말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귀 뚫으시고, 입 열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음성을 듣고, 말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귀가 뚫리고 입이 열리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 천 년 전의 그 찬송이 울려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하신 일 참 훌륭합니다. 저도 행복합니다. 제 가정도 진실로 행복합니다. 우리 나라, 우리 사회도 진실로 행복합니다." 이런 찬양합니다. 에바다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좋은 날이 기쁨이 더하고 즐거움이 있는 날입니다.
19절을 보세요.
“겸손한 자에게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가난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여기에서 겸손한 자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이고 하나님을 인하여 기쁨이 더하는 자를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자를 말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 할것입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부요 한 자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여호와의 손에 자신들을 맡기고 사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쁘고 즐겁게 삽니다.
좋은 날은 악인이 끊어지는 상태입니다.
악인의 종류를 20절에서 보십시오.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회복은 오만이 끊어지고, 겸손이 살아 춤추는 것입니다. 오만과 교만은 영적 타락과 사회적 타락의 대표적 현상입니다. 겸손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영적인 회복과 사회적 회복의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사29:20a); 강포한 자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부와 권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복음이 사회적으로 살아 숨쉬게 되면 먼저 폭력의 시대가 사라지게 됩니다.
“오만한 자가 그쳤으며”(사29:20b); 오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취지 대신에 무엇을 내세우고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공동체의 다수의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창조주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의 다수의 의견이 더 옳다고 상대적인 정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는 성문회의를 통하여 결정된 다수의견을 가지고 선지자 곧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의 잘못을 책망하고 있는 자를 죄인으로 몰아 정죄하고 있다”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사29:20c);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누구일까요?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이며 악인”입니다(사11:4c). “거짓말로 의인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사29:21c). 그들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천하의 권세를 가지시게 되기 때문입니다(마28:18). 그 결과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들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요12:31). 참고로, 그리스도가 승천하심에 따라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그 일을 계속하실 것입니다(요16:8, 11).
우리들이 아담처럼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러워하면서 그 눈이 돌아가면 여전히 세상적인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매달리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십자가와 상관없은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예수님처럼
마귀의 그 시험에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고 그것을 사용하면 예수님처럼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처럼
우상을 심하게 섬긴 이방나라 레바논 땅에 메시아의 복음이 전파가 되면 사람들의 마음 밭이 옥토가 되는 놀라운 변화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예언된 "그 날"은 결코 먼 훗날이 아니라 는 사실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그 날"은 시작되었 습니다. "그 날"은 이 다음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 다. 새 역사가 시작되는 "그 날"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우리가 죄악에 묻혔던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기만 하면 "그 날"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그 찌꺼기들을 품고 있는 한 결단코 "그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아무리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녀도 우 리는 결코 새로운 생활, 감격과 기쁨의 생활을 맛볼 수는 없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던 옛 생활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청산 없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오래 믿었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어떤 변화된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를 믿을 때 자기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한 사람은 금방 새 사람이 되어 기쁨과 감격의 그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연 륜이 쌓여 갈수록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날 마다 죽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가 날마다 죽으면 날마다 새롭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자리잡은 옛 생활의 습성들을 날마다 찾아내어 그것들을 내어버릴 때 우리는 또다시 새 날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1.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다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2.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길 것입니다.
3.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뉘우치고 돌아오며
불평하던 사람이 가르침을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좋은 날이 왔습니다.
좋은 날이 왔습니다.
좋은 날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