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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성(羯城)과 오라혼성(烏羅渾城)
2020년 04월 30일
1. 「당(唐)은 동로마제국(東ROME帝國)이었다.」 한다면… …어떤 반응(反應)일까? 동로마제국(東ROME帝國)은, ‘대진국(大秦國)’을 말한다고 하였다.
※ 혹자(或者)는, 이태리(Italy반도(半島)의 로마(Rome)를 지칭(指稱)한다고도 하는데, 〈“파사(波斯)와 접(接)했다”는 것으로 보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Istanbul)】을 수도(首都)로 한 ‘동로마제국(東ROME帝國)’이 맞다.」고 본다.
「당(唐)【Tang or TANG】은, 【AD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AD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망(亡)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皇帝)가 재위(在位)한 봉건왕조(封建王朝)다.】“동로마제국(東ROME帝國)” 【4세기 무렵, 로마제국이 동(東)ㆍ서(西)로 분열(分裂)할 때 ‘아르카디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Istanbul)】을 도읍(都邑)으로 하여 세운 나라. 1,453년에 터키(Turkey)에게 망(亡)할 때까지 ‘그리스 정교’의 본산(本山)으로 찬란한 비잔틴(Byzantium) 문화를 이룩하였다고 전해진다.】이다.」하고 한다면 : 웃기는 이야기라고 코웃음 칠게 뻔하다.
맞다. 당연히 코웃음 당할 이야기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분명(分明) 그렇게 가르쳐 왔다. 물론(勿論) 지금(只今)도 변(變)한 것은 없다.
※ 위의 지도(地圖)에서 ‘동로마제국(東ROME帝國)’의 수도(首都)인 “이스탄불(Istanbul)”【경사(京師)】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AmuDarya R=옥수스=규수(嬀水)】의 “중류(中流)”까지 약(約) 2,600∼2,700km로(中下流), 6,400리∼6700리 정도의 거리(距離)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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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구려(高駒驪)는,
접경(接境)하고 있던 ‘연연(蠕蠕 ; 柔然),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 : 燕), 탁발씨(拓拔氏 : 北魏)’들과 왕실(王室)간의 혼맥(婚脈)으로 결속(結束)시키고는, 강토(疆土)를 개척(開拓)하는데도 이용(利用)했는데, 〈연연(蠕蠕)【즉(卽) 유연(柔然)이다.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다.】과 은밀(隱密)히 모의(謀議)하여 : 지두간(地豆干:地豆于)의 땅을 빼앗아 서로 나누어갖기로 하였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적고 있다.
고구려(高駒驪)는, 당시(當時),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및 동구라파(東歐羅巴)를 아울렀던 대제국(大帝國)을 건설(建設)했던 조선왕조(朝鮮王朝)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서론(序論)은 아래의 것들을 이해(理解)하는데 도움이 될까한 것이다.
3.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에서, 후조【後趙 : 서력(西曆) 319-351년】 를 설명(說明)하기를 :
《갈족(羯族) 석륵(石勒)은, 312년에 양국(襄國)을 중심으로 하북(河北)일대에 세력을 구축하고, 319년에는 조왕(趙王)에 즉위, 329년에는 전조(前趙)를 멸망시켰다. 330년 9월에는 참칭(僭稱)하였다. 333년, 석륵(石勒)이 죽자, 태자(太子) 석홍(石弘)이어 받고, 서울(京)을 업(鄴)으로 옮기고, 338년에는 단부(段部)를 멸하고, 339년에는 동진을 공격하여 ‘장강(長江) 이북(以北)’지역을 장악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350년, 양자(養子) 석민(石閔)이 즉위(卽位)하여 “염위(冉魏)”를 건국하였는데, 이때 석민(石閔)은 후조(後趙)의 주요민족(主要民族)이던 갈족(羯族)을 학살하였다. 양국에서 석지(石祗)가 일시적으로 후조(後趙)를 부활시켰으나, 351년에 부하의 반란으로 살해되어 후조(後趙)는 멸망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卽) 후조[後趙AD 319년-351년]의 시조(始祖)이자 석륵(石勒)【고조(高祖)-명(明) 황제(皇帝)】은, 갈족(羯族)으로, 「갈족(羯族)은, 후조(後趙)의 주요민족(主要民族)이었는데, 지들끼리 권력다툼으로 치고 박고 싸우다가 석호(石虎)의 양자(養子) 석민(石閔 : 漢人)이 즉위(卽位)하고, 국호(國號)를 염위(冉魏)라고 하면서, 31년 만에 멸망(滅亡)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석민(石閔)”은, 당시 주요민족(主要民族)이었던 갈족(羯族)의 집집마다 하나하나 찾아내어 모조리 목을 베어버렸다고 전해지는데, 갈족(羯族)은,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소위 말하는 “코카서스 인종[Caucasian race]”이었다는 사실(事實)인데, 쉽게 말하면 구라파인종(歐羅巴人種)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런 ‘구라파(歐羅巴)인종(人種)’ 부족(部族)이 오늘날의 하북(河北)【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과 내몽고(內蒙古)등지(等地)】지방에 둥지를 틀고 살다가, 황제(皇帝)를 참칭(僭稱)했고, 한 때는 “장강(長江) 이북(以北)”의 중원(中原) 요충지(要衝地) 땅에서 군림(君臨)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중원(中原) 요충지(要衝地) 땅에 이들 코카서스인종【高加索人種(英語:Caucasian race, Caucasoid)】과 이들과의 혼혈(混血)등 대규모(大規模) 인종(人種)집단(集團)이 존재(存在)했거나 그 흔적(痕迹)이 있어야 함은 당연(當然)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석호(石虎)의 한인(漢人) 양자(養子)였다는 석민(石閔)은 황제(皇帝)에 오르기 전(前)에, 후조(後趙)의 주요민족(主要民族)이었다는 “갈족(羯族)”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몰살(沒殺)”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갈족(羯族)”의 흔적(痕迹)이나 후손(後孫)들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근데 이게 사실(史實)【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問題)다.
당시(當時)의 역사서(歷史書)를 보면,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시대(時代)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신(自身)들의 앞가림하기에도 바빴던 혼돈(混沌)의 시대에, 「한두 명도 아닌 수십만(數十萬)으로 추정(推定)되는 갈족(羯族) 전부(全部)를 몰살(沒殺)시켰다.」는 사가(史家)들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사기(詐欺)다.
이것은 역사(歷史)조작(造作)이다. 즉(卽) 조선사(朝鮮史)를 반도(半島)로 이동(移動)시켜버리고, 그 빈 공간(空間)을 채울 무리가 마땅치 않자, 갈족(羯族)의 “석륵(石勒)”을 등장(登場)시켰으나, 갈족(羯族)의 후예가 없다면 조작(造作)이 탄로(綻露)나는 것을 불 보듯 뻔한 것이므로, 여기에 “양자(養子) 석민(石閔)을 등장(登場)시키고, 원한(怨恨)때문에 갈족(羯族) 전부를 학살(虐殺)시켰다.”고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의 아프리카(Africa) 또는 남아메리카(South America))등지를 한 때 지배(支配)했던 구라파(歐羅巴)인들의 후예(後裔)들은 지금도 생생(生生)하게 그 흔적(痕迹)을 식민지(植民地) 땅에 남겨 놓고, 후예(後裔)와 혼혈(混血)들은 그곳의 주류(主流)로 살고 있다. 이게 인간사(人間事)다.】
본래(本來) “갈족(羯族)”의 나라는,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규수:嬀水)’ 유역(流域) 남(南)쪽에 있었다. 그들의 도성(都城)이 바로 갈성(羯城)이다.
○ 「갈성(羯城)이니, 오라혼성(烏羅渾城)」 이니 하는 말은, 우리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와 무슨 관계(關係)가 있지? 반문(反問)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분명(分明) 관계(關係)가 있다. 모두 지명(地名)이며, 소국(小國) 서울(都)의 성(城) 이름이다.
新唐書43 下 / 志 第33 下 / 地理7 下 羈縻州 / 西域 : 西域府十六,州七十二.【龍朔元年,以隴州南由令王名遠為吐火羅道置州縣使,自于闐以西,波斯以東,凡十六國,以其王都為都督府,以其屬部為州縣.凡州八十八,縣百一十,軍,府百二十六.】
月支都督府,以吐火羅葉護阿緩城置.領州二十五.藍氏州以缽勃城置.大夏州以縛叱城置.漢樓州以俱祿犍城置.弗敵州以烏邏氈城置.沙律州以咄城置.➊媯水州以羯城置.盤越州以忽婆城置.➋忸密州以烏羅渾城置.伽倍州以摩彥城置.粟特州以阿捺臘城置.缽羅州以蘭城置.
위 글의 “➊+➋”의 「규수주(嬀水州)와 뉴밀주(忸密州)」가 오늘의 주제(主題)다. 곧 월지도독부(月支都督府)내에 여러 주(州)를 새로 설치했는데, 이 중에 규수주(嬀水州)와 뉴밀주(忸密州)가 포함되어 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 월지(月支)는 곧 마한(馬韓)의 속국(屬國)이었다. 이곳은 ‘아무다리아강’ 유역(流域) 일대(一帶)다.】
이곳 즉(卽) “서역(西域)에 설치(設置)했다”고 분명(分明)하게 밝히고 있고, 또 지형지세(地形地勢) 또한 오늘날의 아랄해(Aral海)와 그 이남(以南)지방이야기다.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이야기란 것을 잊으면 안 된다.
(1) 갈성(羯城)과 규수(嬀水)【아무다리아강이다.】:「媯 水 州 以 羯 城 置 : 갈성(羯城)에 규수주(嬀水州)를 설치했다.」고 하였다.
규수(嬀水)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아랄 해(Aral, 海)로 흘러드는 “아무다리아강”을 말하는 것이다. ‘총령(葱嶺)=파미르고원’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북방(西北方)으로 흘러 아랄 해(Aral, 海)로 들어가는데, 이 유역(流域)의 남안(南岸)에 있던 갈성(羯城) 땅에, 이때에 이르러 “규수주(嬀水州)”를 설치(設置)했다는 말이다.
갈성(羯城)이란 말은, 갈족(羯族) 나라의 서울(京)이었다. 이러한 이들이 일만(一萬)리 동(東)쪽 너머에 있었다는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가!
【규수(嬀水)는, 본래(本來) 상곡군(上谷郡)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하북성(河北省)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곳 하북성(河北省) 주요지명(主要地名)들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규수(嬀水)일대에서 이동(移動)되어 자리 잡은 것이다.】
갈족(羯族) : 十六國春秋 卷 02 / 後趙錄 : 《石勒字世龍,上党武鄉羯人.十一月,勒即位,改元,稱為趙王元年,始建社稷,立宗廟,主書司典胡人出內,重其禁法,不得侮易衣冠華族.號胡為國人.》이라고 하였다.
● 갈성(羯城) : ‘갈(羯)’은 종족(種族)의 이름이고, 갈족(羯族)의 성(城) 이름이고, 그 나라의 서울(都)을 말한다. 또한 ‘갈(羯)’이란 말은 ‘갈양(羯羊)’을 말하는 것이니, 갈양(羯羊)과 함께 이목(移牧), 유목(遊牧)하던 부족(部族)들을 지칭(指稱)하는 말이기도 한데, 갈족(羯族)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 기미주(羈縻州)편의 서역(西域)편을 보면 :
우선(于先), 갈족(羯族)이란 인종(人種)에 대해 우선 알아야겠다. 한어(漢語) 위키백과를 보면 : 이 종족(種族)은 우리들과는 전혀 다른 형상(形相)을 지닌 무리들이었는데, 갈인(羯人)에 대한 기원(起源)이나 이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羯人起源記載不詳】고 하였다.
이들의 외모(外貌)에 대해서는 : 〈코는 높고, 수염이 많은 자(者)들〉이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혹은 서(西)아세아(亞細亞) 인종(人種)〉이라고 하였다. 【外貌:冉魏時代,對羯人進行大規模誅殺,高鼻多鬚,的胡人和漢人也遭濫殺,學者夏曾佑據此推測羯人的外貌可能是,高鼻多鬚,來自於中亞或西亞】
또 다른 학자(學者) 역시(亦是), 〈갈인(羯人)은 모두 눈은 깊고, 코는 높고, 수염이 많은 것이 특징(特徵)이다.【羯人具有深目、高鼻、多鬚的特點】〉라고 하였다.
중국(中國)판 ‘위키백과’를 찾아보면 : 〈羯人具有深目,高鼻,多鬚的特點.體貌特徵類似於高加索人種 : 갈인(羯人)은 눈은 깊고, 코는 높고, 수염이 많은 것이 특징(特徵)이다. 체모(體貌)의 특징(特徵)은 고가색(高加索)【코카서스인종(Caucasoids)】인종(人種)과 유사(類似)하다.〉고 말하고 있다.
高加索人種(英語:Caucasian race, Caucasoid)은, 구라파(歐羅巴)인종(人種)을 말하는 것이다. 즉(卽) 〈갈족(羯族)이란 이민족(異民族)은 오늘날의 구라파(歐羅巴)인종(人種)이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무리(衆)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집단(集團)으로 수만(數萬), 수십만(數十萬)이 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일대(一帶)로 이주(移住)를 했다면, 이에 걸 맞는 기록(記錄)이나 흔적(痕迹), 설화(說話)등등이 구전(口傳)으로 나마도 있을 것이나, 이런 것들에 어떤 징후(徵候), 흔적(痕迹) 조차도 없다는 것은, “이들은 그곳에 없었다.”는 말과 같다고 본다.
이들이 아주 잔혹(殘酷)했다는 말만 있지, 이들에 대한 무엇도 남기지 않고 있는 것은, 조작(造作)된 이야기일 가능성(可能性)이 많은 것이다.
이들에 대해, 서융(西戎)의 일족(一族), 강족(羌族)과의 혼혈(混血), 토화라(吐火羅)족(族), 강거(康居), 흉노(匈奴), 서호(西胡)등 여러 주장(主張)이이 있으나, 중요(重要)한 것은 오늘의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 이동(以東)에 살고 있는, 동방(東方)세계(世界)의 인종(人種)과는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으로, 「구라파(歐羅巴) 또는 서(西)아세아(亞細亞) 인종(人種)이었다.」는 사실이다.
〈唐會要 西域 吐火羅國〉편을 보면 : 《吐火羅.在蔥嶺之西數百里.與挹怛雜居.勝兵五萬.其國土著多男子.少婦人.故兄弟通室.婦人五夫.中略.產名駒汗血馬.北界接西域大宛之地. : 토화라(吐火羅)국 : 토화라(吐火羅)는 총령(蔥嶺)의 서쪽 수백(數百)리에 있는데, 읍달(挹怛)과 함께 섞여 산다. 승병이 5만이며, 그 나라의 토질은 남자가 많고 부인이 적어, 무릇 형제(兄弟)가 방에서 통하며, 한 부인이 다섯 남편이 있다. 중략(中略). 여기서 나오는 망아지가 한혈마(汗血馬)이다. 북쪽 지경으로 서역(西域)의 대완(大宛)의 땅과 접하였다. 獻大鳥.高七尺.其色元.足如駝.鼓翅而行.日三百里.能噉鐵.夷俗謂之駝鳥. : 대조(大鳥)를 헌상했는데, 높이가 7척이며, 그 새의 색깔이 으뜸이었는데, 낙타의 발과 같았다. 날개로 북을 치며 가는데, 하루에 3백리를 가는데, 능히 쇠를 씹을 수 있다. 오랑캐풍속에서 말하는 타조(駝鳥)이다. 中略.龍朔元年.授烏涇波使持節月氐等二十五州諸軍事月氐都督. : 용삭원년, 오경피(烏涇波)에게 사지절 월저(月氐)등 25주 제군사 월저(月氐)도독(都督) 벼슬을 내렸다. 天寶八載.其葉護失理忙伽羅遣上表曰.臣鄰境有一胡.號曰羯師.居在深山.中略. : 천보8재, 그 나라의 엽호(葉護) 실리망가라가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신(臣)은 국경 가까이 인접한 유일한 오랑캐인데, 부르기를 ‘갈사(羯師)’라고 합니다. 산속 깊은 곳에서 삽니다. 중략.》라고 하였다.
갈족(羯族)은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에서 살던 종족(種族)으로, 「눈이 크고 깊으며, 코가 높고, 수염이 많은」, 이들의 후예(後裔)들이 바로 현(現)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인들이다.
갈양(羯羊) : 여기서 가장 중요(重要)한 것이 “갈양(羯羊)‘이다. 종족(種族)이름이, 양(羊)의 이름과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만(數萬), 수십만(數十萬) 인간집단(人間集團)이, 무슨 쥐라기 또는 백악기 때의 공룡(恐龍)무리들도 아닌 바에야, 어느 날 갑자기 멸종(滅種)될 수 있었을까? 정복(征服)당한 종족(種族)은, 서서히 동화(同化)되어 본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인간사(人間事)다.
흔적(痕迹)도 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변(周邊)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에게, 또는 정복자(征服者)에게 동화(同化)되어 그들만의 특징(特徵)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인종(人種) 분포(分布)를 보면 : 기원전(紀元前:BC) 200-300년경【진(秦) 또는 ‘서한(西漢)=전한(前漢)’시대(時代)】이나, 기원후(紀元後:AD)【21세기(世紀) 작금(昨今)의 시대(時代)】 2020년이나 그 분포(分包)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 이러한 종족(種族)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냥 3-4세기(世紀) 초(初)에, 대륙(大陸)의 산서(山西) 일대(一帶)【산서(山西) : 산(山)의 서(西)쪽 지방을 말한다.】에 나타나 살았던 호족(胡族)무리【4世紀初時居住在今中國山西省一帶的胡人族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이동사(移動史)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이건 바로 역사왜곡(歷史歪曲) 및 역사조작(歷史造作)과 관련(關聯)되는 이야기다.
●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마을에 형상(形相)이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들이 수천(數千), 수만(數萬) 또는 수십만(數十萬)이 들이닥쳤다고 생각해 보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도 남을 일이다. 과거(過去)로 돌아가 보면, “눈은 깊게 들어가 있고, 코는 또 높고, 얼굴에 온통 수염으로 뒤덮인 자들이 수천(數千), 수만(數萬)이 들이닥쳤다…” …이건 곧 잔혹(殘酷)한 대(大)학살(虐殺)이 벌어질 것임에 틀림없는 ‘대(大)사건(事件)’이다.
봉화(烽火)뿐만이 아닌 변경(邊境) 파발마(擺撥馬)는, 온 땅의 먼지를 휘날리며, 황도(皇都)로 향(向)할 것이고, 변경(邊境) 주둔군(駐屯軍)에는, 비상사태(非常事態)가 발령(發令)되고, 황도(皇都) 역시(亦是)도 계엄(戒嚴)이 발령(發令)될 정도의 사건(事件)이란 이야기다.
예(例)를 들면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흑해(黑海), 카스피(裏海)해 주변에 살고 있던 많은 글란(契丹)부락(部落)들은, 구라파(歐羅巴) 만이(蠻夷)인 흉노(匈奴)가 글란(契丹)을 위협(威脅)하니, 두려움을 느낀 글란(契丹) 부락(部落)들은, 일부(一部)는 아예 항복(降伏)해 버렸고, 일부(一部)는 여기저기로 흩어져 제 살길을 찾고, 또 일부(一部) 만여(萬餘)부락(部落)은 갈 곳이 없자, 고구려(高駒驪)에 집단(集團) 투항(投降), 의탁(依託)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적고 있다.
똑같은 이치(理致)다. 「눈은 깊게 들어가 있고, 코는 또 높고, 얼굴에 온통 수염으로 뒤덮인 자들 수천(數千) 또는 수만(數萬)이 어느 날 갑자기 산서(山西)지방에 나타났다.」고 했을 때, 사가(史家)들은 이를 어떻게 기록(記錄)했을까?」
➤ 기록(記錄)이 없다는 말은, 그런 사건(事件)은, 〈애초(本是)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등장(登場)한 것이 뭐냐? 〈조정(朝庭)의 정권(政權)이 바뀌자, 갈족(羯族)들의 집집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몰살(沒殺)시켰다.〉고 추가(追加)해 적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그 “후예(後裔)들을 찾을 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역사조작(歷史造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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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밀주(忸密州)의 오라혼성(烏羅渾城) : 「忸密州以烏羅渾城置 : 오라혼성(烏羅渾城)에 뉴밀주(忸密州)를 설치(設置)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위치는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규수(嬀水 : 아무다리아강)일대(一帶)다.
뉴밀주(忸密州)는, 오라혼성(烏羅渾城)에 두었다.【忸 密 州, 以 烏 羅 渾 城 置】오라혼성(烏羅渾城)이란 오라혼국(烏羅渾國)의 서울(都)이다.
‘오라혼국(烏羅渾國)’이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嬀水)’ 유역(流域)에 있었다는 증거(證據)다.
그런데 “오라혼국(烏羅渾國)의 서울(國都)인 오라혼성(烏羅渾城)은 서역(西域) 땅인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규수:嬀水)’ 주변일대에 있는데, 그 나라는 장안(長安)동북방(東北方) 6,300리에 있다고 하면, 이건 어떻게 되는 거지? 곧
동서(同書)【舊唐書】北狄. 烏羅渾;《烏羅渾,蓋後魏之烏洛侯也,今亦謂之烏羅護,其國在京師東北六千三百裡,東與靺鞨,西與突厥,南與契丹,北與烏丸接.風俗與靺鞨同. : 오라혼(烏羅渾)은, 후위(後魏)시절의 오낙후(烏洛侯)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동북(東北) 6천3백리에 있는데, 동(東)쪽에는 말갈(靺鞨)이, 서(西)쪽에는 돌궐(突厥)이, 남(南)족에는 글란(契丹)이, 북(北)족에는 오환(烏丸)과 접해 있다. 풍속(風俗)은 말갈(靺鞨)과 같다.》고 하였다.
오라혼성(烏羅渾城) : 장안(長安)으로부터 서(西)쪽으로 1 만리(萬里) 떨어져 있다.【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규수:嬀水) 주변(周邊)】그런데,
오라혼국(烏羅渾國)은 : 장안(長安) 동북방(東北方) 6,300리에 있다.
◆ 이러한 설명(說明)은, 당시(當時)의 당(唐)나라 서울이었던 「장안(長安)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아무다리아강(규수:嬀水) 주변으로부터 서(西)쪽 또는 서남(西南)쪽 6,300리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래야 아무다리아강(규수:嬀水) 주변(周邊)에 있던 오라혼성(烏羅渾城)이 장안(長安)으로부터 동북방(東北方) 6,300리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 결국(結局) 당시(當時)의 경사(京師)거 어디였는가 하는 문제(問題)일 뿐이다. 역순(逆順)하면, 「오라혼성(烏羅渾城) 서(西)쪽 또는 서남(西南)쪽 6,300리(里)에 당시(當時)의 경사(京師)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글 서두(書頭)에 「당(唐)은 동로마제국(東ROME帝國)이었다.」한다면… …어떤 반응(反應)일까? 라고 하였음을 생각해 보자. 거리(距離)와 방향(方向)으로 보면, 딱 그렇다는 것이다.
“구글어스(Google Earth)”로 서(西)쪽 또는 서남(西南)쪽 6,300리를 찾아보면 :〈서아세아(西亞細亞)의 터기(Turkey) 땅에 닿는다.〉 이러한 곳에 당(唐)나라가 있었어야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을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결국(結局), 대륙(大陸)의 당(唐)나라는, 조선(朝鮮)의 신라(新羅)를 말하거나, 그렇지 않고 실존(實存)한 나라라고 하면,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 서(西)쪽 또는 서남(西南)쪽에 있어야 옛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
○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의 역습(逆襲)은,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으로 향한다.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기습(奇襲), 역습(逆襲)하여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를 깨뜨려야 한다.
이들의 조작(造作)된 논리(論理)를 깨뜨리지 않고는,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의 진실(眞實)찾기는, 더디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20년 04월 30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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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와 같은 이야기는 결코 과장되거나 인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닌, 합당한 논거가 있는 것이다. 명(明)나라 마문승(馬文升)이 쓴 "興復哈密國 記"를 보면(전에 이미 소개한 바 있음), 합밀의 1만여 기마(騎馬)가 숙주와 감주를 향하자, "변경에서 보고가 오자, 조선은 놀라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다.
이럴 때, 오늘날의 신강성 동쪽의 땅에 조선이 있었다는 것이고, 명(明)나라는 어디에 있었다는 것일까? "興復哈密國 記"는 바로 명(明)나라 사람이 쓴 것이라고 하면서, 합밀 동(東)쪽의 오늘날의 감숙성 숙주, 감주를 공격하니, "1만리 동쪽의 반도 땅 조선(朝鮮)에서 놀라고 두려워하였다는 말은? 명(明)나라는 없었다는 뜻이고, 그 땅에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곳 대륙 땅에 조선이 있었다면 그 이전의 당(唐)나라도 있을 수 없다는 거다.
그걸 唐書(당서)가 입증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반도(半島) 땅, 이곳 저곳에서 옛 유물유적들이 발굴된다.
이렇게 많은 뮤물유적들이 발굴되었고, 오늘도 발굴되고 있지만, 하나같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유물유적들에게서 확실하게 시대를 구분, 또는 구별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원 대륙의 땅에서는 하나같이 나오는 것들이 시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 다량으로 발굴되고,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탄소측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필요없는, 보기만 해도 언제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들이 말이다. 이게 유물이 아닌가! 왜 하나같이 반도 땅에서 발견되는 것들은 주요부분에서는 마모되고, 부서지고, 도굴당하고....또 이해불가한 것은 단군조선으로부터 5000년! 수없이 많은 옛 왕조들이 거쳤음에도 나오는 것들은 모두가 삼국의 것이다. 삼한(三韓)의 78개 나라는 어디로 증발해 버렸나? 그 이전의 위만조선이니 기자조선이니 하는 왕조들은 사서에서만 존재하는가? 이건 조선의 백성들의 삶에 얽힌 이야기들이 될 수 없다. 곧 인간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도사곤=식민사관 논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지만, '반도조선사'는 이제 서서히 무덤속으로 사라져야 할때다.
조선왕조 가례도감에보면 코가큰 코카서스계인종이 나옵니다. 주로 궁중나인들로 그려져있는데 황인종하고는 확실히 구분됩니다. 또 청인들도 그려져인는걸로보아 여러모로 합리적 의심을 하야될겉같습니다.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잘 아시는 것이지만, 소위 이민족이라고 하여, 예부터 황인종계열과 백인종계열, 그리고 흑인종 계열은 대표적인 인종구별이었습니다. 그 중에 청색인종이니 적색인종이니 하는 구분도 있었지만 이는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표현한 것 같구요.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황인종과 백인종의 신체와 면모는 전혀 다릅니다. 또 흑인계열도 그렇구요.
이것은 인종을 폄하는 것이 아니라 구분하는 것입니다. 청인(淸人)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연행기는 직접 본 사람이 기록한 것이니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오늘날의 아세아와 중앙아세아 및 구리파 인종의 분포구도를 보아도 전한(前漢)시대의 역시기록과 튼 차이가 없다는 것은, 큰 변화가 없었다는 뜻이지요.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리며, 건강하세요.
당(唐)이 대진(大秦)이라면.....
당(唐)이 페르시아 제국이었다면,
'아무다리아강=아모하(阿母河)'을 기준하여 그 북쪽을 하북, 그 남쪽을 하남이라고 했다면....
오늘날의 하북성쪽에 있는 많은 지명들이 중앙아세아 '아무다리아강=아모하(阿母河)'의 남북 연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안록산의 범양절도사=범야국도 마찬가지다.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