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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기독교와 연관된 영리단체 대표
사기범으로 전격구속!~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 글은 비기독교인과 안티들에게 일부라고 공유를 금지합니다.
또한 마지막 3번째 글이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한국교회 확실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중심으로 영리사업을 운영했던 송00 대표가 사기범으로 전격
구속이 되었다. 왜 이런 안티 불신자 사업가와 목사들이 손을 잡고서 사업을
했는지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
2012년 11월 26일 KBS 뉴스는 1400억 사기꾼 송씨를 전격 구속시켰다고
방송을 하였다. 가난한 교회의 마지막 희망까지 이렇게 처참히 유린했던
송대표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또한 사기꾼 송 대표와 함께 일했던 뉴월드 공동체 이관우 목사도 불구속
처리가 되었다. 저런 사기꾼을 어떻게 믿고 한국교회의 재산을 맡겼다는
것인지 매우 심각한 일이 터졌다.
거기에 투자한 자들은 이제 다 망했는가? 4만 투자자는 거지가 될
심각한 일이 아닌가? 이제 기독교의 이름으로 신앙도 없는 이방인과 동업하는
행위는 제발 그만 했으면 한다.
이 일로 수천 개의 작은교회가 경제적으로 직격탄을 맞았고 지금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더 심각한 것은 무려 기독교인 피해자가 수십 만이 될 가능성까지
지금 제기가 되고 있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두고서 왜 기독교인이 아닌 신앙이 부족한 이방인을
대표로 세웠을까? 요즘은 교인도 믿지 못하는데 이방인을 대표로 세웠다는 것은
거의 도박과 같은 일이었다.
믿음이 있어도 돈 앞에서는 쉽게 흔들리는데 이방인을 대표로 세웠다니
너무 위험한 모험이었다. 교회를 세우지는 못할망정 수천 명의 가난한
목사들에게 뒷통수를 쳐도 되는가?
송 대표의 집안에 뷸교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왜 이런 자를 믿고서 거액을 맡겼는가?
너무 속상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교회와 성도들을 지금 큰 충격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 다단계 피해는 한국교회 자체를 심각하게 흔들 수 있는 매우 엄청난 대형사건이다.
더 이상 교회는 장사도 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이방인을 대표로 세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어떻게 믿고 따르면서 천억 이상을 맡긴 것은 너무 큰 실수였다.
최소한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타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 같다. 너무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교회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회원을 모집해서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심각한 건 가난한 개척교회들이 한국교회의 최후의 보루인데 이들을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정말로 송 대표는 아주 악날하고 악한 사람이다.
사기를 쳐도 일반인이 아닌 가장 극빈층인 가난한 목사와 성도를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정말로 악한 사람이다.
송00 대표자는 비기독교인으로 처음부터 기독교를 죽이려고 작정했는지 정말로 의문이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기독교를 이렇게 철저히 유린하면서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안티들의 기독교 공격보다 더 악랄한 자들이 지금 한국교회를 파괴하고 있었다. 심각!
제발 기독교인들은 사람 함부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
안티운동이 역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방인에게 돈을 맡겼는가?
한국교회는 불과 몇 년 동안 안티운동으로 최소 백만 이상이 유출이 되었다는 통게가 있다.
이런 현상 속에서 너무 순진하게 신앙으로만 생각한다면 자칫 크게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세상 사람들을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의 불신자를 정말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 장악과 인터넷 선교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냉정해야 한다.
안티운동으로 이미 수천 개의 교회들이 문을 닫았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이미 나왔다.
그것도 가장 안티운동이 극성을 부릴 때에 교회가 가장 많이 문들 닫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통계는 이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론들에서 발표된 것으로 공신력을 가지고 있다.
2005년부터 2010년에 역사상 최악의 교회 건물들이 매물로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내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식을 이제는 바꿔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통계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안티운동이 가장 폭발적으로 극성을 보였던 곳들도 인터넷이었다.
보통 이단들은 조직이 탄탄한 오프라인에서 교회를 쉽게 공격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안이 매우 허술한 인터넷 공간은 그들에게 마치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심지어 직장까지 포기하면서 기독교 안티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분명히 안티운동에 적절하게 대응을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치적으로 기독교는 분파와 교리와 개교회주의로 분열이 그 어떤 종교보다 심각하다.
만약에 캬톨릭과 뷸교와 같은 정치였다면 세상은 교회를 쉽게 유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너무 크게 분열이 되었고 이것은 안티세력들에게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
아무튼 인터넷를 장악하지 않는다면 미래 젊은이들을 교회로 모으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인터넷 카페나 혹은 선교운동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교회의 예산이 대부분 오프라인의 보이는 곳들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지금은 아이티 시대이며 스마트 폰과 인터넷 등등이 모두 융합이 이미 시작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인터넷을 두려워하면서 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전략을 포기해야 한다.
오히려 과감히 인터넷 선교와 인터넷 장악을 위해서 믿음으로 후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산나 마을은 지금까지 무려 약 1년 동안 인터넷 사역을 거의 무료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하나 후원을 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아마 호산나 마을이 경험하면서 느끼는 것을 경험으로 말하는 것이다.
마치 인터넷 사역을 교회나 혹은 선교사역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어쩌면 오프라인의 보이는 교회들보다 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 인터넷이다.
오프라인은 사람도 그리고 영역도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온란인은 상상을 초월하는 넓은 바다와 같으며 이런 곳들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보이는 오프라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온란인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지금 기성교회들 안에는 노인층들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만 흘러간다면 그들이 모두 교회를 떠나 천국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현재 교회 안에서 절은이들이 부족하다는 것이 곳곳에 감지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주로 인터넷과 스마트 세대들로 기성교회의 1세대들과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아직도 교회의 영적인 투자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래의 교회를 생각하지 않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낡은 전략에 투자하는 것이다.
미래를 장악하려면 미래를 장악할 오라인 공간들을 포기한다면 크게 실패하게 될 것이다.
특히 현대는 더 중요한 스마트 시대에 교회의 역할도 선교할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
최소한 교회의 헌금이 온라인으로 50% 이상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다.
세상의 공간에서 선교해야 할 교회의 재정을 교회 안에서 거의 소비가 된다면 말이 될까?
미래 한국교회를 위해서라면 기독교 카페와 그리고 헌신자들에게 이제는 투자해야 한다.
현재 대부분 무료로 운영하는 곳들이 많으며 그들은 믿음으로 하지만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재대로 일을 못하는 경우도 매우 허다하다.
최소한 기독교 인터넷 공간을 오프라인과 같은 무게를 두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공간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더 과감히 확산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이가 없게도 안티들을 전문으로 대응하는 인력들 조차 몇 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원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라는데 총회나 교파나 교단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판공비도다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 지금은 영적전투에서 필요한 무기를 공급하는 일이다.
과거 안티운동이 창궐할 때에 안티운동을 막을 인력이 소수만 있었어도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초기에는 안티운동도 그렇게 크게 나타나지 않았고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기에 기독교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충분히 안티운동은 막았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곳들을 모두 거부한다면 누가 기독교를 쉽게 건들 수 있곘는가?
제발 이제는 외형적인 교회건축보다 영적으로 속사람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헌금해도 일년 수조원의 헌금이 운영비와 건축 등등으로 모두 나간다면 말이 될까?
지금도 5분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너무 많아서 그런지 이제는 간증도 없는 매나른 교회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제 오직예수와 일사각오의 기독교 정신으로 순교자의 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하나님에 대한 비방은 하나님의 심판을 볼러올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예수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ㅡ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물론 외형상으로 기독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
일반인들보다 선행도 더 많이 하고 기부도 많고 또한 범죄율도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영적인 수준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어쩌면 영적으로 더 높은 수준에 오르지 못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아주 간단한 논리이지만 진짜로 믿는가 아니면 그냥 알고 있는가라는 두 가지로 니뉜다.
만약 지옥이 진짜로 믿어진다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을 믿는다.
그리고 세상의 도덕적 기준에 의한 심판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의 기준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천국이 진짜로 믿어진다면 그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모든 것을 걸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물질적인 기준에 의한 축북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본다.
만약 영생이 진짜로 믿어진다면 그는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유한한 기준에 의한 소망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생을 바라본다.
물론 이런 말들은 다 논리적이고 또한 이론적이지만 단순히 알고 있는 것과 믿는 것은 차이가 있다. 참으로 위에 있는 사실들을 다 믿는다면 자신을 위한 삶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많은 성도는 세상의 것을 가지고 세상의 모습들과 큰 차이가 없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의 만족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닌 결국 믿음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달려있다.
만족도 두 가지가 나온다. 자신을 향하는 만족과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향하는 만족이다.
부를 쌓고 그것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만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철저히 세상적인 기준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자신의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만족하는 자들이 있다. 똑같이 만족 하지만 하나는 자신을 또 하나는 이웃을 향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선진국이 아닌 오히려 부탄이라는 나라였다.
과연 물질이 만족의 기준이라면 어떻게 이런 기준이 가능하며 또한 행복이 가능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의 만족과 행복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참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가운데 그것이 참 영적인 만족을 얻게 되는 기준이다.
그런데 성도들의 양극화를 마치 신앙과 별개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비신앙적인 생각이다. 앞서 말한 천국이든 지옥이든 영생이든 그 중에 하나라도 진짜 믿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문제는 썩어져 가는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높은 영적인 수준을 믿는 성도들이 서로 한 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며 아직도 영적인 장애가 크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서로 삶이 다르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연봉이 다르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한다. 그럼 우리가 믿는 것들이 세상에서 얻는 기준보다 턱 없이 부족한 내용들인가?
아니 세상의 것들과 비교해도 부끄러워야 할 성도들이 세상의 기준에 굴복해서야 되겠는가? 참 믿음의 공도체의 모습은 높고 낮음이 점점 약해지는 것이 외적인 변화의 모습이다
그것은 초대교회에서도 서로 자기 것을 나누어 주면서 참 공동체의 모습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강제적인 사회주의에 의한 것이 아닌 영적인 신앙으로 나타난 자발적인 믿음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많은 성도들은 신앙의 기준을 애써 자본주의 논리로 합리화 시키고 있다
참 신앙인들은 과연 어떠한 민족과 행복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는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면서도 더 하고 싶어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자라고 본다. 그리고 자신의 선행에 같이 동참하기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말할 것이다.
또한 지금도 물질이 아닌 자신의 몸을 통해서 영적으로 산제사를 드리는 순교자들이 많다. 그들은 세상의 물질은 이미 포기한 자들로써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고통 속에서 믿음으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이 많다. 북한 외에도 세계 곳곳에 이런 자들이 많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기준을 가지고 성도들이 서로 함께하지 못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서 미래에 영원한 상급을 기쁨으로 보상을 하겠는가?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과
상급을 구분하려고 애써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구원이 얼마나 큰 영적인 복인가?
그 복을 알고 있다면 감히 세상의 것들을 가지고 복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것이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하늘의 복으로 바꾸려는 영적인 거룩한 도전을 위해서 나서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이제 그만 가식을 벗고 물질을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복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물질을 쌓으면서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원하시는 것과 그리고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선포를 애써 외면하는 자들이다. 영적으로 볼 때에 결코 이들은 행복한 참 만족을 알지 못한다.
이제 한국교회 성도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나타나는 세상의 자연스런 자본주의 현상인 빈부의 모습을 영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의 방법으로 극복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스스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신앙의 문제다.
적어도 진주를 발견한 신약성경의 비유를 하나의 동화나 소설로 생각하지 않고 영적이며 실제적인 천국에 대한 비유로 믿는다면 그 진주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를 걸었던 영적인 거룩한 도전이 지금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행하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있거나 혹은 밭에 감추인 보화를 아직도 발견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비유가 아닌 영적인 실제적 참 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과연 그러한 복을 발견한 자일까?
그 결과는 그 이후의 모습에서 확인을 해보자. 하나님께서 약속한 진주를 발견한 자와 밭에 감추인 보물을 발견한 자들은 그 이후 상황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것을 그 진주와 보화를 위해서 모두 쏟아 부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 비유의 공통점이다
그럼 우리 성도들이 지금 이런 이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 숫자가 너무 적다는 것이며 그리고 아직도 확신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참 행복은 자신의 만족을 자신에게 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얻고자 하는 물질도 지극히 평범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분량을 부자에 맞추거나 끝 없는 부귀에 맞춘다면 그들은 결코 자신의 것을 이웃으로 흘러서 들어가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런 자들은 세상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미 세상을 거슬러가는 위대한 영적인 도전을 하는 자들이다.
내 것의 기준이 너무 높으면 언제 이웃에게 흘러 가겠는가? 내 것이 넘쳐서 이웃에서 이웃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은 어쩌면 공동체라는 한 몸에서 나타나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 5만 교회가 넘는다고 하지만 이런 참 공동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성도들은 각각 행위대로 심판과 영생 그리고 상급도 얻을 것이다. 우리가 천국과 영생과 상급은 관두고 지옥을 두려워하는 마음만 있었도 세상에서 선행한다는 이방인들보다는 앞서서 나타날 것이다. 믿음의 삶 그것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뱍주영에 대한 종교편향 도가 너무 지나치다.ㅡ타 종교의 역습인가?
타 종교는 과연 종교편향이 없을까?
뱍주영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골을 넣을 때마다 기도셰례모니로 매우 유명한 선수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또한 철저히 종교의 자유에 속하는 부분들이다.
유렵의 선수들은 경기 중에도 쉬도 때도 없이 쳔주교 성호를 긋는 행위가 종종 나타난다.
셰계적인 선수에는 쳔주교가 많기 때문에 이런 것을 두고서 누구 하나 시비를 걸지 않는다.
호냘두도 캬카도 먜시 등등도 쳔주교 성호를 긋는 행위는 경기 중에서 자주 나타났었다.
이렇게 경기와 직접 관게가 없는 개인적인 종교적인 표현은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뱍주영의 셰례모니에 대해서 타 종교의 차별은 생각보다 너무 심하게 나타났다.
먼저 한국에서 뷸교는 노골적으로 기도 세례모니를 반대하면서 안티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터넷 마녀사냥을 만들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즉 기독교를 경계하기 위해서 한국의 뷸교는 뱍주영의 셰례모니를 걸고 넘어갔던 것이다.
이런 전략은 뷸교성향과 안티운동이 활발한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박주영 기사에는 안티들이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안티들이 공격하였다.
뱍주영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조건 비판하는 자들이 과연 순수한 팬들일까?
그 다음 유렵의 쳔주교는 과연 순수할까?
한국을 떠난 뱍주영은 유렵의 쳔주교 문화에서 종교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다고 본다.
뱍주영이 기도 셰레모니만 하지 않았어도 유렵에서 아마 더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유렵에서도 인종과 종교적인 차별까지 겹쳤서 나타났다고 본다.
결국 야스냘에서는 재대로 검증도 받지 못하고 경기에서 철저히 외면을 당했던 것이다.
이런 성향은 유렵의 천주교라는 막강한 문화가 있었으며 결코 그것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번에 스퍠인 리그에서도 여전히 이런 타 종교에 대한 차별이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경쟁자 공격수는 박주영이 적응을 못한다고 대놓고 말했는데 뱍주영의 말은 전혀 달랐다.
마치 왕따를 시키면서 적응을 못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무서운 변명인가?
뱍주영은 국가대표 선수로써 엄청난 골들을 많이 넣었고 또한 적응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또한 국내 프로리그에서도 마찬가지로 그의 활동은 전혀 문제가 없었고 해외로 진출했다.
그런데 유렵에서 겪는 종교적이며 인종적인 차별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같은 공격수 쳔주교인 야스파스는 노골적으로 뱍주영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뱍주영의 종교적인 약점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왕따문화로 대응하고 있다.
뱍주영이 골을 넣자 그 이후 야스파스가 화를 내는 모습이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이것은 과거 공격수 뱐페르시가 뱍주영에게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즉 이미 주전경쟁보다 종교적으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며 종교적 차별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대한민국 대표 공격수를 기용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아마 기도 셰례모니를 했던 뱍주영은 이런 유렵 쳔주교 문화속에서는 절대로 성공 못한다.
그것은 저들의 보이지 않는 인종주의 그리고 종교주의가 생각보다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뱍주영이 국내 프로에 있엇다면 아마 더 많은 골을 넣었고 대단한 활약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렵에서 겪는 것은 단순히 적응의 문제보다는 종교적인 차별이며 왕따 현상이다.
적응을 못하게 하는 유렵 천주교의 문화와 선수들의 왕따가 가장 큰 문제이지..,.,
왜 가만이 있는 뱍주영을 문제로 삼는가? 언제 뱍주영이 못했던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저들은 걔신교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중세시대의 역사적인 앙긍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쳔주교가 온화하다고? 그들의 문화 속에서 나타난 종교적 차별은 불교보다 더 심각하다.
한국인이 유렵에가서 인종차별을 받지 않았던 선수는 지금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요즘 호주에서는 백인의 인종차별로 한국인에 대한 묻지마 구타사건이 연일 터지고 있다.
사실 종교적이며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곳이 바로 유렵과 백인들이라는 것은 백프로다.
특히 민족주의 백인 분포가 더 많으면 많을수록 더 심하다는 것이 그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탈리아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한국에서 백인들을 이렇게 차별하는 일이 언제 있었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인들과 쳔주교인들은 가장 차별이 지금도 심하다는 것이다.
백인 비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수위는 보이지 않게 더 많았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다종교, 다문화에 의해서 백인들이 적은 곳들은 차별도 줄어들었다.
미국도 백인의 비율이 크게 줄면서 종교차별도 크게 줄었다는 것이 공식적이다(오바마)
그러나 아직도 유렵은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것이 지구상에서 어쩌면 가장 심하다고 본다.
샬롬~호산나 마을에서 알립니다.
호산나 마을의 운영자는 보수주의에서 안수를 받았습니다.
또한 세계 최고의 신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10년 가까이 검증)
역사상 최초로 공개된 신학들도 있으며 이는 한국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개혁과 안티대응을 동시에 하는 곳으로 가장 탁월하게 정보를 제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