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한 장의 정물 사진이 보여 주는 풍경, 바로 그것이었다. 아침 6시, '국기 올림'이라는 감정이 절제된 엄숙한 방송 멘트와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주변의 모든 것이 멈춰 섰다. 하루 일과를 준비하며 본관 앞을 바쁘게 움직이던 병사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멈춘다. 경건한 거수 경례 속에 청명한 가을 공기도 흐름을 멈춘 듯 바람마저 잔잔하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국기 게양대 앞에 서 있는 국기수(國旗手) 2명의 손뿐. 순백의 해군 수병 하정복을 입은 국기수들이 푸른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뻗쳐 올리며 게양줄을 잡았다. 그들의 팔과 손이 한 번씩 절도 있게 움직일 때마다 태극기는 솟고 또 솟아오른다.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본관 국기 게양대에는 이렇게 10월1일에도 변함없이 태극기가 게양됐다.
이곳에서 태극기가 휘날린 나날도 이제 50성상이 넘었다. 이로운(28) 대위는 “지난 56년간 한결같이 이곳에는 태극기가 휘날려 왔다”고 부대 국기 게양대의 오랜 유래를 강조했다. 진해기지사령부 본관 건물의 국기 게양대는 1948년 8월15일 국군이 정식으로 발족한 이후 지금까지 계속 그 자리를 지켜 왔다는 것.
그 이전 46년 조선해안경비대 시절부터 본관 건물이 사용된 점을 감안하면 이곳의 국기 게양대는 국군의 역사와 함께해 온 셈이다. 6·25전쟁 초기 북한의 침공으로 눈물을 머금고 국군이 후퇴할 때 전국의 수많은 부대 국기 게양대에서 태극기가 내려졌다. 그 가슴 아픈 순간에도 진해기지사령부의 국기 게양대만큼은 변함없이 태극기가 올라갔다.
국기 게양과 함께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국기 게양대를 주목하는 풍경은 이제 사회에서는 낯설다. 국기 게양과 강하식 시간이 되면 관공서·학교는 물론 일부 주택가에서까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해 경의를 표하던 80년대 초반까지의 풍경은 이미 아득한 추억이 돼 버렸다.
하지만 해군 진해기지사령부 등 국군 각급 부대에서만큼은 지금도 국기 게양·강하식이 여전히 엄숙하게 치러진다.
한 나라의 국기는 그 나라의 역사와 권위, 독립과 존엄을 나타내는 최고의 상징체계다. 국가를 수호하는 군대에서 국기에 남다른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한 나라의 군대와 국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 주는 사례는 많다.
50년 9월28일 서울을 수복한 한국 해병대 장병들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일이었다. 당시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시민들 중에는 서울 수복의 바로 그날, 중앙청에 다시 휘날리는 태극기를 봤을 때 북받쳐 오르는 감격·흥분·눈물을 지금도 생생히 되새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 나라의 국기가 그 나라 군대의 영광된 순간에만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전투 중 전사한 국군이 영면의 길을 떠나는 그 순간 전사자의 유해를 어머니처럼 감싸 안는 것도 태극기의 몫이다. 매일 아침저녁의 일상뿐만 아니라 가장 영광된 순간과 참을 수 없는 가슴 아픈 순간에 이르기까지 항상 국군과 함께하는 것이 바로 태극기인 것이다.
국기수 남경태(21) 병장은 “부대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는 마치 올림픽 금메달 시상식에 오르는 태극기만큼이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며 부대의 국기 게양을 맡고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남병장의 자부심은 단순히 진해기지사령부 국기 게양대의 오랜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군이 조국을 변함없이 잘 지켜 내고 있다는 사실을 하늘에 휘날리는 태극기가 가장 잘 보여 주기에 더욱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나라를 잃는 순간 더 이상 국기를 올릴 수 없으니까요.”
▲ 육·해·공군과 태극기
육군 각 부대에서 게양하는 태극기의 크기도 별도의 규정이 있다.
육군본부나 군사령부에서는 길이가 5.4m에 달하고 깃대 길이가 20m 이상인 특호 규격을 사용한다. 군단급 부대에서는 길이 4.50m의 1호, 사단급에서는 3.06m의 2호다. 전방 철책 인근의 GP·GOP 부대에서도 부대 규모에 상관없이 사단급과 동일한 2호 규격을 사용한다.
기타 영관급 장교가 지휘하는 부대는 길이 2.70m 3호 규격의 태극기를 사용한다. 각종 차량에 다는 태극기는 가장 작은 길이 27cm의 10호 규격이나 길이 45cm의 9호 규격을 적용한다.
해군은 병영뿐만 아니라 함정에도 태극기를 게양한다. 정박 중인 함정은 보통 해 뜰 때 태극기를 게양하고 해가 질 때 내린다. 항해 중이거나 전투 중인 해군 함정은 24시간 계속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원칙이다. 군함에 태극기를 다는 곳은 배에서 가장 높은 메인마스트다. 정박 중에는 마스트가 아닌 함미에 게양한다.
공군의 전투기들은 국기를 달지 않지만 국적 표시를 위한 태극 마크를 기체에 그려 넣는다.
공군 태극 마크의 도안은 김신 전 공군참모총장이 1948년 9월 미국산 L-4 연락기를 도입할 당시 미국 국적 마크에서 가운데 별 표시를 지우고 태극 무늬를 그려 넣은 것이 시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