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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강의3
제 3강 하나님이 그 아들로 말씀하심
1. 하나님이 옛날에는 여러 부분으로 또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들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시었더니,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아들로 말씀하시었는데 그(아들)는 그가 만유의 후사(後嗣)로 세우신 이요 그에 의하여 세계를 지으신 이다.
3. 그는 그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이신 자로서, 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유를 자지하시는 자로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행하신 후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으니,
4. 천사들보다도 더 좋은 이름을 계승하여 얻으신 것같이, 그와 같이 그들보다도 더욱 승(勝)하신 이가 되셨다. (「히브리서」, 제 1장 1~3절)
1. 예와 지금
저자는 말을 예와 이제의 대조로써 시작한다. 옛적에는 이러이러했더니 지금은 이러이러하다. 그렇게 말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옛날에는 옛날의 일이 있었거니와 지금은 지금의 일이 있단 말이다. 지금 사람은 옛날 일을 하고 있을 수 없다. 생명은 현재에 있다. 현재를 무시한 것은 살림이 아니다. 역사는 항상 그 시대의 아들들에게 현재 속에 들어 있는 그 의미를 이해하고 거기 합(合)하게 살기를 명령한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하는 저자는 현재의 긴급한 명령을 분명히 들은 사람이요 그 절대의 가치를 꼭 붙잡은 사람이다. 이렇게 아니할 수 없다.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一하는 그 생각이 저자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한 동기요, 말을 하되 사상의 변(邊)자리에서부터 서서히 들어가자고 어물거릴 사이 없이 직(直)히 그 중심을 첫줌에 붙들어 내어놓게 한 원인이다. 누가 충실하고 용감한 군인일까. 역사의 목소리를 명확히 알아들은 사람이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우리에게’다. 과거는 조상의 것이요, 미래는 손(孫)의 것이다마는 지금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 할 일을 진실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2. 말씀하시는 하나님
과거와 현재는 무엇으로 갈리느냐. 시계의 진자(振子)에 의해서는 아니다. 태양의 운행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 포함하는 의미로써다. 그러면 역사의 의미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나님의 말씀에서다. 왕후(王侯)의 생사로 시대를 가르려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국조(國朝)의 바뀐 날로 세대를 구별하려는 사가는 속된 사가다. 참으로 시대를 구획(區劃)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자만이다. 언제가 옛날이냐. 하나님이 그 가슴 속에 품으신 사랑을 부분적으로밖에 말씀하시지 않은 때다. 그때에 인간은 어렸고 알아들을 성(性)이 없었다. 고로 하나님은 그의 사신 진리를 여러 토막에 잘라서, 혹은 그 ‘거룩’이라는 토막을, 혹은 그 ‘의’라는 토막을, 또 혹은 그 ‘자비’라는 토막을 때를 따라 주시었다. 그 주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이렇게 하면 잘 알아들을까 저렇게 하면 나을까 하시는 듯이, 어떤 때는 홍수로 어떤 때는 기근으로 혹 어떤 때는 전쟁으로 하시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슨 까닭에 다른 시대라고 하느냐. 무엇으로 새 시대가 열렸느냐. ‘그 아들로’ 완전히 말씀하신 것으 로써다.
역사는 죽은 것이 아니요 산 것이다. 옛적을 옛적이라 하고 지금을 지금이라 함은 지나간 날을 분리하여 죽이는 일이 아니다. 역사에 의미를 붙여 산 것으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실에 의해서만 된다. 역사가 만일 하나님의 가슴에서 나오는 흐름이 아니요 그 의미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예와 이제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둘이 다 합하여 한 단어가 되고 한 문장이 되어 ‘사랑’을 드러내는 ‘말씀’이 되는 고로 서로 산 연락(聯絡)이 있다. 조상이 조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요, 자손이 자손이 되는 것도 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이 말씀 때문에 이 우주는 우리 집이 되고 생명은 이 천지에 주인이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얼마나 놀라운 사상인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다는 생각은 어찌하여 사람의 자식의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던가. 이것은 누가 발명한 것인가. 과연 이 일 자체가, 사람이 이것을 알았다는 이 일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해주신 것으로 된 일이요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을 하시는 증거라 할 수밖에 없다. ‘말’ 이것처럼 이상하고 이것처럼 위대한 것은게 되었던가는 뵈지 않는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되었던영의 나라를 물질의 나라로 번역(飜譯)하는 일이다. 하나님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일이다. 말씀이 육(肉)이 되어 우리 님이에 거하였다는 요한의 말은게과연 진리다. 하나님이 자기를 말씀하시고 말씀이 육이 되어 인간이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자기를 자기로 사유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오 말씀으로 나타내시는 하나님이다. 만물의 근원이 여기 있다. 다른 종교의 헠 수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예수가 가르치신 하나님은 도 없는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태연없는입을 다물고 앉아서 위엄만 뵈는 하나님이 아니요 걷잡을 르게 는 신비막칙(神秘莫測)의 하나님도 아니다. 사람헠 향하여 자기편에서 먼저는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사람이 자기를 알고 자기와 같은 것을 가슴 속에 품기를 바라시면서.
3. 예언자와 아들
그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를 드러내시는데 무한한 기쁨을 가지신다. 고로 그 말씀은 심히 풍성하다. 여러 가지에서, 만유에서 우리는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다. 반짝이는 별, 속삭이는 시냇물, 망망한 바다, 늘 푸른 봉우리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시인 괴테가 말한 것같이 자연은 하나님의 입으신 옷을 나타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의 깊은 가슴 속은 자연으로는 드러낼 수가 없다. 인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 함은 이것이다. 고로 하나님은 자기의 맘성을 드러내려 하실 때에 반드시 인사(人事)를 빌어 하신다. 더구나 인격 중에 가장 고결한 자를 요하신다. 예언자란 인간 중의 인간이다. 예언자의 자격은 다른 것보다 우선 고결한 양심이 제일이다. 동서고금에 아름다운 인격을 가져 인류의 사표(師表)가 되었다는 이들은 다 하나님의 예언자였다. 좁은 의미로 하면 예언자란 엘리야나 사무엘이나,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하는 이스라엘에 났던 예언자라 할 것이나, 넓게 말한다면 아브라함, 이삭을 넣을 뿐만 아니라 석가, 공자, 맹자, 노자, 소크라테스 하는 모든 이를 다 넣어 말할 것이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인격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면을 반드시 보는 것이 있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의 한 토막 혹은 몇 토막을 자기 났던 시대에 외쳤다. 우리 조상들은 그것으로 죽음을 면하고 살았다.
그러나 예언자는 아무리 위대하여도 역시 죄의 인간이었다. 그들은 흐린 렌즈요 상한 악기였다. 고로 그들은 다 같이 옛 시대에 속한다. “여러 부분으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었다는 데는 이들 대언자(代言者)와 듣는 인간의 부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또 한편 하나님의 아버지적인 무한한 자애도 드러나 있다. 고로 그 하나님의 맘성은, 드디어 예언자의 불충분한 전언과 인간의 완악(頑惡)에 견딜 수 없어, 자기 가슴을 단번에 여실히 완전히 말씀하시고야 마는 때가 왔다. 그것이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이요 새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부자는 일체다. 아들은 아버지를 전적으로 표시하는 자다. 하나님이 그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 이상 더 할 수 없이, 이후에 더 말할 것 없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말씀하시었다는 말이다. 저자의 말의 요점은 여기 있다. 즉 이제는 아들로 말씀하신 시대라는 데. 그리고 그 아들이란 물론 예수다. 이리하여 그의 주장 권면은 만세부동, 확호불변(確乎不變)의 영원의 반석 위에 선다.
아들은 누구냐. 하나님이 “만유의 후사(後嗣)로서 세우신 이요 그에 의하여 세계들을 지으신 이다.” 만유의 후사란 우주 만유, 창조하신 것 전부를 소유할 자란 말이다. 아버지의 모든 활동 모든 경영의 목적은 다만 아들에게 물려주는 데 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전혀 아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 더구나「요한복음」 에 보면 예수 자신이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또 아들은 만유의 소유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혹은 모든 시대)를 짓기도 하신이다. 하나님은 그 말씀인 즉 그의 가슴의 여실한 표시인 아들에 의하여서 모든 것을 지으셨다. 지음을 입은 것이 말씀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고 하였다. 고로 아들은 만유의 원인이요 목적이다. 만유의 권(權)이 통(統)히 그에게 있다. 아들은 그런 아들이다. 고로 그 아들의 하는 말은 책임 있을 수밖에 없다. 주인의 말을 전하는 가신의 것과 동일(同日)의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의 뜻은 그런 고로 주의하여 들으란 말이다. 고로 문맥으로 하면 2절 다음에 제2 장 1절을 붙여보는 것이 명료하다.
4. 계시와 구원
그러나 ‘아들’이란 말을 하고 저자의 가슴은 그저 간단히 그저 지나가버릴 수 없었다. 그 아들의 일에 관해서는 이 아래 자세히 말하려 하는 것이건만, 하나님이 그 아들로 이 말세에 와서 우리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해놓고 거기 따라 솟아오르는 시와 찬송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3절의 말을 단숨에 하여 이 아래 말하려는 전문의 뜻이 압축(壓縮)된 형식으로 여기 드러나게 되었다. 이 절은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아들로 말씀했다는 것은 예수의 입을 빌어 말씀하셨다는 말만이 아니다. 물론 예수가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나 말씀은 음성으로만 하는 것 아니요, 또 음성으로 하는 말이 최고의 말도 아니다. 지극한 지경은 음성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지경은 행동으로만, 생애로만 할 수 있다. 예수의 말씀은 산상수훈(山上垂訓)만이 아니다. 그 출생이 곧 말씀이요, 그 시험받고 세례받으심이 말씀이요, 그 전도 그 십자가 그 부활 그 성신이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수육(受肉) 고난, 이것이 하나님의 지극하신 말씀이다.
그러면 그 말씀의 뜻은 무엇이냐. 한마디로 하면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한 그대로다. 그러나 이것을 자세하게 풀어 말한다면 3절의 말을 빌어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① 그는 그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이신 자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요 그 본체를 표시하는 이다. 광채란 말은 ‘방사(放射)’ 라 혹은 ‘반사(反射)’라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즉 예수는 태양광선이 태양을 드러내듯이 하나님을 드러내신단 말이다. 우리가 태양을 보는 것은 태양광선에 의해서다. 태양직접, 태양 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거기서 무한히 흘러나오는 광선으로 이것을 안다. 그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보는 눈을 가지지 못하였다. 예수의 지상 생애를 통하여서 이것을 본다. 전의 모든 예언자들이 행등(行燈),석유등, 전기등이었다면 아들은 태양광선 그것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예언자와 그리스도는 분량의 차(差)만이라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분량의 차이의 생기는 원인은 질의 차이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저를 향하여 주라 하지 아니치 못하는 이유다. 본체의 형상이란 말은 본체를 여실하게 그대로 표시하는 것이란 뜻이다. 칸트가 “물 그 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한 것같이 하나님 자체는 우리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우리 눈앞에 신의 형상 그대로를 나타내어 우리로 보게 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는 영적 하나님의 육적 번역자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나게 하셨나니라.
이 진리는 말하기 어려운 진리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여실하게 나타냈다는 것은 네 주관이다. 一 이렇게 반대함을 듣고 변명할 말이 없다. 다만 두 가지가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본서와 그 외의 성경의 말이 생명의 말씀으로 역사상에 실기(實記)되어 온 것이 하나요, 또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진실하게 살았고 산 사업을 사상(史上)에 깉이고 간 것으로 공인함을 받는 것이 그 둘째다.
② 그는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유를 지지하신다. 그는 창조주를 언표(言表)할뿐만 아니라 또 창조 된 것의 의미를 또 드러낸다. 그의 능력의 말씀이란 문법상으로는 아들의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여하간 그리스도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유를 지지한다고 한다. 만유 는 위대하다 — 그러나 그는 그 자신 자립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에서 기독교는 자연 그것을 자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연주의사상과는 다르다. 성경의 사상으로 하면 만유는 하나님의 사신 말씀의 끊임없는 지지를 받아서만 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전조(前條)와 마찬가지로 많이 의심할 수 있는 진리다. 2천년전에 유대에 예수로 났던 그이가 만유의 지지자냐 — 이렇게 생각하고 대단히 어리석은 말인 듯한 감을 금할 수 없다. 그리나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가 있다. 즉 만유의 존재 이유는 어떻게 설명이 될 것이냐고. 허다한 철학은 만유의 존재의 의미를 설명해보려고 많은 애를 썼고 지금도 쓰고 있다. 그러나 과연 성공한 자가 있느냐. 왜 하늘이 있고 왜 땅이 있느냐. 왜 생이 있고 사가 있느냐. 왜 선이 있고 악이 있느냐, 등등.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만이다. 이것 없이 우주는 혼돈(混沌)이요 이것이 있어서 명료하고 정연하다. 고로 우리는 그가 만유의 지지자인 줄을 믿는다.
이상에서 우리가 알 것은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진리는 근본에서 사람의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자기편에서 찾아낸 것조차도 아니다. 내가 태양광선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요 내가 태양의 형상을 찾아낸 것도 아닌 것같이, 내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요 종교를 발명 발견한 것이 아니다. 진리 편에서, 하나님 편에서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는 인류 문명이 산출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신’ 이다. 성신으로 잉태(孕胎)하였다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그렇게 나타나고 싶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그 뜻에 쫓으셔서 하신 일이다. 예수가 나실 때에 인간의 지혜를 대표한 동방박사가 그를 만난 것은 찾아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별의 나타남을 보고, 성경의 기록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 것이었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 하신 계시다. 종교는 구경에 있어서 계시로 된다. 인간이 생각해낸 종교란 것은 없다. 촛불이 스러지는 것같이 인위로 됐던 종교의 타고 남은 빈약한 등걸이 역사상에 점점이 있다.
그리고 그 계시는 예수요, 또 예수만이다. 태양은 광선에 의하여서만 볼 수 있고 그 외에 방법이 없으며 한 사람에 두 가지 초상은 있을 수 없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또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에 대하여 취할 태도는 자연히 명료하다. 맨 마지막 길을 들어선 사람은 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③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행하시고 높은 곳에서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 진리는 계시되었다.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능력이 없는 고로 하나님 편에서 몸소 인간 앞에 나타나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볼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보면 그에게로 나가야 할 터인데 나갈 능력도 없다. 고로 진리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거기 나가는 것까지도 하나님 편에서 하실 수밖에 없었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은 이 때문에 필요 하였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에게 나가는 능력을 없애버린 것은 이 죄이기 때문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사업의 주되는 일은 이 구원이다. 예수의 생애의 목적이 십자가에 있고 십자가를 중심으로 삼아서만 그의 생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예수를 제사로 설명하는 것은 이것을 밝히자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에 주되는 것이 죄를 정결케 하시는 데 있었고 그것을 행하시기 위한 것이 십자가라 하더라도,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만으로 그 일이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희생인 동시에 또 그 희생을 바치는 제사다. 고로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지성소에 들어가 계실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지존하신 우편에 앉으시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일이 있는 것은 이 위엄의 우편에 앉으시는 영원하신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만일 살아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지 않는다면 그의 죽으심은 일개 의협적인 죽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에서 말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저자가 하려는 모든 말의 논거(論據)는 여기 있다.
성서조선 1939.6 125호
저작집30;20-109
전집20;11-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