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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한일서 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실 15-17절은 12절부터 이어지는 하나의 문장입니다. 즉, 12-14절의 내용은 곧바로 15-17절로 이어지며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12-14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기면서 청년으로 성장할 필요가 있고, 마침내 영적인 아비들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정확히 분별하며 진리를 수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신자들이 생명의 말씀으로 거듭난 직후부터 어떻게 영적인 청년들과 아비들로 성장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15-17절을 통해 알려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일서의 마지막 구절은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입니다. 이는 모든 주의 백성들은 호흡이 마칠 때까지 결코 그 마음에 우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리와 사랑과 의에 있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즉, 신앙의 여정 가운데 계속 악한 자에게 이기면서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절대로 세상을 사랑하거나 그 마음에 우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쓴 목적은 2장 1절에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요일 2:1).
즉, 오늘 우리의 본문은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알려주는 교훈이며 바로 앞 부분과 연결하면 악한 자를 이기는 강한 청년이 되도록 하는 교훈입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아비들처럼 많은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거짓과 싸워 진리를 수호해 내는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 비결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죄를 짓지 않고 강한 청년 및 아비로 성장하는 비결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사도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세상’은 헬라어로 (코스모스)인데, 그 뜻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의 통제를 받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 피조물로서의 ‘세상’은 (토브), 즉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항하는 반란 세력인 사탄이 온 세상을 다스림으로 세상은 마귀의 왕국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영역을 세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세상은 여전히 선한 것이며, 앞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상에 임하면서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은 선과 공의로 가득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라”(계 11:15).
아무튼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로 성경은 ‘세상’이라는 용어로 악한 세력의 통제를 받는 영역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피조물로서의 세상인지 혹은 악한 세력이 다스리는 영역을 말하는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에서 말하는 ‘세상’은 피조물로서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고 할 때의 ‘세상’은 영적인 의미로서 어둠이 다스리는 영역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세상’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제대로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의 이단인 영지주의 및 금욕주의, 그리고 이원론 사상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세상마저 악하게 여기고 자꾸 어디론가 은둔하는 자세를 취하며 그런 자세를 거룩이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의 ‘세상’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도 이런 영적인 의미로 세상을 묘사합니다.
[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라
](엡 2:1-3)
이러한 영적인 의미에서 ‘세상’은 마귀의 다스림을 받는 문화 및 풍조로서 사람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영역입니다. 세상에 속한 일반 사람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로서 하나님 앞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며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합니다.
한편, 복음의 세계는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임하는 영역이기에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 또는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속한 거듭난 주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갈등을 빚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 17:9).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요 17:14-16).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요 17:25).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거짓 선지자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요일 4:5).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니라”(요일 5:19).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어둠의 영들 및 그들에 속한 자들의 어둠의 영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합니다.” 즉, 세상을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공존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약간 응용하여 말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고, 아버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면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간곡히 당부한 사도 요한은 세상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및 세상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리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세상 및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즉 마귀가 다스리는 영역에는 인간과 관련하여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입니다. 즉,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에 이끌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를 하나씩 구체적으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원어로는 (헤 에피쑤미아 테스 사르코스)입니다.
제가 동일한 표현을 신약 성경 전체에서 찾아보니, 일곱 개가 나옵니다. 우리는 그 일곱 개를 통해서 ‘육신의 정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이 말씀에서 보면 ‘육신의 정욕’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만 해결됩니다. 이로 보건대, 우리 인간 안에서 주의 통치를 거절하는 모든 부분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육신의 정욕”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때 바울은 우리의 이해를 위해 육신의 정욕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나열합니다. 그것을 “육체의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0).
그리고 바울은 육신의 정욕에 의해 나타나는 육체의 일을 성령께서 우리의 새생명 가운데 나타내는 일과 대조시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2-24).
그러므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육신의 정욕’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의 악한 욕망입니다. 이는 타락한 모든 인간의 본성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의 육체와 사악한 마음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을 말합니다. 즉, 죄를 낳는 인간의 부패한 욕망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 온갖 종류의 죄를 지을 수 있는 욕구가 잠재 되어 있는 것을 뜻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그리고 이 육신의 정욕은 기회가 닿으면 죄악을 범함으로 육체의 일을 나타냅니다.
둘째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원어로는 (헤 에피쑤미아 톤 옵쌀몬)입니다. 이는 내 안에 있는 부패한 죄성인 육신의 정욕과는 달리 눈으로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욕심 및 사욕을 말합니다. 여자를 보면 음욕이 생겨나는 것, 물건을 보면 탐욕을 갖게 되는 것, 세상을 보면 내 통치 아래 두고 싶은 것 등, 아무튼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을 눈으로 보면서 한없는 욕심을 갖게 되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끝없는 추구가 “안목의 정욕”입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을 즐깁니다. 그리고 보는 것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구약에서 우상 숭배는 다른 것이 아닌 안목의 정욕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인간이 만든 우상의 거대함과 화려함과 특이함과 자극적인 형상을 보면서 계속 우상을 바라보며 그것을 신으로 섬기는 마음을 갖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안목의 정욕은 하나님을 놓치는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또한 안목의 정욕은 일반적으로 육체의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처음 정욕이기도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우리 주님을 유혹하기 위해 안목의 정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목의 정욕에 대해 긴장과 경계심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즉, 마귀가 예수님마저 안목의 정욕으로 시험했다면, 그리고 첫 사람인 하와가 안목의 정욕으로 첫 번째 죄악을 저질렀다면, 얼마나 마귀가 우리를 안목의 정욕으로 미혹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허다한 신자들이 안목의 정욕에 빠져서 마귀의 도구가 되곤 합니다.
특히 안목의 정욕은 명품, 화려한 옷, 자동차 등, 수많은 사치품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맘몬, 즉 돈을 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느새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즉, 안목의 정욕은 우리의 눈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떼어내어 썩을 세상과 우상을 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 안에 세상을 향한 욕망을 부추겨 우리로 하여금 세속적인 사람들 및 우상 숭배자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안목의 정욕은 음란과 음행의 가장 큰 요인입니다. 그리고 음란과 음행에 떨어진 영혼들은 더럽고 힘든 비참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을 항상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성경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목의 정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생의 자랑이 있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원어로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인데, 이는 세상과 관련하여 내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를 말합니다. 즉, 인기, 권력, 잘 생김, 부귀, 학력, 가문, 지식, 출신 등등, 내 자신을 드러내어 세상적인 자랑을 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은 언제나 허세 및 허탄한 자랑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6).
제가 볼 때 이생의 자랑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항상 뭐든 어떻게든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이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생의 자랑은 내가 내 왕국을 세워 내가 왕이 되고 내가 내 멋대로 주관하며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옛사람의 본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이생의 자랑에 빠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세 종류로 나타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원히 남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이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부분입니다. 이는 영원하지 않은 것은 허무와 절망으로 마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모든 수고는 반드시 썩을 것으로 마칩니다. 오직 영원히 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리라”(갈 6:7-8).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썩을 양식을 위해 주를 찾는 자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찾으라고 권하였습니다.
[
2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양식을위하여일하지말고영생하도록있는양식을위하여하라
](요 6:26-27)
그러자 이 권유를 받은 무리들은 진정한 제자를 빼고는 다 주를 떠났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를 진정으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남은 열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 6:67-68)
이처럼 영생이 아니라 썩을 것을 구하는 자들은 참된 진리와 복음의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썩을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구하기 바랍니다. 썩을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거둘 수 있으려면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그러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9-10).
즉,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으니, 선을 행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영원히 남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는 이미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영원히 남는 것과 연결되면서, 결국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갈라디아서를 보면,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과 또한 성령으로 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갈 5:16, 17, 25).
그리고 이 내용을 골로새서와 함께 보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만유의 주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욱 알아가면서 주께서 지시한 바를 내 안의 새생명으로 행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더욱 간결한 표현은,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인데, 이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죄에 대해 승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비결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
](롬 8:1-4)
그러므로 바울은 신자들은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도 있고, 또한 내 안에 있는 옛사람, 즉 육신의 정욕을 따라 죄를 범할 수도 있으니, 더욱 성령을 따라 행할 것을 당부합니다.
[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2-14)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것이 새언약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깨닫고 적용해야 할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고,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 이 세상을 등지고 기도원에 들어가서 말씀과 기도만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중세 시대에는 이러한 생각을 함으로 수도승들이 생겨났고 수녀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격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비결입니까? 다행스럽게도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그러한 격리된 삶을 아무리 살아보아도 전혀 인간 안의 더럽고 악한 죄성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다시 되찾는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도리어 우리는 이 세대를 본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세상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을 이기기 위해 세상에서 최고가 되면 됩니까?
과거에 ‘고지론’이라는 가르침이 유학생 선교에 널리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논리는 “너희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에서 최고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가 된 후 온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학생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에 힘썼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영적 성장에 대해서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최고가 되는 것이 나름 인생의 목표가 된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복음의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 중에는 나름대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신자로서 단지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기독교 라는 항목에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을 뿐 실제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켜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는 살 수 없었습니다. 이는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영적인 지식과 실력을 청년의 때에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일 뿐,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며 죽기까지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극히 적은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간교하게’ 신자들의 마음을 잡아 삼킵니다. 이처럼 ‘고지론’이라는 그럴듯한 합리화로 세상을 사랑하는 순간부터 사실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믿음과 사랑을 접는 것입니다. 어찌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주 예수님만을 죽도록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행여 그가 사랑하던 이생의 자랑이 무너지게 되면, 옛사람의 무서운 본성이 다 드러나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는데, 폭력과 거짓과 음행과 시기와 수군거림과 미움과 살인 등 무서운 죄악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그러한 신자의 삶에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으며 어둠과 죄악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에 이생의 자랑이 사실 신앙의 목적인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교회를 다니며 왜 기도를 하며 왜 헌금을 합니까? 저 깊은 곳에서의 대답은 ‘이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성경에 따르면 이미 영적으로 간음하는 자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천박한 신자일 뿐이며, 심지어 가짜 신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니 여전히 마귀에게 사주를 받는 죄의 종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서서히 진행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구약에서는 롯이 있고 신약에서는 데마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은 한때 충성스런 신자들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삶의 패턴을 보면 서서히 세상으로 흐릅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0, 12-13).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더라”(딤후 4:10).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조금씩 더 깊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 동시에 우상을 섬기는 것! 그것이 얼마나 주께 가증한 죄가 되는지 아십니까? 그러한 우상 숭배자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박기 바랍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기 바랍니다.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은 직장을 버리고 공부를 하지 않고 세상 문화와 과학과 학문을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 삶의 모든 목적이 무엇보다 먼저 내 영광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주의 나라를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청지기의 마음을 갖고 늘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경건에 힘쓰면서 군인도 되고, 경찰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의사도 되고, 상인도 되고, 은행의 직원도 되고,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도 되고 사업가도 기업의 직장인도 되기 바랍니다. 즉,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모든 종류의 일들을 하되 그 마음 동기가 주의 청지기로서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의 청지기로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신자이기 전에 한없이 게으른 악한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그러므로 열심히 이 세상에서 일하기 바랍니다. 죄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통해 공정하게 돈을 벌기 바랍니다. 그러나 다만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단지 나의 구주요 왕이신 예수께서 시키시는 일을 충성스럽게 할 뿐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권력자도 될 수 있고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도 될 수 있고 과학이나 학문 등에서 탁월한 사람으로 온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단지 우리 주 예수님께 청지기로 충성하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스스로 세상의 야망을 갖고 달려가며 “하나님! 나의 야망이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세요”라는 신앙 자세를 갖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띄라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처럼 말하라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처럼 복장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내 마음이 참으로 주를 가장 경외하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감사하고 있는지를 살피며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께서 보내시는 성령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나의 죄사함과 구원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와 생명을 다 쏟으신 우리 주님께 참으로 깊게 감사하며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 그러므로 남은 삶은 경건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해답입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7-10).
그러한 경건 가운데 주께서 내게 맡기신 이 세상의 일들을 감당할 때 우리는 세상에서 정직과 성실과 거룩한 삶의 향기를 통해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구원의 방주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7).
즉, 불신자와 식사를 하며 교제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교제하는 목적은 언제나 그들의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어둠 속에 속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주된 이유입니다.
[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고전 9:22-23)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빛이라고 하신 것을 빛이라고 말해야 하고, 어둠이라고 하신 것을 어둠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말씀하신 것을 죄라고 해야 하고, 하나님이 의라고 말씀하신 것을 의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진리하고 해야 하고, 거짓과 속임수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우리 역시 거짓과 속임수라고 말해야 합니다.
진화론, 낙태, 종교 다원화, 동성애 등, 이러한 것들은 성경에 따르면 다 어둠이며 죄이며 거짓이며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은 가장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말해야 하고 마귀의 거짓에 대해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부지런히 일하고 거룩의 향기가 되고 사랑의 향기가 되고, 요셉처럼 일하는 그곳에서, 사업터에서 복의 채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늘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불신자이면 신자가 될 수 있도록 나의 삶이 그들에게 복음의 향기가 되도록 노력하고, 맡겨진 일에 대해서도 그들에게 본이 되고 덕이 될지언정, 폐가 되거나 욕을 먹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거룩한 영향력을 나타내려면 무엇보다 거룩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믿습니다. 즉,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비결은 영광스런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면서 그 교회에서 복음의 능력을 서로 나눔으로 변화를 받아 그 변화의 힘으로 죄악 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 공동체는 무엇보다 외부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죄의 영향력을 엄중하게 차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말씀을 합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 이러므로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고전 5:7-8).
여기서 누룩은 죄를 죄라고 하지 않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무서운 죄를 용납하는 것을 뜻합니다.
[
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고전 5:1-2)
그러면서 바울은 말합니다.
[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전 5:9-13)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함께 거룩한 공동체를, 진실하고 순전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워나감이 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즉, 교회에서 하늘의 만나와 신령한 음료를 공급 받으면서, 서로 영적으로 훈련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분량으로 자라나며, 저 죄 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구별된 삶을 넉넉히 살아내면, 이 세상에서 선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비결입니다.
[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3-16)
그러나 거꾸로 성도가 세상에 물들어 살아간다면 그러한 성도는 거룩한 주의 교회를 세우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할 것이고, 도리어 교회를 더럽히는 장본인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 다리를 걸치고 있는 신자이기에 많은 비참과 실패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부실한 신자들 중 가장 교회를 더럽히는 사람은 교회를 세상화, 즉 세속화시키는 자들로서 이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 자신에게 물읍시다. 여러분은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를 강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는데 쓰임 받고 있습니까? 세상 및 세상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룩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도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즉, 세상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처럼 주의 거룩한 영으로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는다면 결코 세상을 본받지 않을 능력이 우리에게 생겨날 수도 없고, 또한 세상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되고 복음으로 서로 훈련하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 바랍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으며 그 뜻을 분별한 후 그 뜻대로 주의 영 안에서 행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목적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죄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다 바쳐 보혈을 흘리신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건한 ‘습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배 절대로 빠지지 않는 습관, 성경을 정해진 시간에 읽는 습관, 정해진 장소 및 정해신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 주기적으로 신앙 서적을 읽는 습관 등, 경건과 관련한 습관을 더욱 개발하기 바랍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은 이 시대 신자들에게 가장 힘든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른 복음을 아는 상태에서 만일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을 겸한다면 대단히 큰 영적인 유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남들에게 없는 훌륭한 습관, 바로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경건의 탁월함과 복음의 지식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와 함께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경건의 습관 하나를 정할 수 있기 바랍니다.
매일 몇 장씩 언제 어디서 성경을 읽겠다.
매일 얼마 20분씩 또는 1시간 씩 언제 어디서 기도를 하겠다.
교회 예배를 화요 예배와 토요 예배까지 반드시 참석하는 습관을 갖겠다.
자녀들과 ~~ 하는 습관을 갖겠다.
남편과 손 붙잡고 기도하고 잠드는 습관을 갖겠다
또는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매일 하나씩 듣는 훈련을 해도 좋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에서 있었던 모든 성경 연구 동영상을 하나씩 청강하듯 공부하는 습관을 갖는 것도 엄청난 유익을 줄 것입니다.
하루 한 구절씩 성경 구절 암송을 하겠다.
또는 집중적인 기도를 위해 일 주일에 한번 점심(또는 저녁) 금식을 하겠다.
개혁복음주의회에서 출판된 책을 전부 하루에 한 챕터씩 읽어 보겠다.
이 외에도 경건을 위한 셀 수 없이 많은 아름다운 습관을 오늘 주일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경건의 습관 하나가 여러분의 인생을 놀랍도록 변화시킬 것이며 영적으로 크게 도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인생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짧은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며 그 뜻대로 행한 자들은 영원한 것들을 소유하게 되면서 보는 눈과 생각하는 깊이가 남달라질 것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주의 손길을 항상 읽으며 주를 한량없이 사랑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서 주를 닮아갈 것입니다.
사실, 신자의 영적인 차이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큽니다. 여전히 영적으로 1살 짜리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깊은 진리의 세계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그 능력을 누리는 아비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원한 보람된 영향력을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잔잔히 퍼뜨리는 숨은 영적인 고수들과 늘 악한 자에게 승리하는 강한 청년들이 있습니다.
얕은 개울에서 첨벙거리며 시끄럽게 살지 말고, 말씀으로 깊어져서 주의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나를 이 땅에 보내시고 나를 십자가의 속량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다같이 베드로의 당부를 마음 속에 새기도록 합시다.
[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9, 11)
죄를 범하지 않는 악한 자를 이기는 강한 청년이 되는 비결, 나아가 궁극적으로 아비들처럼 많은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거짓과 싸워 진리를 수호해 내는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는 비결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죄를 짓지 않고 강한 청년 및 아비로 성장하는 비결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나 삶의 평가를 받을 때 참으로 잘하였도다 라는 영원한 주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영광에 들어가는 저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