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집 - 2
일요일이었다.
요일까지 기억하는 이유는, 내 얼굴에 들이치던 햇살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된 뒤부터 아침은 할머니의 고함소리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휴일만은 예외였다. 천천히 올라온 태양이 창문의 나무문살에 바른 창호
지를 새하얗게 만들거나, 한쪽 편 벽으로 떨어진 네모난 햇볕이 방바닥을
가로질러 내 얼굴에 도달할 때쯤에서야 비로소 상체를 일으키곤 했다.
창문턱을 넘은 햇살은 아직 어두운 방 안에 살짝 퍼지면서 들어온다. 그리고
그 빛줄기 속에서 무수한 먼지가 반짝반짝 빛난다. 그때라고 특별히 먼지가
많은 건 아니었겠지만(오히려 지금보다 적었겠지만)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늘
무수한 먼지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상상을 했다. 비를 피하듯 공기 중
을 헤엄쳐 깨끗한 산소만 덥석덥석 집어먹는 상상.
할머니의 고함소리에 일어난다고 했지만, 할머니가 시골 아낙처럼 소란스러
운 건 아니었다. 관절염이 심해서 내 방이 있는 2층 계단을 오르려면 끔찍할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창문가에 서서 기지개를 켠다. 창문은 겨울철이 아니면 늘 열어둔다. 시골
이라서 바깥은 그대로 자연이고, 창을 열어놓으면 왠지 반 애들과 숲속으로
갔던 캠핑 분위기가 났다. 행락 기분 이라고 할까. 창 안팎의 경계가 흐릿해
진다.
창문에 설치된 방충망은 꼬마 여자애인 내 손으로도 쉽게 탈부착 할 수
있다. 만일 원할 때 방충망을 뗄 수 있는 게 아니었다면 난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무척 다르거나, 적어도 조금은 다른 사람.
망을 쳐 두어도 어느샌가 모기나 풍뎅이가 방 안에 들어와 있곤 했다. 난
어렸을 때는 벌레를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을 경계로 벌레
라면 기겁을 하게 되었다. 그 어느 순간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기억한다.
내가 멍하니 마루에 누워있을 때였다고 한다. 아마도 풍령風鈴을 올려다
보고 있었겠지. 시골집에는 얇은 유리로 된 동그란 풍령이 있었는데 여름
이면 늘 처마 한구석에서 소리를 발했다. 할머니가 수박을 잘라 내오시면
나는 누운 그대로 쟁반을 향해 손을 뻗는다. 불쑥 노린재 한 마리가 날아든
다. 더듬이가 긴 놈이다. 난 한입 베어 문 수박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후다
닥 할머니 등 뒤로 숨는다. 벌레를 스스럼없이 대하던 외손녀이기에 의아해
서 물으니 “벌레는 너무 금방 죽어버리잖아. 실수로 발에 깔려도 죽고, 이유
없이 다리가 떨어져 나가”라고 대답하더라는, 어디까지나 죽고 없는 할머니
의 말씀.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상상하면, 언제나 앵글의 반은 풍령이 차지하는
묘한 구도가 된다. 그리고 맑은 소리를 내는 구옥口玉이 내 모습을 가리고
있다. 투명하니까 어렴풋이 비쳐보이기는 하지만, 흐릿하고 일그러져 잘
보이지 않는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정경이, 내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일의 전인지, 후
인지는 모르겠다. 알고 있는 건, 아무리 시간에 덧붙여지고 소실되어버린
기억이라도 일말의 진실은 들어가 있고, 그것이 꼭 객관적인 사실일 필요
는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꽁꽁 묶어버리고 피가 통하지 않는 서걱거리는
몸뚱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언제나,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않았다.
내 방 창문가에 서면 호수가 보였다. 그리 크지 않아 끝에서 끝이 시야에
다 담기는 저수지 같은 호수였다. 한쪽에는 온통 클로버로 뒤덮인 둑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빨간 뱀딸기가 경사진 곳곳에 박혀 무늬를 이루었다.
수면에 연무가 끼지 않는 날에는 호수 건너편으로 폐옥廢屋이 한 채 보였
다. 유난히 검은 집이었다. 우리집 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 집의 반쯤
깨진 유리창을 타오르게 할 때를 제외하고는 늘 검었다. 그 집은, 막연한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잠에서 막 갠 후라 눈앞이 뿌옇다. 손등으로 눈언저리를 부비며 창문가에
선다. 얼굴을 찡그려가며 먼 산에 초점을 맞추고 눈운동을 했다. 좌로,
우로, 위로, 아래로. 천천히 시야가 맑아진다. 허리를 살짝 수그려 창틀에
팔을 기댔다. 밤나무 가지 사이를 작은 새가 포롱포롱 날아다녔다. 호수
표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청둥오리 떼는, 아직 겨울이 아니니 다른 이름의
새일지 모른다.
일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오면 좁은 거실이다. 거실과 이어진 마루에는
오래된 미닫이 덧문이 둘러쳐져 있다. 다른 시골집과는 구조가 조금 다른 게,
일제시대에 지은 집이라서 영향을 받은 것도 같다.
세면장에서 웅,웅 하는 세탁기 모터 도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세탁해요?”
그냥 말을 걸기 위해 물었다. 할머니는, 마룻바닥에 양반다리로 앉는 건
관절에 해롭다고 해서 산 번들번들한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계셨다.
“응. 이제 여름옷들 빨아서 둬야지.” 실뭉치와 코바늘에서 눈을 떼지 않고
할머니가 대답했다.
“아직 좀 더운데” 하면서 할머니를 지나 마루로 내려갔다. 딸랑. 딸랑.
풍령에 매달린 종이(短冊)가 바람을 받아 흔들리며 빙그르르 돌았다. 마당가
에는 예쁘다고는 하기 힘든 맨드라미와, 심지도 않았는데 피어난 코스모스가
자라고 있었다. 맨드라미꽃은 과하게 생육이 빨라서 점점 과학실 벽에 걸려
있는 아이의 머릿속을 닮아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