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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신앙(요20:11-18)-2022.4.17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크고 위대한 절기입니다.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부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신앙이 복음의 핵심이요, 전부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 생활을 오래하고, 그럴싸한 직분을 가졌을지라도 부활신앙을 갖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때문에 성경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고전15:17).
부활은 분명히 죽음을 전제합니다. 비록 누군가 지금 육체는 살아 있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이미 죽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2장1절은 말씀합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죽은 자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죽음을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비록 지금 육체가 살았을지라도 모든 사람은 반드시 육체의 죽음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과한 모든 사람은 반드시 부활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부활은 믿는 자나 믿지 아니하는 자나 모두가 다 경험하는 부활이지요.
요한복음5장29절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은 신자와 불신자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의 윤리적인 조건만 가지고 선한 일과 악한 일을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선한 일을 행한 자나 악한 일을 행한 자 모두가 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믿는 자는 영생하기 위해 부활하고, 믿지 않는 자는 영벌을 받기 위해 부활하는 것이지요. 분명한 것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부활을 경험해야 한다는 거예요. 다만 부활의 목적이 다를 뿐이지요. 무엇을 위해 부활하느냐는 것입니다. 영생을 위한 부활이냐? 아니면 영벌을 받기 위한 부활이냐는 것이지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주님이 부활하신 생명으로 살기 위해 부활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부활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입니다(고전15:20).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은 그의 백성들의 부활을 보증하는 대표자가 되셨음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첫 열매는 구약에서 사용하는 말씀으로 장차 올 것의 예표와 보증을 의미하거든요. 이른바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의 부활을 믿는 모든 자들도 다가올 미래에 반드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보증하는 약속이지요.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우리에게 죄를 전가시킨 것처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삯을 지불하시고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의를 전가시켜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분과 함께 부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에 참예한다는 말은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하려하심입니다. 이른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지요.
때문에 부활신앙은 단순한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생명이고 실재입니다. 무엇보다 부활은 복음의 결론이지요. 만일 우리에게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자요,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기 때문에 부활은 복음을 이루는 여러 과정에서 결론 부분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복음을 이루시는 과정은 여러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복음입니다. 성육신은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복음의 시작과 같은 것이지요. 감히 하나님이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옷을 입고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다니요. 도저히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육신하신 주님이 세상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감당하사 죽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죄의 삯을 지불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심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복음을 이루는 과정인 것이지요. 그분은 무덤 속에서 친히 죽음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하나님이 인간들의 죄를 얼마나 무섭고 무겁게 다루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무덤에 갇히심은 예수님이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무덤 속에 갇히심도 복음을 이루시는 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장사지낸 지 사흘 만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복음의 절정과 같습니다. 이른바 복음의 결론과 같은 것이지요. 그분의 죽으심은 부활을 위한 필수요건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성육신은 죽음을 위함이요, 주님의 죽으심은 부활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복음의 완성과 같은 것이지요.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아직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묵상하는 것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신앙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지요.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망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른바 부활의 복음을 믿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이 내안에 나와 함께 사심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복음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음이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예수님의 특정한 한 가지 성품이라고만 고집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성품, 모든 사역들이 복음을 완성하는 퍼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복음이요, 십자가의 죽으심이 복음이며, 부활이 복음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 복음이라는 퍼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저는 부활이 복음의 결론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부활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의 죽으심이 필요했고, 죽으심을 이루기 위해 성육신이 필요했던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부활의 복음을 믿으시고,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본문을 통해 부활의 도를 믿지 못하던 한 여인이 어떻게 부활의 복음을 믿고 부활의 도를 전하는 주인공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여인입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자가 제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존재감이 별로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유대 여인들에게 아주 흔한 이름이었지요. 그래서 이름을 구별하기 위해 막달라인 마리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눅8:2). 막달라는 가버나움 남쪽에 위치한 작은 성읍의 이름이었지요.
성경에 마리아라는 이름이 몇 사람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고,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가 있지요. 또한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마리아가 있고, 요셉의 어머니 글로바 마리아가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가 있지요.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 마리아들 중에서 가장 비천한 여인이었지요.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일곱 귀신들린 여인으로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여인이었거든요(눅8:2). 일곱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최악의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만큼 막달라 마리아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인 고통이 심했던 여인이었지요. 그런데 그녀가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어요.
그녀는 가장 많은 아픔을 가진 여인이요,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여인이며, 그러면서 가장 많이 주님을 사랑한 여인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르고 전적으로 헌신했던 여인이었지요.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에요.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혀 운명하실 때 현장을 지킨 여인입니다(마27:55, 요19:25). 예수님의 시신이 매장되는 현장에도 있었던 여인입니다(눅23:55, 막15:47). 그리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무덤을 찾아간 여인입니다(눅24:10, 마28:1). 그래서 빈 무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여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여인이요, 가장 먼저 부활의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해준 여인입니다(눅24:10). 한마디로 예수님의 고난 받는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켜본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 사역에 있어 기념비적인 역할을 한 여인이지요. 당시 제자들도 못한 것을 막달라 마리아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려면 막달라 마리아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현장에서 지켜본 증인이기 때문이지요. 과연 그녀는 어떤 과정을 통해 부활의 복음을 접했고, 부활의 도를 증거하는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1) 그녀가 처음부터 부활의 도를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8-9절)
아무리 그녀가 주님을 가까이 따라 다녔을지라도 처음부터 그녀가 주님의 부활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녀도 언젠가 주님으로부터 부활의 도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도를 믿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이 죽으신 후에 진짜 그분이 말씀대로 부활하실 것은 믿지 못했던 것이지요. 설마 죽은 자가 부활하다니요? 당시 아무도 그런 믿음을 갖고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번도 그런 사례가 없었으니까요. 그동안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부활의 도는 비현실적인 가상의 교리정도로만 받아 드렸을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교훈정도로 받아 드렸을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주님과 함께 삼년이상을 한솥밥을 먹고 동고동락하던 제자들도 받아들이지 못했거든요. 보십시오. 예수님의 죽으심 이후에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었지요. 주님의 부활에 대해 말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정말 주님의 마음은 아프셨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부활에 대한 관심이라도 가졌으면 좋으련만 하나도 없었던 거예요. 그만큼 당시에 부활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한번도 부활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니 부활의 도를 믿는다는 것은 믿음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솔직히 지금 우리 시대의 우리들을 보면 실감이 나지요. 왜냐면 우리는 이미 검증된 과거사를 통해서도 부활을 잘 믿지 못하거든요. 이미 2천 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거가 수없이 많이 있지만 부활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혹시 예수님의 부활은 믿을지라도 그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됨을 믿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러니 당시 제자들이나 무리들을 우리가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활의 도를 직접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믿지를 못했으니 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물론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 곁에서 부활의 도를 들었을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거든요(마12:40, 16:21, 20:19, 26:32등). 그리고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수없이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도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을 믿고 무덤을 찾아간 것은 아닙니다. 본문9절을 보십시다. “저희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 중에 아무도 부활의 도를 믿는 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도는 복음의 결론부분에 해당된다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교리적으로나 지식적인 수준으로 부활의 도를 받아드렸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믿음의 실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자신들의 믿음의 실체로 인정하지 못했다는 말이에요. 부활은 이론이나 교리가 아닙니다. 부활은 믿음의 실재입니다. 지금 내 믿음의 현장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실재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부활의 확고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이후에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야 할 실체의 믿음인 것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갖지 못하고 죽음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질 신앙으로만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의 신앙은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부활의 신앙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를 정말 슬프게 하는 것은 당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식이나 의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자도 없었고, 부활을 영접하려는 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여인들이 사흘째가 되던 날 새벽 미명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것도 사흘 만에 말입니다. 사흘 만에 찾아간 것 때문에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하고 찾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여인들의 의식 속에는 부활이라는 단어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연치고는 기막힌 우연이지요. 마치 예수님의 사흘만의 부활을 예비하고 간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나 전혀 아닙니다.
금요일에 장사되신 예수님은 안식일 토요일에는 무덤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속성상 아무도 무덤에 찾아갈 수 없었지요. 비록 안식일이라 가 볼 수는 없어도 여인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무덤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 후 첫날 새벽미명에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른바 주일 새벽에 말입니다. 일정상 사흘 만에 가게 된 거예요. 공교롭게도 사흘 만에 부활을 예비하는 마음으로 찾아간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라도 여인들은 부활의 주님을 가장 처음 만나는 축복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있지요. 로마서8장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바라보고 울었던 것이지요. 그녀는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굴해 간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울면서 무덤 속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찐 일입니까? 무덤 속에 두 천사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한 머리맡에, 또 다른 하나는 발편에 앉아 있었던 것이지요. 이는 초자연적인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시는 주님의 아주 특별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천사들은 그녀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절)고 묻습니다. 천사들의 질문은 울음 자체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르고 슬퍼하느냐는 것입니다(눅24:5-6). 천사들의 질문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한마디로 누가 예수님의 시신을 도굴해갔는지 알지 못해서 운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녀는 사흘 전에 처형당하시던 예수님의 장면을 떠올리고, 또한 마지막 주님의 무덤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죄송함 때문에 울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주님을 사랑한 여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녀는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2) 그러나 부활의 주님이 그녀를 첫 번째로 만나주셨습니다(15-17절)
부활하신 주님은 뒤에서 그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물으십니다. 15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주님의 질문도 울음에 대한 원색적인 질문이나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주님이 모르고 그런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주님은 그녀의 울음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고, 그녀가 누구를 찾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지요. 주님의 질문 역시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 찾으면서 우느냐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왜 부활을 믿지 못하느냐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주님은 마리아가 부활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그녀가 언젠가 한번이라도 주님으로부터 들었던 부활에 대한 말씀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부활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어쩌면 사람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 터지면 당황하는 버릇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데 진짜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부활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된 이튿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와 함께 모여 작당을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27장63-64절을 보십시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 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그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모르지만 사흘 만에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말을 기억한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제자들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들로부터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유대인들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건성으로 듣던 것을 오히려 불신자들이 깊이 새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타성에 젖어 우리는 건성으로 들을지 몰라도 오히려 불신자들은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한번쯤은 들어 본 이야기가 있지요. 실제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있는 건물에 술집이 들어왔어요. 술집은 교회가 방해받을 정도로 시끄럽고 난잡했지요. 그래서 교회는 그 술집을 망하게 해서라도 내보내달라고 작정기도를 한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술집에 불이 났지요. 그래서 술집 주인이 교회를 상대로 고소를 한 거예요. 고소내용은 교회가 자기들을 망하게 기도해서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교회 관계자들을 불러 조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 관계자들이 재판장에게 따지듯이 질문을 하더랍니다. ‘재판장님은 진짜 우리가 기도했다고 술집이 불이 난 줄로 믿으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자기들이 기도했다고 술집이 망했다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항변하더랍니다. 그러나 술집 주인은 단호했습니다. 분명히 교회가 술집이 망하도록 기도했기 때문에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하는 교회는 오히려 자기들의 기도를 믿지 않았으나, 술집은 교회 측의 기도를 그대로 믿은 거예요. 과연 누구의 믿음이 더 좋은 것일까요? 참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어쩌면 믿음도 그럴 것입니다. 너무 익숙해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한마디로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닐까요? 주님으로부터 부활에 관한 도를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감각이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둔감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 영혼이 위험하다는 증거입니다. 어쩌면 막달라 마리아도 영적인 무감각증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셨습니다. 사실상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처음 만난 주인공이 됩니다. 여전히 그녀는 처음에 그분이 주님이신 줄을 모릅니다. 그녀는 주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이 혹시라도 주님의 시신을 옮겨갔다면 말씀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의 자태를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주님의 음성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일까요?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이 부활전의 모습과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요, 주님의 목소리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녀는 동산지기로 착각했던 것일까요?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지만 상식적으로 사람이 너무 큰 슬픔에 빠지게 되면 현실감각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지요. 한마디로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 큰 슬픔에 잠겨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고로 주님의 자태를 확인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요, 주님의 목소리도 분별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만큼 그녀의 슬픔이 컸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도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일 때가 있지요. 그런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녀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십니다. 그녀에게 부활의 믿음을 주시려고 말입니다. 그만큼 주님도 그녀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부활의 도를 전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친히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찾으십니다(16절). 이것은 말하는 자의 신분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이른바 주님이 누구신가를 밝혀주는 것이지요. 만일 그가 동산지기라면 그녀의 이름을 알 턱이 없거든요. 마리아의 이름을 공개하심으로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심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불러주시는 음성을 듣고 그녀의 닫힌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알거든요.
그녀는 곧장 주님을 ‘랍오니여’라고 부릅니다. 과거에 자기가 주님을 향해 불렀던 존칭을 사용한 것이지요. 그리고 순간적으로 마리아는 주님께 기쁨을 표하며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반가움을 표현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자 주님이 제지하십니다. 마리아의 단순한 감정표현을 억제하신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음을 강조하셨지요. 이것은 단지 만지는 것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전의 육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육신의 실체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분명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의 도를 전하여 부활의 신앙으로 초청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영생을 얻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마리아에게 부활신앙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마리아는 복된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가장 처음으로 만났고 주님으로부터 부활의 복음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을 영접한 마리아는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요?
(3) 드디어 그녀는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습니다(18절)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고 복음의 결론입니다. 그녀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만났습니다. 그동안 마리아의 믿음이 다소 감성적이었다면 부활은 그녀의 믿음을 훨씬 더 성숙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녀의 믿음을 훨씬 더 튼튼하고 훨씬 더 견고하게 했을 것입니다. 아니 더욱 큰 확신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 주는 능력입니다. 부활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죽어도 살겠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른바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줍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믿음이 좋아 보일지라도 부활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앞에서 겁을 냅니다. 그러나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는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현실의 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죽음이후의 세계를 동경하며 담담히 맞아들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른바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이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했습니다. 본문18절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녀의 전도는 단순했습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전도대상자였던 것이지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들은 여전히 전도대상자인 것입니다. 부활이 복음의 결론이거든요. 아무리 주의 제자들일지라도 부활의 도를 믿지 못한다면 복음을 영접하지 못한 거예요.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퍼즐들을 모두 믿을지라도 부활의 도를 믿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을지라도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입니다.
그동안 부활을 믿지 못한 마리아는 여인의 감정으로 주님께 죄송해서 눈물을 흘리고 사랑의 표현을 했을지라도 여전히 마음속으로 뭔가 허전한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사는 부활이 없었기 때문에 믿음이 불완전했을 것입니다. 마음 한구석으로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만나고 그녀는 세상을 다 얻은 것같이 기쁘고 즐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주님께 가졌던 죄송한 마음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컸을 것입니다. 그동안 죄송해서 울었던 눈물이 아니라 이제는 감사하는 눈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의 시신에 대해 관심을 집중했다면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활의 주님을 전한 것입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노라’(18절)고 전했습니다. 사실 ‘내가 주를 보았다’(I have seen the Lord)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주를 보지 않고 주님을 전할 수 없습니다. 주를 본 사람만 주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부활을 전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반드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부활의 도를 배웠는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과연 나는 부활의 복음을 믿는 것일까요? 당신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셨는지요? 당신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부활을 믿는 자는 부활의 도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부활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사단은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지요.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전한 것은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사도행전4장2절에 보면, 사도들이 부활의 도를 전하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과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도를 전함을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부활의 복음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의 복음을 통해 믿는 자의 수가 날마다 더해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이른바 부활의 복음이지요. 반드시 믿는 자는 부활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부활절 한주만 부활절로 지키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죄의 문제만 해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망의 문을 잠그고, 생명의 문을 여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부활은 귀하고 복된 것입니다. 우리 고백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됨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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