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국 빗장 열렸다” 복음 공식 상륙
19세기 말은 역사의 격변기였다.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이 번역되는 등 기독교와의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국제적인 정치질서의 개편과 아시아의 변화는 은둔의 왕국에도 변화를 재촉하고 있었고, 미국의 아시아 진출과 함께 인접한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국(開國)과 개항(開港)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심각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흥선 대원군의 하야와 강화도 조약
1863년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안으로는 왕권 강화를 위해 봉건체제를 유지하고 밖으로는 쇄국정책을 강화하였으나 19세기 말 배외척사론(排外斥邪論)의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대외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따지자면 이런 변화는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 때로부터 시작되지만 점차 세력을 확보해 갔다. 오늘 우리는 개국을 주장한 이들을 개화파라고 부르고, 개국을 반대한 이들을 척사위정파(斥邪衛正派)라고 부른다. 또 개화파 중에서 온건 개화론자들을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로, 급진적인 개화파를 개화당(開化黨)이라고 부른다.
이들 간의 논쟁은 1873년 대원군의 실각과 민비세력의 등장으로 변화를 겪게 되었고, 1875년(고종 12년) 운양호(雲揚號) 사건은 조선의 개국을 강요하게 된다. 대원군이 하야하자 무력으로라도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킬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일본은 해안 측량이란 이유로 운양호를 보내 영흥만과 서해안의 강화도 일대를 측량·조사하며 한강으로 접근하게 되자 우리나라 수비군과 충돌하게 된다. 조선 수비군의 공격을 받고 퇴각하던 이들은 영종도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일본은 이를 트집 잡아 통상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로 맺은 조약이 강화도 조약이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이 최초의 불평등 조약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부른다.
그 내용은 크게 5개 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조약에서는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고, 사절의 교환, 부산 외 2개항 개항, 개항장에서의 일본 상인의 무역활동 보장, 일본의 조선 연해 측정의 자유 보장, 그리고 일본인의 치외법권 인정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조약의 결과로 1876년 부산과 제물포 그리고 원산항이 개항하게 되었고, 우리나라는 개국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비록 강압에 의한 결과였다 할지라도 이런 일련의 변화는 조선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가능하게 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의 때는 성숙해 가고 있었다.
개국, 선교의 서장을 열다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1876년 수신사(修信使)라는 이름의 외교사절을 파견하였다. 이전까지는 통신사(通信使)라고 하였으나 강화도 조약 이후 수신사로 개칭된 것이다. 1881년에는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과 수행원들로 구성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정부 각 부처와 세관, 조폐, 산업을 두루 시찰하고 돌아왔다.
일본과의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개국의 길을 간 우리나라는 1882년 5월 22일에는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Corea)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것은 구미 각국 중 최초의 조약으로서 청의 중재로 이루어졌다. 청은 일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의 개국을 권고하였고, 이홍장의 주선으로 미국 대표 슈펠트(Robert W Shufeldt)는 인천에 도착하여 조선 대표 김홍집, 신헌(申櫶)과 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이 조약의 체결과 함께 1883년 5월에는 미국공사관이 설치되고 민영익이 초대 공사로 파견되었다. 미국에 이어 1884년에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와 조약을 체결하였고, 1886년에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벨기에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근대국가의 일원으로 소위 국제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결국 쇄국의 녹슨 빗장을 열게 되자 서구인들, 특히 선교사들의 내왕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비록 이상과 같은 외국과의 조약에서 종교의 자유나 기독교 선교에 대한 언급은 전무했으나, 이러한 일련의 개국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는 서서히 이루어져 갔다. 이렇게 볼 때 1876년의 개항은 기독교의 한국선교를 가능케 해주는 역사의 전기였다고 하겠다.
개항 이전까지는 기독교가 국법으로 금지된 상태에서 주로 만주지방을 거점으로 유럽 교회 선교사들과의 접촉이 있었으나, 1880년대 이후에는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내한하는 등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되고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개항 및 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 등 국내외 변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길목에서 중국과 일본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던 미국 선교사들과 일본의 이수정은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호소가 마케도니아의 부름이 되어 1884년 이래로 한국에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교회는 미국의 북장로교(1884) 북감리회(1885) 호주장로교(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1892) 미국 남감리교(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 등이었다. 이 시기에는 미국교회가 한국선교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