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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07월19일(수요일) [부여 (궁남지&시인 신동엽 문학관&정림사지& 관북리 유적지&부소산성) & 공주 공산성] 여행일정
회비 29,000원 5월24일 결제 완료, 28번 좌석 예약
탐방지 : 부여 [궁남지&시인 신동엽 문학관&정림사지& 관북리 유적지&부소산성]
[부여의 진산(鎭山) 부소산은 부여의 배경이자 사비 백제의 최후 보루, 백제 왕실의 후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서울로 치자면 경복궁의 백악산과 창덕궁의 후원에 빗댈 수 있는 곳이다.
또한 부소산성은 부소산 정상과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았으며, 성의 총 길이는 2495m에 이른다. 부여로 도읍을 옮긴 백제 성왕 16년(538)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 때의 이름은 미상인데 언제부터인가 성이 위치한 산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부소'는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부소산성은 평상시에는 왕궁으로 이용되었으며, 전란시에는 왕궁을 방어하는 최후 거점 역할을 하였던 사비백제시대의 대표적 산성이다. 처음 입구에 들어서면 "백마강길"이란 아치가 보이고 조금 더 걸어가면 안내소에서 문화유산 해설사가 탐방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부소산은 해발 106m의 낮은 산이지만 아치는 우리에게 그리 만만하지 않을 산이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어슬렁거리며 이 산의 한적하고 유아한 맛을 느끼겠다' 는 가람 이병기 선생님도 '낙화암 가는 길'에서 부소산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기엔 조그마한 단조한 산인 듯하더니 이제 올라와 보니 적으나 복잡하고 아득한 산이다"라고 평했다. 부소산은 가는 곳마다 백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산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삼충사(三忠祠)이다.
특히, 부여 하면 낙화암, 고란사, 백마강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 낙화암은 부소산성이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삼천궁녀가 수십 길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황당한 구석이 있는 전설이다. 하지만 적군에게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는 우국충정의 몇 사람이 자결한 현장이라고 하면 훨씬 귀가 솔깃해 질 것 같다. 삼국유사에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에서 이곳을 '타사암(墮死巖)' 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누군가에 의해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뜻의 낙화암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 낙화암 절벽 중턱에는 주홍색으로 '落花巖' 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낙화암 절벽 아래에는 아담한 절 거란사가 있다. 절 뒤 바위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가 서식한다. 백제의 왕들은 이 고란정 약수를 즐겨 마셨는데, 그때마다 고란초 잎을 한 잎씩 띄워 마셨다고 한다. 거기에는 ' 어린이가 된 할아버지' 의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옛적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실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제라도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日山, 금성산)에 사는 도사로부터 고란사 뒤 약수와 고란초에 대한 효험을 듣게 된다. 다음날 새벽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그 약수를 마시고 오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저녁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일찍 할머니는 약수터로 찾아갔다. 한데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웬 갓난아기가 할아버지 옷을 입고 누워 있었다. 할머니는 순간 도사가 약수 한 잔을 마실 때마다 3년씩 젊어진다고 한 말을 할아버지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할머니는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으며, 그 아이는 훗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최고의 벼슬인 좌평(佐平)에 올랐다고 한다.
부소산에는 '해를 맞는 누각'인 영일루도 있다. 백제의 왕께서 이곳에 올라 멀리 계룡산 연천봉으로 떠오르는 해를 맞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 밖에도 백마강과 부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반월루, 부소산의 가장 높은 곳 사자루, 옛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 태자골 숲 등 사비 백제 시대의 숨결이 즐비하다.]
탐방코스: [ 궁남지~(1.3km)~시인 신동엽 문학관&생가~(0.8km)~정림사지~(1.1km)~관북리 유적지 부여 동헌~(0.6km)~삼충사~(0.7km)~영일루~(160m)~부소산~(0.6km)~반월루~(0.3km)~사자루~(0.2m)~낙화암~(158m)~고란사~(2.4km)~구드래나루터 주차장 ] (약 8Km)
탐방일 : 2023년 07월 19일(수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30분 소요)
07:00~09:00 “좋은사람들” 버스로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52-1 번지에 있는 궁남지 주차장으로 이동 (157km) [2시간 소요]
09:00~09:03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152-1 번지에 있는 궁남지 주차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신라 안압지보다 40여 년 앞선 국내 최고(最古)의 인공연못인 궁남지로 이동 [입장요금은 무료]
[궁남지는 1964년 사적 제135호로 지정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 연못으로 유명하다. 일본정원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도 전한다.
궁남지는 사계절이 다 아름답지만, 천만송이 연꽃이 연못 가득히 핀 7월이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룬다.
연못 한가운데 작은 섬 안에 있는 정자 ‘포룡정’의 야간경관도 인기다. 불빛에 따라 달리하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물에 비친 ‘포룡정’의 반영이 신비감을 준다. 궁남지는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의 무대로 ‘서동요’의 전설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또한 궁남지에는 백제 30대 무왕의 탄생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고려후기의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의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사비성 남쪽 연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가에서 홀로 살다가 용신(龍神)과 정을 통해 아들을 얻었고, 그 아이가 바로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인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궁남지길
신동엽시비에서 제방을 따라 군수리 마을을 경유하여 궁남지를 돌아볼 수 있는 탐방로이다. 백제궁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하여 궁남지란 이름이 붙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무왕 35년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끌어 들여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한가운데에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궁남지는 634년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으로 연못 가운데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정자까지 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백제는 삼국가운데 정원기술이 가장 뛰어나 노자공이라는 백제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가 황궁의 정원을 꾸며 아스카시대의 정원사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 계절마다 색다른 느낌을 주는 궁남지에서는 연꽃과 야생화가 만발한 7월이면 서동연꽃축제가 열린다. 약 12만평 규모로 조성된 연꽃단지에는 희귀 연꽃 오가하스연, 빅토리아연, 기시연을 비롯하여 홍련, 백련, 황금련, 수련 물양귀비, 열대수련 등 20여종의 연꽃이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만발하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궁남지 연꽃축제는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사랑이 깃든 서동설화를 홍보하기 위하여 2003년 처음 개최된 이후 현재는 국내 최고의 역사 생태관광축제로 발전하였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공식행사, 주제관 전시회, 서동이벤트, 경연대회, 체험상설행사 등 30종의 다양한 행사가 있으며 웰빙굿뜨래 농특산물, 연·마 관련 상품 전시판매장이 펼쳐져 약 30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백제시대 이궁터로 알려진 궁남지 일대에는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했던 무왕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사비시대에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궁궐 밖의 생활이 궁핍하였으므로 생계유지를 위해 그는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 되었던 것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둘은 서로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그래도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트리기로 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 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이야기이다.
09:03~09:10 사진촬영
09:10~09:35 시인 신동엽 문학관으로 이동
[신동엽 문학관은 시인 신동엽의 문학정신을 추억하고 기리기 위해 2013년 5월 3일 개관된 문학관이다.
부여읍에서 2004년부터 8개년 연속사업으로 추진해서 2011년 12월에 준공되었으며, 총 사업비 36억 6300 만원이 들었다. 유족은 문학관에 시인의 육필 원고 737 점을 비롯해 편지와 사진, 책 등 모두 2,114 점을 기증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신동엽길 12 (동남리 501-21), 신동엽 생가 뒷편에 있다.
터 2,026 제곱미터에, 지하 1층 120 제곱미터, 지상 1층 679 제곱미터로 건축면적 695 제곱미터, 연면적 800 제곱미터이다.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전시관은 문학마당, 안마당, 옥상마당으로 만들어져 있고, 부여출신 화가 임옥상의 작품인 시인의 대표시 구절이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는 야외마당은 1985년 재건축 복원된 시인 생가 뒷마당과 이어져 있다.]
[신동엽(申東曄)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석림(石林)이다. 동시대에 활동한 김수영(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과 함께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출생 – 사망 : 1930년 ~ 1969년
직업 : 국어교사
충남 부여 출생. 전주사범학교와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었으며, 1961년부터 명성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다. 1967년에 4,800여 행에 달하는 서사시 <금강>을 발표함으로써 확고한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의 작품들은 대개 민족적 동일성을 훼손시키는 반민족적 세력에 대한 저항이 기조를 이루며, 민중에 대한 자기 긍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작품과 더불어 민중의 정서에 따른 시적 형상을 창조했다. 이런 측면에서 1960년대에 김수영의 시와 더불어 참여시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껍데기는 가라>, <금강(錦江)>,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등이 있다.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선화공원길
규암의 수북정은 조선 광해군 때 양주 목사가 건립한 것으로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 명명하였다. 수북정이 세워진 바위산의 명칭은 엿바위라 한다. 강 쪽에 돌출한 암벽에 쓰여 진 '자온대(自溫臺)'라는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자온대는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기 위하여 왕래할 때 망배하거나 휴식했던 장소로 전해져 왔고, 임금이 도착하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는 데서 자온대라고 일컬었으며 현재는 신하들이 임금이 도착하기 전 불을 지펴 바위를 따뜻하게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정자 아래로 맑게 흐르는 백마강 위에는 수상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유람선이 한가로이 오가고 있다. 수북정에서 부여로는 백제교를 통해서 건너 올 수 있는데, 교량길이가 길다보니 이 다리위에는 휴게공간이 조성되어 관광객들을 위한 풍요로운 이벤트가 가득하다. 백마강의 넘실대는 물결을 감상하면서 선화공원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부여가 낳은 대표적인 민족시인 신동엽의 시비를 맞이하는데 이 곳에서 신동엽 시인의 '산에 언덕에'를 읊으며 자연을 노래해 보는 건 어떨까 한다. 관련 유적으로 시인이 태어난 부여읍 동남리에 생가, 문학관이 있으며, 묘소는 부여읍 능산리 백제왕릉 앞산에 자리해 있다.
또한, 선화공원에는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사실에 감사를 표하고자 일본 불교신도들이 1972년 백마강변 숲속에 세운 불교전래사은비가 있다. 발원자는 일본 불교도 전중지학(田中智學), 건립자는 일본불교 전래사은사업회이며, 전일본불교회가 협찬하여 세워졌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52년 10월 성왕의 명에 의하여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가 금동불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가지고 가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다 한다.]
09:35~09:45 시인 신동엽 문학관과 생가를 탐방 [입장요금은 무료]
09:45~10:00 정림사지(定林寺址)로 이동
[부여 정림사지(扶餘 定林寺址)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요약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 사적.
1983년 사적로 지정되었다.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서·남·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伽藍)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으며, 다수의 소조인물상편(塑造人物像片)과 백제시대·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및 백제시대의 벼루·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 배치이다. 이는 정림사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발견된 다른 사찰에도 확인되므로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단, 정림사지는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 중문 밖에는 동·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다. 이 연못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므로,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최근 발굴 결과 드러난 강당 및 금당 좌우로 회랑과 연결된 부속 건물 배치 형식은 부여 능산리사지(567년)와 부여 왕흥사지(577년)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금강사지 등 다른 형식의 가람배치로 보고된 사지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중국 북위(北魏) 낙양(洛陽)의 영녕사(永寧寺)나 일본 호류지(法隆寺) 5층목탑의 탑내 소상 사례에 비춰볼 때 정림사지 기와구덩이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목탑 내부에 안치됐던 것들로 추정되므로 정림사지 5층석탑 건립 전에 5층목탑이 존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
백제 사비시기의 대표적인 사찰 터인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와 건물기단·기초, 석탑 조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10:00~10:15 정림사지를 탐방 [정림사지 박물관 입장요금은 1,500원]
10:15~10:35 관북리 유적지에 있는 부여 동헌으로 이동
[부여 관북리유적(扶餘 官北里遺蹟)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외
요약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비시대 궁궐터. 사적.
사적 제428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43호에서 2001년 2월 5일 사적 제428호로 변경되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의 사비시대(泗沘時代) 왕궁터로, 성왕에서 의자왕까지 6대에 걸쳐 123년간 나라를 다스렸던 곳이다. 또한 이곳은 조선시대 부여현의 관아(官衙)가 있었던 곳으로, 주변에는 백제의 유적과 유물이 산재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충남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를 한 결과 백제시대 연못 및 배수로 유적, 도로 유적, 건물터 기단 및 석축시설, 공방(工房)터 등이 발견되어 왕궁터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왕궁터의 연못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옛 국립부여박물관) 앞 광장에서 발견되었는데, 호안(護岸)은 막돌을 이용하여 4∼5단 높이로 쌓아올렸다. 동서가 긴 장방형으로, 규모는 남북 길이 6m, 깊이 1m 내외의 크기이며, 동서 길이는 7m가량 조사가 이루어졌다.
연못 안의 퇴적토는 크게 3개층으로 구분되는데, 최하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목간(木簡), 금동제귀걸이, 기와 및 토기편이, 중간층은 흑회색점질토층으로 벼루, 등잔, 바구니 등이, 최상층에서는 개원통보(開元通寶), 철제창, 철제화살촉 등이 발견되었다.
연못에 인접한 동쪽 지역에서는 남북과 동서로 교차된 도로망 유적의 일부가 확인되었다. 남북 도로는 연못 동쪽 30m 지점을 기점으로 개설되어 있는데, 너비 10.9m, 남북 길이는 약 40m가 확인되었다.
도로의 가장자리에는 배수로 시설이 있는데, 너비 45㎝ 간격으로 두께 5㎝ 정도의 판자를 양단에 세워 만들었으며, 서편 도랑의 경우 마지막 시기에는 막돌을 이용하여 너비 20㎝ 정도의 배수로로 좁혀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동서 도로는 너비가 3.9m로서 가장자리에는 역시 배수로시설이 있는데, 내부는 암수키와가 인위적으로 채워져 있었다.
도로의 교차지점에는 잘 다듬어진 화강암을 이용하여 암거(暗渠)시설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너비 120㎝, 길이 130㎝의 화강암 판돌 3매를 남북방향으로 이어서 깔아 놓았으며, 그 총 길이는 동서 도로의 너비와 같았다. 한편 남북 도로는 부여 중심에 있는 정림사(定林寺)의 중앙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 기단과 석축시설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동편에 인접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건물터 기단은 기와를 쌓아 만든 와적기단(瓦積基壇)이었고, 석축시설은 그 높이가 80㎝에 이르는 것으로 왕궁의 북쪽 한계선을 밝혀주는 자료로 생각되는데, 문화재연구소 안의 뜰로 계속하여 이어진다.
석축시설의 서쪽에서는 석축으로 된 조그마한 샘이 발견되었다. 와적기단 건물터와 석축시설 사이에는 도로와 배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터 기단과 배수로 내부에서는 토기 표면에 얼굴무늬가 있는 것〔人面文土器〕, 토기의 태토(胎土)가 매우 정선된 완형토기들, ‘北舍(북사)’명이 있는 항아리, 연꽃무늬수막새, 동으로 만든 숟가락과 철제품이 발견되었다. 얼굴무늬가 있는 토기편은 백제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완형토기는 규격에 따른 제품생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며, 표면에 ‘七(칠), 八(팔)’ 등의 숫자가 오목새김된 것도 있다.
공방터는 남북 도로 유적에서 동편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동서가 긴 장방형 움〔竪穴〕내부에 노(爐)시설이 있었던 곳과 가로로 된 손잡이가 상하에 각각 4개씩 부착된 토관을 이용하여 만든 집수구시설이 있었다. 움 내부에서는 철제편들과 석제추가 발견되었다.
발굴된 유적과 출토된 유물은 인공으로 성토된 층 위에서 발견되었으며, 동일한 방향으로 배치되어 일정한 규칙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백제가 도시계획에 따라 도성 안의 시가지를 정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0:35~10:40 사진촬영
10:40~10:50 부소산성에 있는 삼충사(三忠祠)로 이동
[삼충사(三忠祠)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40-1번지
요약 : 부여 삼충사(扶餘 三忠祠)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시대의 충신이었던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지은 사당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10:50~11:00 사진촬영 [부소산성 입장요금은 2,000원]
11:00~11:10 영일루(迎日樓)로 이동
[영일루(迎日樓)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11:10~11:13 부소산(106m)으로 이동
[부소산(扶蘇山)은 해발 106m 고도를 가진 부여의 진산으로 백마강과 맞닿아 있다. 낙화암과 고란사, 군창지, 백화정, 사자루, 삼충사, 서복사지, 영일루 등 여러 유적과 유물을 품고 있는 곳으로 역사성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산이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가 바로 ‘낙화암’이다. 나당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백제가 함락되자 궁인들이 백마강에 몸을 던져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절벽에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또, 낙화암 아래 작은 사찰이 있는데 바로 고란사다. 백제 아신왕(재위기간 392년~405년) 때 혜인대사가 세웠다는 설과 백마강에 몸을 던진 궁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 때 세웠다는 설이 있다. 사찰 뒤편 고란정에서는 365일 맑은 약수가 흐르는데, 이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는 속설도 있다.
낙화암과 고란사를 비롯한 부소산 관광지는 산행을 통해 관람할 수도 있지만, 황포돛배를 타고 백마강을 건너 들어가고, 나올 수도 있다.]
11:13~11:23 반월루(半月樓)로 이동
[반월루(半月樓)는 백마강(白馬江)이 반달 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扶蘇山)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市街地) 전경(全景)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전망대로서 1972년 세운 이층 누각이다.]
11:23~11:30 사자루(泗泚樓)로 이동
[사자루(泗泚樓)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임천군 군사리에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자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자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건물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을 새긴 백제시대 금동 석가여래 입상이 발견되어 더욱 주목받는 장소이다.]
11:30~11:35 사진촬영
11:35~11:40 낙화암(落花巖)으로 이동
[부소산 북쪽 백마강을 내려다보듯 우뚝 서 있는 바위 절벽이 낙화암이다. 낙화암은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게 유린될 때, 수많은 백제 여인들이 꽃잎처럼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이 전설로 낙화암이라는 꽃답고 애절한 이름을 얻었지만, [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岩-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백제 성왕이 국가 중흥의 원대한 꿈을 펼치려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비운을 맞기도 하였으나, 위덕왕ㆍ무왕ㆍ의자왕에 이르는 동안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라는 단독으로 백제에 대항하기가 어려워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백제는 국운을 다했던지 의자왕도 정사를 소홀히 하고, 나라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의자왕 20년(660) 사비성은 신라ㆍ당나라 연합군에게 함락되고, 성내에 살던 궁녀와 도성에 남은 여인들은 부소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침략군이 부소산성까지 몰려들자, 백제 여인들은 적군에게 잡혀가 치욕스러운 삶을 사느니보다 차라리 푸른 강물에 몸을 던져 무너지는 국운과 함께 목숨을 깨끗이 버리는 길을 택했다. 이처럼 여자의 정조를 생명보다 더 소중히 하고, 백제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 했던 백제 여인들의 충절과 넋이 어린 곳이 바로 낙화암이다. 바위 절벽에 새겨진 ‘낙화암(落花岩)’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글씨이다.
부소산 서쪽 낭떠러지 바위를 가리켜 낙화암이라 부른다.
낙화암은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 때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일시에 수륙양면으로 쳐들어와 왕성(王城)에 육박하자, 궁녀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깊은 물에 몸을 던져 죽은 장소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절벽에 조선시대 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낙화암(落花岩)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낙화암의 기암절벽은 백마강에서 배를 타고 돌아갈 때 더 잘 보인다.]
11:40~11:45 사진촬영
11:45~11:50 고란사(皐蘭寺)로 이동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1:50~12:00 사진촬영
12:00~12:30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1-1 번지에 있는 구드래 나루터 주차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2:30~14:00 식사
14:00~14:40 “좋은사람들” 버스로 충남 부여군 부여읍 구교리 1-1 번지에 있는 구드래 나루터 주차장을 출발하여
충남 공주시 금성동 17-1 번지에 있는 공산성 주차장으로 이동 (33.5km) [40분 소요]
탐방지 :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포곡식으로 축조된 백제의 성곽. 산성. 사적.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산성동 2번지
금강변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동쪽과 서쪽에 보조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흙으로 쌓은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돌로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인다. 진남루(鎭南樓)·공북루(拱北樓) 등의 남문·북문은 남아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았다. 적에게 보이지 않게 누각없이 만든 암문(暗門),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 고대(高臺)·장대(將臺)·수구문(水口門) 등의 방어시설도 남아 있다.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熊津城)이라고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이라고 불렸으며,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한강 유역에 자리 잡아 빠르게 성장하였다. 당시 한성백제의 수도가 위례성이다. 위례성은 백제 1대 온조왕이 건국했을 때부터 개로왕이 전사할 때까지 약 5백 년간 도읍으로 있었던 곳이다. 한성백제 시대는 백제의 초대왕 온조왕 1년(BC 18년)부터 21대 개로왕 21년(AD 475년)까지의 493년간이다.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공격으로 한강 이북 지역을 잃게 되었고, 그의 아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도읍을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옮기게 된다. 그 후 성왕이 백제의 도읍을 사비로 옮기면서 백제는 크게 세 번 도읍을 옮긴 나라가 됐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泗沘)는 지금의 부여이다.
공주 공산성에서 왕궁지로 추정되는 곳은 해발 110m 공산(公山)의 높은 부위에 위치해 있다. 이곳이 왕궁터다, 아니다는 논란이 있지만 발굴이 진행될수록 왕궁지로서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서기 475년 백제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살해되고, 아들 문주왕이 급히 남쪽으로 피신했다. 당시 웅진은 마한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변방이었다. 문주왕은 패잔병을 수습하고 다시 왕조를 열었다. 북쪽에는 고구려가 밀려오고, 남쪽에선 마한이 버티는 상황에서 백제의 망명세력들은 생존 그 자체에 급급했을 것이다.
웅진성은 도읍지라기보다 방어의 진지로서 적합한 곳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해자 역할을 하고, 능선이 3면을 에워 싸고 있다. 그들은 가장 높은 곳에 지휘소를 마련했다. 언제라도 싸울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있기로 했던 웅진 피난살이가 60여년이 흘러갔다. 처음 와서 세웠던 사령부가 그대로 왕궁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공주는 22대 문주왕 1년(475년)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서 26대 성왕 16년(538년)에 사비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63년간 웅진백제의 도읍지였다.
웅진백제 시기에 다섯 왕이 거쳐갔다. 왕조가 약해지면 배신자도 많아진다. 2명의 왕은 반란세력에 죽임을 당했다. 정권이 불안했다. 그렇게 버티다가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겼다. 한성을 되찾으려는 꿈은 고사하고, 더 남쪽으로 내려간 것이다. 웅진은 백제 왕실의 임시거처였을 뿐이다. 사비(泗沘)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지금의 부여(扶餘)이다. 사비시대는 성왕 16년에 사비로 천도한 이후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를 말한다. 사비백제 시대는 26대 성왕 16년(538년)부터 27대 위덕왕, 28대 해왕, 29대 법왕, 30대 무왕,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 왕인 31대 의자왕 20년(660년)까지의 122년간이다.
공산성을 쌓은 연대는 문주왕 이후 성왕 이전까지 수도 웅진(熊津)을 수비하기 위하여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짐작되고 있다. 하지만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城柵) 시설이 있었다는 견해도 제기되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2.2㎞ 정도인데, 돌로 쌓은 부분이 약 1.81㎞이고, 흙으로 쌓은 성벽은 약 390m이다. 성벽은 2중으로 축조되었지만, 만하루(挽河樓)터 주변에는 동성왕이 쌓았다고 전하는 무너진 성벽이 있어서 모두 3중으로 축조된 셈이다. 이것은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산성 북쪽의 영은사(靈隱寺) 밖에도 높이 7.4m, 길이 43m의 성벽이 2중으로 축조되어 있는데, 돌 홈통인 석루조(石漏槽) 2개가 있고, 그 위에는 너비 2m의 수구문과 문의 주춧돌 2개가 남아 있다.
흙으로 쌓은 성벽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후대에 고쳐 쌓았을 가능성도 있다. 높이와 너비는 일정하지 않은데, 대체로 높이는 1m이고, 너비는 아랫부분이 8.5m, 윗부분이 3m이다. 성 안에는 깊이 약 2m의 호(壕)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돌로 쌓은 성벽은 가운데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쌓는 협축(夾築) 방식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다만 일부는 속을 다지고 겉을 쌓은 내탁외축(內托外築)을 한 구간도 있다. 협축으로 쌓은 성벽의 윗부분 너비는 약 0.7m 정도이며, 안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백회를 발랐다. 진남루 주변에 사용된 돌은주로 긴 네모꼴이나 네면이 같은 네모꼴인데 반해, 영은사 밖에 사용된 돌은 비교적 큰 편이다. 나머지 구간은 대체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산성의 주문(主門)은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이다. 진남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初翼工) 팔작지붕 누각이며, 공북루는 1603년(선조 36)에 옛 망북루(望北樓)터에 세운 것으로 고주(高柱)를 사용한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다락집이다. 서문은 1975년에 보수공사하였을 때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의 크기를 확인하였지만 받침 부분만 복원되었고, 동문도 발굴 결과 길이 6.45m, 너비 2.46m였음이 확인되었다.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동문은 서문·남문·북문처럼 2층이었으며, 동쪽 외곽의 토성에도 약 4m 크기의 문터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80년에 발굴조사한 결과, 만하루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건물이며, 임류각(臨流閣)은 백제 때 세운 건물이지만 파괴된 뒤 그 터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장대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2칸인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적심석만 남은 상태로,주변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출토되고 있다.
그 뒤 1983년에도 조사되었는데, 길이 10.23m, 높이 1.67m, 너비 13∼0.8m의 암문이 발견되었다. 현재 성 안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를 비롯하여 광복루·쌍수정·명국삼장비·쌍수산정주필사적비·주춧돌·창고터·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곧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는 의자왕이 잠시 거처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 뒤 822년(헌덕왕 14)에 김헌창(金憲昌)이 일으켰던 반란은 이곳에서 진압되었고, 1623년에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잠시 피난하기도 하였다.]
탐방코스: [ 공산성 주차장~금서루~쌍수정~웅진백제 왕궁 추정지~진남루~영동루~광복루~임류각~영은사~만하루~공북루~공산정~금서루~공산성 주차장 ] (약 3km)
탐방일 : 2023년 07월 19일(수요일)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10분 소요)
14:40~15:00 충남 공주시 금성동 17-1 번지에 있는 공산성 주차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錦西樓)를 지나서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雙樹亭)으로 이동
[금서루는 공산성(公山城) 4개의 성문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문루(門樓)이다.
성안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가, 1895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등의 문헌 기록과 동문 조사 자료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로 지어졌다.
금서루(錦西樓)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쌍수정(雙樹亭)은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서쪽에 위치한 정자로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하여 머물렀던 곳이다.
쌍수(雙樹)에 기대어 나라를 걱정하던 인조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기대었던 쌍수에 통훈대부(通訓大夫)를 명하고 이곳을 쌍수산성이라고 하였다. 이때의 일을 기념하기 위하여 1734년(영조 10) 이 정자를 창건하였는데, 창건 당시의 이름은 삼가정(三架亭)이었다. 그후 여러 차례 중건하였으며, 1903년(광무 7)에 수축한 것이 현재의 쌍수정이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 전체적으로 해체 복원한 것이다. 정자 앞에는 느티나무 1그루와 말채나무 1그루가 서 있다. 인조가 이곳에 머물렀을 당시의 사적을 기록한 비(쌍수정 사적비:충남유형문화재 35)도 남아 있다.]
[공산성 입장요금은 1,200원]
15:00~15:15 쌍수정과 부근의 웅진백제 왕궁 추정지를 탐방
15:15~15:20 공산성의 남문인 진남루(鎭南樓)로 이동
[진남루는 조선시대 때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람들이 모두 이 남문을 같이 통과했다고 해서 ‘삼남문’이라고도 불린다.]
15:20~15:25 사진촬영
15:25~15:30 공산성의 동문인 영동루(迎東樓)로 이동
[백제시대 도읍지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건설된 공주 공산성에 있는 출입문으로 총 4개의 출입문 중에서 동쪽으로 나 있는 문이다. 석축을 쌓아 성채를 만들고 그 위에 팔작의 누각을 세웠다. 1993년에 서문 금서루와 동문 영동루가 복원되었다.]
15:30~15:35 광복루(光復樓)로 이동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광복루가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원래 공산성 내 중군영의 문루였는데, 당초 위치도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고 이름도 해상루(海桑樓)라 불렸다. 중군영을 폐지한 조선총독 데라우치는 해상루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이름도 웅심각(雄心閣)으로 바꿨다. 지난 1946년 공주를 방문해 누각에 오른 백범 김구가 사연을 듣고 조국의 8·15 광복을 기려 광복루(光復樓·문화재자료 제50호)로 바꾸자고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15:35~15:40 사진촬영
15:40~15:45 임류각(臨流閣)으로 이동
[임류각(臨流閣)은 백제시대인 500년 동성왕 재위 22년에 궁성 동쪽에 세운 누각으로,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가졌던 장소로 추정된다.
공산성 정상부에 위치하며 주변은 편평한 대지로 다듬어져 있다. 누각의 높이는 15m, 2층구조로 이루어진 대형의 건축물이며 백제시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1980년 공산성을 발굴하면서 임류각 터를 알게 되었고 1993년 복원하였다.]
15:45~15:50 사진촬영
15:50~15:58 공산성 안에 있는 사찰인 영은사(靈隱寺)로 이동
[영은사는 백제시대 창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영은사는 1458년 세조 4)에 세운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5:58~16:05 사진촬영
16:05~16:10 만하루(挽河樓)를 지나서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拱北樓)로 이동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따르면, 1754년(조선 영조 30) 충청감사 김시찬(金時粲)이 공산성 동쪽 연못가에 6칸으로 건립하였다. 박윤원(朴胤源)이 지은 〈만하루기〉에 따르면, 만하루라는 명칭은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시 〈세병마(洗兵馬)〉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1859년(철종 10)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와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도 만하루가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까지는 존재하였으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 이후에 홍수로 붕괴되어 매몰되었다.
1980년 공산성 내의 유적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만하루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1984년 지금의 누각으로 복원되었으며, 2006년 보수공사가 이루어졌다. 지금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이며, 옆에 연못도 복원되어 있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礎石)과 주위의 기단석(基壇石) 디딤돌 등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보통의 누정(樓亭)들이 풍류를 즐기거나 강학(講學)을 목적으로 건립된 데 비하여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을 중심으로 하고 경승 관람을 겸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소재지는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5번지이다.]
[공북루(拱北樓)는 성문에 해당하는 문루이다. 공북루의 양쪽은 금강을 따라 석벽으로 이어져 있다. 1층 정면 5칸 가운데 중앙의 1칸만 성으로 출입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고 나머지 4칸은 모두 석벽으로 둘러쳐 있다. 공산성의 다른 누각인 만하루(挽河樓)와 마찬가지로 휴식 공간 보다는 군사적 목적이 더 큰 건물이다. 금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공북루의 원래 이름은 망북루(望北樓)였다. 공북루의 명칭은 1603년 쌍수산성을 수축할 때 고쳐 부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산성에 피난 왔던 사실을 떠올리며 시를 지었다. 인조는 공산성에 머무는 동안 이괄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머물던 곳의 두 나무, 쌍수(雙樹)에 정3품 벼슬을 내려주었다. 이후 공산성의 이름도 쌍수성·쌍수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산성의 공북루는 성의 북문으로 그 역사의 현장에서 금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16:10~16:15 사진촬영
16:15~16:20 공산정(公山亭)으로 이동
[공산정(公山亭)은 공산성 서북쪽 정상에 있는 정자이다. 공산성 안에 있는 백제 왕궁 관련 유적을 비롯하여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철교 등 공주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금강의 낙조와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공산정에 관한 기록은 구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으나 18세기 후반의 충청도읍지 공주목 지도를 보면 '후락정'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공산정은 1970년대에 새롭게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 또는 전망대 등으로 불렸다. '공산정'이란 이름은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지은 것이다.]
16:20~16:30 사진촬영
16:30~16:50 금서루를 지나서 충남 공주시 금성동 17-1 번지에 있는 공산성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여 웅진백제의 왕궁이 있었던 성인 공산성의 탐방을 완료
16:50~17:00 휴식
17:00~19:00 “좋은사람들” 버스로 충남 공주시 금성동 17-1 번지에 있는 공산성 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이동 (125.3km) [2시간 소요]
부소산성 지도
부여시 관광지도
공주 공산성 관광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