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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치시마(千島) 낙엽송(1)
요코는 고등학교 1학년, 도오루는 홋카이도 대학 2학년이 되었다.
도오루가 삿포로로 떠난 후 집안 공기는 이상하게 음산했다. 나쓰에는 언제나 집안을 깨끗이 정돈하고 복도도 잘못하면 미끄러져 넘어질 정도로 정성껏 닦고 또 닦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고 거북했다.
특히 게이조의 귀가 시간이 늦어져 나쓰에와 요코가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되면 나쓰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식탁에는 풀먹인 흰 식탁보가 날마다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항상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접시에는 따뜻하게 데운 두툼한 불고기가 푸짐하게 담겨 있고 옆에는 아스파라거스에 마요네즈가 뿌려져 있었다. 수프 접시의 스튜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과일 접시엔 식후에 먹을 사과가 보기 좋게 가득 담겨 있었다. 나무랄 데 없는 식탁이었다. 요코는 나쓰에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면서 애써 화제를 찾아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나쓰에는 언제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곤 하였다.
‘엄마는 왜 이럴까? 내가 싫은가봐.’
요코는 나쓰에와 둘이 식사를 할 때에는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밝게 살 거야.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엄마의 영향만 받고 침울해질 필요는 없어.’
이 무렵 요코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다쓰코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쓰코의 집은 요코가 어렸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여전히 아늑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다쓰코도 유달리 정답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집안에 들어서면 싱긋 눈웃음으로 맞아 주기도 하지만,
“어서 와라.”
하는 말조차 하지 않는 때도 있었다.
‘다쓰코 아줌마는 춤으로 몸을 단련해 와서 그런지 몸 전체로 표현하게 되었나 봐. 입으로 전하기보다는 몸 전체로 감정을 전한다는 것은 더욱 아름다운 일인지도 몰라.’
요코는 미묘하게 변하는 다쓰코의 얼굴을 아무리 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았다. 춤을 추는 동안에는 말을 걸거나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엄격한 데가 있어 다쓰코의 주변에는 차가운 분위기가 감도는 경우가 있었다.
그 날도 요코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쓰코의 집에 들렀다. 몇 해 전부터 이 집에 드나드는 구로에는 요코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미술 선생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게 된 요코가 보기에는 상당한 연배로 생각되었지만 아직 서른도 안 되는 독신이었다. 구로에는,
“난 다쓰코 씨보다 더 좋은 여자가 나타나면 결혼할 거야.”
하고 말했다. 다쓰코는 싫어하는 표정이나 딱히 기뻐하는 표정도 짓지 않고 건성으로 듣는 눈치였다.
“다쓰고 씨와 결혼하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누가 말하면,
“아니야, 다쓰코 씨를 좋아하는 정도로는 안 돼. 다쓰코 씨보다 더 좋아해야지.”
하고 구로에는 뇌까렸다. 그 구로에가 요코에게 말했다.
“가을 전시회 작품에 요코를 모델로 하고 싶어. 어때 모델이 되어 주지 않겠어?”
모델이 되기보다는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게 더 재미있겠다고 요코는 생각했다.
구로에는 열심이었다. 전부터 요코를 모델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쓰에는 이 얘기를 다쓰코의 전화를 받고 알게 되었다. 나쓰에는 밤에 이 사실을 게이조에게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구로에 선생은 아직 독신이죠? 그렇다면 요코를 절대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그런데,
“물론이오. 요코를 모델로 삼다니 절대로 안 돼.”
하고 게이조가 강경하게 반대하자,
“하지만 구로에 선생은 성격이 소탈한 좋은 분이에요. 요코의 고등학교 선생이니 무턱대고 거절할 수도 없지 않을까요?”
하고 갑자기 요코가 모델이 되는 것을 찬성했다. 그러자,
“절대로 안 돼. 요코는 아직 학생이오. 고등학교 선생이라고는 하지만 저번에도 제자에게 애를 배게 한 적이 있지 않소?”
하고 게이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구로에 선생 집에는 부모님도 계시고 아틀리에도 거실 옆에 있대요. 게다가 옷을 벗는 것도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고 다쓰코도 말했어요.”
“하지만 그 선생을 위해서 우리 요코가 굳이 모델이 되어 줄 필요는 없지않소?”
게이조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나쓰에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어머, 당신 혹시 질투하고 계신 거 아녜요?”
하고 싸늘하게 웃었다.
“뭘 내가 질투한다는 거요?”
하고 게이조는 태연스럽게 말했으나, 내심 나쓰에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가슴이 뜨끔했다.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토요일 오후에 게이조가 여느 때보다 일찍 귀가해 보니 집안이 아주 조용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만 이따금 들릴뿐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거실에 들어선 게이조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슈미즈만 걸친 요코가 간이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그만 깊은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짧은 슈미즈만 걸친 채 두 다리를 꼬고 있었기 때문에 통통한 넓적다리가 그대로 게이조의 눈에 들어왔다. 가느다란 발목과 미끈하게 뻗은 종아리, 그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하얀 넓적다리.
게이조는 요코의 넓적다리에서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한참 동안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그 살결을 직접 만지기라도 한 것 같은 심상치 않은 전율이 온몸에 퍼져 그는 그대로 서재로 올라가 버렸다. 그 후부터 걸핏하면 그때 요코의 모습이 생각나 게이조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런 한편 은근히 즐겁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꿈속에서 껴안은 나쓰에의 몸이 점점 가늘어지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나쓰에, 나쓰에”하고 불렀더니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것은 나쓰에가 아니라 요코였다.
“당신 혹시 질투하고 계신 거 아녜요?”
하고 방금 나쓰에가 싸늘하게 웃어 보인 순간 게이조는 슈미즈 바람으로 다리를 꼬고 잠들어 있던 요코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린 자기 자신을 의식했다. 분명히 그는 구로에라는 교사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델이 되는 것은 요코 자신도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고 또 게이조가 한사코 반대하기도 하여 그만두기로 했다.
나쓰에는 요코를 모델로 삼으려고 한 일 때문에 요코의 아름다움이 다쓰코의 응접실에서 때때로 화제가 되는 것을 상상하면 마음이 평온하지 못했다. 그리고 요코가 다쓰코의 집에 가는 것이 못마당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치자,
“요코, 다쓰코 아줌마네 집을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나쓰에는 새삼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좋게 생각해요.”
요코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좋게 생각하는 것뿐이야? 약간 지저분한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아뇨, 전혀.”
“어머, 넌 조금도 지저분한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응접실에 늘 사람들이 득실거려 어딘지 난잡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야 물론 세상에서 말하는 예의 바른 사람들은 아녜요. 하지만 난잡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는 우리 집에 그렇게 시도 때도 남자들이 모여서 뒹굴거나 지저분하게 군다고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져.”
나쓰에는 얼굴을 찌푸렸다. 요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만일 쓰지구치 집에 그 사람들이 모인다면 저마다 이상하게 굳어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니 요코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쓰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 반면 다쓰코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편하게 해주면서도 자기 마음속까지는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절도가 있었다. 그것은 결코 나쓰에가 말하는 것처럼 지저분한 인상을 주지 않았다.
“다쓰코 아줌마네 집에 모이는 사람은 거의 남자들뿐이지? 너도 차츰 남자들의 눈에 띌 나이야. 엄마 친구 중에는 네 나이에 벌써 시집간 사람도 있어. 넌 이제 어린애가 아냐.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는 건 좋지 않아.”
요코는 나쓰에의 말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좋은 분들이에요.”
“엄마는 그런 사람들이 싫어. 남의 집인지 자기 집인지도 분간 못하는 짓들을 하고 있잖아. 구로에 선생님만 하더라도 한쪽이 찌그러진 게다를 아무렇게나 질질 끌고 언제나 스웨터 바람으로 다니지 않니? 그건 남의 집에 찾아가는 사람의 옷차림이 아니야.”
요코는 그런 구로에가 더 좋아 보였다.
“게다가 식사 시간이 되어도 뻔뻔하게 앉아 있잖아. 다쓰코가 너무 만만하게 보이니까 그래.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하고많은 날 밥을 먹여 줄 필요는 없을 텐데.”
아무튼 나쓰에는 요코가 다쓰코의 집에 가는 것은 언짢게 생각했다.
이때부터 다쓰코의 집에 찾아가는 요코의 발길이 뜸해졌다.
다쓰코를 만나지 않는 날이면 요코는 마음속으로 종종 자기를 낳아준 부모에 대해서 상상하게 되었다. 다쓰코 곁에 있으면 요코의 가슴속에 가득차 있던 감정이 차츰 사라진다는 것을 나쓰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요코는 때때로 외로워졌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기에 내 친부모는 나를 남의 손에 넘겨주었을까? 나는 친부모에게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되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자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런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은 이 세상 천지에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어린 요코는 자기 부모가 죽었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딘가에 분명 살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품에서 떠났다는 것은 아무리 상상해도 자기 존재가 축복받지 못했기 대문인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나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나쓰에에게는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게이조는 자상했다. 그러나 요코에게 적극적인 아버지다운 애정은 보이지 않았다. 단둘이 있을 때면 게이조에겐 무언가 숨막힐 듯한 어색한 표정이 역력했다.
삿포로에 간 도오루는 일요일마다 집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도 단둘이 있게 되면 게이조보다 더 숨막힐 듯이 이상하게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때때로 도오루의 뜨거운 시선을 느끼게 되면 요코는 희미한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요코가 도오루에게 원하는 것은 오빠로서의 애정이었다. 그런데 도오루에게는 요코가 맘껏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오빠다운 분위기가 없었다.
‘오빠에게 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코에게는 그것이 별로 기쁘지 않았다. 도오루의 눈에 연정이 분명히 드러나는 날 자신은 이 집을 나가야 한다고 요코는 생각했던 것이다.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잇었다. 삿포로의 도오루에게서 나쓰에 앞으로 엽서가 왔다.
‘며칠 후면 집으로 돌아가요.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기타하라 군을 일주일쯤 집에 묵게 해주세요. 그는 화학을 전공하는데, 저보다 한 살 위에요. 언제나 신세를 지고 있으니 반가이 맞아 주세요.’
나쓰에는 그 엽서를 요코에게 보이며,
“도오루는 우리 사정도 묻지 않고 멋대로야.”
하고 난처한 듯이 말했다. 나쓰에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편이었다.
키타하라에 대해서는 가끔 도오루가 말한 적이 있어 요코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고 검도가 3단인가 된다고 했다. 어디 외국에 있다가 고국으로 흘러 들어온 사람으로, 어머니가 없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도오루가 기타하라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지는 요코도 알 수 없었다. 도오루가 이 일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괴로워했는지 요코는 물론 알 턱이 없었다.
난처해하는 나쓰에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기타하라가 집에 와도 별로 마음 편히 있을 만한 곳이 못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요코는 도오루가 가엾게 여겨졌다.
그 날은 무더운 일요일이었다. 오후에 요코는 숲속의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폭풍의 언덕>을 읽고 있었다. 숲속은 서늘했다.
주인공 히드클리프가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것이 요코의 감정을 자극했다. 히드클리프의 어두운 정열이 자신에게 그대로 옮아 온 듯한 느낌이었다. 요코는 숨을 죽이고 읽어 나갔다. 버림받은 자식이었던 주인공은 남매처럼 자란 캐더린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그녀가 남의 아내가 된 후에도 못 잊고 그리워하다가 죽은 그녀의 무덤을 파헤쳐 그녀의 환영을 안고 죽어 가는 뜨거운 사랑은 자신을 낳아 준 부모의 얼굴도 모르는 요코에게 커다란 감명을 불러일으켰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은 히드클리프처럼 양손을 뻗고 언제까지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유일한 존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로서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구나. 자신은 부모에게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가 못 되었다는 절망이 그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책을 읽으면서 요코는 자신도 어떤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을 받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때때로 낚싯대를 어깨에 멘 아이들이 작은 양동이를 들고 숲속의 제방 위를 지나갔다. 요코는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요코는 티모시가 무성한 오솔길에 서서 자신의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상에! 히드클리프에겐 마루도, 포석도, 어떤 구름도 어떤 나무도 모두 캐더린의 얼굴로 보였구나.’
요코는 히드클리프가 부러웠다. 죽은 애인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 후에도 여전히 애인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히드클리프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가진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도 부러웠다.
‘그러나 그는 캐더린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어.’
요코는 책에서 얼굴을 든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랑을 한다면 나도 이렇게 뜨겁고 진실한 사랑을 하고 싶다.’
그때 요코의 발치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재빨리 지나갔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을 때, 요코는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청년이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코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방금 생각하고 있던 것을 들킨 듯한 느낌이었다.
청년은 멋쩍은 듯이 빙그레 웃엇다. 적당한 키에 보기 좋게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청년이었다. 짙은 눈썹이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안녕하세요!”
청년은 요코가 어디에 사는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친절하게 인사를 했다. 힘찬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요코도 명랑하게 인사를 했다. 소설을 읽은 흥분으로 요코의 눈은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 기타하라라고 합니다.”
청년에게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쉽사리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한 친밀감이 있었다.
“어머나, 오빠의 친구분이시군요?”
요코는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저, 여동생인 요코에요.”
“들었어요. 쓰지구치가 늘 입이 닳도록 자랑하더군요. 쓰지구치는 요코가 어떠니 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날이 없었어요.”
기타하라는 밝게 웃었다.
요코는 나쓰에가 어떻게 이 사람을 맞아들였는지 약간 궁금했다.
“이런 숲이 바로 집 옆에 있다는 말을 쓰지구치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어처구니없는 놈이군요.”
기타하라는 히죽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전 원래 숲을 좋아해요. 이렇게 소나무가 연이어진 숲은 보기 드물지요. 지금이야 이 팻말을 보고 나무들의 이름을 알았어요. 분비나무, 스트로브소나무, 캐나다가문비, 독일가문비……그리고 또 뭐더라?”
기타하라와 요코는 숲에서 나와 제방 위로 올라갔다. 제방 위에는 강한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라야나소나무.”
“무라야마소나무?”
“아뇨, 무라야나소나무, 몬타나소나무.”
“정말 이름이 다양하군요. 이 호리호리하고 영양 실조에라도 걸린 것 같은 소나무는 뭐라고 하죠?”
“아, 이 연약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소나무 말이에요? 이건 치시마 낙엽송이에요.”
“네? 치시마 낙엽송요?”
기타하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요? 이게 바로 치시마 낙엽송이라…..”
이렇게 말하고 기타하라는 제방을 내려가 치시마 낙엽송 그루터기를 가만히 만졌다. 요코는 놀란 눈빛으로 제방 위에서 기타하라를 내려다보았다. 요코는 생기 있게 빛나던 기타하라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코는 제방을 내려가 기타하라의 옆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왜 그러세요?”
“전 치시마에서 태아나 네 살 때 육지로 왔어요. 그곳에는 어머니가 잠들어 계세요. 그래서 전 해마다 샤리다케에 올라가 멀리 치시마를 바라보지요. 하지만 날씨가 흐린 날에는 치시마가 보이지 않아요. 고등학교 때는 열흘 동안이나 날마다 샤리다케에 올라갔어요.”
요코는 가슴이 뭉클했다. 지금은 찾아갈 수 없는 고향인 치시마를 해마다 산에 올라가 바라보는 기타하라의 간절한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잠들어 계세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알지 못하는 요코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기타하라가 갑자기 무척 가까운 사람처럼 생각되었다.
키타하라는 요코가 들고 있는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 <폭풍의 언덕>이군요. 나도 두 번이나 읽었어요.”
두 사람은 숲속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물기를 머금어 축축하고 부드러운 길이었다.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숲속은 어두컴컴했다.
“낮인데도 꽤 어둡군요. 이처럼 나무가 무성한 곳에 살고 있으니 정말 행복하겠어요.”
“행복요?”
요코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이조와 나쓰에가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졸업식에서 답사 원고가 백지로 바뀌었을 때도 슬프기는 했지만 불행하다고 한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금 기타하라로부터 ‘행복하겠어요’라는 말을 들으니 무척 아득한 얘기처럼 생각되었다.
“스지구치는 말이에요. 언제나 당신을 자랑했어요. 거리를 걸어가다가 지나쳐 간 여자를 되돌아보고는 ‘저런 것들은 요코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해’하고 으스대곤 했지요. 기숙사에 있는 친구들이 누가 대표로 가서 직접 선을 보고 와야겠다고 법석을 떨 정도로 말이에요.”
“어머, 오빠는 주책이야.”
요코는 웃었다.
“나에게도 여동생이 하나 있지요. 그래서 나는 쓰지구치가 아무리 여동생 자랑을 해도 부러워하지 않았지만…….”
기타하라는 이렇게 말하다 말고 약간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팔짱을 낀 기타하라의 두 팔이 뙤약볕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어갔다.
“어머니는 참 아름답더군요.”
기타하라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고마워요.”
요코도 나쓰에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잇었다. 그래서 기타하라가 나쓰에를 칭찬해주니 무척 기뻤다.
“쓰지구치나 당신은 행복하겠군요. 그런 훌륭한 어머니가 계시니까요. 정말 부러워요.”
요코는 잠자코 있었다.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기타하라의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쓰에를 ‘훌륭한 어머니’라고 말하는 데는 저항을 느꼈다.
“그만 돌아갈까요?”
요코가 말했다.
“참, 쓰지구치가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숲이 너무 근사해서 잠시 산책하고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한 시간 가까이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까요.”
제방에 다시 올라가자 도오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타하라!”
도오루가 찾으러 나온 모양이었다.
“야호!”
기타하라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대답하지 도오루가 뛰어왔다.
“아, 요코와 같이 있었군.”
도오루는 미소를 지었다.
“소개를 받지 않아도 첫눈에 요코 씨라는 것을 알아보았지.”
기타하라의 말에 도오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가 약간 얼굴을 찌푸린 것을 기타하라와 요코는 알아차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