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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말리엘의 지혜가 온전한가
사도행전 5:33~42
오늘 본문 말씀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 과정에서의 큰 난관을 극복하고 그 기초가 튼튼히 세워진 전환점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거듭된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공회와 바리새인들의 거센 핍박을 당하면서도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굳건한 헌신을 보여줌으로써 뿌리가 굳게 세워지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또한 진정한 진리 운동은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 속에서 드러나는가를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들은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려 결국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데 앞장섰던 산헤드린 공회에 끌려가서 대담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증거했다가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의 분노를 사서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은 대체로 대제사장들과 그들과 함께하는 종교 권력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반 동안에 수많은 이적들을 보았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소식도 전해듣고 사도들이 일으킨 각종 이적들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으나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하여 조금도 받아들일 의향이 없음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일반 성도들은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을 때에 마음이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원문을 보면, 이들 산헤드린 공회의원들은 마음이 찔리긴 찔렸습니다. 33절에 ‘크게 노하여’라는 말은 원문에 보면, ‘조각 조각 톱질하다’, ‘마음을 찌르다, 마음을 잘라내다’라는 의미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는 이들은 도리어 회개의 결과로 나아가지 않고 사도들을 죽이려고 더 크게 분노와 혈기로 가득찬 이성을 잃어버린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다름 아니라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성전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요 대중 앞에서 기도를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을 듣고 도리어 무서운 분노와 혈기로 가득차서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들을 아예 죽이려 들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장 종교적인 외양을 갖추었다고 해서 다 진리에 속한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가장 종교적인 모양을 갖추고 종교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참 진리 앞에서 마음이 교만하고 거칠고 무서운 반감을 가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적인 외양만 갖추는 자가 되는 것을 항상 두려워합시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과 그의 부활의 진리를 굳게 붙들며,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장차 주님 앞에 서게 되는 그 날을 반드시 맞게 될 터인데, 그 날에 자신의 지상의 모든 언행에 대하여 반드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도들 전부가 처형당하는 절체 절명의 위기가 예루살렘 교회에 닥쳐왔을 때에 예상치 못하게 사도들을 돕는 지원자가 한 사람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리새파의 유명한 지도자 가말리엘이었습니다. 34절로부터 3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가말리엘은 산헤드린 공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두개파 사람들 곧 대제사장들과 제사장 무리와 달리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의 최고의 율법 교사로서 유명한 랍비 학자인 힐렐 학파의 창시자 힐렐의 손자였는데, 가말리엘은 유대인들에게 최고의 존경의 이름인 ‘랍반’이라는 존귀한 직명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랍반’이라는 호칭의 뜻은 ‘우리의 주,스승’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얼마나 존경을 받았는지, 그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제 그의 죽음과 함께 율법에 대한 경의도 끝났다. 그리고 순결과 절제도 그와 함께 묻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 가말리엘의 직속 제자였습니다.
이렇게 존경받는 율법 교사였던 가말리엘이 사도들을 다 죽이려고 크게 분노하는 대제사장 일파들을 진정시킵니다. 그는 사도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에 공회의원들을 안돈시키며 말하기를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본래 관용 정신이 많았던 그의 할아버지 랍비 힐렐의 정신을 이어받아 가말리엘 역시 포악한 결정을 성그비 내리려는 공회의원들을 진정시키며 사려깊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자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이어서 사람들을 이렇게 차분하게 자기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36절로부터 3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이처럼 사도들을 다 없애버리자는 당시 포악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하여 가말리엘이 차분한 어조로 사도들을 함부로 죽이려 들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자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당시 분위기를 보아 대단히 용기가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분노로 이성을 잃은 사두개파 사람들을 설득할 때 당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일어난 실패한 운동들을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는 드다에 관한 이야기요 또 하나는 갈릴리 출신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드다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데, 갈릴리 유다라는 사람의 행적에 대해서는 요세푸스 유다고대사 18권 1장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독이라는 바리새인과 힘을 합쳐서 로마에 내는 세금을 단연코 거부하고 유다 독립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고 무장 봉기를 부추겼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이에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는데, 로마 군대만 상대로 싸운 것이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 동족들까지 살해하였으니 실상은 강도떼와 같은 부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원과 같은 철학과 신념을 주장했는데, 무엇보다 자유를 최우선시하였고 하나님을 믿는 외에 누구에게도 억압받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으며 로마 정부에 대하여 거칠게 저항하도록 사람들을 부추겼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대의 공격으로 그와 그의 아들들이 죽자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드다나 갈릴리의 유다나 유대 사회에 일어났던 수많은 실패한 정치 운동가, 실패한 종교 운동가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그렇게 지도자가 패망함으로써 결국 금새 실패하고 막을 내린 종교 운동, 정치 운동을 예를 들면서 이번에 일어난 이 기독교 종교 운동도 시간이 지나면 그 진정성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 기독교 운동의 지도자들을 서둘러 처형하는 과격한 행동을 통하여 기독교 세력을 압제하지 말고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만약 기독교 사상과 운동이 사람으로부터 나왔으면 그냥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무너질 것이고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무리 해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진리 운동인데 이렇게 상관하여 무너뜨리려고 핍박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될 것이기에, 이렇게 서둘러 사도들을 죽이는 일은 하지 말자고 설득했습니다.
이러한 가말리엘의 권면은 기독교에 대하여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는데, 논리적이고 이해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더욱이 가말리엘은 유대 사회에서 매우 존경받는 분이므로 그 말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을 당장 죽이려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사도들을 죽이려던 시도를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의 생명이 위태로운 때에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개입하여서 포악한 자들의 생각을 바꾸어 사도들을 살리게 된 이 일은 사도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율법 교사 가말리엘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종종 교회와 자기의 백성들을 돕는 일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불러 사용하시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구약 성경 시대에 아브라함이 동맹관계를 맺었던 헤브론 지역의 마므레 형제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려고 동방의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치러 달려갈 때에 아브라함과 합세하여 함께 전투에 임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떠돌이 신세가 되었을 때에 블레셋 지역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서 은혜를 입게 하셨고, 다윗과 솔로몬이 왕궁 건축과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할 때에 두로 왕 히람이 기쁨으로 돕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기 백성 유다를 다시 고토로 돌려보내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이백년 전에 택정하시고 그를 통하여 유대인 해방령을 선포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 공사를 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러 이방 지역을 여행할 때에 종종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로부터 호의와 보호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에 유대인들의 고소로 당시 아가야 지역 총독이 로마 사람 갈리오 앞에 섰을 때에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고소 고발을 물리치고 사도 바울을 간접적으로 보호해주었습니다. 또한 후에 사도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배를 타고 로마로 항해할 때에 그를 호송하는 책임자였던 로마 백부장 율리오는 한결같이 사도 바울에게 친절히 대하고 그가 죽임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을 보호하여 무사히 로마에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대 교회 유명한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님도 황해도 신천에서 시무할 때 교회가 부흥되자 교회 건축을 시작했는데, 건축 자금이 모자랄 때에 그 동네의 최고 부자이지만 인색하기로 소문난 사람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에게 말하기를 “다른 것이 아니라 신천교회를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교회당으로 건립하고자 하는데, 이 선생께서는 예수는 믿지 않지만 이 좋은 사업을 위하여 원조하시라는 청이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자가 김익두 목사님의 말을 듣고 묵묵히 앉아 있더니, 얼마 후에 입을 열어 말하기를 “우리 신천 땅에 목사가 계시는데, 교회가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 고을에서 부러워할 만한 큰 회당을 지으셔야지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김목사님이 말하기를 “우리 교인이 헌금한 돈이 거의 모아졌으니 과이 많이 보조하지 않더라도 될 것이외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부자는 말하기를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니지요. 어쨌든 부족액은 소생이 다 부담하겠소이다. 염려 마시고 내일부터라도 공사를 시작하십시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인색하다던 그 부자는 오히려 한 마디 더하기를 “하여튼 이 신천도 이제 훌륭하게 되겠습니다. 김목사처럼 공익사업에 열중하시는 분이 계시니 말입니다.”라고 하면서 치하까지 하더랍니다. 김익두 목사님의 전기를 보면 후일 그 부자의 손자들 오형제가 다 부유하게 되어 서울, 의정부에서 운수사업을 하였노라고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이나 기독교 역사의 기록들은 믿지 않는 분들인데도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들어 쓰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께 충성스럽게 일하며 믿음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도 당하며 주의 일을 행하고자 애를 쓸진대,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곁에 붙여주셔서 돕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의 영광과 주님 나라의 진보를 위하여 일할 때 믿지 않는 세상의 협조자들을 붙여 주셔서 우리를 돕게 해주시며 우리의 보호와 복지를 위하여 그들로 돕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는 형제들과 신앙 안에서 우의를 지켜나갈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늘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돕고 위하여 기도하며 축복하며 화평을 도모하며 살아가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우리 곁에 두사 우리를 돕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협조자로 삼으시기도 하시므로, 넓은 아량과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축복하며 섬기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 기도하며 축복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갑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말리엘이 포악한 산헤드린 공회의원들로부터 사도들을 구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지라도 정작 가말리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요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가 비록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사도들을 돕는 일에 쓰임을 받았고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진술한 진리의 바른 판단 기준은 허술하기짝이 없는 말이라는 점입니다. 가말리엘이 제시한 진리의 분별 기준은 이러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사상이나 소행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면 결국 그것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스스로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면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고 말했습니다. 즉 진리인가 아닌가를 아는 기준으로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과 그것이 성공하는가 아닌가 여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아니면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은 시간이 좀 지나면 그냥 무너지고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시간이 지나고 많은 반대가 있을지라도 계속 번성하고 성공적인 결실을 맺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역사를 돌아보면 이 기준이 꼭 맞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 불교의 가르침이 시간이 지났는데도 얼마나 넓게 많이 번성하였습니까? 저 유교나 저 이슬람의 사상과 가르침 역시 얼마나 넓게 퍼졌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퍼졌습니까? 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념이 얼마나 넓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얼마나 많은 지역에 그 영향력을 퍼뜨렸습니까? 그 공산주의 이념은 지금도 변형된 형태로, 저 북한에서, 중국에서, 러시아에서, 그리고 저 남미 지역에서.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까?
수많은 이단적 가르침 역시 그러합니다. 여호와의 증인 이단이 저 지지난 세기에 미국에서 일어나 2백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 각처에 신도 수를 늘리고 있고 이 천안 지역에도 꾸준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천지 이단의 시초도 1990년도 시절에는 안양 과천의 작은 모임이었는데, 지금 30년이 지난 후에 그 교세가 20여만 명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비진리, 인간 철학, 인간 사상, 인간의 정치 이념도 시간을 지나면서 얼마든지 번성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자연 소멸하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진리 여부를 따지며, 그 운동의 외적인 번성함 여부를 가지고 진리 여부를 따지는 것 역시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의 진리 운동도 저 중동 지역이나 아프리카 북부와 인도 지역에서 한 때 전해져서 번성했다가 그 후 수백 년 동안이나 혹은 천년이 넘게도 마치 죽은 것 같고 잠든 것같은 시대를 보냈습니다. 그 지역에 이슬람 종교, 힌두교 종교, 지역의 토속 종교 등이 강력하게 퍼져서 마치 기독교는 아무 힘을 못쓰는 소수 종교의 모습을 유지해온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말리엘의 기준에 의하면 적어도 북부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란 판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말리엘의 판단은 인간적인 판단에 불과하고, 진리를 분별할 바른 기준을 제시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사실은 가말리엘은 종교의 스승일 수 있으나 진리를 알아보는 눈은 뜨지 못한 영적 소경인 것입니다. 예수님께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이르신 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단호하게 가르쳐주신 것처럼, 가말리엘은 거듭나지 않았기에 진리를 알지 못하고 가르치는 어리석은 종교인 중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제시한 바 진리의 판단 기준은 심히 허술한 잘못된 기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본질적으로 가말리엘이 틀린 진단을 내린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말리엘이 종교적이고 객관적인 판단만을 내렸고 기독교의 진리 운동을 솔직하게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여전히 기독교의 진리 운동을 그냥 무식한 어부들의 종교적 열심으로만 치부했습니다.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죽은 스승 예수를 신성화하여 추종하는 부류로 보았던 것입니다. 분명 그는 랍비의 최고 지도자로서 지난 몇 년 동안 예수님께서 그 땅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셨고 많은 기적을 행하신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그가 부활하셨다고 사도들이 선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도들이 행한 여러 기적들에 대해서도 가말리엘은 분명히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러한 일들을 그냥 종교적의 관점으로, 학문적인 관점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그러한 일들의 사실 여부, 진실 여부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객관적인 관찰자 입장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멀리서 지켜보자는 입장만 고수했던 것입니다. 그가 니고데모처럼 적어도 밤중이라도 예수님께 찾아와서 직접 묻고 대답하면서 고민해보는 적극적인 노력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말리엘은 언제나 멀리서 학문의 가르치는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을 관망하면서 분석하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아직도 이 운동을 그냥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면 나중에는 진리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태평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기독교 진리 운동이 자기 눈앞에서, 자기 집 앞마당에서 진행되는 중인데도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은 한발자국도 사도들의 가르침의 현장에 가서 직접 들어보지도 않고 기적의 소문을 들으나 그 기적의 현장을 가보지도 않으면서, 결국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말리엘이 관용의 마음을 갖고 기독교 진리 운동을 바라보고 거기에 무엇인지 진리의 빛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구원받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기독교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몇 년 혹은 몇 십년을 신학을 연구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학교 교수가 되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진리를 자기의 목숨으로 알고 그것을 자기 삶 전체의 근본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이 있을 때 구원을 받고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처럼 율법의 교사가 되고 선생들의 선생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종교의 지도자가 된다 할지라도, 나사렛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라고 하는 진리와 그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사 만민의 임금과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는 이 진리를 자기 마음에 온전히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자기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들이는 결단과 충성된 믿음이 없다면 그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가말리엘과 달리 진정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40절로부터 4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사도들은 다시 공회 앞에 들어와서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또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절대 말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또 다시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거나 전도하거나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면서 매 맞으면서도 기뻐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멸시와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인하여 오히려 가장 큰 명예로 여기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은 금방도 사형당할 위험도 있었고 엄중한 위협과 경고가 있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날마다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전도하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요 구원자라는 것은 어떤 정치 운동이나 이념의 주장도 아니라 너무나 확실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는 복음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그의 영광스러운 부활은 너무나 분명하게 자기들이 보고 듣고 만진 확실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생 부활의 복을 받고 죽어도 천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 너무나 확실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 가르쳐주신 가르침과 그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은 아무리 목에 칼이 들어와도 숨길 수 없고 마음에만 담아둘 수 없고 담대히 전해야 하는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귀한 복음 진리, 생명의 말씀을 온갖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목숨을 내걸고 담대히 가르치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서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모습입니다. 멀찍이 서서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기독교 운동을 좀더 지켜보자면서 다른 이런 저런 정치 운동, 이런 저런 종교 운동들을 비교해가면서 자기의 종교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거리를 두는 자들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구원받은 자입니까? 누가 진리 운동을 행하는 자입니까? 객관적 관찰자로서 진리를 분석하고 머리로 파악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마음으로 그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여 그 진리를 따라 삶을 온전히 바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영업하고 그의 모든 가르침과 그의 십자가 대속의 진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과 삶 전체를 바치는 자입니다.
개인의 일신앙의 위기를 만날지라도 변함없이 이 진리를 붙드는 자입니다. 건강의 위기를 만나고, 사업의 위기를 만나고, 가정의 위기를 겪을지라도, 이 진리의 말씀을 변함없이 굳게 붙들고 진리와 함께 살고 죽는 자가 진실한 구원받은 자의 표지인 것입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그 이름, 곧 자기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되신 이름을 위하여 온갖 모욕과 멸시를 받을 때 이를 가장 큰 명예로 여기고 기뻐하는 자입니다.
사는 동안 누그를 만나더라도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열렬하게 증거하며 가르치기를 계속하는 자가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관대하고 기독교에 대하여 너그러우면서도 거리를 두고 기독교에 대하여 우호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세상의 참 빛이며 생명과 진ㄹ의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고 이 진리를 위해서 삶을 내던지는 자가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참 진리의 운동의 맥박이 힘차게 뛰어서 이 생명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힘차게 흘러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사도행전 17:6)이라는 가장 명예로운 불명예가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