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구원받은 신자들의 특수모임인 교회를 기반으로 세워진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특수성을 지닌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의 터 위에 세워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이지 세상이 아니다.” 또한 “세상은 세상이지 교회가 아니다.” 교회와 세상은 분리되지 않지만,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의미와 고유한 자기 영역을 지닌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다(church is in the world, not but of the world). 교회와 세상은 분명 두 개의 나라요, 별개의 왕국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자체의 특수성과 정체성의 측면만이 아니라 보편성과 일반성의 측면을 지닌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역시 “세상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공동선 혹은 공공선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를 교회적 기독교가 아니라 세상적 기독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고백적 기독교가 아니라 사회연대적 기독교의 측면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 신앙을 공통성, 일반성, 보편성의 측면에서 사고하는 것이다. 그럼 공동선. 공공선의 기독교를 위한 신학적 사고의 근거는 어디에 근거할 것인가?
가장 먼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세상 현실을 긍정하셨으며, 그 현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은 이제 더는 하나님과 세상사이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초월과 내재가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은 이 세계의 현실로 들어왔다”라고 말한다. 이제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현실은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으로 인하여 하나가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속의 인간, 인간적인 인간이 되심으로 이제 성스러움과 세속적인 영역이 따로 있지 않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현실이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상 속에서도, 사회 속에서도 거룩한 세속성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본회퍼는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종교로 부르지 않고 삶으로 부르셨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공동선과 공공선을 위와 같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근거로 설명하는 것은 기독론적인 접근이다. 그리스도께서 육화(肉化)하심으로 인간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은 하나님의 현실로, 하나님의 차원과 만나게 된다. 이것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은 세속 현실을 긍정하고, 세속의 시민사회에서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공동선과 공공선은 기독론적 근거에서만이 아닌 창조신학적 근거에서 설명된다. 공동선을 설명할 때 기독교 세계관은 주로 창조 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임한 문화명령에 근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화명령은 국가영역에서의 정치적 활동, 경제영역에서의 노동행위, 결혼을 통한 가정 등 인간의 총체적 활동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위임이다. 문화명령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예수의 제자 삼는 전도 명령보다 더 포괄적인 명령으로 본래는 신자에게 주어진 명령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모든 인간, 즉 불신자를 포함한 전 인류에게 주어진 위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화명령이 불신자, 교회 밖의 사람들, 일반인까지 포괄하는 근거는 이 위임 명령이 구속된 신자에게 제한되는 특별은총에 근거하기보다 (타락하였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 형상의 잔존물로서) 합리적 이성과 도덕성, 그리고 자연적 은혜가 유효하게 작동하는 일반은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영역에서 공공선과 공동선을 구현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지점이 있다. 소위 문화명령과 일반은총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세계관은 변혁모델이다. 변혁모델은 현존하는 세상의 문화, 정치, 경제 질서를 보다 적극적으로 변혁해 나가려는 사회전략이다. 그런데 공동선과 공공선 개념은 교회가 세상 질서와 구조를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 아래 적극적으로 변혁하자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기보다, 기독교와 보편 사회, 교회와 시민사회가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선을 추구하자는데 지향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공동선과 공공선을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의 문화 유형론으로 설명한다면, ‘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분리모델)는 더더욱 아니며, 그렇다고 ‘문화와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역설모델)도 아니며, 또한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도 아니라 ‘문화의 그리스도’(일치모델)에 가까운 개념이다. 기독교가 공동선과 공공선을 실현하려면 기독교적인 것과 시민적인 것 사이의 공통성과 일치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시민성의 덕목이다.
시민성이라는 덕목은 사회 일반의 보편가치와 규범을 존중하되, 기독교적 독특성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아야 하며, 예의 바름과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공공에서 무례하지 않음, 즉 정중함(civility)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덕목은 지금의 한국 기독교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기독교가 시민사회 안에서 관용, 무례하지 않음, 예의 바름을 가지면서 상호소통과 일치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이 사회 속에서 공공선과 공동선을 구현하는 최선의 전략인가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공공성 전략은 기독교적인 가치와 도덕이 시민사회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는 전제가 성립될 때 가능한데, 어쩌면 이런 방식이 기독교적인 가치와 규범의 위축과 퇴각을 초래할 여지가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동선과 공공선 전략은 어쩌면 리버럴한 기독교의 한 형태이고, 거슬러 가면 문화개신교주의(cultural protestantism)의 또 다른 유산이라면, 이 방향의 기독교의 사회전략에 대해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공공에서 무례지 않고 정중함을 발휘하며 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