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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분야 | 역사/근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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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
시대 | 근대/근대 |
출처 | 디지털구미문화대전-왕산 허위 가문의 항일독립운동 |
한말의 대표적 의병장 허위는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출신이다.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허위 가문은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허위의 맏형 허훈은 진보의진의 창의장이었고, 셋째 형 허겸은 형과 아우를 도와 의병 투쟁에 참여하였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허겸·허형·허필은 그 일가를 이끌고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허위는 한말에 거유(巨儒)로 명망이 자자했던 맏형 허훈에게 학문을 배운 전통적인 유생이었다. 그러나 허위의 경륜과 포부는 성리학적 유생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관직에 나아간 허위는 망국으로 치닫는 사태에 저항하여 혁신 유림으로서 경세관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허위는 국권 회복에 투신한 의병장으로서 투쟁과 순국을 통해 드높은 애국 충절을 보여 주었다.
허위가 순국한 뒤 만주로 망명한 이들 일가는 국내외를 통해 조국 광복에 헌신하였다. 특히 허겸·허형·허필은 북만주 이역의 하늘 아래 뼈를 묻었고, 그들의 아들들은 만주와 노령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이역만리의 하늘 아래 국제 미아로 살고 있다. 선산의 허위 가문은 대대로 쌓아 올린 명문의 전통과 영화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위해 바쳤다. 누가 ‘집안의 슬픈 이야기’라고 한탄했던가. 청사(靑史)에 길이 남아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1. 허훈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은 허조(許祚)와 부인 진성이씨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허훈의 학문은 가학에서 출발하여 허전(許傳)과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근기학파와 영남학파를 계승하였다. 허훈 가문은 일찍부터 근기 지방의 남인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입향조 허돈(許暾)은 허목(許穆)의 문하를 출입하였고, 허훈의 증조부 허임(許恁)은 채제공의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허임은 181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는 않았던 대유(大儒)였는데, 허훈은 허임으로부터 가학을 이어 받았다.
허훈은 29세에 김해부사로 부임한 허전의 문인이 되어 허목과 이익으로 이어지는 근기 남인의 학풍을 계승하였고, 나아가 유성룡의 학통을 계승한 유주목의 문인이 되어 영남학파의 학문도 섭렵하였다. 따라서 허훈은 근기학파의 실학을 받아들인 가운데 영남학파의 성리학적 분위기도 수용할 수 있었다. 허훈은 국가 재정·국방 등의 현실적인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고, 한편으로는 이기론에서 주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사회 문제를 원칙적인 수준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허훈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조선 말기의 상황에서 현실 개혁적 성향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고, 안동 유림의 의병 투쟁에 맞추어 기꺼이 의병 부대를 조직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두 아우 허겸과 허위의 의병 투쟁과 장지연의 계몽운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허훈은 아우 허위와 함께 1894년 동학농민항쟁을 피하여 흥구(현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로 이거하였다. 1894년 여름부터 동학농민군의 읍성 점령과 양반 지주층에 대한 보복이 각처로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허훈은 진보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중 명성왕후의 시해와 단발령 공포의 소식을 들었다. 또한 1896년 1월 20일 안동을 필두로 각처에서 의병이 창의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마침 허훈의 형제들이 고향인 선산 임은에 돌아와 있던 중에 안동의진 의병장 권세연(權世淵)의 창의를 독려하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허훈 형제들은 창의를 결심하였고, 허훈은 진보에서, 허위는 김산에서 창의하기로 하였다.
허훈은 고향에서 진보 흥구로 귀가하여 1896년 4월 초순 창의하였다. 진보의진(眞寶義陣)의 창의장은 허훈이고, 부장은 신상익(申相翊)이었다. 1896년 청송의진의 진중일기인 『적원일기(赤猿日記)』에 의하면, 진보의진은 창의 후 어천, 남면 화마리 등지로 진영을 옮기며 안동·청송·영양·의성 등 주변 의병진과 사통(私通)을 교환하며 협조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청송의진의 감은리 전투 후 진보의진은 영양·청송의진과 합세하여 의성의진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안동의진 배후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을미의병 이후 진보 흥구에 우거하고 있던 허훈은 1905년에 아우 허겸과 허위에게 전답 3천여 두락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1907년 봄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에 추대되었고, 그 해 8월 서거하였다. 우대락(禹大洛)·권수엽(權秀燁)·권수승(權秀升)·권중호(權重鎬) 등이 모두 진보 출신으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 허겸
성산(性山) 허겸(許蒹, 1851~1940)은 아버지 허조와 어머니 진성이씨 사이의 네 형제 허훈(許薰)·허신(許藎)·허겸(許蒹)·허위(許蔿) 중 삼남으로 태어났다. 허겸의 이름은 허혁(許爀)·허환(許煥)·허노(許魯) 등으로 썼는데, 초명이 허혁이었던 것 같고, 1896년 을미의병기에 쓴 이름이 허겸,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 투쟁을 할 때 쓴 이름이 허환, 그리고 도만하여 부민단을 조직할 당시에 쓴 이름이 허혁이었다.
1896년 3월 29일 아우 허위가 김천·상주·선산의 유생들과 함께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김산에서 창의하자, 허겸은 찬획(贊劃)으로 참여하였다. 곧이어 형 허훈이 1896년 4월 초순 진보에서 창의하자 형을 돕기 위해 진보로 간 것으로 보인다. 진보의진에서 김도현(金道鉉)을 초청하기 위해 허겸을 안동으로 파견하였고, 김도현이 진보에 오자 허겸은 김도현과 함께 소모(召募) 활동을 전개하였다.
허겸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05년 10월 21일 이완용·이근택 등의 오적 암살 사건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다가 유배되었다. 1907년 허겸은 아우 허위가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하자 그 막하에 참여하였다. 허겸은 경기도 연천·삭령 등지에서 부하 약 400명을 이끌고 허위와 함께 항쟁하였다. 이때 맏형 허훈은 허겸과 허위 두 아우에게 전답 3천여 두락을 매각하여 군자금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허겸은 종손 허종(許鍾, 허훈의 손자)과 함께 1907년 4월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허위의 유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寅植) 등과 같이 만주 통화현에서 중어학원(中語學院)을 개설하여 한·중 양국인의 친선과 한인의 재만 활동을 용이하도록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허겸은 합니하에서 경학사(耕學社)를 계승한 부민단을 조직하여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다. 부민단은 남만주에 이주한 한인 개척 농민의 자치기관으로 민생·교육·군사 등의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허겸은 부민단을 이끌며 10여 년 동안 남북 만주와 노령, 그리고 국내에 잠입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18년 음력 12월에는 만주와 노령의 독립운동단체가 중심이 되어, 당시 여러 곳에 있는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의 명의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20년 1월에는 김구·이상룡·안창호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협회 군사독판참모총장 유동열(柳東說)의 명으로 「경고동포급수군비서(警告同胞急輸軍費書)」를 발표하여 군자금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또한 허겸은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박상진(朴尙鎭)과 이관구(李觀求)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허겸은 1922년 71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부하 30여 명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출옥한 후에도 86세의 나이로 재차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40년 90세를 일기로 주하현 하동에서 서거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3. 허위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는 1855년(철종 6) 4월 2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허조와 어머니 진성이씨 사이의 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맏형 허훈은 영남 유림의 종장으로 문장의 대가였으며, 진보로 이주하여 은거하던 중 1896년 창의하여 진보의진을 결성하였다. 둘째 형 허신은 문재(文才)가 출중하였으나 28세에 요절하여 뚜렷한 경륜을 세상에 남기지 못했다. 셋째 형 허겸은 동생 허위의 막하에서 의병에 참가한 이후 국내외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허위는 형제 중에서 경륜이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한말 의병 전쟁에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허위는 다섯 살에 문자를 깨우치고, 일곱 살에 숙부 허희(許禧)에게 글을 배우면서 비범함을 드러냈다. 허위는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맏형 허훈에게 학문을 배웠다. 11살에 옛날 역사서에 나오는 인물의 선악과 성패를 능히 비평할 줄 알았으며, 15세에는 『시경』·『서경』·『역경』 등을 읽었다. 그리고 천문(天文)·지리(地理)·병진(兵陣)·산수(算數) 등을 깨우치고, 춘추강목(春秋綱目)이나 육도삼략(六鞱三略)을 익혔다. 맏형 허훈의 영향을 받은 허위는 근기학파와 영남학파의 학문적 경향을 두루 섭렵하여 지식주의·실용주의를 익혔다.
허위는 1881년 아버지를 여윈 뒤 10년 동안 학문에 전념하였고, 또한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장복추가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에서 강회(講會)를 개설하였는데, 인근 고을에서 강회에 참석한 선비가 거의 1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때 허위가 두각을 나타내어 문명을 크게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차츰 어지러워지는 시국을 보고 가슴에 품은 의기에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허위는 전통적인 유생으로 인간적인 포부와 경륜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허위는 경학보다는 병서를 좋아하여 실용주의에 기울어 있었다.
허위를 가르친 허훈은 거의 20년 아래의 아우에 대하여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양보할 것이 없지마는, 포부와 경륜에 있어서는 내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吾儒之學 我不讓君 四方之志 我不及君)”라고 극찬하였다. 허훈이 높이 평가한 아우 허위의 사방지지(四方之志), 즉 경세와 경륜은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실학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는 임은에 세거하던 허씨 가문의 가풍이 실용주의적이고, 그 학통 또한 근기학파의 실용적 경세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허위는 30대 후반인 1890년 경 선산 임은을 떠나 진보의 신한(新漢)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은 가문의 전장(田莊)이 있는 곳이었다. 1894년 허훈이 진보의 흥구로 이거하기 전부터 마련해 두었던 전장으로 보인다. 이즈음 허위는 맏형 허훈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전장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허위는 전장을 경영하면서 실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고 각처의 우국지사들과 교유 관계를 넓히며 현실 인식을 보다 철저히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허위는 맏형 허훈과 함께 1894년 동학농민항쟁을 피하여 흥구(현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로 이거하였다. 1895년 흥구에 있던 허위는 명성왕후의 시해와 단발령 공포의 소식을 들었다. 1895년 1월 20일 안동에서 권세연(權世淵)·김도화(金道和)·김흥락(金興洛)·유지호(柳止鎬) 등이 창의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른바 을미의병(乙未義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위 형제들은 창의를 결심하였다. 허훈은 진보에서 창의하고, 허위는 김산에서 창의하기로 하였다.
김산 지역에서는 유생 여영소·여중룡 등이 1896년 1월부터 창의를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상주와 선산 지역에서도 허위·조동석 등이 창의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1896년 3월 28일 허위는 김산에서의 창의 소식을 듣고 상주와 선산의 유생들과 함께 김산으로 갔다. 김산의진은 많은 진통 끝에 김천 지역을 비롯해서 상주와 선산의 유생들이 1896년 3월 29일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김산의진은 우선 군례(軍禮)를 행하고, ‘김산창의대장(金山倡義大將)’이라 쓴 대장기를 세우고 그 진용을 정비하였다.
1896년 3월 29일 금릉향교에서 창의한 김산의진은 김천 장날 읍으로 가서 수백 명의 장병을 모집하고 또 김산군 금릉의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는 등 그 진용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였다. 그러나 1896년 4월 2일 김산의진은 조직·군비·전략 등이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관군의 출동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유생들이 주축이 된 김산의진은 조직력과 전투력의 결함으로 자멸이 불가피했다. 전투다운 전투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괴멸된 김산의진은 진주·안의·황산 등지로 흩어졌고, 김천 지역은 관군이 장악하였다.
1896년 4월 7일 허위 등은 상주·선산 등지로 통문을 돌리고 직지사에서 재기하여 무주·영동·황간 등지를 전전하다가 참모회의를 열고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동시에 호서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인석(柳麟錫)과 합세하기로 하였다. 허위를 비롯한 김산의진의 잔여 세력은 충청북도 진천에서 근신 전경운(田慶雲)이 가져온 국왕의 봉서를 받았다. 그 내용은 ‘의병을 급속히 해산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허위 등은 군대를 해산하였다. 이때의 답답한 심정을 허위는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보국하려던 서생이 철갑을 벗는다/ 산새는 시국 급할 줄은 모르고/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不如歸)라 하네.”라고 읊었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허위는 허훈과 허겸 등 형들과 함께 진보 흥구에 은거하다가 1899년 2월 신기선(申箕善)의 천거로 상경하였다. 고종은 허위의 경륜과 포부를 듣고, 2월 1일 환구단참봉을 제수하여 입시토록 하였다. 2월 6일 영희전참봉, 2월 22일 조경원봉사, 4월 2일 성균관박사를 거쳐 이후 중추원의관·평리원수반판사·평리원재판장·의정부참찬을 역임하였고, 1905년 비서원승이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과 한일의정서 조인 이후 일본의 침략은 한층 가중되었다. 허위는 1904년 6월부터 1905년 11월까지 일본 침략을 고발하고 항의하는 언론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정우회(政友會)를 조직하여 반일·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격문 사건을 조사하다가 최고 주모자가 허위임을 밝혀내고 헌병대에 구금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1905년 1월 8일 의정부참찬에서 사임시킨 뒤 석방하였고, 3월 2일 다시 비서원승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허위의 항일 투쟁 전력을 두려워 한 일제는 3월 11일부터 4개월 동안 헌병사령부에 구금하였다가 7월 13일 강제로 귀행 조치하였다.
허위는 경상도·충청도·전라 3도의 경계인 삼도봉 아래 지례 두대동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의 소식을 들었다. 이때부터 허위는 경상도·충청도·강원도·전라도 등지를 다니며 우국지사들과 의거를 결의하였다. 1906년 6월 26일 허위는 여중룡·이강년·우용택·이병구 등과 창의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허위는 안동을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를, 이강년은 상주를 중심으로 충청도 일대를, 여중룡은 김산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를 거쳐 경성으로 모이기로 하였다.
1907년 7월 23일 고종의 강제 퇴위와 8월 1일 군대 해산 이후 1907년 9월부터 허위는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하였다. 당시 허위는 연천·적성·청원·파주 등 경기도 북부와 남부, 그리고 강원도 일원에 걸치는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2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전국 의병장들은 통합 의병 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성립시키고, 관동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허위는 작전참모장 격인 군사장(軍師將)을 맡았다. 13도창의대진소는 즉시 서울 진공 작전에 돌입하였다. 1908년 정월 허위의 선발대 300명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후속 부대와 연락이 단절되어 패퇴하였다. 더욱이 이인영은 문경의 본가로부터 부친의 부음을 전해듣고 모든 것을 허위에게 위임하고 귀가하였다.
1908년 2월 허위는 의병을 수습하여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박종환(朴宗漢)·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李殷燦) 등의 의병 부대와 함께 임진강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였다. 허위는 의병 부대의 정신 무장을 강화하고 군율을 엄히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군정(軍政)을 실시하여 의병 부대에 소요되는 군수 물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조달하였다. 또 의병 부대를 소단위 부대로 편성하여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1908년 5월 허위는 통감부에 30여 개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고, 그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허위가 제시한 요구 조건은 고종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이권 침탈 중지 등이었다. 1908년 6월 11일 경기도 포천에서 체포된 허위는 9월 18일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21일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평생 구국의 일념을 견지하고 항일 투쟁으로 일관했던 위대한 삶이었다.
4. 허학
박경(博卿) 허학(許壆, 1887~1940)은 허위의 4남 2녀 중 장남이다. 허학의 아명은 허만령(許萬齡)이며, 일명 허형(許瀅)이라고도 하였다. 차남 허영(許瑛, 1890~?)의 아명은 허억령(許億齡)이며, 삼남 허준(許埈, 1895~1956)의 아명은 허천령(許千齡)이며, 그리고 막내 허국(許土國, 1899~1955)의 아명은 허경령(許京齡)이다.
허학은 부친 허위가 1907년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할 때 21살의 약관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의병장들에 대한 연락과 무기 조달을 위해 각처로 잠복하여 활동하였다. 1913년 9월 임병찬(林炳瓚)·이인순(李寅淳)·전용규(田鎔圭) 등과 함께 독립의군부 사건의 주모자로 활동하다가 1914년 5월 동지 54명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독립의군부 사건에는 허위의 아들 허학을 비롯하여 사위 이기상(李起商)과 그 아우 이기영(李起永), 그리고 부하였던 정철하(鄭哲下) 등이 연루되어 있었다.
허학은 1912년 중부(仲父) 허겸을 따라 동지 박노창(朴魯昌) 등과 도만하여 강산 이도구에서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설립하였다. 1917년에는 유하현 전수하자에서 이세기(李世基) 등과 함께 동흥학교(東興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출병 직후 허학을 비롯해 그의 재종숙 허형과 허필 등은 서간도를 떠나 일제의 탄압이 미치지 않고 동만주·남만주보다 남한 출신 동포들이 많은 북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허위의 유족인 허학과 허국 등은 주하현으로 이주하였다.
허학은 1925년 김혁을 위원장으로 한 신민부(新民府)가 창립되자 원로들로 구성된 참의원에 선출되었다. 이때 참의원장은 이범윤(李範允)이었고, 참의원으로는 허형을 비롯한 김규진(金奎鎭) 등이 있었다. 1934년 허학은 일제 관헌의 비밀문서인 『국외에 있어서 용의조선인명부』에 ‘남만주군정서원(南滿洲軍政署員)’으로 요시찰 대상에 올라 있다. 아우 허영과 허준, 그리고 허국도 같은 혐의로 수배 대상이었다. 1940년 9월 28일 허학은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하였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5. 허종
중산(重山) 허종(許鍾, 1883~1949)은 허훈의 장자인 허숙의 아들이다. 조부 허훈에게 글을 배웠고, 외조부 이진상(李震相)의 촉망을 받았다. 허종은 천성이 활협(濶俠)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허종은 종조부 허겸과 같이 신민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대구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초 안창호가 발기하여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열·안창호 등 7인의 창립위원으로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대구는 신민회의 거점 도시였고, 그 조직은 경상북도 지역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1920년을 전후로 대구에서 거주하던 허종은 김응섭(金應燮)·김시현(金時鉉)·허규(許珪)·한양이(韓良履)·이원기(李源祺)·양한위(梁漢緯)·이원일(李源一)·김동진(金東鎭) 등과 교유하며 시국의 정보를 교환하였다. 그 중에서 허규(許珪)는 재종숙이었고, 이원기(李源祺)·이원일(李源一)·이원록(李源祿, 陸史) 등은 재종고종이었다.
허종은 1920년 9월 결성된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에 가입하여 서로군정서의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2년 12월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 등은 재외 독립운동단체와 서로 호응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경상도 일원을 중심으로 단원의 규합과 군자금의 모집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었을 때 허종도 체포되었던 것이다.
허종은 청송 광덕에서 수리 간척으로 전장을 경영하였고, 대서업(代書業)과 운송업을 겸해서 사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허종의 창의성과 사업적 자질은 조부 허훈의 실학적 정신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 허종은 1945년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안정을 얻지 못하고 1949년 6월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은 대구시장을 역임한 허흡(許洽)이다.
1. 허형
범산(凡山) 허형(許蘅, 1843~1922)은 허희(許禧)의 장자이며, 허필(許苾)의 형이다. 허훈·허겸·허위 등과는 종반간이다. 허형은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허민은 군부주사에 이어 내각 지제교를 역임하였는데, 명필로 이름이 나서 고종의 어명으로 명정전(明政殿)과 명정문(明政門)의 현판을 썼다. 차남은 허발이요, 삼남은 허규(許珪)로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딸 허길(許佶)은 진성이씨 이가호(李家鎬)에게 출가하여 이원기(李源基)·이원록(李源祿)·이원일(李源一)·이원조(李源朝)·이원창(李源昌)·이원홍(李源洪)을 낳았다. 육사 이원록은 저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였으며, 이원기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건국포장을 받았다.
허형은 을사조약 이후 오적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06년 3월 나인영·오기호 등이 오적 암살을 모의하던 중 거사 계획이 드러나 검거된 사건이다. 허형은 당시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이 피자(被刺)된 사건의 혐의를 받고 있었다. 허위가 1908년 5월 체포되어 10월 순국하자 허위 일가의 국내 활동은 불가능하였다. 이에 허겸은 1912년 허위의 가족인 제수와 네 아들 및 두 딸을 데리고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로 망명하였다. 허형도 1915년 아들 허발과 허규, 그리고 동생 허필의 가족과 함께 도만하였다. 이미 서간도 통화현에 정착하고 있던 종제 허겸 및 허위의 가족과 합류하였다.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출병 직후 허형은 아우인 허필의 가족을 비롯해서 종질인 허학과 허국 등 허위의 유족들을 데리고 서간도를 떠나 북만주로 이주하였다. 그 후 허위의 유족인 허학과 허국 등은 주하현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허형의 가족들은 철령하로, 허필 일족은 요녕성 개원현 이가태자를 거쳐 흑룡강성 오상현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1929년 봄에는 하얼빈 부근의 빈현 가판참으로 이주하였다. 허형은 1922년 10월 3일 서거하였다. 향년 80세이며, 묘소는 만주 목단강 사도구 자전산에 있다.
2. 허필
시산(是山) 허필(許苾)은 허희(許禧)의 차남이며, 허형(許蘅)의 동생이다. 허필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허보는 1918년 만주에서 작고하였고, 차남 허형식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항일유격대 제3로군 총참모장 및 북만성위 위원이었으며, 삼남 허규식(許圭植, 1916~1961)은 형 허형식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상룡(李相龍)과는 사가(査家) 간이었다. 허필은 허위의 의병 항쟁에 적극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백형 허형, 조카 허발·허규와 함께 도만하여 통화현에서 허위의 유족과 합류하여 살았다.
1920년 일본의 간도 출병 직후 허필은 종형 허겸과 허위의 유족, 그리고 형 허형 등과 함께 서간도를 떠나 북만주로 이주하였다. 그 후 허위의 유족인 허학과 허국 등은 주하현으로 이주하였다. 허형의 가족들은 철령하로, 허필 일족은 요녕성 개원현 이가태자를 거쳐 흑룡강성 오상현으로 이사했다가 1929년 봄에는 하얼빈 부근의 빈현 가판참으로 이주하였다. 허필은 1920년대 중국 동북 지방에서 직접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연계되어 있었다. 한학(漢學)과 한방(韓方)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허필은 한약방을 열어 가족들을 부양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허필은 1932년 서거하였고 묘는 하얼빈에 있다.
3. 허발
허발(1872~1955)은 허형(許蘅)의 차남이며, 허규(許珪)의 형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허발은 허위의 의병 투쟁에 적극 가담하였다. 1915년 동생 허규와 종형제들을 데리고 도만하여 통화현에서 허위의 가족과 합류하였다. 처음에는 통화현 당황구 만루산 중턱에서 산전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 후 종숙부인 허겸과 재종형 허학 등 친지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허발은 1919년 3·1운동이 남북 만주에 번져나가자 남만 대표로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920년 8월 다시 남만주로 갔다. 1933년에도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대구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가 경영하던 일창한약방(一蒼漢藥房)은 독립운동의 연락처였으며,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안중근(安重根)·안경학(安敬鶴)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허발의 묘는 대구 신암동 선열공원에 있다.
4. 허규
일헌(一軒) 허규(許珪, 1884~1957)는 허형의 삼남이며, 허발의 아우이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워 시에 능했으며, 유주목의 총애를 받았다. 프랑스 외방선교회가 설립한 한성법어전문학교(漢城法語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허규는 종숙 허위가 창의하자 격려문을 배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19년 3·1운동 때에도 6개월 간 고초를 겪었다. 1925년 허규는 대한광복회 사건으로 도만하였다. 특히 김규식(金奎植)·김구(金九)·안재홍(安在鴻)·여운형(呂運亨)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928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군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을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경성형무소에서 5년간 옥고를 치루고 가석방되었다. 그 후 비밀결사 사건으로 서울 왕십리에서 다시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내종질 이원기·이원록·이원일 등은 독립운동의 동지였다. 1935년 이후 허규는 전후 3차의 시국사범으로 복역하였다.
허규는 1944년 8월 10일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건국동맹의 상위지도부에 이걸소(李傑笑)·최병철(崔秉喆)·이여성(李如星)·박승환(朴承煥)·김문갑(金文甲)·이상백(李相佰)·이만규(李萬珪)·이수목(李秀穆)·정재철(鄭載轍) 등과 함께 추대되었다. 조선건국동맹은 일제의 말기적 탄압이 가중되고 있을 때 조동호·여운형 등 민족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연합하여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허규는 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46년에는 김규식과 안재홍의 공동 추천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의원이 되었다. 특히 김구와 통일 조국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정계와는 관계를 끊고 대구에 내려와 최준(崔浚) 등과 아양음사(峨洋吟社)를 창립하여 시회(詩會)를 열며 여생을 보냈다. 1957년 11월 별세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평에 있다.
5. 허형식
허형식(許亨植, 1909~1942)은 초명이 허극(許克)이며, 이희산(李熙山) 혹은 이삼룡(李三龍)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다. 허형식은 허필의 차남으로, 형은 허보(許堡)이며, 아우는 허규식이다. 아버지 허필은 1915년 백형 허형, 조카 허발·허규와 함께 도만하여 통화현에서 허위 유족과 합류하여 살았다. 1920년 일본군의 간도 출병 직후 허필은 종형 허겸과 허위의 유족, 그리고 형 허형 등과 함께 서간도를 떠나 북만주로 이주하였다. 그 후 허필은 가족을 이끌고 요녕성 개원현 이가태자를 거쳐 흑룡강성 오상현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1929년 봄에는 하얼빈 부근의 빈현 가판참으로 이주하였다.
허형식은 1929년 중반부터 중국 공산당 북만특위 및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동하였다. 허형식은 1930년 초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당원으로 입당한 후에는 북만의 한인 농민들을 상대로 대중사업을 전개하였고, 1930년 5월 1일 ‘붉은 5월 투쟁’에 참가하여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습격을 주도하였다. 1930년 후반에는 대중운동을 주도하다가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공산분자라는 혐의로 심양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31년 12월 만주성위원회에 의해 구출되었다.
1932년 1월 허형식은 만주성위 빈현특별당지부 선전위원의 직책을 맡아 빈현 일대에서 반일동맹회·공산주의청년단·자위대 등 항일 단체들을 조직하였다. 또 1933년 3월에는 탕원현으로 가서 항일유격대 창건을 지원하여 1,400여 명의 회원을 결집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허형식은 주하현으로 돌아가 대중 조직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1933년 10월 주하반일유격대가 창건되자 허형식은 항일 선전과 항일 투쟁 의식 고취를 통해 항일유격대를 지원하였다. 1934년 6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제3대대 정치지도원이 되었으며, 그 해 가을에는 제1대대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이희산(李熙山)이라는 가명을 썼다.
1935년 1월 말 당세의 확대 및 유격구의 확대에 힘입어 합동지대는 지방청년의용군을 흡수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제1독립사로 발전하였다. 허형식은 제3군 제2단의 단장이 되었고, 동년 9월 제3군 제3단 정치부 주임, 1936년 초 제3군 제3사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6년 1월 중국 동북의 항일 부대는 동북항일연군으로 재편성되어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실현되었다. 허형식이 소속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은 동년 8월 1일 동북항일연군 제3군으로 개편되었다. 이어서 허형식은 9월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위원 겸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6년 9월 중국공산당 주하·탕원중심현위와 항일연군 3군 및 6군의 연석회의에서 확정된 방침에 따라, 동년 11월 허형식은 3군 1사 선전대를 이끌고 소흥안령산맥 부근의 철력현으로 진출하였고, 뒤따라 온 3군 6사 및 9사 부대 200명과 합류하였다. 허형식은 구도강·팔도강 등지에서 항일 선전과 대중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일본군 및 만주국군의 연합 토벌대 300여 명과 격전을 벌여 큰 승전을 거두었다. 1937년 2월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의동판사처 주임에 임명되었고, 1937년 6월 제9군 정치부 주임을 거쳐 1938년 6월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1사 사장(師長)이 되었다. 이 해 말까지 허형식은 해륜·경안현 등지에서 투쟁하였다.
1939년 1월부터 허형식은 중국공산당 북만성위 집행위원 겸 수해지구대표단 부지휘, 용남지휘부 책임을 맡아 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3·4지대와 독립 제1·2사를 지휘하였다. 그리고 동년 4월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장에 임명되었고, 1940년 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12지대 정치위원으로 북만에서의 항일 투쟁을 주도하였다. 1941년 초 제3로군은 참모장 허형식이 지휘하였다.
1941년 중반 이후 북만에서의 항일 무장투쟁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일제는 만주국 군경을 대거 동원하여 제3로군을 집중 공격하였다. 허형식은 생존한 제3로군 200여 명을 총괄 지휘하면서 대중 조직 사업과 유격전을 벌였다. 1942년 7월 말 각처를 돌아다니며 소분대의 활동을 지도하던 중, 8월 3일 아침 경성현 청풍령에서 만주국 토벌대에 포위되어 격전을 벌이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33세였다.
1. 허담
허담(許燂, 1850~1930)은 허회(許禬)의 아들이며, 허질(許秷)의 양자이다. 허위와는 삼종간이다. 허담은 7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에 행시장편(行詩長篇)을 지었다. 저술로 『효경여예(孝經餘裔)』와 『운옥영선(韻玉英選)』이 있고, 문집 10권을 남겼다. 을사조약 이후 허위 등이 창의하자 오적의 죄를 성토하는 상소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올리는 등 우국충정의 기개를 보였다.
2. 육사 이원록 형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의 형제로는 맏형 이원기(李源祺), 동생 이원일(李源一)·이원조(李源朝)·이원창(李源昌)·이원홍(李源洪)이 있다. 이들은 안동군 도산면 원촌동 881번지에서 출생하였는데, 이황의 5대손 이구(李榘)를 입향조로 하는 원촌파(遠村派)이다. 이들 6형제는 이황의 13대손 이가호(李家鎬)와 허형(許蘅)의 딸 허길(許佶)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원록의 조부 이중직은 장릉참봉으로 1903년 판임관이 되었고, 1904년 8월경 충의사(忠義社)의 사원으로 참가하였다. 1909년 12월에는 예안의 도산서원에 설립된 보문의숙(寶文義塾)의 초대 숙장이 되었다. 이중직은 가학으로 다섯 손자들을 교육시켰고, 손자 이원기와 이원록을 보문의숙에 입학시켜 신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이원록의 아버지 이가호는 1905년 양주군수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 허길은 허형의 딸이다. 허형은 의병장 허훈·허겸·허위와 사촌간이었다. 허형·허훈 등은 모두 예안의 진성이씨 집안으로 딸이나 손녀들을 시집 보내 중첩혼을 맺고 있었다. 이원록의 집안은 1916년 조부 이중직이 별세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안동군 녹전면 신평동 속칭 듬벌이로 이사하였다. 1920년 이원기가 결혼하여 대구에 살림을 차리면서 이원록·이원일 등도 대구로 이사하여 한동안 서병오(徐丙五)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1) 이원기
이원기(李源祺, 1899~1942)는 1911년 보문의숙이 폐교된 뒤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정월 조부가 별세하고 그 해 6월 부인 안동권씨가 죽었다. 그 후 장희학(張希鶴)의 딸 인동장씨와 결혼하여, 1920년 아우들과 함께 대구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이원기는 대구에서 부모를 모시고 동생들을 거느리며 어려운 살림을 꾸리면서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동생들을 후원하였다.
이원기는 아우 이원록·이원일과 함께 1925년 9월 북경을 다녀온 성주의 독립운동가 이정기(李定基)로부터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암살단를 조직하고 의열단 등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국내 활동을 후원하였다. 1927년 10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아우 이원록·이원일·이원조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2) 이원록
육사 이원록(李源祿, 1904~1944)은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보문의숙을 거쳐 1918년 4월 1일 설립된 도산공립보통학교를 1회로 졸업하였다. 그는 17세에 형 이원기를 따라 대구로 와서 18세가 되던 1921년 봄 부친의 뜻에 따라 영천군 오동 안용락(安鏞洛)의 딸 안일양(安一陽)과 결혼하고 형 이원기의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1922년 영천군 화북면 백학학교(白鶴學校)에서 이명선·서만달·백기만 등과 반 년 넘게 공부하였고, 9개월간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그 해에 대구 교남학교에 입학하여 얼마 동안 다녔다.
1923년 대구 남산동 662번지로 이사한 뒤 약 1년간 일본에 다녀왔다. 일본에서 동경정칙예비학교(東京正則豫備學校)와 일본대학 문과전문부를 다니다 병으로 퇴학하였다. 1924년 관동대지진 이후 귀국하여 대구 조양회관에서 신문화 강좌에 참여하며 문화 활동을 벌였다. 1925년 9월 북경을 다녀온 이정기로부터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에 관한 설명을 듣고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1926년 봄에는 이정기와 함께 북경으로 가서 중국대학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1926년 7월에 남형우(南亨祐)와 배병현(裵炳鉉)에게 암살단 조직과 국내의 정황을 알리고 9월에 일단 귀국했다가, 11월에 재차 북경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그 후 이원록은 광동으로 가서 중산대학을 다녔다. 1927년 4월 유호한국혁명동지회에 참가하는 등 사회주의에 접근하기도 하였으나, 중산대학을 중퇴하고 1927년 8월 귀국하였다. 이원록은 귀국 직후인 1927년 10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에 연루되었고, 이원기·이원일·이원조 등 형제들과 함께 검거되어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장진홍 체포 후 출옥한 이원록은 『중외일보』기자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1930년 11월 이른바 대구 격문 사건에 연루된 이원록은 배후 조종자란 죄목으로 동생 이원일과 함께 체포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4) 이원일
이원일(李源一, 1906~ )은 일찍부터 형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 1927년 10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이원기·이원록·이원조 등의 형제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0년 11월 중형 이원록과 대구 격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원일은 대구에서 서병오에게 사사하여 서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5) 이원조
이원조(李源朝, 1909~1955)는 조부 이중직에게 한문을 배우고 정인보(鄭寅普)의 문하에도 다녔는데, 정인보는 이원조를 ‘장안 삼재의 일인(長安 三才의 一人)’으로 꼽았다. 1926년 대구 교남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31년 동경법정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귀국 후 파리강화회의 대표단의 1인이었던 이관용(李灌鎔)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원조는 1927년 10월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의거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이원기·이원록·이원일 등 형제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 있고 일본 유학 시절에도 1개월간 구금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원조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공간에 걸친 시기에 문학평론가로서 다양한 비평 활동을 했다. 192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입선하였고, 1929년에는 소설 부문에서 선외가작(選外佳作)으로 뽑혔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일보』학예부 기자로 일하며 학예부장을 맡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을 조직하여 초대 서기장을 맡았다. 또한 『현대일보』의 주필을 역임하는 한편, 서울대학교 문과대학에서 ‘소설론’을 강의하였다. 1947년 말 이원조는 임하(林和)·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월북하여 중앙본부 선전선동부 부부장, 『해방일보』의 주필을 역임하였다. 1953년 남로당 숙청 때 투옥되었고 1955년 옥사하였다고 한다.
5) 이원창
이원창(李源昌, 1914~ )은 1944년 1월 이원록이 북경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옥사하자 그 유골을 인수해 왔다. 이원창은 1946년 인천 송현동 집에서 대상을 지내고, 삼남 이동박(李東博)을 후사로 삼았다.
육사 이원록 형제들은 국내외에 걸쳐 활동한 독립운동가일 뿐 아니라 문인으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한말의 역사적인 격동기에 태어나 성장한 이원록 형제들은 조부 이중직의 신교육에 대한 관심과 근대적인 사상의 수용, 그리고 예안 의병장 이만도(李晩燾)와 같은 우국지사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원록 형제들의 민족의식의 형성에는 외숙부 허규나 외삼종형 허종 등 외가의 영향이 많이 작용하였다.
외조부 허형은 의병장이었으며, 상주목사 이만원(李晩綏)의 사위였다. 그 종반인 허훈·허겸·허위 등의 형제들은 을미의병 때 진보와 김산 등지에서 창의한 의병장으로 영남 유림의 중망을 받고 있던 인사들이었다. 또 그 아우 허필은 을사조약 이후 창의에 참여하였다가 1915년 형 허형과 조카 허발·일헌 허규 등과 함께 도만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이원록과 그 형제들의 민족의식 형성에는 본가와 외가의 영향이 컸다.
[네이버 지식백과] 왕산 허위 가문의 항일독립운동 [旺山 許蔿 家門의 抗日獨立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