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으로 에예공과 연락이 됐고 2시간의 통화 끝에 내 상승하려는 힘의
의지가 급상승하고 있는 가운데 전장에 나갔어요. 당연히 일도 잘 되더이다.
왜 분위기가 반전 됐을까요? 카뮈를 10번 읽고 부조리에 맞서는 것까지 누가
내 새끼 아니랄까봐 야물게 잘 살고 있더이다. 아싸, 우리는 소시오패스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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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없이 의정부로 설 새러 가는 패밀리(엄마, 아들, 딸)를 픽업 해 가는 길이
번잡합니다. 타이밍 보시라. 둘째 매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어요. 3초 동안
갈등하다가 받았는데 뜻밖에 내 회갑은 자신이 새주겠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뭐야 이거 바야흐로 김 씨 패밀리도 빅텐트로 가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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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하루를 앞 두고(D-60) 빅텐트가 극적으로 성사되는 바람에 이낙연 이준석
신당의 몸값이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이준석의 개혁신당, 이낙연의 새로운미래,
금태섭의 새로운선택, 민주당 탈당파 의원 모임 '원칙과 상식'의 의석을 합하면
일단 4석(이원욱, 김종민, 조응천, 양향자)확보입니다. 기호3번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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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합당파들이 곰살맞은 사이는 아니지요. 각자 이해타산을
기대하면서 빅 텐트를 친 것은 저마다 속셈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반지성주의'
가 만들어 낸 마아블링으로 봅니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라는 개념은
원래 가치중립적 개념이자 특정 언행에 적용하는 미시적 개념으로 지성의 유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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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가 아니라 지성의 작용방식을 기준으로 '이성적 합리적 소통을 수용하지
않는 정신상태나 태도'로 정의됩니다. 반지성주의의 사회적 배경으로 평등주의,
물질주의, 지성의 자기소외를 지적하는 동시에 개인의 차원에서 다섯 가지의
인지적 편향이 소통의 과정에서 반지성주의를 유발하거나 촉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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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이다. 그 다섯가지 인지적 편향은 1) 행동 편향 2) 가용성 편향 3) 확증 편향
4) 부정성 편향 5) 이야기 편향인데 이런 인지적 편향에 대한 탐구는 반지성주의가
문화적 환경과 소통의 조건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는 것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이유를 설명한다는 아티클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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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실을 보면 반지성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사람이 반지성주의를 비판하고,
진보와 보수는 각각 상대편을 반지성주의라 비판하고, 페미니스트들과 그 비판자
들도 각각 상대편을 반지성주의라 비판하고, 감성주의를 반지성주의로 간주하는
등 대표적 사례가 개딸-문빠-어버이연합-뉴라이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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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적 현상이 다 그렇듯이, 반지성주의의 부상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수많은 이유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건 평등 정신입니다. 호프스태터가 반지성주의의
한 축으로 간주한 ‘종교적 반합리주의’만 해도 당시엔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고 해요. 1720년대에 시작돼 1740년대에 절정에 달한 대각성 운동은 당시 개신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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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대륙의 새로운 지배 계층으로 떠오른 부유하고 힘 있는 엘리트들 중심의
종교였다는 점에 반발해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신앙부흥운동가들은 지성적인
교계가 신의 뜻에서 멀어졌다고 주장하면서 지식이나 교양보다는 직관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서커스 예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단에서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고 우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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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고함을 지르며 때로는 강단 위를 춤추며 돌아다니는 설교 행위로 청중의 감성에
호소했어요. 호프스태터는 이런 부흥운동가들의 활약에 “목사들은 마치 무대 위의
가무단 맨 앞줄에 선 젊은 여성에게 마음을 빼앗긴 남편을 보고 있는 늙은 아내와 같은
심정이었다”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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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의 소유자들은 주로 기득권 엘리트 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반기득권 투쟁은
자연스럽게 반지성주의로 발전했으며, 이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지성을
대변하는 계급은 대중의 이런 민주주의 열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현실로부터 멀어지는 자기소외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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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디지털 혁명은 280년 전의 신앙부흥운동과 비슷한 일을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게
만들었어요. 소셜미디어와 유튜브가 공론장을 같은 편끼리만 모이는 곳으로 재편성한
가운데, 이른바 ‘집단사고’, ‘필터 버블’, ‘반향실 효과’ 등과 같은 현상이 대중의 일상적
삶을 지배하게 되면서 증오와 혐오를 발산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가 제공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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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전문가와 지식인은 디지털 혁명이 촉진한 부족주의적 편가르기에 흡수됩니다.
무슨 말을 하건, 반대편 전문가와 지식인만 매도의 대상일 뿐 우리 편 전문가와 지식인은
추앙의 대상입니다. 반대편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발산하는 능력이 뛰어난 우리 편 논객
들에겐 무한대의 ‘궤변 면책특권’이 주어졌으며, 그들은 같은 부족 진영 내에서 부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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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사랑과 존경까지 누리는 정신적 지도자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에 따라
'반지성주의는 나의 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반지성주의와 편가르기는
동의어가 된 것 아닙니까.
What's wrong with living. (사는 게 왜 이래)
2024.2.9.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