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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청주] 제발 돌아오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제1독서 욥 38,1.12-21; 40,3-5
† 복음 루카 10,13-16
★ 하느님께서 욥에게 인간이 바다의 원천까지, 심연의 밑바닥까지, 암흑의
대문을 볼 수 있는지, 또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지 물으신다. 욥은
보잘것없는 자신이 드릴 대답이 없다고 고백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의 주민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듣는 이는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그들을 물리치는 자는 당신과 당신을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확언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과 내일의 복음이 속한 단락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그들에게 부여하시는 사명과 권한에 대한 내용입니다(루카 10,1-20 참조).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의 활동은 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 선포와
기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활동’을 대신할 수 있는 제자들의 활동의 본질입니다.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파견된 자로서의 ‘존재’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존재’와 ‘활동’이 일치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의
활동을 대신하는 길은 부족하나마 그분의 ‘존재’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서 그분의 존재가 드러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그분을 ‘모방’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 르네 지라르가 매우 설득력 있게 말합니다. 내일의 복음에서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복종하였다고 기뻐하며 보고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신 다음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 르네
지라르는 이 구절을 그대로 자신의 책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그는
인간 사회의 근본 원리는 불행히도 타인에 대한 ‘모방’과 끝없는 욕망의
증폭, 그리고 거짓된 평화와 안정의 악순환이라고 통찰합니다.
르네 지라르는 사탄이 바로 이러한 악마적 모방에 따른 욕망과 폭력의 힘과
그 진실의 왜곡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모방은 사회 구성원 모두를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거짓 증인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이는 그들이 진실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폭력에 이르는 ‘모방’의 욕망이 이끄는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일하게 ‘십자가’를 통하여 이 질서에 결정적
균열을 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뿐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파견된 자에게 가장 큰 유혹과 장애는 자신이 수행해야 할 활동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닮으려는 노력 없이
‘사탄의 모방’인 세상의 거짓과 탐욕에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젖어 있다면,
주님을 대신해서 수행한다는 행위와 말은 아무런 힘이 없음을 깊이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 10,13-16
가장 생명력이 강한 나무로 사람들은 ‘대나무’를 뽑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서 유일하게 생존했던 나무가 바로
‘대나무’이거든요. 그래서 이 대나무는 몇 년 동안 전혀 자라지 않아
‘죽었나?’ 싶어도 꾸준히 물을 주면 어느 날 갑자기 새순이 돋고 하루에도
수십 센티씩 쑥쑥 자랍니다. 부지런히 땅속줄기에 양분을 모두 보내서
다음 세대 양성에 힘쓰기 때문입니다.
이 대나무를 보면서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특히 내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내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또 내 자신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도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에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한
지가 30년이 넘었으니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것이지요. 옛날의 얼굴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래도 반가운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공부도 잘하고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구들은 평범한 공무원과
선생님 생활을 하고 있고, 공부도 잘하고 말썽을 하도 많이 부려서
선생님께 매일 혼나던 친구들은 유명한 배우도 있고 회사의 CEO가 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30년 전에 지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하긴 친구들이 저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네가 신부님이 될 지는 정말 몰랐다.”
우리의 삶은 지금을 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단지
지나가는 과정 중의 한 부분이며, 내 나머지 삶의 시작점에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고 좌절에 빠져 주저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대나무가 쭉쭉 자라듯, 언젠가 내 삶의 또 다른 반전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라는 도시를
꾸짖습니다. 이 도시들은 당시에 무척이나 번화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원리원칙에 너무 젖어 있어서 그랬을까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기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음에도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만을 따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닫힌 마음을 보였고, 결국 주님으로부터
하늘에 오를 수 없다는 선고까지 듣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야 할 말씀입니다. 단순히
‘그렇구나.’라고 생각만 하고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변화될 수 있는 나의 모습은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앞서 이야기했던 대나무처럼 쑥쑥 자라는 반전을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실패에 대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두려움은 당신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꿈을 이루려는 당신의 능력을 방해한다(스티븐 스코트).
말 한마디의 가격(‘사랑밭 새벽편지’ 중에서)
어제 인터넷에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휴양도시 니스의 한 카페에는 이런 가격표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 Coffee! 7 Euro.
⊙ Coffee Please! 4.25 Euro.
⊙ Hello Coffee Please! 1.4 Euro.
우리말로 바꾸면.
⊙ 커피 - 라고 반말하는 손님은 ‘1만 원’을.
⊙ 커피주세요 - 라고 주문하는 손님은 ‘6천 원’을.
⊙ 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 주세요 ? 라고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주문하는
손님은 ‘2천 원’을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기발한 가격표를 만든 카페 주인은 손님들이 종업원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 카페에서는 말 한
마디를 예쁘게 하는 것으로 똑같은 커피를 5분의 1가격으로 마실 수 있는
셈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곧 나의
인격을 표시하는 것과 같은데, 나의 인격을 깎아먹는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나를 높이는 길은 남을 먼저 높였을 때 가능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 10,13-16
‘정치에 관여했으나,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 이 말은 ‘국정원의 선거법
위반’에 대한 담당 판사의 판결입니다. 사람들은 비슷한 말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술을 먹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 ‘외도는 했지만
불륜은 아니다.’, ‘터치는 했지만 성희롱은 아니다.’, ‘물건을 가져왔지만
도둑은 아니다.’ 말이 일관성이 없고, 보편성이 없어 보입니다. 정치에
중립을 지켜야 하는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을 했다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면 되고,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으면 음주운전이라고 하면 되고, 외도를
했으면 그것이 불륜이고, 동의를 구하지 않고 터치를 했으면 성희롱이며,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왔으면 그것이 도둑인 것입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보편성과
일관성이 없던 인류의 역사에서 ‘보편성과 일관성’을 찾아낸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 이란에서는 차라투스트라, 중국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을
먹을까?’를 고민하려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는 무엇인가?’를 성찰하였습니다.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을 저술한 새무엘 크레이머는
‘밤에 꿈을 꾸면 아침이면 사라지지만 낮에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류의 신화, 역사, 문학, 신학, 종교의 원형을
‘수메르’에서 찾았습니다. 밤에 꾸는 꿈은 자면서 꾸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낮에 꾸는 꿈은 의지와
비전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욥에게 보편성과 일관성을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
하십니다. 욥은 하느님의 보편성과 일관성 앞에 겸손하게 순명을
하였습니다. ‘희로애락, 생로병사’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제자들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보편성과
일관성입니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온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주일 미사를
참례하지 않지만 냉담자는 아니다. 미워하고 불평을 하였지만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하느님을 멀리한 것은
아니다.’
신앙생활에도 ‘기본기와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역에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지도를 봅니다. 지도에는 한결같이 ‘현 위치’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반성과 회개를
하는 신앙인들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성과
회개를 하지 않아서 그릇된 길로 가곤합니다. 사다리를 오를 때도 올바른
방향으로 사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반성과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매일 드리는 저녁기도에도 반성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이 한 죄를
뉘우치오니 저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제 손을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독서: 루카 10,13-16
< "제 손을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
저는 군에 있을 때 운전병을 하였습니다. 그때 인사계들이 있었는데 계급은
상사였고 대부분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고 어렸을 때 군대에 들어와
제대하지 않고 군대말로 말뚝을 박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이는 저희
아버지뻘 되었지만 아버지처럼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조금은 다혈질이고
또 조금은 무식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전방 철책 순찰을 하다가 아직 따지 않은 두릅이 많이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자연산 숫두릅은 맛있고 영양도 좋아 값도 비쌌습니다.
인사계와 저는 차를 세우고 그 곳으로 뛰어 내려가 두릅을 열심히
채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한 사병이 우리가 있는 곳이 지뢰밭이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인사계도 그랬습니다. 인사계는
칼을 꺼내더니 땅을 조심스럽게 찌르며 자신이 밟은 곳만 밟고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인사계는 칼로 찌르고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만을 밟으며 안전한 곳으로
저를 인도했습니다. 저는 인사계의 발만 보며 다른 곳을 밟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를 따랐습니다.
사제가 되어 상당히 다양한 성격의 신자들을 만납니다. 어떤 분은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동의하지 못하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어떤 신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이 중요하지 사제나
교회가 말하는 것에 굳이 순종할 필요는 없다고도 말합니다.
군대에서는 한 달 먼저 들어와도 그 차이가 확연하게 나타납니다. 이는
밖에서 무엇을 했던 상관없습니다. 군대라면 군대에서 생활했던 경험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일류대를 나와도 고등학교만 나온 선임에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끔은 그런 경험을 무시하고 자신이 더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자신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한 반박문을
내걸었음에도 교회는 합당한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교회가
자신의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 그 전통적 가르침과
수많은 교회지도자들보다도 더 현명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저 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오랫동안 믿어왔다면 저들이 내 개인의 생각보다
옳지 않을까?’하는 마음을 가져야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결국 교만이란
것이 믿지 못하게 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욥기인데 욥의 갈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 욥만큼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이 없지만 욥은 자신의 모든 자녀들과 재산과
건강과 아내의 존경, 친구의 우정까지 잃어버립니다. 남은 것이라곤
끈질기게 붙어있는 생명뿐입니다.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원망합니다.
욥의 아내는 차라리 하느님을 원망하라고 합니다. 욥도 차마 입으로 그
원망을 쏟아놓지는 못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느님이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욥에게 그렇게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탄에게 욥의 믿음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세상에도 욥을 통해서
우리가 잘못해서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도 고통을 당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려는 의도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인간인 우리들은
조금만 안 좋은 일이 벌어져도 하느님의 생각이 우리보다 짧은 것인 양
불평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오늘 욥에게 물어보았던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도
물어보실 것입니다. 아침에게 명령해 본 적이 있는지, 땅을 뒤흔들 수
있는지,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는지,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는지,
죽음의 대문에 가 본 적이 있는지, 빛과 어두움의 자리가 어디인지 등을
말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이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드셨다면 이런 것들이 대해 잘 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지혜 앞에서 욥이 대답한 이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 입에 갖다
댈 뿐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 대해 항상 은총임을
믿으며 다만 감사해야 할 뿐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을 수
없다면 하느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이고, 교회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모든 교회를 거쳐 간 모든 사람들보다 내가 더 똑똑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욥이 하느님께 승복하였듯이 하느님의
섭리에 또 교회의 가르침에 승복할 수 있는 겸손함을 지녀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느님이 보증하시니 당당합니다.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 10,13-16
하느님이 보증하시니 당당합니다.
책임진다 보증한다는 것이 점점 사회생활 많은 곳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과일 식품 같은 것을 농부가 직접 보증한다는 표시들을 이미 씁니다.
자녀에 대한 보증은 언제든 부모님이 하기에 자녀들이 기죽지 않고 큽니다.
제자들을 보증하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을 보증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제자들은 후계자를 보증하고 후계자들은 이 교회를 보증하셨습니다.
우리 신앙도 교회가 보증하는 것, 곧 하느님이 보증해 주시니 당당합니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기타] 회개란.....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그분의 사랑을 만나는 것에 결코 주저하지 마십시오.'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복음묵상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루카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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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고 사용합니다.
하지만 결코 쉬운 말이 아니며, 체험에 이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뉘우침이나 반성을 넘어서는 말입니다.
회개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할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라틴어에는 회개라는 의미를 가진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꼰베르시오(Conversio)’라고 하는데, 이는 ‘하느님께로 돌아섬’, 혹은
‘하느님께 되돌아감’이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마음이나 행동을 다시 돌려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빼니뗀찌아(Paenitentia)’라는 단어인데, 이는 회개에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보속의 삶까지 포함한 말입니다.
이 두 단어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회개라는 말의 참 뜻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뒤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뉘우침이나 반성은 사랑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회개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체험만이 가능케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은 자연스럽게 보속의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분의 뜻으로 삶의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약함 앞에는 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또 쓰러지고 넘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기다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싸우면 됩니다.
비록 반복되는 회개와 보속의 삶이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끝이 있음을
희망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삶
속에 던져져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이지요.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만나는 것에 결코 주저하지 마십시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청주] 제발 돌아오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 10,13-16
제발 돌아오라.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우물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물을 찾아가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살았다면 말을 잘
들은 사람이요, 죽었다면 말을 듣지 않은 사람입니다. 말을 듣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죽음은 누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죽음에 떨어진
것입니다.
오늘 언급된 코라진, 벳사이다 지역은 카파르나움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
북동 해안에 삼각대를 형성하고 있고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기적들이 특히 두드러진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동네들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생활하는데 더뎠습니다. 많은 은총을
입은 만큼 새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 경고 합니다.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10,15).
사실 티로와 시돈은 이방인 지역으로 유다인들은 이 동네 사람들을
세속적인 관심사에 빠져버린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기네 동네와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동네보다도 못하다고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꾸중을 듣는 것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거두고 자신의 속을 본다면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쓴 것이 약이 된다.’는 말을 새삼 생각합니다. 제발 돌아오라,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어서 오너라. 마음을 돌리길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애절한 사랑이 거기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세상의 자녀들보다도 못하다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알고도 실천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아도 많이 맞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각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응분의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1코린4,5).하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에제18,30.로마2,6).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듣고
행하였을 때 잘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한 이들을 봅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느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창세6,22).
“주님께서 당신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을 모세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였고, 여호수아는 또 그대로 실행하였다.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 가운데에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여호11,15).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욥기1,22). 히즈키야는 “주님께 매달려 그분을 따르는 일에서
돌아서지 않고,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켰다. 주님께서는
그와 함께 계시며,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성공하게 해 주셨다”(2열왕18,6).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예수님께서는“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8).
우리도 말씀을 잘 듣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3,35)하셨으니 사랑하는 삶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 샘을 알려주어도 찾아가지 않으면 스스로 죽음에
떨어지는 것이듯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떠나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주님의 품에 머물기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 10,13-16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생일대의 과제인 ‘회개’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회개는 아무런
노력 없이 한 순간에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 번째 단계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회개란 말마디의 어원을 살펴보면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강의 상류를 따라 올라가듯 위로 계속 거슬러 올라가면
최종적으로 만나게 되는 분은 곧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비록 우리가 죄인이어도 한결 같이
끝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당신을 멀리
떠나간다 할지라도 늘 우리의 귀향을 기다리시는 인내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를 당신 눈동자처럼 여기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한없는 연민의 정과 측은지심으로 우리 내면의 상처를 눈여겨보시며
치유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어서 두 번째 단계로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원래 무(無)였습니다.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크신 자비와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감지덕지하게도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에 힘입어 오늘 우리는 이 땅위에
두 발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온전할 수 없는 흙부스러기 같이 나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의 마지막 단계인 세 번째 단계는 아주 간단합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토록 크신 사랑의 하느님, 너무나도 은혜로운
하느님에게로 우리의 발걸음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억지로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실체를 파악한 우리가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께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바로 회개의 본
모습입니다.
빨래를 볼 때 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빨래 안하고 사는 방법 없을까?’ 잔뜩
쌓인 빨래를 세탁기 안에 넣고 돌렸습니다. 세탁이 끝난 빨래를 널려고
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5만 원짜리 고액환 한 장을 주머니 속에 넣고
돌렸지 뭡니까? 이미 늦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바지 호주머니 속을
살펴보니 다행히 색상만 조금 옅어졌을 뿐 물을 잔뜩 머금은 5만 원 권
지폐가 그대로 접혀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다리미로 다렸더니 감쪽같이
신권처럼 변화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때로 우리들도
실수로 우리도 모르게 죄와 타락과 방황의 세탁기 속으로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한번 들어갔다고 우리 인간의 존엄한 가치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한번 중죄를 지었다고 우리 인생
완전히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세탁기 속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물에 흠뻑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의 가치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죄인이어도, 흠이
많아도, 별의 별 상처투성이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계속해서 사랑하십니다. 이토록 한결같은 하느님, 언제나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문을 열자[단상]
2014년 가해 10월4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제1독서
<아침에게 명령해 보고, 바다의 원천까지 가 보았느냐?>
▥ 욥기의 말씀입니다. 38,1.12-21; 40,3-5
복음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연중 제26주간 금요일(2014년 10월 3일) 문을 열자
오늘 우리 삶의 자리에 주님이 오신다면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요? 다시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을까요?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이 자주
들리셨고 놀라운 일을 행하셨던 마을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그분을
배척했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기에 그
어떠한 기적도 소용없었습니다. 아무리 우리 눈 앞에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열려있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저 스쳐지나갈
뿐입니다.
실상 참다운 회개는 주님께 우리 마음의 문을 늘 여는 것입니다. 주님께
우리 마음의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은 일상 삶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일어나는 사건들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주님, 우리 마음 안에서 당신 기적을 행하소서. 우리는 놀라워 하리이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 [수도회] 회개와 찬미 -
2014년 가해 10얼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순례45일차),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0월3일 연중 제26주간 금요일(순례45일차),
욥기38,1.12-21;40,3-5 루카10,13-16
회개와 찬미
오늘은 순례45일차입니다.
어제 순례44일차는 온종일 파티마 성모성지를 이냐시오 형제와 순례했습니다.
사진도 가장 많이 찍은 날입니다.
어느 성지를 방문하든 우선 느껴지는 것은 '평화'입니다.
새삼 인류 최상의 가치가 평화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어제는 정말 평화 자체였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그대로 성모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처럼 느껴졌습니다.
흡사 어머니 품에서 노니는 아이들처럼 모두가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곳곳에서 바라보는 파티마 도시 역시 참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성모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모성을 상징합니다.
성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는 어머니 없는 집처럼 참 썰렁하고 쓸쓸할 것입니다.
오전에는 파티마 대광장 주변의 성전을 주로 순례했고
얼마간의 시간은 보속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걸으며 묵주기도를 바쳤고,
자주 이렇게 기도하는 신자들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파티마 대광장을 벗어나 외곽지대에 있는,
루시아 성녀가 성모님의 발현을 체험한 곳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
십자가의 길도 이냐시오 형제와 바쳤습니다.
각처마다 아름답고 품위가 있었고 도합하여 약2km정도의 긴 거리였습니다.
십자가의 길후에는 루시아가 성모님의 발현을 목격한 곳과 생가를 순례하니
하루를 가득채운 느낌이었습니다.
순례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성전 거대한 유리벽에 여러나라 글자와 함께
한글로 새겨진 시편 몇구절이었습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하신 일을 알려주도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시며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나이까"
바로 위 말씀이 오늘 강론의 실마리가 됩니다.
하느님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와 찬미의 대상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들로 가득한 놀라운 세상입니다.
이를 깨달을 때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요, 회개와 겸손입니다.
이런 찬미를 통해 비로소 하느님을 알아가게 되고 더불어 자신을 알아가게 됩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역시 하느님 체험을 반영합니다.
"당신 숨결을 피해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얼굴을 피해 어디로 달아나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당신이 거기 계시나이다."
"제가 새벽 놀의 날개 달아, 바다 끝에 자리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 손이 저를 이끄시고, 당신 오른 손이 저를 붙드시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일은, 살 길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뿐입니다.
바로 1독서의 욥은 이 점을 망각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컸기에 하느님 찬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복음의 코라진과 벳사이다 주민들 역시 하느님 찬미를 잃었기에 죄악속의 삶이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회개와 찬미는 함께 갑니다. 회개할 때 찬미요 찬미할 때 회개입니다.
일상의 모든 기적들이 우리를 찬미하게 하고 회개에로 이끕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 사람들은 별종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 찬미를 잃어 버렸을 때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1독서의 욥은 하느님을 체험한 후 즉시 회개합니다.
"저는 보잘것 없는 몸, 당신께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손을 제입에 갖다 댈뿐입니다.
한 번 말씀드렸으니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두 번 말씀드렸으니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욥의 회개가 단호하고 철저합니다.
분명 더 완전한 찬미의 사람으로 변모했을 욥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를 찬미의 사람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주님,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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