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당신의 도시락★
도시락은 집을 떠나서 일하러 가거나 여행,·소풍 갈 때 휴대하기 쉽게 밥과 반찬을 곁들여 담은 그릇 또는 밥을 일컬어서 혼용하고 있다.
도시락 어원 유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시락밥과 표주박 물을 뜻하는 단사표음(簞食瓢飮)이라는 말이 중국 고사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도시락은 지금처럼 쇠붙이를 이용한 그릇문화가 적었고 운반이 불편한 옹기문화(甕器文化)가 대부분이어서 운반하기에 가볍고 신선도(新鮮度) 유지를 위해 부패 방지의 장점을 갖춘 싸리나무로 둥글게 엮은 작은 고리짝을 도시락으로 사용하였단다.
이렇게 도시락의 재질과 내용물 등은 그 시대의 그릇문화 그리고 음식문화에 따라 변천이 다양했다.
옛날 남자(선비)들은 먼 길을 나들이 갈 때는 개나리(괴나리) 봇짐을 메고 갔는데 그 괴나리봇짐 안에는 소형(小形)의 지필묵(紙筆墨) 그리고 책자를 반드시 휴대했으며 도시락도 챙겼을 것으로 짐작 된다. 괴나리봇짐 밖으로는 여벌로 삼은 짚신을 매달고 죽장(竹杖)에 삿갓 쓰고 도시락의 풍류천하를 떠났을 것이다.
나의 유년기시절(1950년대)에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 중에 지금도 생생한 할아버지 도시락 이야기가 있다. 나의 아버지 형제분은 7형제 3자매 분으로 모두 10남매분이셨다. 토지는 많았으나 개간(開墾)과 다수확의 영농방식이 서툴렀던 시기이어서 12식구의 식량조달이 그 당시(1920년대)에는 가정경제의 끼니 해결책이 급선무였단다. 할머니는 어린 새끼들과 한 끼라도 늘여먹기 위해 할머니 자신은 굶다 시피하시며 잡곡을 섞어서 새끼들 한 끼를 준비하셨는데 어느 날 할아버지는 혼자서 배불리 잡수시고 나머지 새끼들 먹일 밥마저 주먹밥 도시락을 만드시더니 그 도시락을 들고 밖으로 나가셔서 할머니는 너무 야속하고 미워서 속으로만 ‘썩을 놈의 인간! 그것 처먹고 뒤져나 버려라’하시고 하루 종일 울화통이 터져서 가슴앓이를 하고 계셨단다.
그런데 뉘엿뉘엿 해질 무렵에 할아버지는 대문을 열고 쌀자루 하나를 메고 들어오시는 반전(反轉)의 모습을 보시고 할머니는 표정관리가 어색하셨단다. 그날 저녁 식구들은 어느 때보다 할아버지가 가지고 온 쌀로 배불리 식사를 했단다. 조용한 시간에 할머니는 할아버지한테 자초지종을 물으니 주먹밥 도시락을 지게에 매달고 깊은 산에 들어가 나무 한 짐을 어깨가 찢어져라 지고 읍내 장에 팔아서 쌀을 팔러 오셨다는 60여 년 전의 할머니가 나한테 들려주신 할아버지가 도시락하나로 식구들을 건사 하셨던 이야기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셔서 얼굴을 모르지만 가장(家長)으로서 책임을 다하신 할아버지 모습이 보고 싶다.
나의 어린시절(1960년대)에 아버지는 지금의 국토관리청 계열에 계약직으로 출근 하신 걸로 기억된다. 그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혈기 왕성한 40대이시고 유난히 건장한 아버지의 체력을 유지하시도록 미군들이 야전 전투에 식기(食器)로 사용하였던 항고(군용반합)에 꾹꾹 눌러서 싸준 도시락을 자전거 짐받이에 꽁꽁 묶어 출근하시던 모습이 아버지의 도시락 모습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도 할아버지가 나무지게에 매달고 가신 도시락의 모습과 같은 가장의 심정이셨을 거라고 생각되어 진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인가 오후 수업이 있어서 어머니가 알루미늄 도시락에 반식기 보리밥(보리와 쌀을 반반 섞어 지은 밥)을 주걱으로 쌀밥을 골라서 싸주셨다.
그래서 유일하게 쌀 섞인 밥을 먹을 수 있는 때가 나의 점심 도시락이었고 늘 동생들은 나의 도시락에 눈독을 들였으며 어머니한테는 불평의 투정거리이어서 나는 학교에서 도시락 귀퉁이에 밥을 조금 남겨서 집에 돌아 와서 동생들한테 주면서 불평을 해소시켰던 초등학교 시절 나의 도시락 기억이다.
대학은 타 지역에서 다녔는데 그 당시(70년대)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뤄 생계를 유지하는 도시가구도 상당수이어서 대학시절의 도시락은 쌀밥에 푸짐한 반찬으로 흡족했으나 언제나 양이 차지 않아 저녁때는 꼭 자장면 한 그릇을 사먹어야 잠을 잤던 식욕이 왕성한 시절의 도시락이었다.
나의 결혼기념일 3주년 쯤 기억되는 어느 해 6월 1일이 일요일과 겹치게 되어 우리 부부는 결혼기념일을 좀더 뜻있게 보내려고 가장 경제적인 비용을 투자하여 뜻있는 결혼기념일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대중 교통수단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가서 놀다 오기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안식구와 합의 하고 점심때 먹을 밥을 김치 몇 가닥 넣고 김밥을 둘둘 말아서 썰지도 않고 통째로 비닐에 싸고 콜라 한 병을 사서 준비한 것이 오늘 점심식사 도시락이다.
점심보따리 도시락 딸랑 들고 군산역에서 익산가는 완행기차를 타고 다시 익산역에서 대전가는 완행열차로 환승하여 논산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부여에 도착했다.
우리부부는 우선 박물관을 구경하고 부소산(扶蘇山)으로 올라가다가 늦은 봄비를 만났다, 그리 많이 오는 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우산 없이 잠시만 서있어도 옷을 촉촉이 적실 강수량이다. 박물관 뒷길 부소산 중턱쯤 가다가 비를 만나서 비를 피할 수단은 어른 키 정도의 소나무 들 뿐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가장 잎사귀가 촘촘한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는데 좀처럼 쉽게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아예 마음 편히 쉬고 있었다.
그런데 점심때가 지나서 인지 시장기가 든다. 우리는 가랑비가 뭉쳐서 큰 빗방울로 간혹 한 방울씩 떨어지는 소나무 아래서 썰지 않은 김밥을 빗속에서 꺼내어 입속에 넣고 한입씩 베어 먹으니 이 세상 어느 김밥보다 맛있는 도시락으로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교직에 임용되어서도 그 당시는 학교 급식이 없었기 때문에 도시락은 각자 집에서 싸가지고 출근해서 점심을 때웠다.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지게 뒤에 매달았던 도시락, 자전거 짐받이에 매달았던 아버지의 도시락을 상기하게 되었다. 더구나 초임 때는 3학년 진학반을 맡아서 야간 자율학습시간 까지 버티려면 하루에 도시락을 두개를 싸는 날이 허다했으며 혹 두개를 못 싸갖고 가는 날이면 안식구가 오후에 학교 수위실에 저녁용 도시락을 놓고 가면 교무실에서 저녁 도시락을 먹던 때도 비일비재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시절의 도시락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퇴직 후에도 매주 화요일은 또 도시락을 지참하고 출근하는 날이다. 나의 어머니는 금년이 92세가 되셨는데 요양병원에서 요양중이시다. 그리고 퇴직 후에 모 특수학교에 책임자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취미 활동으로는 서예학원을 다니고 있다.
그런데 매주 화요일은 어머니 요양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점심식사 드시는 것을 도와 드려야 되기 때문에 전주에서 최소한 11시 이전에 출발해야 12이전에 익산의 어머니 병원에 도착하여 어머니 식사를 도와 드릴 수 있고, 어머니 식사 등 돕는 일이 끝나면 1시가 훌쩍 지나가버려 나는 자동차 안에서 안식구가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바로 서예학원으로 달려가야 시간 내에 도착 할 수 있다. 서예실 학습이 끝나면 이어서 학교로 가야하기 때문에 부득이 화요일은 차안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는 날이다.
결혼해서 학교 급식이 생기기전까지 지겹게 도시락을 싸준 아내인데 퇴직 후에도 정성 들여 싸준 아내의 도시락이 어느 고급 레스토랑 식사보다 더 따뜻하고 맛있어 언제나 고맙고 또 감사하다.
(자동차 창가림막을 치고 차안에서 도시락을 먹으면서................)
